Thursday, October 16, 2008

그리스도와 문화 - 중용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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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이버는 3장 말미에 [2장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와 [3장 문화의 그리스도]에서와 같이 서로 극과 극인 듯한 무리들의 공통점을 분석하며 신학적 변론을 하는 와중에 "삼위일체"를 언급합니다.

니이버는 말하기를;
영지주의자들은 삼위보다도 더 많은 수를 요구하였고, 자유주의자들은 더 적은 수를 요구하였다. 이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 예수를 인간 안에서 일하는 내재적, 신적神的 정신(spirit)과 일치시키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내재적, 합리적, 정신적, 도덕적인 원리가 자연과 그 자연을 산출하고 지배하는 능력 등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문화적 윤리적 생활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진과 불 속에 나타난 능력과 조용히 작은 목소리로 인간의 마음속에 속삭이듯 말하는 그분 사이에는 어떤 일치점이 있는 것인가? 인간이 자연에 직면할 때 그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자는 무자비하고 맹목적인 힘인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지를 구명해야하는 문제이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전능한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문화를 보전하려는 사람들의 사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이고 아주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종말론적 비젼, 즉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무자비하고 캄캄한 멸망의 운명이 자기의 이상적 세계 위에 임박해 있음을 보았을 때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과학과 그의 건축은 자연의 주어진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경우에는 도저히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에도 일어나는 문제이다... 이 도전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3분의 1의 진리만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니이버는 4장에 들어가며 "중립적 교회 the church of the center" 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의 "신앙고백"을 "삼위일체"적으로 합니다. 그 입장을 토대로 4,5,6장을 펴나갑니다. 오늘날 프린스톤 연합교회에서 우리가 고백해야할 신앙의 공통분모를 잘 드러내지 않았는가 하여 여기에 요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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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와 세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중립적 교회는 이 조항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토론 속에 모든 문화의 근거가 되는 자연의 개념을 도입한다. 그런데 이 자연은 선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올바로 정돈하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님에게 복종하셨고 또 이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도록 연합되신 분이다.

이 신념이 지배하는 곳에는 그리스도와 세상이 단순히 서로 대립되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문화로서의 "세상"은 하나님 없는 영역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

(2) 인간은 그 본성으로 볼 때 하나님에게 복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에게서 분리된 그리스도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된 자연의 창조주도 아니다. 그들(중립적 교회)이 의미하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복종은 자연적 문화적 인간의 구체적 현실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활동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히 본능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은 필연의 세계에 살면서도 자유를 지니고 살아야하는 피조물인 때문에, 문화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하나의 요청 ein Postulat 이다. 즉, 하나님에게 복종함으로써 많은 가치를 추구하게 되어있다.

중립적 교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주요 운동의 또 하나는;
(3) 죄의 보편성과 근본성에 대한 어떤 신념의 합치이다.

2장의 문화에 대립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거룩한 공동체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3장의 문화의 기독교인들은 죄가 인간 인격의 심연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용의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서는 개인적으로 보나 공동체적으로 보나, 거룩함을 발견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4) 은혜와 율법에 대하여는;

은혜의 우위성과 복종하는 행위의 필요성에 대하여 인정할 때에, 인간의 문화적 활동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분리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은혜로써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은 은혜의 경험을 문화 활동에서 분리시키지도 못한다. 인간 사회에서 보이는 형제에게 봉사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그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런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적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통일된 한 그룹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니이버는 거기에 적어도 세가지 구분된 부류가 있다고 하며 (i) 종합론자 (ii) 이원론자 (iii) 개변주의자conversionists 로 나눕니다.

(i) 종합주의synthetic or architectonic자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둘 다 긍정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함께 주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구분선을 명백하게 보존합니다. 그리함으로써 주 예수는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어서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도 않는다는 역설적인 신념을 고백합니다. 그들은 쉽게 가치존재에 종속시키지도 않으며 가치에 존재를 종속시키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logos 이면서 동시에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와 문화를 함께 긍정할 경우에 그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그리스도는 그 성격에 있어서 안이한 화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그리합니다.

종합주의자에게 문화는 그 기원에 있어서 신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이며, 거룩하면서도 범죄적이며, 필연과 자유를 함께 가진 영역이며, 이성과 계시가 함께 적용되는 장소입니다. 종합주의자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3장 문화의 그리스도]론자와 구별되며, 동시에 문화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2장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론자들과 갈라서는 것입니다.

(ii) 한편 이원론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문화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구별하면서 동시에 그 둘을 결부시킬 정당한 이유를 추구하고 있는 점에서는 종합론자와 같습니다.

이들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선 자리,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생활의 근본 과제는 기독교 공동체와 이교적 세상 사이에 구분선을 그을 때 부딪치는 문제가 아니며, 인간이 자연과 충돌할 때 그리스도가 문화의 정신적 세력 편에 서 있는 분이라고 할 때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원론자는 충돌 가운데 살고 있으며, 한 위대한 논쟁점 앞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충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충돌입니다. 즉 문제점이 하나님의 의와 나의 의 사이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 우리의 국가와 우리의 교회, 우리의 이교적 또는 기독교적 사업, 이런 모든것들과 더불어 한편에는 우리가 서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다른 한편에 서 있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보면,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문제는 사람이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물을 질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와 이교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들의 논리적 출발점은 하나님과 인간의 전쟁에서 생긴 화해와 용서의 위대한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여기에 충돌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라는 사실이 이 출발점에서부터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은 자명한 이성의 진리로 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은혜에 대한 신앙과 그와 상관된 죄에 대한 지식은 십자가를 통해 옵니다.

하나님 자신인 진리와 선의 형상을 모독하며 파기하려고 꾀하는 인간들이 살고있는 이 무서운 세상을 진지하게 직면해 보지 못한 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신의 자비와 인간의 도덕적 과오를 안이하게 수락하는 것과는 온전히 다른 질서에서 나온 것이라 합니다.

이원론자의 출발점인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서 이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은혜와 죄에 관한 그 근본적인 상황이 변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은혜는 하나님 안에 있고 죄는 인간 안에 있습니다.하나님의 은혜는 만나와 같은 능력이 아니며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중개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행동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대결하는 역사적 완충지대를 넘어서 인간에게 도래한 화해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그 무엇이 그 은혜로운 행동에 감격한 바울이나 루터의 응답 속에 반사되더라도, 바울이나 루터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본다 할지라도 한 반영reflection으로 밖에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은혜스러움을 사람들이 자기 자신 안에 찾으려 할 때에는, 그것이 즉석해서 사라지고 맙니다. 마치 내가 나의 은인을 배반하고 그것이 나의 덕행이라고 생각할 때, 그 은혜끼친 이에대한 나의 감사가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주를 알고 그에게 나아와 그를 신뢰하는 믿음은, 믿는 그 자신의 본래의 가능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가 신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에 있어서 사람이 그 화해의 말씀을 들은 후의 상황도, 듣기 전 상황과 마찬가지로, 은혜는 온전히 하나님 편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죄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이요, 사람은 죄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영광의 주 앞에 설 때, 인간들의 모든 사업과 일을 주님의 선의 표준에서 보면 아주 부적당한 것일 뿐 아니라, 더럽고 타락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종합론자인 클레멘트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바울과 루터와 같은 이원론자가 다른점은 인간의 모든 행위에 부패와 타락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는, 철학자의 지혜와 무식자의 우둔함이 다를 것이 없으며, 살인자의 죄와 법관의 처형 사이에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업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원론자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기는 하지만). 다만 자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나누일 수 없이 자기와 연합되어 있는 전 인류, 그리고 또 자기 자신에게 내리고 있는 심판에 대하여 증언할 뿐입니다.

문화에 대해서 이원론자는, 그 자신도 그 문화에 속해있는 자로서 도저히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문화 안에서, 또 문화로 말미암아 그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이 죄악 중에있는 세상을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잠시라도 존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원론자는 역설paradox이라고 보여지는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 편에서서 하나님을 만나지만, 그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편이 아닌 저쪽에서 오는 것으로 설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긴장 속에 있는 그는 계시와 이성, 율법과 은혜, 창조주와 구속주 등의 대립된 형태의 용어로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그의 말이 역설적일 뿐 아니라 그의 행위도 또한 그러합니다.

그는 율법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게 아니라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는 죄인이지만 의롭습니다. 그는 의심하는 자 같으나 믿는 자입니다. 그는 구원의 확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칼날 위로 걸어가는 것 같이 불안정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것이 새로와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맨 처음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그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그 자신을 숨기고 계십니다. 신자는 그가 믿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걸어가며, 보는것으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이원론자들의 핵심용어; 율법과 은혜,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iii) 개변주의자conversionist의 이해는 이원론자와 가까운데,

그들의 기독론은; 그리스도가 새 율법을 주신 분이라는 것보다도 그가 속죄주라는 것을 주장하며, 하나님은 인류의 최선의 정신적 원천을 표징하는 분이라는 것보다도 인간이 만나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공간적, 외부적인 인간 행동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는 인간의 마음을 심사하며 잠재의식적 삶을 심판합니다. 그는 인간의 가장 완강하고 독살스런 병,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을 고칩니다. 그는 인간의 가장 깊은 데 숨어있는 번식력이 강한 죄, 즉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 무애無愛, 절망을 용서합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이념과 권고와 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단순화시키지 않으며, 깊은 겸손으로 인간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논증하기보다도 무덤에서 다시 살아남으로써 그것을 시위합니다.

개변주의자가 이원론자와 구별되는 점은 그들이 문화에 대하는 태도가 더 적극적이요 희망적이라는 점입니다. 이 입장은 세가지 신학적 신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1) 창조

창조에 비해 속량을 강조했던 이원론자와는 달리, 개변론자는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두 주제를 모두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통치 밑에서 창조적인 능력과 하나님 말씀의 질서화에 의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창조에 대한 큰 관심은 이원론자가 등한시한 기독론의 일면을 발전시켰습니다. 한편으로는 말씀logos 즉 하나님의 아들이 창조에 동참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한 옛날에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능력 안에 있는 만물의 논리적 순간적인 시초와 직접적인 기원이라는 의미에서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의 성육신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큰 관심을 가짐으로써, 다만 그의 죽음 부활 그리고 권능으로 올 재림에 나타난 구속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 창조의 세계 속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행하는 아들이 그의 질서화행위 없이는 있어본 적이 없는 인간 문화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2) 창조 때의 선善에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

이원론자가 창조와 타락을 거의 영지주의적으로 표시할 수 있을 만큼 근접시킨데 반해, 개변주의자는 타락을 창조와 구분합니다. 이원론자에게 문화제도는 부패를 막기위한 질서, 무정부의 예방, 육신생활의 지도 등 일시적인 문제들에만 관계된 것이라고 합니다. 개변주의자는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을 주장하는 교리에 찬동하는 점에서 이원론자와 합치되지만, 그들은 타락을 창조로부터 구분하며 또한 육체적 생명의 상태로 부터 구별하는데 극히 날카롭습니다. 타락은 창조의 반대이지, 결코 그 계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에게 미치는 결과는 인간 편에만 나타나지, 하나님 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선한 본성은 부패해졌습니다. 이것은 존재해서는 안될 사물처럼 악한 것이 아니라, 비틀어지고 꼬이고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문화는 부패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악이 아니라 전도된 선입니다. 그러므로 문화는 개변의 문제이지 새 창조로 대치할 문제는 아니라 합니다. 물론 그 개변이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일종의 신생을 초래합니다.

(3) 역사관

역사가 근본적으로 다만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의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극적인 상호행동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역사 안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타적 기독교인들에게는, 역사란 기독교 문화의 발흥과 이교 문명의 사멸을 기술한 이야기 입니다.

문화의 기독교인에게는, 역사란 자연과 정신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종합론자에게는, 역사란 영혼이 하나님과의 궁극적인 교제를 율법 이성 복음 교회의 치하에서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이원론자에게 있어서 역사란, 신앙과 불신앙이 투쟁하는 시간,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때와 그것이 완성될 때의 중간 기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개변론자에게는, 역사란 하나님의 능력있는 행위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기술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에게는 종말론적 미래가 종말론적 현재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의미하는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 이전의 하나님의 행동이나 시간 이후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보다도, 시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영생이란 지금, 여기 있는 실존의 특질quality 입니다. 그러므로 개변주의자들은 창조에서 주어진 것을 보존한다거나 최후의 속량에서 주어질 것을 위한 준비라기보다도 현재의 갱신에 대한 하나님의 가능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만나는 현재가 곧 역사라는 견해를 가지고, 창조와 문화의 세계가 최후로 종말을 고한다는 데 대한 기대보다도, 만물을 끌어올려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더욱 민감합니다.

그의 표현방식은 시간적이 아니라 공간적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운동은 상향적인 운동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과 흠모의 힘찬 파도에 의하여 높이 올려진 인간의 영혼과 행위와 사상의 상승rising 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있는 변화된 인간의 삶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위하여 몸과 영혼을 가진 인간을 만드시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으로 하여금 그를 통하여 구원받게하신 하나님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개변주의의 주제는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복음서는 복음을 그리스Greek적 개념으로 번역하여 문화를 새로운 수준으로 상승시켰다는 점에서 문화적 개변 자체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창조에 대한 진술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창조된 세계는 근본적으로 선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응답 속에서 자기 모순이 발생하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타락 사상, 선의 전도라는 사상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응답과 창조주에 대한 인간 세계의 응답을 끊임없이 대조함으로써 잘 드러냅니다. 역사관에 있어서, 역사 안에 있는 시간적 차원, 즉 과거와 미래가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다분히 종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영생'이라는 말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도다"(요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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