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13, 2009

하나님의 義에 나타난 믿음 - 롬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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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복음 ευαγγελιον (eu[v]angelion)은 old English로서 "good tidings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에 동사形으로 한번, 마가와 마태복음에는 13번 나오고 요한복음에서는 쓰여지지 않았다. 사도행전에 두번, 베드로전서와 계시록에 각각 한 번씩 나온다. 반면 바울의 서신에는 60여회 사용되었다.

ευαγγελιον은 신약시대의 그리스에서 지배자의 업적을 경축하는 것을 말하는데 (The Interpreter's Bible, vol.9 p.390)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업적을 선포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 한다.

능력(power) δυναμισ(dynamis)은 신약성서에서 기적이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表明(manifestation)할 때 쓰인다. 그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날 것을 볼 것이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היה hayah H1961). 복음은 이 역동적인 사건의 宣言이자 公表, 公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dynamis이며 지혜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YHWH의 역사하심에 응답하는 능동적 행위이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dynamis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1:18-25 새번역)

'구원(salvation)'은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구출함을 뜻한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유태인들에게는 마지막날에 하나님께서 가져다 주실 종국적인 위대한 구원을 의미했다. 바울은 바로 이 종말론적(eschatological) 의미에서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이는 죄와 죽음의 속박(bondage)에서 해방됨을 뜻한다. 화해 속에서의 여전한 불안감과, 불화 가운데의 증폭되는 적대감을 극복함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행하신 이 일은, 그리고 여전히 행하고 계신 일은 모든 자에게 열려있는데, 이때가 바로 마지막 날의 때이다.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사2:2 새번역)
And it shall come to pass (היה H1961) in the last days, [that] the mountain of the YHWH's house shall be established in the top of the mountains, and shall be exalted above the hills; and all nations shall flow unto it. (KJV)

로이드존스는 그의 로마서 강해 1권(3:20-4:25) p64에서 '믿음'에는 세가지 요소 또는 세가지 국면이 있다고 한다. 진리에 대한 앎 또는 인식(a knowledge[awareness] of truth), 그에 대한 찬성과 동조(assent of truth), 그리고 신뢰와 헌신(a trust[committal] in the truth)이다.

야고보서 2:14-26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일상적인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지적 동의라는 의미에서의 '믿음'을 뜻한다. 이러한 '믿음'이 있노라 말하지만 행함이 없으니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허탄한 자, 그의 믿음은 헛것이다.

'믿음'의 또 다른 의미는 히브리서 11장 1절 같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확신(assurance); 실체,보증(새번역)]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conviction)"로서의 '믿음'이다. 믿음이란 지적인 동의를 너머 행위를 수반하는 확신이며 확실한 보증이어서 현재 삶[實狀]의 모든 것을 - 고통과 심지어는 죽음까지 - 감수하며 오늘을 살게하는 능력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취하는 완전한 신뢰의 態道나 常態이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공로를 쌓는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性質(disposition)에 반응하는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靈의 disposition이다.

사랑이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방도는 겸허와 감사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은 이중적(twofold)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신뢰는 한없이 선하다. 반면 인간의 불경건함과 불의함, 그리고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義의 성취에 대한 절망감(despair)이다.

복음은 흔히 '회개'와 '믿음'을 설교하지만, 바울은 로마서에서 '회개'를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는 이 '믿음'에는 회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이다. 여기에는 자신을 향한 태도[회개; despair]가 포함되어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dynamis이고 그 매개체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일이다.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의 義(righteousness of God, 롬3:5에는 justice): 복음에는 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났는데 [계시되었는데 αποκαλυπτεται], 하나님이 인간을 올바른 관계 안으로 들어오게 하심으로써 드러난다 (롬3:21-26). 이는 마지막 날의 징표이다 (롬13:11,12).

세상에서 불의에 고역을 당하는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변호는: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公義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The Lord hath made known his salvation; his righteousness hath he revealed in the sight of the nations (시98:2)

公義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My righteousness quickly draws near and my salvation shall come forth like a light (사51:5, LXX 칠십인譯)

'하나님의 의'는 인간들을 위함이다.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I have brought near my righteousness and I do not hold back my salvation. (LXX)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사46:13)

여기서 義는 구원과 동의어로 쓰였다. '의'란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들을 변호하시는(vindicating) 하나님의 행위이다. YHWH께서 "알게 하시며 나타내셨도다!" 주님이 義의 대변자로서 구원하고 입증하는 행위의 주체이시다.

啓示(revelation)는 구약에서 항상 능동적인[dynamic] 의미로 사용된다 (IB). 바울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義(righteousness) δικαιοσυνη는 하나님의 內在的 성품인가 외적 행위인가?

성품으로서의 의를 뜻하는 경우, 18절은 단순히 17절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고 3:25과 -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내용이 상통한다. 즉, 하나님의 진노와 죄에 대한 심판과 [필요충분한 조건으로서 실제로 당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이 복음에 나타난다. 이러한 방도로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변호하여 立證(vindicate)하셨다. 원어에는 능동태로 되어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그의 의를 변호하신다"라는 적극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변호하시는 자들은 이미 의로운 자들이다. 말 그대로 "정당화 justification"하시는 것이다. 의롭다고 선언된 자, 의로운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자, 사실상 이들은 모두 의롭다. 여기서 바울의 신학은 차이를 보인다. "의롭다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데, 의롭다고 선포하고 의롭다고 여겨지는, 실제로는 지금 의롭지 않은 자에 대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으로부터의 稱義이다.

동사 δικαιοω는 "to make righteous"를 뜻한다 (IB). τυφλοω가 "to make blind"를 뜻하는 것처럼 이 두 경우 마지막의 σ가 형용사형으로부터 제거되었다. 바울이 말하는 '칭의 Justification'는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는 역사이고, 우리를 죄의 심판으로부터 변제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하나님이 "의로운 자"를 변호하는(vindicate) 행위를 하시는 것이지 그들을 의로운 [행위자 또는 성품의 소유자]로 만드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칭의'라고 할 때, "赦免 또는 放免(acquittal)"을 말하는 것이지 "實際로 의롭게됨really righteous"을 뜻하지 않는다. 칭의는 새로운 性質(性品 character)을 주는 것이 아니고, 우선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신분(status)을 받게됨을 뜻한다. 칭의는 그 사람을 하나님과 한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게 하는 법적인 절차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당신을 화해시키셨다. 이 의롭다 하고 화목되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믿음'을 기반으로 일어났다.

17절에 나오는 세 '믿음'을 각각 살펴보자.

δικαιοσυνη γαρ θεου εν αυτω αποκαλυπτεται εκ πιστεωσ εισ πιστιν (from faith to faith), καθωσ γεγραπται, Ο δε δικαιοσ εκ πιστεωσ ζησεται (by faith will live). (UBS 4th ed. Nestle-Aland 27th ed.)

For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through faith for faith; as it is written, "The one who is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The one who is righteous through faith will live]. (NRSV)

해석하기 어려운 from[through] faith to[for] faith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한글 성서의 "이르게 하나니"는 원문에는 없는 단어이나 번역자가 문맥상 집어넣은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三는 그의 로마서연구에서,

혹은 '소박한 신앙에서 정련된 신앙에까지'라 하고, 혹은 '신앙에서 출발하여 신앙으로 끝마친다' 하고, 혹은 '구약적 신앙에서 신약적 신앙까지'라 하고, 혹은 '(하나님의) 의는 신앙에서 발하여 신앙으로써 획득된다'고 한다. 기타 異說이 퍽 많다. 일역성서가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나, 신앙에서 신앙에 이른다"고 의역한 때문에 "신앙에서 신앙에 이른다"는 구를 떼어놓고, 단지 신앙의 진보를 의미하는 통속적 견해가 생겨났다. 그러나 원문에는 "하나님의 의는 이것에 있어서, 신앙에서 신앙에까지 나타났다"하고 있음을 보면, "신앙[믿음]에서 신앙[믿음]에까지"의 구는 하나님의 義의 나타나심과 밀접하게 관계됨이 분명하다.

NRSV에서 "through faith"란 "하나님의 미쁘심 God's faithfulness (롬3:3)"를 뜻하고, "for faith"는 "God's faithfulness elicits human trust"를 의미한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3:26)

하나님의 의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은 "한 사람이 순종하심(롬5:19)" "죽기까지 복종(빌2:8)"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忠誠됨에서와 같은 의미이다.

"..,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for all who believe" (롬3:22) 를 through the faith of Jesus Christ로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친다"로 읽게된다.

하박국2:4의 '믿음'은 "loyalty, steadfastness, faithfulness"를 의미한다. 의로운 사람은 그의 충성된 신앙으로-혹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인해 생존할 것이다. 그 당시 유태인들처럼 바울도 이 구절을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다면, 그 의로운 자, 메시야(행3:14; 7:52; 22:14)는 신실함을 근본으로 살아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7:52)

구원은 하박국서의 의미로서 하나님의 믿음[신실함] 안에 그 원천이 있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끌어내는 인간의 믿음, 즉 바울서신의 의미로서 우리의 믿음[태도; 반응]에 대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바울의 의도는 그가 인용한 하박국 2장 4절에 잘 드러나 있다.
The one who is righteous through faith will live. Ο δε δικαιοσ εκ πιστεωσ ζησεται (by faith will live).

하나님의 義, 그의 신실하심으로 의롭다고 稱해진 자는 살 것이다. 영원히 살 것이다. 인간 본연의, 창조된 모습으로 살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 것이다.

16절의 '믿음'은 동사形이다. 17절에 세번 나오는 '믿음'은 명사形이다. 16절의 믿음은 "모든 믿는 자"의 주님을 향한 태도이고, 17절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義이며,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조명된 (우리 안에 생겨난) 확신이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다.

명사란 개념화된 실체요 동사는 동적이기 때문에 결코 개념화될 수 없는 과정process이다. 명사는 이상화된 목표이며 동사는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인간의 행위이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中庸 제12장)
誠함 그 자체는 하늘의 길이요, 誠해지려고 함은 사람의 길이다.
(여기서 者는 誠을 명사화 시키는 토씨; 之는 지시대명사로서 목적어가 되기 때문에 그 앞의 誠을 동사화 시킴)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그의 죽기까지 복종하신 충성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롬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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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29, 2009

Romans - Martyn Lloyd-J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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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s 3:20-4:25: Atonement and Justification

제1장 서론적 기초 (3:19~20)
제2장 위대한 전환점-'이제는 But Now ' (3:21~31)
제3장 죄사함보다 더한 것 (3:21~31)
제4장 오직 값없는 은혜로 By Free Grace Alone (3:24)
제5장 화목제물 Propitiation (3:25)
제6장 예수 그리스도의 피 (3:25)
제7장 하나님의 자기 변호 The Vindication of God (3:25~26)
제8장 자랑할 데가 어디뇨? Boasting Excluded (3:27~31)
제9장 차별이 없느니라 Distinctions Abolished (3:29~31)
제10장 세워진 율법 The Law Established (3:31)
제11장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아브라함 (4:1~3)
제12장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심 Justifying the Ungodly (4:4~8)
제13장 오직 믿음 (4:9~16)
제14장 전능자의 은혜로 보증된 구원 Salvation Guaranteed by Omnipotent Grace (4:13~17)
제15장 믿음의 본질 (4:18)
제16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 Faith Glorifying God (4:18~22)
제17장 우리의 칭의를 위한 부활 Raised for our Justification (4:23~25)


로이드존스 목사의 간략한 전기(한글) 그리고 여러 자료를 모아 놓은 사이트(등록 要)

Martyn Lloyd-Jones 공식 웹사이트

로이드존스 목사 관련 링크 모음

설교 - Prayer in the Spirit


중생(重生)과 회심(回心)의 차이 (로이드존스 "성경교리 강해" 중에서)

“그러면 우리는 중생을 무엇이라고 정의해야만 합니까? 제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그것을 회심(돌이킴)과 차별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주, 이 둘은 혼동되어집니다. 그러나 중생이 회심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회심은 중생할 때에 우리가 하는 그 무엇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회심은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발생(發生 generation)하는 그 무엇입니다. 회심은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실제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의미는 다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회심한 이들은 자신이 중생한 사실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회심은 중생을 따라오는 무엇입니다. 중생으로 인한 변화는 사람들의 외적인 삶과 생활에서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위대한 변화는 첫째로 그들 안에서 발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것과 그 씨를 뿌린 결과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생은 삶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그 결과로 오는 것들과 분명하게 다릅니다.

중생과 탄생 사이에도 역시 차이가 있습니다. 중생은 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결론으로 인도하는데, 어떤 과정이 계속된 후에 탄생의 실제적인 과정에 도달합니다. 따라서 이 둘을 우리의 생각에서 구분하여 둔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중생을 말할 때, 우리는 실제적인 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generation)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효과적인 소명은 실제적인 출생으로 오며,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소명은 효과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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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ugust 25, 2009

Tragic Optimism - Viktor Fran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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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정신의학자인 저자(Viktor E. Frankl)가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기술한 클래식 -- 죽음의 포로 수용소 Man's search for meaning 개정판 마지막에 있는 The case for a Tragic Optimism 이라는 에세이 입니다. 아래의 Google books에서 전문을 참조할 수 있고, 그 밑에 요점을 의역해 보았습니다.



"a tragic optimism"이란, 인간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1)고통 pain (2)죄책감 guilt (3)죽음 death 이라는 비극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소망 가운데 그의 삶을 영위함을 뜻합니다. 사실 인간의 이 특성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아니 인간이 어떻게 이 모든 비극 가운데서 삶을 긍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불행 가운데 어떻게 삶의 의미를 간직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어떠한 조건이나 비참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삶의 부정적 측면을 어떤 긍정적이고도 건설적인 면으로 창조적 전환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역량을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문제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최선의 것을 만드는가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최선 the best"은 라틴어로 optimum 이라 하는데, 비극적 상황에 처한 인간의 낙관optimism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능력이 다음의 세가지를 가능케 한다는 데 착안하여 "tragic optimism"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1) 고난을 인간의 성취와 성숙으로 전환시키고,
(2) 죄책감을 더 나음을 향한 자기혁신의 기회로 승화시키며,
(3)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생활로부터 책임 있는 삶의 행위를 끌어 냅니다.

물론 낙관이란 우리가 조정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거슬러서 마구잡이로 낙관적으로 될 수도 또한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을 조정하거나 강제할 수 없듯이, 삶의 고통과 죄책감을 우리 맘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유럽인에게 미국 문화를 특징 짓는 것이 "인간이 행복하도록 명령 받았다"라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행복은 추구되는 것be pursued이 아닙니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잇따라 일어나는 것ensue입니다. 인간은 행복한 이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이유를 발견하면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따라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겠지만, 한 인간의 존재는 행복을 추구함에 있지 않고 행복하게 되는 이유를 찾는 데에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내재되고 잠재되어 있는 가능한 의미를 실재의 삶 속에 구현함을 통해서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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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의 필요성은 인간 본연의 또 다른 특징 --웃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을 웃길려면 웃음의 이유를 제공해야 합니다. 즉 농담을 재미있게 말해야 합니다. 웃으라고 타인에게 윽박지른다고, 또는 웃을려고 스스로 아무리 애써봐야 억지웃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진관에서 치-즈 하고 나온 이런 부자연스런 웃음을 정신의학에서는 "hyper-intension"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성적 감각신경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의 경우, 그 문제된 신경의 기능에 신경을 쓸 수록 그 증세를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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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 개인이 삶의 이유(의미)를 찾는데 성공하면, 그는 행복하게 될 뿐만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삶의 의미를 찾는데 실패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아마 치명적인 상황으로 몰리게 될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 수용소에서 미군들이 "give-up-itis"라고 부르던 현상이 먼저 일어납니다. 어느날 수용소에서 한 사람이 작업장에 나가서 일하기를 거부합니다. 감독관의 어떠한 협박도 그의 의지를 꺽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아주 전형적인 행동이 나타납니다: 깊은 곳에 몰래 숨겨 놓았던 귀중한 담배 한 까치를 꺼내 물고 피우기 시작합니다. 의미 지향적인 삶이 무너지고 즉흥적인 삶의 쾌락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러면 수용소의 동료들은 그가 이삼일 안으로 죽어갈 것임을 압니다.

오늘날(1984) 전 세계적인 drugs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산업화에 따른 인간 존재의 몰가치와, 그에 따른 삶의 허무 속에 자라난 젊은이들이 순간을 즐기는 현상입니다. 이 허무한 느낌의 근원은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도구와 물품은 많이 가졌지만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이유와 의미를 모르는 데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그나마 가진 것도 없습니다. 실직자들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연전에 "실업증후군"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한 젊은이를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실업은 자신을 쓸모 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하였고, 쓸모없음은 무의미한 삶과 동일시 되었으며, 결국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청년 단체나 도서관 등에서 자원봉사자로서 일하도록 설득하였는데, 보수는 없지만 그의 자유시간을 의미 있는 일에 보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의 경제적 형편은 여전하여 배고픔은 변함 없었지만 그의 우울증은 사라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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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우울증이 허무감에서 온다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우울증의 귀착지인 자살 또한 항상 존재의 공허감에서 온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모든 자살이 허무감으로 부터 기도(企圖)되었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자살하려는 사람이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어느정도 깨닫는다면 자신의 생명을 끊을려는 충동을 극복하였을 것입니다.

의미 지향적인 삶의 태도가 자살을 예방한다면, 자살의 충동에 노출되어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젊었을 때 오스트리아의 정신병원에서 이미 자살을 기도했던 우울증 환자 12,000여명을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의 자살기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자주 말했습니다. 그들의 문제--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를 해결할 길이 있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응답하기를: "비록 만에 하나라도 해결책이 있는 것이라면, 당신의 문제가 조만간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날이 밝아오는 것을 볼 때까지 생존해서 그날을 맞는 것은 당신의 책임입니다"

또 다른 현대의 정신병--공격성, 반항성aggression--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목적을 함께 추구해 나갈 때 완화됨이 관찰되었습니다.
-p167

중독addiction에 대해서는, 알콜 중독자의 90%가 삶의 공허감으로부터 온다는 Annemarie von Forstmeyer의 연구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Stanley Krippner에 의하면 마약 중독자의 100%가 그러하다고 합니다.

이제 다시 본론--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으로 돌아갑시다.

무엇보다 먼저 저는, 한 인간이 그의 삶을 통해 대면해야 하는 그때그때 하나하나의 상황 속에 잠재된 고유한 의미를 다루려고 합니다. 인생을 전체로 보아 그 의미를 기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지금-여기) 일상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상황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영화는 수천 수만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한 장면 한 장면에 의미가 있어서 전체 줄거리를 전개해 가는데, 마지막 단원을 보고 나서는 전체 영화의 의미를 판가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한편, 전체 영화를 구성하는 각각의 장면을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그 영화를 감상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도 종국을 맞고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겠지요. [하지만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면 어떻게 삶의 의미를 (지금) 알 수 있습니까?]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그 삶을 구성하는 각각의 장면[상황]에 담긴 가능성이, 그 사람의 앎과 믿음을 좇아 최선optimum으로 그의 삶에 실재(實在)로 구현되어가는 데[과정]에 달려있지 않을까요?

결국 삶의 의미를 발견함이란 상아탑의 공허한 논쟁에 있지 않고, 지금-여기에 그 삶을 실질적으로 만들어감에 있습니다. 의미의 발견은 Karl Buhler가 말한 "아하" 하는 순간 같은 구체적 상황의 개인적 경험과, Max Wertheimer의 Gestalt(경험의 통일적 전체) 사이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삶의 의미란 "figure" on a "ground"의 돌연한 각성을 말하는 고전적 Gestalt 개념과 달리, 현실(reality)에 깔린 저변에 反하는 가능성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경성(警省)하게됨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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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4, 2009

Fre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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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비교표는 침례교 목사님인 David N. Steele 과 Curtis Thomas 공저, The Five Points of CALVINISM - Defined, Defended, Documented 에서 발췌했습니다.

(I) Arminianism: Free-Will or Human Ability

Although human nature was seriously affected by the fall, man has not been left in a state of total spiritual helplessness. God graciously enables every sinner to repent and believe, but He does not interfere with man's freedom. Each sinner possesses a free will, and his eternal destiny depends on how he uses it. Man's freedom consists of his ability to choose good over evil in spiritual matters; his will is not enslaved to his sinful nature. The sinner has the power to either cooperate with God's Spirit and be regenerated or resist God's grace and perish. The lost sinner needs the Spirit's assistance, but he does not have to be regenerated by the Spirit before he can believe, for faith is man's act and precedes the new birth. Faith is the sinner's gift to God; it is man's contribution to salvation.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말마암아 심각하게 손상되었지만 완전히 절망 가운데 버려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죄인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까지 간섭하지는 않으신다. 각 죄인은 자유의지를 가졌고, 그의 영원한 운명은 그 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인간의 자유는 악함 대신 선함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그의 의지는 죄악된 본성에 속박되어있지 않다…

Calvinism: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

Because of the fall, man is unable of himself to savingly believe the gospel. The sinner is dead, blind, and deaf to the things of God; his heart is deceitful and desperately corrupt. His will is not free, it is in bondage to his evil nature, therefore, he will not - indeed he cannot - choose good over evil in the spiritual realm. Consequently, it takes much more than the Spirit's assistance to bring a sinner to Christ - it takes regeneration by which the Spirit makes the sinner alive and gives him a new nature. Faith is not something man contributes to salvation but is itself a part of God's gift of salvation - it is God's gift to the sinner, not the sinner's gift to God.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스스로 복음을 믿을 수 없다. 죄인은… 마음이 사악하고 절망적으로 부패하다. 죄인의 意志는 자유롭지 않고, 그의 사악한 본성에 속박되어 있다.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하려면 성령의 도우심 이상의 更生 즉, 죄인을 살려서 새 본성을 주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믿음은 인간이 구원에 공헌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구원의 한 부분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시는 (댓가 없는) 선물이지, 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다.

(II) Arminianism: Conditional Election

God's choice of certain individuals unto salvation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was based upon His foreseeing that they would respond to His call. He selected only those whom He knew would of themselves freely believe the gospel. Election therefore was determined by or conditioned upon what man would do. The faith which God foresaw and upon which He based His choice was not given to the sinner by God (it was not created by the regenerating power of the Holy Spirit) but resulted solely from man's will. It was left entirely up to man as to who would believe and therefore as to who would be elected unto salvation. God chose those whom He knew would, of their own free will, choose Christ. Thus the sinner's choice of Christ, not God's choice of the sinner, is the ultimate cause of salvation.

하나님은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할 자들을 예견하여 선택하신다. 自由意志적 결단으로 복음을 믿을 자들만을 선택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그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이 예견한 그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죄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즉, 성령의 권능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죄인에 의한 그리스도의 선택(영접)이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Calvinism: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God's choice of certain individuals unto salvation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rested solely in His own sovereign will. His choice of particular sinners was not based on any foreseen response of obedience on their part, such as faith, repentance, etc. On the contrary, God gives faith and repentance to each individual whom He selected. These acts are the result, not the cause of God's choice. Election therefore was not determined by or conditioned upon any virtuous quality or act foreseen in man. Those whom God sovereignly elected He brings through the power of the Spirit to a willing acceptance of Christ. Thus God's choice of the sinner, not the sinner's choice of Christ, is the ultimate cause of salvation.

창조전부터 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의 주권적 행위(의지)이다. 이는 그 인간의 회개나 믿음을 예견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게 믿음과 회개를 그냥 주시는 것이다. 이 선택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한 자들을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하신다. 죄인에 의한 그리스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죄인의 선택이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III) Arminianism: General Atonement

Christ's redeeming work made it possible for everyone to be saved but did not actually secure the salvation of anyone. Although Christ died for all men and for every man, only those who believe on Him are saved. His death enabled God to pardon sinners on the condition that they believe, but it did not actually put away anyone's sins. Christ's redemption becomes effective only if man chooses to accept it.

그리스도의 속량은 구속될 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될 자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한 것이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구원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도록 하지만, 實際로 그 죄를 죄인에게서 없애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에 대한) 속량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 때에만 실효된다.

Calvinism: Limited Atonement 제한 속죄

Christ's redeeming work was intended to save the elect only and actually secured salvation for them. His death was substitutionary endurance of the penalty of sin in the place of certain specified sinners. In addition to putting away the sins of His people, Christ's redemption secured everything necessary for their salvation, including faith which unites them to Him. The gift of faith is infallibly applied by the Spirit to all for whom Christ died, therefore guaranteeing their salvation.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보장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한 자들을 위한 대속이다. 그의 백성들의 죄를 도말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것을--그의 백성을 그와 연합하게 하는 믿음을 포함하여-- 보장한다. 믿음이라는 선물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모든 자에게 성령의 권능으로 주시는 확실한 구원의 보장이다.

(IV) Arminianism: The Holy Spirit Can Be Effectually Resisted

The Spirit calls inwardly all those who are called outwardly by the gospel invitation; He does all that He can to bring every sinner to salvation. But inasmuch as man is free, he can successfully resist the Spirit's call. The Spirit cannot regenerate the sinner until he believes; faith (which is man's contribution) proceeds and makes possible the new birth. Thus, man's free will limits the Spirit in the application of Christ's saving work. The Holy Spirit can only draw to Christ those who allow Him to have His way with them. Until the sinner responds, the Spirit cannot give life. God's grace, therefore, is not invincible; it can be, and often is, resisted and thwarted by man.

외면적으로 복음을 들은 모든 자들을 성령님은 내면적으로 부르신다. 성령님은 모든 죄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로운 만큼 성령의 부르심에 저항할 수 있다. 성령은 죄인이 스스로 (회개하고) 믿지 않는한 그를 改心시킬 수 없다. 인간의 믿음이 선행하여야 거듭남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실행하는 성령의 활동을 제한한다. 성령님은 오직 인간들이 당신의 사역을 허락하는 안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신다. 성령님은 그 죄인이 응답함으로써만 그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 아니다. 인간이 거역할 수 있다.

Calvinism: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In addition to the outward general call to salvation which is made to everyone who hears the gospel, the Holy Spirit extends to the elect a special inward call that inevitably brings them to salvation. The internal call (which is made only to the elect) cannot be rejected; it always results in conversion. By means of this special call the Spirit irresistibly draws sinners to Christ. He is not limited in His work of applying salvation by man's will, nor is He dependent upon man's cooperation for success. The Spirit graciously causes the elect sinner to cooperate, to believe, to repent, to come freely and willingly to Christ. God's grace, therefore, is invincible; it never fails to result in the salvation of those to whom it is extended.

복음을 (귀로)들은 모든 자들에 대한 부르심에 더해서, 성령님은 특별한 내적 부르심을 통해 선택된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이 내적 부르심은 거부할 수 없으며 항상 改心케 만든다. 이 특별한 부르심에 의하여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신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제한 받지 않으며,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협력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성령께서는 택하신 죄인이 은혜로히 협력하게 하시고, 믿으며 회개하게 하시고, 자유롭고도 자발적으로 그리스도께 나오게끔 만드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그 은혜는 그것이 베풀어진 바 된 인간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일에 결코 실패함이 없다.

(V) Arminianism: Falling from Grace

Those who believe and are truly saved can lose their salvation by failing to keep up their faith, etc. All Arminians have not been agreed on this point; some have held that believers are eternally secure in Christ - that once a sinner is regenerated, he can never be lost.

진정으로 믿고 구속 받은 자들이라도 그들의 믿음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알미니안주의자는 구원이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히 보장된다고도 한다.

Calvinism: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堅忍

All who are chosen by God, redeemed by Christ, and given faith by the Spirit are eternally saved. They are kept in faith by the power of Almighty God and thus persevere to the end.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 받은 바 되며, 성령에 의해서 믿음이 주어진 모든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믿음 안에서 보호되며 그로 인하여 끝까지 견인된다.


History of Calvinist-Arminian debate


Pelagius vs Augustine


Timeline for Pelagius vs Augustine


에라스무스 루터 칼빈의 자유의지와 예정론


Luther and Erasmus on Free Will and Salvation


Discourse on Free Will


Arminianism vs Calvinism


The Triumph of Arminianism (and its dangers)


Calvinism vs Arminianism


Calvinism vs Arminianism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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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y 2, 2009

Numinose 全的他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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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utline of Rudolf Otto’s The Idea of the Holy

The Idea of the Holy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 연구 - 김 남중

루돌프 오토Rudolf Otto에게 처음 종교적 반응의 독특한 성격을 연구하도록 지도해준 스승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였다. 오토가 관심을 쏟은 것은 특히 슐라이어마허의 초기 저서 종교에 관하여: 종교를 경시하는 지식인들에게 주는 글 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1799)이었다. 오토는 이 책에서 종교를 인식하는 윤리적·합리적 방식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느낌 혹은 자각으로 종교를 인지하는 슐라이어마허의 방법에 끌리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훗날 이 독특한 느낌을 인간의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했다. 오토는 이러한 체계적 설명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슐라이어마허를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거룩함의 의미를 재발견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후에는 슐라이어마허가 그 책에서 강조한 것이 일상적인 혹은 '자연적인' 의존의 감정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여 그 설명을 비판했다. 오토는 '절대의존'을 '피조물 감정'으로 대체했다.

"피조물 감정은 또 하나의 감정 요소에서 나온 최초의 주관적 파생물이자 그 결과이다. 피조물 감정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지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자아(自我) 바깥에 있는 대상을 우선적으로 직접 가리킨다."

오토는 이 대상을 '누미노제'(das numinose) 혹은 '전적타자', 즉 세속 영역을 철저히 초월하는 존재, 전통적으로 운위되어온 '초자연적' 혹은 '초월적' 존재와 거의 일치하는 존재로 보았다.

거룩함의 개념

세월이 흐르면서 오토는 여러 영향을 받아 슐라이에르마허를 넘어서는 종교 범주(範疇)를 재구성했다. 괴팅겐대학교 학생시절에 그를 가르친 알브레히트 리츨Ritschl은 종교를 가치판단의 영역에 두었으며 [<그리스도와 문화> 제3장 2절 - "문화-프로테스탄티즘"과 리츨 -에서 자주 인용된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을 클릭하시면 Google Book Search에서 Harvard대학교 소장본을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괴팅겐대학교 교수이자 리츨의 동료 신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Troeltsch는 한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 선험(先驗 a priori)을 종교적 해석 및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고 했다.

오토는 윌리엄 제임스James가 다양한 종교체험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1902)에서 보여준 예리한 통찰력에 감명을 받았지만, 제임스의 경험적인 방법이 그런 현상을 해석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 오토는 J. F. 프리스Fries의 사상을 좋아했다. 프리스의 '안둥'(Ahndung : Ahnung의 옛날식 표현이며 문자적인 뜻으로는 '예감', ' 직관') 개념, 즉 진리의 느낌을 만들어내는 열망이라는 개념은 오토에게 종교현상을 민감하고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오토는 이 '진리의 느낌'을 그의 책 거룩함 The Idea of Holy: An Inquiry into the Non-rational Factor in the Idea of the Divine and its Relation to the Rational 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오토는 이 책에서 이전의 수준을 넘어서서 종교 차원의 비합리적 측면을 더욱 자세히 연구했고, '오멘'(omen : 징조)이라는 낱말에서 '오미뇌스'(ominös : 불길한)가 파생한 데 착안하여, 라틴어 '누멘'(numen : 신·영혼·신성)에서 '누미노제'라는 용어를 만들어 '종교 차원의 비이성적 측면'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경외심을 일으키는 종교 체험의 요소인 누미노제에 대해서 오토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누미노제는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다. 음악작품의 아름다움처럼 비합리적이며, 따라서 철저한 개념분석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미노제는 상징적인 용어들을 가지고 논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룩함 에서 오토는 이전의 연구들을 활용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지속해왔던 연구의 성격과 토대를 철저히 바꾸는 새로운 모험에 나선 셈이다. 여기서 오토의 관심사는 누미노제 자체를 인지하는 기본적인 체험에 참여하는 데 있었다. 오토는 누미노제를 인지하는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순간 우리는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어떤 것을 다루게 된다… 그 느낌은 때로 부드러운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예배에 깊이 몰두하는 평온한 상태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안정되고 일관된 상태에 있는 영혼이 충만해져서 한동안 두려움으로 전율하게 하다가, 결국에는 그러한 느낌이 다 사라져 영혼은 다시 매일 겪는 '세속적인', 즉 비종교적인 분위기를 되찾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느끼는 첫 순간에는 거칠고 야만적인 현상이 나타나다가 다시 아름답고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느낌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피조물이 마음을 졸이며 떨고 말문이 막히는 겸손한 상태가 되는 것은 누구 또는 무엇 앞에서일까? 그것은 표현할 수 없고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신비' 앞에서이다."

오토가 누미노제 체험형식으로 제시한 '신비'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용어가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신비'는 누미노제 체험의 질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느낌으로 경험된다. 그 내용은 다음 두가지 양상으로 전달되는데, (1) '사람을 압도하는 두려움과 장엄', (2) '독특하게 마음을 끌고 사로잡는 것'이다. 전자로부터는 경이감, 즉 신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느낌이 오고, 후자로부터는 사람을 안심시키고 밝게 하는 신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체험이 온다. 두려움이 깃든 신비와 매료(魅了)라는 이 이중적인 충격이 바로 거룩한 것의 만남을 표현하는 오토의 독특한 방법이다.


한민족에 내재하는 누미노제: 공구(恐懼)와 상제(上帝)의 임재(臨在)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바를 조심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

- 정 약용,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중용자잠(中庸自箴), 1권

인간의 본성은 원래 스스로 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조심[戒愼]케 하는 것까지는 가능하겠지만 대저 두려워한다는 것은 구체적 까닭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선생이 가르쳐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가짜 두려움이다. 군주가 명령을 내려서 두려워한다는 것도 기만적인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어찌 속임수로 얻어질 수 있겠는가? 밤에 공동묘지를 지나가면 두려워할려고 안해도 저절로 두려워지는 것이니 그것은 그곳에 도깨비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밤에 산림 속을 지나가다 보면 두려워할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두렵게 될 것이니 그것은 그곳에 호랑이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군자가 캄캄한 방속에 홀로 앉아 있어도 전전 율율 하면서 감히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상제가 그를 굽어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命과 性과 道와 敎를 모두 一理에 귀속시킨다면, 理라는 것은 본래 지각도 없고 위엄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으로 인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할 수 있게 되겠는가? 성인의 말씀은 지극히 진실된 것이므로 체면만 세우는 그러한 로써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人性原自樂善。使之戒愼。猶之可也。夫恐懼爲物。非無故而可得者也。師敎之而恐懼。是僞恐懼也。君令之而恐懼。是詐恐懼也。恐懼而可以詐僞得之乎。暮行墟墓者。不期恐而自恐。知其有魅魈也。夜行山林者。不期懼而自懼。知其有虎豹也。君子處暗室之中。戰戰栗栗。不敢爲惡。知其有上帝臨女也。今以命性道敎。悉歸之於一理。則理本無知。亦無威能。何所戒而愼之。何所恐而懼之乎。聖人所。皆至眞至實。必不作矯僞體面之。以自欺而欺人矣。

소매(魅魈)-산에 산다는 외다리 도깨비

Otto’s vocabulary

Numinous Dread: Otto calls the feeling of numinous dread, aka awe or awe-fullness, the mysterium tremendum.

The mysterium tremendum implies three qualities of the numinous:
(1) its absolute unapproachability (2) its power (3) its urgency or energy, a force which is most easily perceived in the "wrath of God."

It has been suggested that Gothic fiction originated primarily as a quest for the mysterium tremendum.

The Connection of the Numinous and the Gothic

Connection 1: "daemonic dread."

"Daemonic dread" is the first stage in religious development. Primitive people misunderstood their experience of the mysterium tremendum or the dread inspired by the numinous, to which they were drawn by the fascinating power of the numinous. Otto explains, "The daemonic-divine object may appear to the mind an object of horror and dread, but at the same time it is no less something that allures with a potent charm, and the creature, who trembles before it, utterly cowed and cast down, has always at the same time the impulse to turn to it, nay even to make it somehow his own." Still, "daemonic dread" is a genuine religious experience and from it arose the gods and demons of later religions.

Otto regards the "dread of ghosts" as a "perversion, a sort of abortive offshoot" of "daemonic dread." Even after purer, more highly developed religions have evolved, the primitive "daemonic dread" may assert itself. Otto points for proof of this to the attraction of horror and "shudder" in ghost stories. The ghost attracts us because it is wholly Other, and as such "falls outside the limits of the ‘uncanny' and fills the mind with blank wonder and astonishment," which are responses to the numinous. Ghosts have another connection with the numinous; in the primitive experience, the feeling of the presence of ghosts produces the stupor which the wholly Other arouses.

Connection 2: other interpretations of the numinous.

Other Gothic elements originate in the misapprehension of the numinous. The feeling of the numen as mysterious stimulates "the naive imagination, inciting it to expect miracles, to invent them, to ‘experience them,' recount them." Terrifying, baffling, and even astonishing natural events have inspired "daemonic dread," a response which transformed them into portents, prodigies, and portents. Demons and specters, in Otto's view, are not part of the true development of religious consciousness but "spurious fabrications of the fancy accompanying the numinous feeling." Nevertheless, these fabrications do serve a positive function, one which may operate in Gothic fiction; though feelings of horror and shudder at spectral hauntings are caricatures of authentic numinous emotions, they enable us to break through rationality to contact "feelings buried deep in religious consciousness."

Connection 3: the sublime. 고상한, 숭고한, 기품 있는

A counterpart to the numinous, the sublime provides another connection to Gothic fiction. Though Otto distinguishes the numinous and the sublime as separate categories, they have a close connection. Like the numinous, the sublime cannot be explicated, is mysterious, and is both daunting and intensely attracting. Because of these similarities, the sublime may stimulate the capacity to perceive the numinous, and there is a tendency for the sublime to pass over into the numinous and for the numinous to pass over into the sublime.

Otto explicitly connects the two categories; the sublime is the most effective, if indirect way of depicting the sublime in the arts. The eighteenth century Gothic novelists were aware of theories of the sublime; Edmund Burke's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the Sublime and the Beautiful presented the most widely accepted theory. They incorpoated the sublime into their novelists. Radcliffe was famous for her landscapes, which were imbued with the sublime.

Otto identifies portrayals of darkness and silence as a means of presenting the numinous; he stresses that the darkness must contrast with a flickering or dying light, the semidarkness creating a "mystical" effect. "The semi-darkness that glimmers in vaulted halls or beneath the branches of a lofty forest glade, strangely quickened and stirred by the mysterious play of half-lights has always spoken eloquently to the soul." And the Gothic novel abounds in these particular effects and similar ones over and over. For Otto, these effects expression the numinous in contrast to Burke, for whom they express the sublime.

Stupor:

Because the mysterium tremendum is wholly Other, i.e., is unlike anything that we have encountered or ever will encounter, it arouses in us a mental state of stupor, a "blank wonder, an astonishment that strikes us dumb, amazement absolute."

The shudder:

In this state, the soul, "held speechless, trembles inwardly to the farthest fibre of its being[;] ... it implies that the mysterious is beginning to loom before the mind, to touch the feelings."
Creature-consciousness and the simultaneous experiencing of the self as nothing.무아의 경지 Creature-consciousness is the awareness of ourselves as having being or of existing. The nothingness is not a sense of guilt for a transgression, but the sense of being profane, which is the opposite state to the holy or holiness, which is an absolute quality belonging just to God. Only the person who is "in the spirit" can experience profaneness, which Otto describes as a "piercing acuteness... accompanied by the most uncompromising judgment of self-depreciation, a judgment passed, not upon his character because of individual ‘profane' actions but upon his very existence as creature before that which is supreme above all creatures." I think of profane nothingness as feeling, "I am nothing in the presence of that which is all." In this state, we are moved to praise the might of the numen, because its might demands praise and even more because it is absolutely deserving of praise. This sense of nothingness, which Otto calls "disvalue,"becomes a sin or sacrilege if the numinous is perceived in or confined to a moral framework; it has no necessary connection to moral judgments.

Sense of unworthiness and need for "covering." Accompanying the disvaluation of self is the feeling of being unworthy to be in the presence of "the holy one" (we fear that our presence might even defile him). Being profane, we need a "covering," in Otto's term, or a consecration or grace, "that renders the approacher ‘numinous,' frees him from his ‘profane' being," so that he is no longer unfit to relate to the numen.

The numinous has another aspect which co-exists with the mysterium tremendum, the power to fascination. The numinous fascinates or draws us to it with a force that is nearly irresistible. Otto calls the alluring quality of the numinous the mysterium fascinosum. At its most intense, this fascination becomes "exuberant" and transforms into the mystical "moment" or direct, complete contact with the numen, a state which few people experience. The numinous dread and the fascinating "combine in a strange harmony of contrasts," which Otto calls the mysterium tremendum and fascinosum

Human beings as a species have the a priori capacity of mind to perceive or experience the numinous. This is not to say that the ability to perceive the holy, let alone the perception itself is innate; it merely means that every individual has the potential to perceive or experience the numinous. The numinous state of mind or the feeling of the numinous must be evoked in us or brought into consciousness; it cannot be taught. But not everyone has the same degree of receptivity to the holy. The revelations of those who are specially receptive, like the prophets, stimulate the numinous capacity of the less receptive. Otto, who believes in the superiority of Christianity, awards the highest stage of revelation to the Son or Christ, who embodies holiness.

The human soul has parallels with the divine or numinous; it too is "mystery and marvel," undefinable, and "wholly alien" to our understanding. Insight into the soul comes, when it does, as an eruption, a flash or burst of illumination. The numinous-ness of the human soul is what enables the mystic to apprehend the numin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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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pril 22, 2009

고통의 문제 - C.S. Lew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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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2008) 12월 독서회에 C.S. Lewis의 간략한 전기와 함께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C.S. Lewis의 자서전격인 <예기치 못한 기쁨 Surprised by Joy (1955)>를 보면, 1912년(14세)에서 시작하여 1931년(33세) '회심'까지 20여년에 걸친 그의 고뇌로 가득 찬 기독교 신앙에로의 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릴적 가졌던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자칭 무신론자로서 젊을 날을 보낸 후, 결국 하나님의 존재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 돌아와 예수 그리그도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기까지 겪었던 갈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가 1952년에 쓰여졌으니까 <고통의 문제>는 그가 회심한 후 얼마 되지 않은 1940년(42세)에 쓴 초기 저작으로서, 그의 젊고 싱싱한 기독교관이 피력되어 있습니다. 반면 <헤아려본 슬픔 (A grief observed, 1961)>는 그가 익명(N.W. Clerk)으로 출판한 '고통'에 관한 책으로서, 58세에 처음으로 결혼한 아내 Joy의 사망(1960)을 겪으며 발견한 하나님과 인간과 그 세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책입니다. 여기서 증언하는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에서와 동일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감정이 섬세하고 리얼하게 묘사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영화한 것이 Shadowlands (Anthony Hopkins 주연)



Part 2, 3, 4, 5, 6, 7, 8, 9, 10, 11, 12, 13


루이스가 사망하는 해(1963)에 있은 그의 마지막 인터뷰 기사를 보면,

Q: In your book you remark that you were brought into the faith kicking and struggling and resentful, with eyes darting in every direction looking for an escape. You suggest that you were compelled, as it were, to become a Christian. Do you feel that you made a decision at the time of your conversion?

Lewis: I would not put it that way. What I wrote in Surprised by Joy was that ‘before God closed in on me, I was offered what now appears a moment of wholly free choice.’ But I feel my decision was not so important. I was the object rather than the subject in this affair. I was decided upon. I was glad afterwards at the way it came out, but at the moment what I heard was God saying, ‘Put down your gun and we’ll talk.’

Q: That sounds to me as if you came to a very definite point of decision.

Lewis: Well, I would say that the most deeply compelled action is also the freest action. By that I mean, no part of you is outside the action. It is a paradox. I expressed it in Surprised by Joy by saying that I chose, yet it really did not seem possible to do the opposite.

그의 계속되어지는 인터뷰에서: Heaven, Earth and Outer Space

Q: Do you feel, then, that modern culture is being de-Christianized?

Lewis: I cannot speak to the political aspects of the question, but I have some definite views about the de-Christianizing of the church. I believe that there are many accommodating preachers, and too many practitioners in the church who are not believers. Jesus Christ did not say, ‘Go into all the world and tell the world that it is quite right.’ The Gospel is something completely different. In fact, it is directly opposed to the world.

"The case against Christianity that is made out in the world is quite strong. Every war, every shipwreck, every cancer case, every calamity, contributes to making a prima facie case against Christianity. It is not easy to be a believer in the face of this surface evidence. It calls for a strong faith in Jesus Christ."

<순전한 기독교>가 일반인을 상대로 했다면, <고통의 문제>는 기독교인(루이스의 표현을 따르면 '세례를 받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쓰여졌습니다.

하나님의 전능, 선함을 이야기하는 <고통..>의 처음 세장을 읽으며, 루이스가 <순전한..>에서 'gentleman' 예를 들어, 어떤 개념을 '심화된' 의미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둘 때 급속도로 무용한 단어가 된다고 한 말을 다시 떠올립니다.

우리는 얼듯 '신사'의 본래적 '고상한' 뜻이 잃어가고 겉치레만 남은 위선적 '신사'가 됨을 루이스가 비판하는 거라고 지레 짐작하기 쉽지만, 루이스는 오히려 그 반대 방향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신사'란 말을 '심화'시키면 '객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어떤 존재'로서의 '거친 의미'를 잃는다는 의미에서 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전능과 선함'의 위대함과 고상한 의미를 우리가 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과 선함'을 영적으로 심화시켜서 그 본래의 참뜻 즉, 살아계셔서 오늘 지금 이순간도 끊임없이 여기 인간들 가운데 간섭해 들어오시며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주님으로서의 그 전능함과 선함을 우리가 생생하게 증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믿는다고 하는 전능함과 선함에 그 능력이 없고, 세상에 되어가는 일들을 보면 그 신학적 표현(전능-선)의 맛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선함을 고백할진데, 그의 자녀인 우리들이 왜 이토록 무능하며 심지어는 교활한가? 우리는 세상의 불행과 악인들의 횡행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그 전능-선함으로 생겨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한편, 이렇게 진부한 '신학' 이야기를 할 땐 <순전한 기독교>의 그 '지도' 이야기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해변에서 진짜 대서양을 본 사람이 집에 돌아와 대서양 지도를 볼 때 실제 세계가 덜 실제적인 세계로 바뀌듯이, 눈앞에서 넘실대던 파도가 한낱 색칠한 종이 조각으로 바뀌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지도가 색칠한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여러분이 지도에 관해 기억해야 할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지도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진짜 대서양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그 지도의 이면에는 해변에서 바다를 본 당신의 경험 못지않게 생생한 경험의 덩어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의 경험은 바다를 고작 한 번 흘낏 본 것이 전부지만, 지도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어딘가 가고자 할 때는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해변을 거니는 데 만족한다면 지도를 보느니 해변에서 직접 바다를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고 싶다면 해변을 거니는 것보다는 지도를 보는 편이 훨씬 유용할 것입니다.

신학은 지도와 같습니다...교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일종의 지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지도는 정말 하나님을 만났던 수백명의 경험 -- 여기에 비하면 여러분과 제가 경험하는 흥분이나 경건한 감정들은 아주 초보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선함에 상충하는 듯한 인간세상의 고통의 문제를 푸는 논리는 이렇습니다.

위의 인터뷰에서 그의 '회심'에 관한 진술에서도 보듯이, 그의 책에 조심스럽게 자주 등장하는 신학용어가 '자유의지' 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또는 인간이 선택하는 이 '자유의지'라는 가정에 내포될 수 밖에 없는 가능성으로서 고통이 존재합니다. 또한 '자유의지'에 따르는 인간 자신의 선택적 결과로서의 ''과 이로인한 고통의 가중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의 악순환을 바라보는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선함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써 나타날 때 선함과 고통과의 관계가 이해되어진다고 합니다.

인간이 육체적 통증을 통해 경각심을 가지듯이, 고통은 인간에 내재한 악을 발견케 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깨우치게 합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인데 인간은 이를 원치 않았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이러한 인간자신의 반역의지가 노출된 증거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악을 당하여 고통스러울 때까지 그것이 악인지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남을 해하는 행동이나 말도 그것을 본인이 당할때에야 비로소 큰 해악임을 깨닫는 지극히 악한 존재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너무 행복해서 하나님을 잊고 살 때 갑자기 일어나기도 합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그를 의지하게 합니다. 적극적인 선을 행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에게 때로 두려움과 연민을 통해 선한 일에 대한 순종과 베품을 가능케도 합니다.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건강하고 성숙하게 합니다. 고난이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의적 고행은 때로 철저한 반역의 의지적 표징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할일은 고통을 없애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고통을 없애려 한다고 해도 고통은 완전히 그치지 않을 것임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이 지독한 고통스런 갈망은 궁극적 결핍에서 옵니다. 그 고통스런 갈망이 우리를 이끄는 곳은 우리와 하나님의 연합입니다. 지옥은 그래서 동물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며, 어쩌면 지옥은 영혼이 선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자기부정을 원치 않는 자들이 최후까지 반역에 성공한 곳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있다는 말처럼...

인간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알게 되는 때는 자신을 비워 그 분을 모실 때, 또 그 분을 이웃과 나누길 원할 때입니다. 진정한 하나님과의 맞닿음, 어우러짐의 완성이 되는 그 때입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선이며 사랑입니다. 그 때야 비로소 파생된 우리는 우주의 심연이신 그 분 앞에 (고통의) 질문을 그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살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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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rch 25, 2009

Hang on the Two Command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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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do the Law and the Prophets ‘hang’ on the two ‘greatest commandments’?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40 개역 개정)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새번역)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KJV)

여기서 '이 두 계명'이란, 율법士(마태)[서기관(마가), 율법師(누가)]와 예수와의 대화 속에 나오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5~40; 막12:28~34; 눅10:25~28)를 지칭합니다.

두 계명의 내용이 거의 동일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22:35)"로 시작하여 "…강령이니라(22:40)"는 예수의 말씀으로 끝나고, 마가복음에서는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막12:28)"로 시작하여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12:34)"로 끝나며,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10:25~26)" 하자 율법사가 그 '두 계명'을 답하니까 예수께서 "네 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8)" 그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 (10:29)"하며 대화가 계속 이어집니다.

개역 성경의 '강령'은 구약성경의 핵심요약으로 흔히들 간주해서 '일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를 의미하며 'manifesto'같이 사용하지만, 원문을 보면 문자 그대로 '달려 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참고로 '綱領'은 '삼강오륜'에서와 같은 '강'의 '령'으로 이해하여, '두 계명'이 구약의 핵심요약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번역된 듯 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만 나오는 이 말씀 'hang'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동사적인 표현법에 주목하면 히브리-그리스적 사유를 이해하는 단서를 잡게 되고, 소라이가 지적한 바대로 今註와 古註를 분별하여 이해하는 지혜로운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다고 주님께 칭찬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막12:34).

'hang'의 古註를 달아 今註를 밝혀보겠습니다.

질문: 율법(모세오경)과 선지자(예언서)가 두 계명에 매달림hang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구약성서의 모든 것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 또는 의존되어있다 depended upon, 또는 이 두 계명이 눈 앞에 달랑거리며 바라보게 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한다..?

κρεμάννυμι (Strong’s G2910: kremannumi = hang)가 나온 구절들을 찾아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18:6)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눅23:39~4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행5:30~3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행28:3~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참고로 가롯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27:5)" 에서 hang은 ἀπάγχομαι (apagchomai)로 마22:40의 hang과 다릅니다.]

"성경은" 하며 시작하는 다음의 갈라디아서3장 8절로부터 나오는 바울의 변증에서 보듯이, 인간이 '율법(오경)과 선지자(예언서)'의 '저주 아래' 있게 되는 연유를 알아보겠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갈3:8~13 새번역)

[참고로 '율법 (토라 Torah)'는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권(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 소위 '모세오경')을 지칭하는 것으로, 단어 자체는 'teaching, instruction'이란 뜻이고 동사어근 'to shoot (an arrow)'에서 나온 말로 '과녁에 명중하다'는 어원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율법을 가르침이라 할 때, 그 가르침의 스승이 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그 참 뜻을 알아가게 됩니다.]

율법의 저주란 무엇인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는 뜻은?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 하였습니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지키지 않을 경우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죄의 삯은 사망 (롬6:23)입니다. 하지만 율법 자체가 저주나 죽음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는 어떻게 의롭게 되며 자유하게 되는가? 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는가?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예수님이 토라가 아니며 토라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토라 안에 (나타나) 있고 예수께서 토라를 완벽하게 사용(인용, 해석)하셨습니다. 토라 안에는 축복도 있고 저주도 있습니다. 악한 자의 행적도 있고 선한 자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는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율법의 조항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하나의 법규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 그 요구를 대할 때 마다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도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지막 장을 빼고…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자기[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함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매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된 말씀을 다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Do we then make void the law through faith? God forbid: yea, we establish the law." (롬3:31) 할 때,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 establish the law'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데?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율법을 굳게 세우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fulfill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until all is accomplished (마5:17~18 NASB)

Something has to come to pass (haya)… What is in Torah must come to pass? The curse.

예수께서는 율법의 저주가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게 충족시키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또는 죽음을 담당하시고], 선지자가 말한 바 -이스라엘이 죄를 범해서 고난을 당한다- 를 충족시키려고 멸시함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여러 '예언'들이 실현됨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 뿐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 그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는 데 따른 저주를 친히 받아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갈4:5)" 하셔서, 자녀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갈4:7)", 죄의 종에서 해방된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 (갈4:31)"가 되게 하셨습니다.

Do we know how we are to love the Lord with all our heart, soul, mind & strength and to love our neighbors as ourselves?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흔히 우리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과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그 상황을 외면하거나 또는 그 사람을 비켜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평온한 가운데 현실적 안정을 도모하고 이웃과 갈등 없이 행복하게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은 이렇습니다. 남편과 아내, 자식들과 친인척 그리고 교회 교우들과 직장 동료들과 어쩔 수 없이 지지고볶는 상황 가운데 들어가게 되고, 그것을 회피하며 살아갈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에로부터의 요청을 듣는 것입니다. 가까운 자일수록, 그를 대할 때마다 나의 눈 앞에 두 계명을 대롱대롱 '매달려'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눅20:38 새번역)
For he is not a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all live unto him. (KJV)

그러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갑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관계 속에 살고 있는 그러나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을 듯한 '그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데 '달려'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출발점은 자신이 '속량된' 사람임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량받은' 사람으로 볼 때 생겨납니다.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축복은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는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12:1~3 새번역)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반복 인용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NRSV, 3rd Ed)을 보면 긴 설명이 나오는데 특히 유익하고, The Jewish Study Bible (JPS), The Five Books of Moses (The Schocken Bible, vol. 1), Genesis (Robert Alter) 등의 각종 번역과 주석을 보면 바울이나 다른 성서의 기록자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약간씩 변형된 해석(번역)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유태인들이 번역한 토라에는 2절과 3절을 詩처럼 써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와 같이 한글(새번역)에서도 댓구가 좀 되도록 번역된 것입니다.

YHWH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하심으로 시작된 이 새로운 관계는, Moshe Weinfield가 지적한 대로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이후 계속되오던 인류의 저주의 역사를 반전시킵니다. 창12:1~3은 이스라엘 시초의 조상들에게 행한 하나님의 일련의 말씀 셋 중 첫째것입니다. 다른 둘은 26:2~5와 46:1~4인데, 조상들에게 갈 곳을 명하고 축복의 언약을 맺는 구조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함에 따라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해 갈 때에도, 야곱에게 명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창31:3)"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창31:13)"는 말씀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약속은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창11:30)"와 같은 처지에 있는 아브라함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이 언약 이후로 전개되는 아브라함 가족의 이야기는 이 약속의 말씀 안에 있는 당사자들의 삶 속에 펼쳐진 struggle이라 하겠습니다.

"너를 축복하여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는, 셈族(Shem = 'name' in Hebrew)의 후예인 아브라함이 바벨탑에서 추구했던 인간의 무모한 야망 "우리의 이름을 내고 (창11:4)"를 바야흐로 이루게 된다는 약속이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니겠습니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you shall be a blessing" (12:2b, KJV)는 마소라(Masoretic Text)를 읽을 때 문자적 의미로 "be you a blessing"인데, 히브리어 문법상 문제가 있어서 강독법을 좀 바꾸면 "and it [your name] will be a blessing"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반(창30:27~30)과 보디발(창39:5)의 경우에서와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이 약속이 실현되는 예가 율법(토라)에 나옵니다.

3절의 "one who curses you"는 마소라 전통에서 단수로 읽지만 다른 고대 사본들에서와 같이 복수로 쓰면 병행구가 어울려져 시적 운률이 있게 된다고 합니다. 창세기27:29, 민수기24:9 병행구에서도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하였습니다.

한데 여기 창세기 12장의 경우는 YHWH께서 "treats [Abraham] lightly"하는 자에게 조차 저주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Young’s Literal Translation에 보면, "I bless those blessing thee, and him who is disesteeming thee I curse" (창12:3a)라고 문자적으로 번역했습니다.

그 이유는, '저주'에 해당하는 두 히브리어 중의 하나가 ארר (H779)으로 저주 외에 별다른 뜻이 없지만, 또 다른 하나는 קלל (H7043) Pual形으로 쓰일 때 '저주받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한데 이 구절에서 쓰인 Hiphil形 'to treat with contempt, bring contempt or dishonour'의 경우, '멸시하다, 시시하게 보다'로 쓰여져 아브라함을 깔보거나 멸시하는 자들을 YHWH께서 저주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는 자들을 저주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을 중요시 여기지 않으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시초에 심각한 하자가 생깁니다. 다시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고 율법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지키지 않으면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간의 관계에서 그 이웃을 깔보는 자를 주님이 저주하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21:23)

..his corpse dost not remain on the tree, for thou dost certainly bury him in that day -- for a thing lightly esteemed of God [is] the hanged one -- and thou dost not defile thy ground which Jehovah thy God is giving to thee -- an inheritance. (YLT)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고난 당하시며 멸시 천대를 받았습니다.

다음은 '선지자(예언서)'의 저주 아래 놓이는 경우입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언약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렘11:3 새번역)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렘17:5)

주의 일을 정성을 다하여 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칼을 휘둘러 모압 사람을 죽이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렘48:10)

너희가 나의 말을 명심하여 듣지 않고서, 내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서, 너희가 누리는 복을 저주로 바꾸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받은 복을 내가 이미 저주로 바꾸었으니, 이것은 너희가 내 말을 명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2:2)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주의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YHWH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저주 받게 됩니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데 이 모든 것이 ‘매달려’ 있습니다.

다음의 스가랴서에서 두루마리에 있는 것은? 여기 말하는 저주란 무엇?

내가 또 고개를 들고 보니, 내 앞에서 두루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 천사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였다.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길이는 스무 자이고, 너비는 열 자입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온 땅 위에 내릴 저주다. 두루마리의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고, 두루마리의 다른 쪽에는 '거짓으로 맹세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내가 저주를 내보낸다. 모든 도둑의 집과 내 이름을 두고 거짓으로 맹세하는 모든 자의 집에 저주가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면서, 나무 대들보와 돌로 쌓은 벽까지, 그 집을 다 허물어 버릴 것이다." (슥5:1~4 새번역)

여기서 요한계시록에서 두루마리와 저주가 나오는 곳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또,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안팎에 글이 적혀 있는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니, 힘센 천사가 큰소리로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외쳤습니다.
---
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었는데,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그가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제사장이 되게 하셔서, 땅 위에서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계5:1~10)

요한이 본 것,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분께 두루마리를 받아 일곱 봉인을 하나씩 떼는 비젼이 계시록 6장 이후로 계속 나오는데 저주, 저주 또 저주… 이렇지 않습니까?

스가랴가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를 보았을 때 한 음성을 들었는데, "이것은 온 땅 위에 내릴 저주다. 두루마리의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고, 두루마리의 다른 쪽에는 '거짓으로 맹세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내가 저주를 내보낸다." 라고 하였습니다.

자 이제 마태복음의 예수의 본 말씀으로 돌아가서;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이 두 조항도 성경의 한 구절이니까 결국 '율법과 선지자'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만약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밑에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갈3:8에서 바울이 해석한 창세기12:3b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에서 '모든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저주에서 벗어나 '복을 받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8,9절에서 "또 성경은" 하며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하였습니다.

바울이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All the Gentiles shall be blessed in you "로 인용한 그 Greek 문장은 <70인역> 이라고도 불리우는 Septuagint (히브히어 고사본의 그리스어 번역)를 근간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In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의 가능한 다른 번역이라고 해봤자 "by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less themselves"으로서, 의역하면 "우리가 아브라함 같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48:20a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에서, 여기서는 축복의 목적어가 없고 축복하는 樣式으로서 "이스라엘이 너희의 이름으로" 축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다른 나라들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축복을 우러러 보고 같은 축복을 자기 자신들에게도 내리기를 기원한다.. 뭐 그런 의미입니다. 다음의 시편을 보면 그 내포된 의미를 잘 전달받습니다.

그의 이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태양이 그 빛을 잃기까지 그의 명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뭇 민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모든 민족이 그를 일컬어서,
복 받은 사람이라 칭송할 것이다. (시72:17)

율법서에 나오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가볍게 보지 않음 또는 '저주'하지 않음'으로써 오는 이방인들에게 내린 축복과 관련된 사례를 마음에 새겨 둡시다.

아비멜렉(창26:28) 라반(30:27) 보디발(39:3~5) 요셉과 감옥에 같이 있던 자(39:21~23) 이드로(출18:10~12) 발람(24:1) …

이방인은 율법이 없이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갈2:16)

아브라함이 믿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한 일이 무엇인가? YHWH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행동하였나?

아브라함은 오랜 기간동안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마음에 새겨 듣는 것부터 시작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아브라함이 실수도 저지르고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지만 지속적으로 YHWH의 한말씀 한말씀에 복종하며 나아감을 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강령이 눈 앞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그 축복의 언약에 대한 믿음으로 삶을 헤쳐나간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저주가 우리 위에 놓일 때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도질 때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이 앞길을 막을 때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매달려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매달려 있음을 볼 때, 이 땅의 모든 짐을 지고 율법의 저주에서 나의 죄를 속량하느라 나무에 높이 매달시신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 에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3:5)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롬8:2)

그리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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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rch 5, 2009

Four Rivers and Two Trees in Eden (Gen. 2:8-17)

무대: 에덴 동산, 땅[하윌라, 구스, 앗수르], 하늘
등장인물: 두 나무, YHWH, 네 강(물), 사람 [아담], 여자 [하와], 뱀, 여자의 아들 [어린 양], 그룹들, 드래곤 [사단]과 그의 사자들,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 (그 여자의) 남은 자들

Four rivers, two trees in Eden

Q. (창2:8) garden의 뜻은?
A. (gan) that is fenced; boundaries; hedge
동사어근 (ganan, Strong's H1598) protect; defend – defend what? --> Eden

Q. 가든은 무엇이며 그안에 무엇이 있었나?
A. 에덴을 싸고있는 경계이며 그 안에는 두 나무와 사람(남자)이 놓였고 네 강물의 근원지이다.

Q. 에덴은 어디에 있(었)나? Eden의 문자적 의미는?
A. (Eden; 'adan H5727) to be soft; to be pleasant, delight (wonderful, beautiful place..)

느슨할(laxity) 정도로 부드럽고 상쾌하며 아름다운 곳. 위험한 것이 있어서 hedge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타락"하지 않았음, 위험하지 않음). 에덴은 가든이 있는 곳 또는 가든(헤지)되고 있는 상태로서, YHWH 하나님이 그 헤지된, 느슨한 상쾌함으로 한 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가든 안에 사람을 놓아두었다. 창세기1장에서, 그 garden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כי-טוב 키토브 because it is(was) good."

Q. 두 나무?
A. (창2:9)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Q. 나무에 대한 히브리어?
A. ('ets) wood; 꽃이나 식물과 달리 firm하다.

Q. 동사어근? 그 의미는?
A. ('etsah) to fasten; to make firm; to be made firm
이 어근은 성서에 한번 (잠언16:30) 사용된 동사로서 (Kal形) to shut 이란 뜻이고, 링크의 게제니우스 렉치콘을 보면 to make firm; hence to shut, specially the eyes 라고 나온다.

잠언16:30에서, "눈을 감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라는 표현은, root가 firm하게 되는 것처럼 눈을 꽉 감는다, 그러니까 죽음을 뜻한다.

나우웬(Henry Nouwen)은 Turn My Mourning into Dancing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이 십자가 [나무에 달린 자, 저주받은 자 (신21:23), 패역한 자, 눈을 나무의 굳음처럼 firm하게 꽉 감은shut 죽은 자]의 승리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공동체는 이 새로운 공동생활에 기뻐할 것이 있고, 환희(ecstatic) -죽음이라는 정지(static) 상태에서 벗어나서 인간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선포하는 것- 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계속 알리는 자리다.

Q.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왜 나무에 비유하시나? 나무가 하는 일은 무엇(또는 나무의 존재 이유)? 왜 하나님은 두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셨나?
A. (히브리)성서는 무엇을 말하려 할때 항상 "물질적"인 대상을 들어 표현한다.
하나님은 그가 좋아하는 사람 (rightousman, holy people, people of God)을 나무같이(로서) 표현하시고 좋아하신다.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창1:11). 모든 생산물이 나무로부터 온다 (창1장). 뿌리가 나무를 firm(solid)하게 한다. 나무는 물가에 심어져서 뿌리를 통해 물을 흡수하며 생명을 유지한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창6:14-) 노아 방주는 firm한 나무로 만들었다.
(겔37:20) the sticks.. it's the trees that is going to be firmly connected. 여기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firm하게 하는 나무 작대기.

인간은 나무가 아니라서 온 데를 돌아다니지만(창 3:7 - 동산에 거니시는 YHWH 하나님) 그래서 문제의 발단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이 spiritual함을 좋아하심.. 하늘과 땅을 연결짓는 것(나무, 사람)은 두 trees... your firmness and my firmness are based upon where somebody's hand.. make firm where somebody's hand..(창조자의 손)

Q. (창2: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네 강의 이름은?
A. (창2:11-15)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Q. 그 네 강이 흐르는 목적지는? 그리고 무엇을 하려 하는가?
A. four heads(areas)는 square의 네 모서리를 뜻하는것 아님. 강이 흘러가는 목적지를 가리키는 것.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계7:1)

Q. "river"의 뜻은?
A. (nahar) continuously flowing.. "water"

Q. 동사어근?
A. (nahar) to flow, to flow together, stream; to beam, shine, to give light, radiant
흐르고 넘치며 때로는 (홍수같이) 파괴적이고 압도적인 물의 흐름; 한편 빛에 대하여는 비침, 영롱함.

Q. 영적인 의미에서 "강물"이 뜻하는 바는?
A. 흐르는 물(생명); spirit

My spirit(s) come down like rain (water)...
For I will pour water upon him that is thirsty, and floods upon the dry ground: I will pour my spirit upon thy seed, and my blessing upon thine offspring (사44:3)
내가 메마른 땅에 물을 [부어] 주고 마른 땅에 시내가 [넘치게, 풍성하게] 흐르게 하듯이, 네 자손에게 내 영을 부어 주고, 네 후손에게 나의 복을 내리겠다. (새번역)
And it shall come to pass afterward (haya), [that]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flesh; and your sons and your daughters shall prophesy, your old men shall dream dreams, your young men shall see visions: (요엘2:28, 행2:17-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말씀하시되]" 라고 인용되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개역개정)

Q. The river that is in the middle of Eden surrounded by a garden(hedge) that waters something.. where does it go?
A.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사2:2 개역개정)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새번역)
And it shall come to pass (haya) in the last days, [that] the mountain of the LORD'S house shall be established in the top of the mountains, and shall be exalted above the hills; and all nations shall flow unto it. (사2:2 KJV)
..flow unto it.. something on the moving (has a purpose..) flow back into where it began.. (물밀듯 그리[원래]로 다시 모여들 것이다)

구원이란 回復한다는 것, 즉 (창조의) 원래대로 되돌아 (물밀듯) 모여드는 것.

참고로, 함 석헌 선생의 스승으로서 유명한 다석 유 영모 선생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을 뚜렷하게 [서 있게, 솟도록] 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굳게 서고 높이 솟아남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回光返照라는 말을 자주 했다는데, 니이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루터와 바울의 역설적 은혜론을 연상케 한다.

이원론자의 출발점인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서 이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은혜와 죄에 관한 그 근본적인 상황이 변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은혜는 하나님 안에 있고 죄는 인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만나와 같은 능력이 아니며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중개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행동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대결하는 역사적 완충지대를 넘어서 인간에게 도래한 화해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그 무엇이 그 은혜로운 행동에 감격한 바울이나 루터의 응답 속에 반사되더라도, 바울이나 루터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본다 할지라도 한 반영reflection으로 밖에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은혜스러움을 사람들이 자기 자신 안에 찾으려 할 때에는, 그것이 즉석해서 사라지고 맙니다. 마치 내가 나의 은인을 배반하고 그것이 나의 덕행이라고 생각할 때, 그 은혜끼친 이에대한 나의 감사가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석이 16세에 세례 받고 38년 후 回心하여 한 말;

옳은 이를 뵙자고, 참을 찾자고 반 백년 동안 목이 말랐었습니다. 누리를 하나되게 하실 이가 과연 누구일까요. 옳으신 그 어른이리니 우리 님이시여, 꼭 한 가지만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 나의 마음을, 이 만물보다 거짓된 나의 마음을 뿌리째 뽑아 버려 주옵소서. 그리 되오면 그 뿌리뽑힌 속의 속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샘물이 강이 되어 흐를 줄 믿겠나이다.

Q. (창2:11) 비손 Pishon의 어근의 뜻은?
A. (puwsh) scattering; distribution of
어디에다 distribute하는가? ..continuously spread itself (the Spirit of living God) out over this area.

Q. "하윌라 Chavilah 온 땅에 둘렸으며"의 뜻은?
A. (Chaviylah) circular기하학적 원이 아니고 pattern으로서 반복되는 형태. 히브리적으로는 패턴으로 나타나는 것, 반복되는 형태가 드러나는 것을 "영원"하다고 한다.
"둘렸으며"는 하윌라의 동사어근 (chuwl) to twist in circle; to dance; to whirl 인데, 하나님의 영이 circular (round)라고 불리는 곳으로 (패턴을 드러내며 춤추듯이) 감아돌아 흘러간다. 강이 계속적으로 spread itself out하며 돌아 흘러가는 곳이 하윌라.

Q. (창2:13) 두번째 강의 이름 "기혼 Gihon"의 뜻? 어디로 흘러가나?
A. (Giychown) bursting forth; to break forth
구스 (이디오피아 - 이 이름은 '대홍수' 후 나타남(고고학). 그러니 창세기의 이 부분을 '대홍수' 후에 쓰여졌다고 추정하는 것임)로 흘러감.

Q. "구스 Cush"의 뜻은?
A. (kuwsh) black; 아프리카 dark continent.. 온 세상 방방곡곡으로 흘러들어감.

Q. (창2:14) "힛데겔 Tigris Chiddekel"의 뜻은?
A. (Chiddeqel) rapid

Q. "앗수르 Assyria"의 뜻은?
A. ('Ashshuwr) 북 이라크. 그 동사 어근 ('ashar) to be straight, level, happy, honest, pure..

막1:3 등에 인용된 이사야서(40:3)의 말씀 "그의 첩경을 평탄케straight 하라" (물)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

Q. "유브라데 Euphrates"의 뜻은?
A. (Perath) 문자적 뜻은 "fruitfulness, sweet water"인데, break forth 어근 뜻을 가짐.

이 네째 강은 어디로 흘러가나 나오지 않았음!!

Q. 물이 break forth할 때 생기는 일은? 이 때 사람에 대해 물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A. (1) 하나님의 사람들 - 나무에게는 그 뿌리에 물(Spirit)이 끊임없이 공급됨으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2) 그러나 여기처럼 break forth하는 물은, 물이 창궐하거나 대군으로 질풍같이 쳐들어오는 군대(?) 같을 때, 계시록 12장에서 드래곤의 입에서 삼키려할 듯 나오는 쏟아져오는 물 [대홍수].

(계12:13) The dragon sent the waters to destroy the woman but the earth swallowed the water.. The dragon didn't succeed in conquering the woman, so what did he do?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계12:15)
이 첫번째 싸움에서 실패해서 드래곤이 그 여자 (12개의 별 -the house of Israel- 을 가짐)가 낳은 남자 아이 (예수 그리스도)와 싸움.. 여기 두번째 싸움에서 성공(?)하는데,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다 [또는, 죽음을 담당한다].

궁켈에 의하면 창세기는, 창조[order]를 통해 혼돈[chaos]을 물리친 1차 대전쟁의 언저리에, 헤지된 에덴동산의 사람이 앎[선 또는 악]을 주는 나무에서 사탄의 꾐에 빠져 에덴에서 좇겨나는 이야기를 통해, 패퇴한 잔당이 네 모퉁이 온 땅에 두루다니며 창조주의 자녀들과 싸우고 최후의 발악을 하는 현세의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 그러니까 창조된 상태 그대로 되돌아감[復]을 "구원"이라 할 때,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바, 소임 (잔당 소탕, 근데 이놈들이 원체 힘이 쎄서 -Archangel은 엘로힘과 맏먹는 능력을 가졌다- 우리의 싸움은 성전, 혹은 struggle (창32:28)이 되겠다)을 완벽하게 수행하면, 우리가 지금 삶을 영위하는 여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며,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내 안에 솟아나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내 집에서) 영원토록 思慕하게 하실 것이다.

Q. (창2:15-16) Did God not understand what He was doing, or is the lack of understanding our issue?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나?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물질적"이어서, 그것에 관련된 (상징적인) 무엇인가를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Q. "앎 knowledge"의 뜻은?
A. (det) cunning; cleaver.. knowledgible; perception; discernment; skill; understanding
게제니우스 렉치콘을 보면 아주 긴 설명이 나온다. 동사어근을 보면, 모든 7가지 동사형에 따른 각각의 쓰임새를 알 수 있다.

Q. 여기서 어떤 종류의 앎이 있는가? 누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차 있는가? 왜 그러한 지혜가 주어졌는가?
A. (출31:1-6)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knowledge 주어짐.

예언하여 이르기를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민24:15,16)

참고로 여기서 우리 성경에 "감았던 자" 밑에 주를 보면 "뜬자" 라고 나온다. 새번역에는 "뜬 사람"으로 했다!

두 상반된 종류의 knowledge: good or evil 선한 앎과 악한 앎이 있다. 앎 자체는 "선함"과 "악함"이 없다. good OR evil 이지 그 둘 사이에 회색지대란 없다. good AND evil은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못된evil 열매 맺는 좋은good 나무가 없고 또 좋은good 열매 맺는 못된evil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good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evil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눅6:43-45)

Q. 누가 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인가? 이는 유익한가? 만일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그 지식을 알기 원하지 않으셨는가? 어떤 종류의 지식을 알기 원하시고 어떤 종류의 지식을 거절하길 원하시는가?

Q. "evi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그 동사어근의 뜻은?
A. (ra' 여성형) "bad"; 동사어근: to break it pieces, break it apart, spoil, make it worthless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나무를 심어 놓으셨는데, 인간에게 묻기를, 어떤 "지식"을 갖기 원하느냐? Now we have this physical tree exist in the garden of Eden.. the first thing a man realize is..

God said "they have become like me".. what are they capable of doing now? they have knowledge of cunningness, discerning,..of destruction, separation,.. making a choice between good or evil.. among "키-토브"...

하나님은 "악함"을 이해하시는가? 악함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주의하고 계신가?
(창44:4-5) ..knowledge of evil -knowing how to do evil- "악으로 선을 갚느냐 rewarded evil for good"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사7:14-16)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For my people [is] foolish,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sottish children, and they have none understanding: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렘4:22)

I(YHWH) want you to have knowledge..

언제 하나님이 이 knowledeg를 주나?
After they take the tree of life… after wantingly, willingly believe..
In order to choose life, you must believe when God said you were challenged to choose..
Did we succeed? No!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thou shalt surely die (KJV)"

예수님이 죽음을 맞이하며 동일한 어투를 쓰셨는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예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서, 같은 말씀을 다시 하시면서, 세 번째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가까이 왔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마26:36-46)

창2:17절을 다시 표현하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선택하면 정녕 죽으리라".

예수께서, He that findeth his life shall lose it: and he that loseth his life for my sake shall find it. (KJV)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10:39 새번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막8:35)

自由意志

여기서는 마가복음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첨가되었다? 아마 마태복음은 유태인적인 것으로, "복음"이라는 정형화된 또는, 그 당시 초대교회 내에서 "심화된" 예수의 말씀이라 판단하여 뺏을까?.. 여하간, 이 말씀의 구조가 "태초"에 YHWH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과 동등한데, 예수님은 이렇게 사용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근심하시고 죽을 지경까지 괴로와 하시며 죽음을 "선택"하셔서 삶을 얻으셨다. 더우기 이 말씀의 전후 문맥(베드로의 고백과,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파악하면, 그 은혜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 달려 높이 우뚝 선 주님의 영광이, 찬란히 세세토록 온 천하 만민에게 빛날지어다!

Adam!
In order for you to have life, you are to choose me unto your death.
Do you believe me, 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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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February 16, 2009

as touching the dead, that they rise: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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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과 끊임없이 논쟁하신 것으로 증언합니다. 그들 유대교 지도자들이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로 대표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영혼은 영원불멸하다"고 믿는 반면, 사두개인들은 "영혼이 불멸하지 않고, 육체가 죽을 때 그와 더불어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The Wars of the Jews)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세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as touching the dead, that they rise:(KJV)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막12:18-27)

신명기 25장 5절 이하, 레위의 혼례법 (the law of levirate marriage, levirate = brother-in-law)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발해의 형사취수兄死取嫂를 연상케합니다.

사두개인들은 "그의 형을 위하여 자식을 낳는"(19절) 동서의 의무를 인용하였는데, 여기서 쓰인 헬라어 동사는 부활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사람이 그의 자손을 통해 이어가는 '생식生殖'의 부활을 의미한 듯 합니다.

또한 레위의 혼례법을 인류의 사회발전史의 한 측면에서 보면, 가부장적 사회에서 형사취수에 따른 부계로의 재산상속과 관련된 경제적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좀 더 직접적인 '신학적' 측면을 살펴봅니다.

인용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 중 모세와 관련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요? 구약성서의 모세와 관련된 사건 중 '부활'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 나오지요?

여기서 언급된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은 출애굽기 3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새번역)
Moreover he said, I [am] the God of thy father,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출3:6 KJ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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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3:14)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KJV)

YHWH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모세)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신 자체가 "죽은자의 살아난다는 것"(눅20:37)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이 전적으로 동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20:39).

누가복음에 나오는 동일한 에피소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말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개역개정)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새번역)
For he is not a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all live unto him. (KJV) (눅20:38)

부활과 같이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의 참 뜻을 헤아려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현존하시는 하나님-예수님과 교제한다는 것,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를 예수께서 응답하신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세상'에 사는 인간이 '이세상'이 갖는 '죄'된 속성과 관련이 없는 어떤 '신적인' 대상과 어떻게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가? '이세상'과 '저세상' 또는 '육체'와 '영혼' 같은 이원론적 사유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인간됨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어떻게 교통하는가에 대해 다음의 변론에 나와있습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을 다하고 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An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KJV)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 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막12:28-34)

여기서 인용된 구약성서의 말씀은 각각 신명기 6장과 레위기 19장에서 인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4-5)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An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ine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ght. (KJV)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19:18)

예수님은 그 중요한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첫째와 셋째의 '마음'과 '힘'은 정확히 쿠오트하셨지만, 둘째 것 '성품'을 '목숨'과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성품=목숨+뜻] 으로 '암송'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의향을 여기에 쓰인 원문의 단어와 그 쓰임새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성품 (신6:5) נפש nephesh

숨쉬는 기관(욥41:13 아가미?) 또는생명력-생동감(창1:20, 30)을 지칭하는 말로 다양하게 쓰였는데, 입맛, 몸, 호흡, 욕망, 기꺼움, 마음, 삶, 욕정, 사멸, 쾌감, 열정 등이 있는[나오는] (몸이나 정신적인) 곳[기관]으로서, 문자적으로 또는 빗대어서 사용되었습니다. [Strong's H5315]

BDB (Brown-Driver-Briggs) 히브리어 사전에서는,
1) 살아 숨쉬는- soul, self, life, creature, person, appetite, mind, living being, desire, emotion, passion 으로 쓰였습니다.
1a) the breathing substance or being, soul, the inner being of man 숨쉬는 것, 인간의 내적 존재
1b) living being 생물체
1c) living being (with life in the blood) (피를 가진) 생물체
1d) the man himself, self, person or individual 그 자신, 자아, (개체적) 인격
1e) seat of the appetites 맛을 감지하는 기관
1f) seat of emotions and passions 감정과 열정이 나오는 곳
1g) activity of mind, will or character 마음, 의지, 성품의 활동

목숨 (막12:30) ψυχη psuche [G5590]

breath, that is, (by implication) spirit, abstractly or concretely (the animal sentient principle only 실체적 또는 추상적으로 동물적 정서의 원천으로서만의 호흡 또는 정신; 그래서 합리적이고 영원불멸하는 영혼을 뜻한 [성령 Strong’s G4151]과는 다릅니다. 이는 신명기6:5의 성품[H5315]과 정확히 대응되는 그리스어입니다. 생동감 나는- heart, life, mind, soul.

Thayer's Greek 사전에서는,
1) breath 호흡, the breath of life 생물의 호흡;
the vital force which animates the body and shows itself in breathing
동물(인간)의 몸이 생명력을 나타내는 증거로서의 호흡
a living being, a living soul that in which there is life
생명력이 깃든 살아있는 존재와 혼
2) the soul 영혼
the seat of the feelings, desires, affections, aversions (our heart, soul etc.)
(마음 영혼등으로 표시되는) 욕망 호감 혐오같은 열정과 감정들이 나오는 곳으로서의 영혼

(막12:30) διάνοια dianoia [G1271]

심사숙고 deep thought; (마음의) 능력 또는 작용, 의지; 실례에서 이 단어가 내포하는 바는, 심사숙고하는 데서 나오는 상상력과 이해력.

1) the mind as a faculty of understanding, feeling, desiring
앎 느낌 바람(욕구)이 작용하는 능력으로서의 마음
2) understanding 이해력
3) mind, i.e. spirit, way of thinking and feeling
마음 즉, 사고와 감각의 방도로서의 정신
4) thoughts, either good or bad (좋고 나쁜) 생각

서기관이 사용한 '성품'에 해당하는 '지혜 understanding(KJV)'라는 단어의 사용이 흥미로운데, 그들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어휘의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뜻'을 첨가한 것을 알아채고 그 말씀을 받아서 응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혜 understanding (막12:33) σύνεσις sunesis [G4907]

지적인 종합능력 a mental putting together, 즉, 지능, 지식과 이해력.
1) a running together, a flowing together with
(지적인 발전사항을) 같이 잘 따라감, 이해함.
2) knowledge; the understanding, i.e the mind so far forth as it understands
지식; 알 수 있는 데까지 이해한 상태의 발현

여하간 이경우에도, '지혜 또는 영(적)지(혜) gnosis' 와는 다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에 여러번 사용되었지만 (요13:35) 명사적(개념적)으로 쓰인 이경우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의 동사어근 ginosko는 관계 속에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자가 남자를 안다고 할 때도 쓰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응답;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막12:34)"에서의 '지혜'는 KJV에서 "He answered discreetly"라고 했듯이, 상기의 '성품(신명기)' '목숨과 뜻(마가)' '지혜(서기관)' 들과는 전혀 상관 없는 말로서, '슬기롭게'라고 번역하면 더 좋습니다 (새번역).

욕망이든 지식이든 육체든 영혼이든 간에, 이들을 '건반의 키'로 하여 어떤 '곡조'가 울려나게하는가에 진실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도 그 '곡조' 자체가 아니고 그 배후에 있는, 매일매일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운데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는 struggle 자체가 하나님께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C.S. Lewis, 순전한 기독교)

기왕에 심사숙고하는 참에, 예수님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as touching the dead, that they rise:(KJV)" 라고 해석하신 신명기의 사건 - YHWH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나타난 말씀의 樣式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의 요한복음에서 인용된 말씀의 구조를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6:35a)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새번역)
And Jesus said unto them, I am the bread of life: (KJV)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1:25a)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새번역)
Jesus said un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KJV)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요6: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시니, (새번역)
But he saith unto them, It is I; be not afraid. (KJV)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8:5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새번역)
"Jesus said unto them, Verily, verily, I say unto you, Before Abraham was, I am. (KJV)

새번역(2001년 개정)이 원문의 중요한 표현법을 잘 반영했습니다.

주님이 --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당신의 현존함을 드러내시고 듣는 자의 응답 또는 결단과 복종을 지금-여기에서 요구하십니다.

상기의 요한복음 8장 후반부에서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The sam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 thing made that was made.

여기서 다시 마가복음의 '부활'에 관한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으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해석을 들어보시고, 그것이 지칭하는 출애굽기 3장의 떨기나무 이야기에서 '부활'을 찾아보십시요!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as touching the dead, that they rise:(KJV)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막12:18-27)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새번역)
Moreover he said, I [am] the God of thy father,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출3:6 KJV)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3:14)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KJV)

출애굽기 3장의 떨기나무 이야기에서 히브리어의 haya 동사[H1961] - YHWH의 동사어근 -에 대한 전체적 이해 속에서 만이 예수님의 해석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예수님을 걸고넘어가던 서기관[율법학자]을 위시한 반대자들도 그 해석에 동의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링크의 haya에 대한 설명, 특히 가운데 Gesenius사전의 긴 설명에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Ratschow의 Werden und Wirken을 구글하셔서 참조하시기를... 한국말로 번역된 토틀라이프 보만 저, 허 혁 옮김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분도출판사)에 haya에 대한 설명도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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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anuary 5, 2009

Film, Balette, 그리고 對談 하나.



Carmina Burana는 1803년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발견된 200여편의 라틴어 또는 옛 독일어로 쓰여진 13세기 유럽의 詩입니다.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고, 내용도 종교적인 것들이 많다고 하는데(하기야 중세시대에 종교적이 아닌게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사실은 교회 또는 교회의 도덕률을 비꼬거나 풍자하는 아주 "세속"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Carl Orff가 1937년 이 시들을 대본으로 작곡한 합창곡을 영화로 만든 것과 발레 공연을 보셔요. Carl Orff는 나찌였다 하고(흠...), 베를린 올림픽 때 개막공연의 음악을 담당했다고도 합니다.

Carl Orff가 인용한 Carmina Burana의 내용이 궁금하시면 여기를 보셔요.

"O Fortuna" 가장 유명한 듯 한데, 이걸 보면 영문번역과 함께 음악을 감상하게 됩니다.

Film:

1/9


2/9, 3/9, 4/9, 5/9, 6/9, 7/9, 8/9, 9/9


Balette:



2, 3, 4, 5, 6, 7, 8, 9, 10, 11, 12, 13-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25


다음은 The Question of God: C.S. Lewis and Sigmund Freud라는 제목으로, 루이스와 프로이드의 전기를 보여주며 사이사이에 하버드 의대 심리학자 Armand Nicholi의 사회로 각계각층 사람들과의 대담을 엮은 2004년 가을 PBS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입니다.

Part I: 1/7



Part I: 2/7, 3/7, 4/7, 5/7, 6/7, 7/7

Part II: 1/6, 2/6, 3/6, 4/6, 5/6, 6/6

Part III: 1/6, 2/6, 3/6, 4/6, 5/6, 6/6

Part IV: 1/6, 2/6, 3/6, 4/6, 5/6, 6/6


루이스와 Joy에 대한 영화: Shadowlands (Anthony Hopkins 주연)



Part 2, 3, 4, 5, 6, 7, 8, 9, 10, 11, 12, 13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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