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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do the Law and the Prophets ‘hang’ on the two ‘greatest commandments’?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40 개역 개정)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새번역)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KJV)
여기서 '이 두 계명'이란, 율법士(마태)[서기관(마가), 율법師(누가)]와 예수와의 대화 속에 나오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5~40; 막12:28~34; 눅10:25~28)를 지칭합니다.
두 계명의 내용이 거의 동일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22:35)"로 시작하여 "…강령이니라(22:40)"는 예수의 말씀으로 끝나고, 마가복음에서는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막12:28)"로 시작하여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12:34)"로 끝나며,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10:25~26)" 하자 율법사가 그 '두 계명'을 답하니까 예수께서 "네 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8)" 그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 (10:29)"하며 대화가 계속 이어집니다.
개역 성경의 '강령'은 구약성경의 핵심요약으로 흔히들 간주해서 '일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를 의미하며 'manifesto'같이 사용하지만, 원문을 보면 문자 그대로 '달려 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참고로 '綱領'은 '삼강오륜'에서와 같은 '강'의 '령'으로 이해하여, '두 계명'이 구약의 핵심요약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번역된 듯 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만 나오는 이 말씀 'hang'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동사적인 표현법에 주목하면 히브리-그리스적 사유를 이해하는 단서를 잡게 되고, 소라이가 지적한 바대로 今註와 古註를 분별하여 이해하는 지혜로운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다고 주님께 칭찬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막12:34).
'hang'의 古註를 달아 今註를 밝혀보겠습니다.
질문: 율법(모세오경)과 선지자(예언서)가 두 계명에 매달림hang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구약성서의 모든 것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 또는 의존되어있다 depended upon, 또는 이 두 계명이 눈 앞에 달랑거리며 바라보게 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한다..?
κρεμάννυμι (Strong’s G2910: kremannumi = hang)가 나온 구절들을 찾아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18:6)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눅23:39~4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행5:30~3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행28:3~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참고로 가롯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27:5)" 에서 hang은 ἀπάγχομαι (apagchomai)로 마22:40의 hang과 다릅니다.]
"성경은" 하며 시작하는 다음의 갈라디아서3장 8절로부터 나오는 바울의 변증에서 보듯이, 인간이 '율법(오경)과 선지자(예언서)'의 '저주 아래' 있게 되는 연유를 알아보겠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갈3:8~13 새번역)
[참고로 '율법 (토라 Torah)'는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권(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 소위 '모세오경')을 지칭하는 것으로, 단어 자체는 'teaching, instruction'이란 뜻이고 동사어근 'to shoot (an arrow)'에서 나온 말로 '과녁에 명중하다'는 어원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율법을 가르침이라 할 때, 그 가르침의 스승이 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그 참 뜻을 알아가게 됩니다.]
율법의 저주란 무엇인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는 뜻은?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 하였습니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지키지 않을 경우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죄의 삯은 사망 (롬6:23)입니다. 하지만 율법 자체가 저주나 죽음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는 어떻게 의롭게 되며 자유하게 되는가? 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는가?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예수님이 토라가 아니며 토라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토라 안에 (나타나) 있고 예수께서 토라를 완벽하게 사용(인용, 해석)하셨습니다. 토라 안에는 축복도 있고 저주도 있습니다. 악한 자의 행적도 있고 선한 자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는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율법의 조항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하나의 법규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 그 요구를 대할 때 마다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도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지막 장을 빼고…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자기[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함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매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된 말씀을 다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Do we then make void the law through faith? God forbid: yea, we establish the law." (롬3:31) 할 때,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 establish the law'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데?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율법을 굳게 세우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fulfill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until all is accomplished (마5:17~18 NASB)
Something has to come to pass (haya)… What is in Torah must come to pass? The curse.
예수께서는 율법의 저주가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게 충족시키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또는 죽음을 담당하시고], 선지자가 말한 바 -이스라엘이 죄를 범해서 고난을 당한다- 를 충족시키려고 멸시함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여러 '예언'들이 실현됨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 뿐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 그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는 데 따른 저주를 친히 받아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갈4:5)" 하셔서, 자녀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갈4:7)", 죄의 종에서 해방된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 (갈4:31)"가 되게 하셨습니다.
Do we know how we are to love the Lord with all our heart, soul, mind & strength and to love our neighbors as ourselves?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흔히 우리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과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그 상황을 외면하거나 또는 그 사람을 비켜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평온한 가운데 현실적 안정을 도모하고 이웃과 갈등 없이 행복하게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은 이렇습니다. 남편과 아내, 자식들과 친인척 그리고 교회 교우들과 직장 동료들과 어쩔 수 없이 지지고볶는 상황 가운데 들어가게 되고, 그것을 회피하며 살아갈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에로부터의 요청을 듣는 것입니다. 가까운 자일수록, 그를 대할 때마다 나의 눈 앞에 두 계명을 대롱대롱 '매달려'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눅20:38 새번역)
For he is not a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all live unto him. (KJV)
그러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갑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관계 속에 살고 있는 그러나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을 듯한 '그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데 '달려'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출발점은 자신이 '속량된' 사람임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량받은' 사람으로 볼 때 생겨납니다.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축복은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는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12:1~3 새번역)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반복 인용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NRSV, 3rd Ed)을 보면 긴 설명이 나오는데 특히 유익하고, The Jewish Study Bible (JPS), The Five Books of Moses (The Schocken Bible, vol. 1), Genesis (Robert Alter) 등의 각종 번역과 주석을 보면 바울이나 다른 성서의 기록자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약간씩 변형된 해석(번역)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유태인들이 번역한 토라에는 2절과 3절을 詩처럼 써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와 같이 한글(새번역)에서도 댓구가 좀 되도록 번역된 것입니다.
YHWH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하심으로 시작된 이 새로운 관계는, Moshe Weinfield가 지적한 대로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이후 계속되오던 인류의 저주의 역사를 반전시킵니다. 창12:1~3은 이스라엘 시초의 조상들에게 행한 하나님의 일련의 말씀 셋 중 첫째것입니다. 다른 둘은 26:2~5와 46:1~4인데, 조상들에게 갈 곳을 명하고 축복의 언약을 맺는 구조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함에 따라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해 갈 때에도, 야곱에게 명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창31:3)"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창31:13)"는 말씀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약속은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창11:30)"와 같은 처지에 있는 아브라함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이 언약 이후로 전개되는 아브라함 가족의 이야기는 이 약속의 말씀 안에 있는 당사자들의 삶 속에 펼쳐진 struggle이라 하겠습니다.
"너를 축복하여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는, 셈族(Shem = 'name' in Hebrew)의 후예인 아브라함이 바벨탑에서 추구했던 인간의 무모한 야망 "우리의 이름을 내고 (창11:4)"를 바야흐로 이루게 된다는 약속이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니겠습니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you shall be a blessing" (12:2b, KJV)는 마소라(Masoretic Text)를 읽을 때 문자적 의미로 "be you a blessing"인데, 히브리어 문법상 문제가 있어서 강독법을 좀 바꾸면 "and it [your name] will be a blessing"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반(창30:27~30)과 보디발(창39:5)의 경우에서와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이 약속이 실현되는 예가 율법(토라)에 나옵니다.
3절의 "one who curses you"는 마소라 전통에서 단수로 읽지만 다른 고대 사본들에서와 같이 복수로 쓰면 병행구가 어울려져 시적 운률이 있게 된다고 합니다. 창세기27:29, 민수기24:9 병행구에서도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하였습니다.
한데 여기 창세기 12장의 경우는 YHWH께서 "treats [Abraham] lightly"하는 자에게 조차 저주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Young’s Literal Translation에 보면, "I bless those blessing thee, and him who is disesteeming thee I curse" (창12:3a)라고 문자적으로 번역했습니다.
그 이유는, '저주'에 해당하는 두 히브리어 중의 하나가 ארר (H779)으로 저주 외에 별다른 뜻이 없지만, 또 다른 하나는 קלל (H7043) Pual形으로 쓰일 때 '저주받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한데 이 구절에서 쓰인 Hiphil形 'to treat with contempt, bring contempt or dishonour'의 경우, '멸시하다, 시시하게 보다'로 쓰여져 아브라함을 깔보거나 멸시하는 자들을 YHWH께서 저주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는 자들을 저주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을 중요시 여기지 않으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시초에 심각한 하자가 생깁니다. 다시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고 율법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지키지 않으면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간의 관계에서 그 이웃을 깔보는 자를 주님이 저주하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21:23)
..his corpse dost not remain on the tree, for thou dost certainly bury him in that day -- for a thing lightly esteemed of God [is] the hanged one -- and thou dost not defile thy ground which Jehovah thy God is giving to thee -- an inheritance. (YLT)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고난 당하시며 멸시 천대를 받았습니다.
다음은 '선지자(예언서)'의 저주 아래 놓이는 경우입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언약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렘11:3 새번역)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렘17:5)
주의 일을 정성을 다하여 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칼을 휘둘러 모압 사람을 죽이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렘48:10)
너희가 나의 말을 명심하여 듣지 않고서, 내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서, 너희가 누리는 복을 저주로 바꾸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받은 복을 내가 이미 저주로 바꾸었으니, 이것은 너희가 내 말을 명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2:2)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주의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YHWH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저주 받게 됩니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데 이 모든 것이 ‘매달려’ 있습니다.
다음의 스가랴서에서 두루마리에 있는 것은? 여기 말하는 저주란 무엇?
내가 또 고개를 들고 보니, 내 앞에서 두루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 천사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였다.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길이는 스무 자이고, 너비는 열 자입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온 땅 위에 내릴 저주다. 두루마리의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고, 두루마리의 다른 쪽에는 '거짓으로 맹세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내가 저주를 내보낸다. 모든 도둑의 집과 내 이름을 두고 거짓으로 맹세하는 모든 자의 집에 저주가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면서, 나무 대들보와 돌로 쌓은 벽까지, 그 집을 다 허물어 버릴 것이다." (슥5:1~4 새번역)
여기서 요한계시록에서 두루마리와 저주가 나오는 곳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또,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안팎에 글이 적혀 있는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니, 힘센 천사가 큰소리로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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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었는데,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그가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제사장이 되게 하셔서, 땅 위에서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계5:1~10)
요한이 본 것,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분께 두루마리를 받아 일곱 봉인을 하나씩 떼는 비젼이 계시록 6장 이후로 계속 나오는데 저주, 저주 또 저주… 이렇지 않습니까?
스가랴가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를 보았을 때 한 음성을 들었는데, "이것은 온 땅 위에 내릴 저주다. 두루마리의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고, 두루마리의 다른 쪽에는 '거짓으로 맹세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내가 저주를 내보낸다." 라고 하였습니다.
자 이제 마태복음의 예수의 본 말씀으로 돌아가서;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이 두 조항도 성경의 한 구절이니까 결국 '율법과 선지자'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만약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밑에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갈3:8에서 바울이 해석한 창세기12:3b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에서 '모든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저주에서 벗어나 '복을 받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8,9절에서 "또 성경은" 하며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하였습니다.
바울이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All the Gentiles shall be blessed in you "로 인용한 그 Greek 문장은 <70인역> 이라고도 불리우는 Septuagint (히브히어 고사본의 그리스어 번역)를 근간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In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의 가능한 다른 번역이라고 해봤자 "by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less themselves"으로서, 의역하면 "우리가 아브라함 같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48:20a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에서, 여기서는 축복의 목적어가 없고 축복하는 樣式으로서 "이스라엘이 너희의 이름으로" 축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다른 나라들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축복을 우러러 보고 같은 축복을 자기 자신들에게도 내리기를 기원한다.. 뭐 그런 의미입니다. 다음의 시편을 보면 그 내포된 의미를 잘 전달받습니다.
그의 이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태양이 그 빛을 잃기까지 그의 명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뭇 민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모든 민족이 그를 일컬어서,
복 받은 사람이라 칭송할 것이다. (시72:17)
율법서에 나오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가볍게 보지 않음 또는 '저주'하지 않음'으로써 오는 이방인들에게 내린 축복과 관련된 사례를 마음에 새겨 둡시다.
아비멜렉(창26:28) 라반(30:27) 보디발(39:3~5) 요셉과 감옥에 같이 있던 자(39:21~23) 이드로(출18:10~12) 발람(24:1) …
이방인은 율법이 없이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갈2:16)
아브라함이 믿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한 일이 무엇인가? YHWH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행동하였나?
아브라함은 오랜 기간동안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마음에 새겨 듣는 것부터 시작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아브라함이 실수도 저지르고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지만 지속적으로 YHWH의 한말씀 한말씀에 복종하며 나아감을 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강령이 눈 앞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그 축복의 언약에 대한 믿음으로 삶을 헤쳐나간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저주가 우리 위에 놓일 때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도질 때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이 앞길을 막을 때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매달려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매달려 있음을 볼 때, 이 땅의 모든 짐을 지고 율법의 저주에서 나의 죄를 속량하느라 나무에 높이 매달시신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 안에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3:5)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롬8:2)
그리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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