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20, 2008

순전한 기독교 - C.S. 루이스

Mere Christianity - C. S. Lewis

이 책은 지은이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BBC방송을 통해 평신도 및 무신론자들을 위해 강의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그 후 저자는 기독교인이 당면한 문제, 기독교인으로서의 행위, 인격을 초월한 존재 등 세 권의 책을 한 권으로 펴냈습니다. 이 책은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가치관,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의 행위, 인간의 사념을 초월한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지은이는 기독교나 가톨릭, 혹은 성공회 등 일정 교파의 소속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그야 말로 "순수하게 예수 믿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힙니다.

다음의 YouTube를 보시면 이 책을 쓰게된 배경과 입장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YouTube 사이트에 가시면 책 전체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1898년 북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자서전 아닌 (유일한) 자서전 Surprised by Joy: The Shape of My Early Life (1955)을 보면, 1895년 생인 형 Warren Hamilton Lewis와 친구처럼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낸 듯 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지만 아버지가 책읽기를 좋아해서 온 집안에 돌아다니는 책을 닥치는대로 읽으며 아주 어린나이에 그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놀았다고 합니다. 1908년 어머니가 병사하고, 그 후 아버지에 의해 보딩스쿨에 보내져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1917년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지만 곧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서 참전하게되고, 1918년 전장에서 부상을 당하여 1919년 제대합니다. 그후 옥스포드 대학으로 돌아가서 Greek, Latin, 영문학, 철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우등으로 졸업한 후,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중세 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면서 소설, 평론, 동화 들을 썼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강사로 지내며 옥스포드 대학 교수이자 Lord of the Ring의 저자 J.R.R. Tolkien과 "The Inklings"이란 문학회를 만들어 친하게 지냈습니다. 29년간 Oxford대학에서 재직하다가 1955년부터 Cambridge 대학의 교수직을 맡게됩니다. 1950-56년 사이에 <나니아 연대기 The Chronicles of Narnia>를 쓰는데,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동화이며, 전세계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책 중의 하나입니다. 1956년 Helen Joy Davidman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공산주의자이자 무신론자이었습니다. 당시에 Joy가 영국 체류권을 따기위한 수단으로 결혼했다는 비난이 있었지만, 결혼생활은 견실했고 법적인 결혼식 후 기독교적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그 결혼식은 투병중인 아내 Joy의 병상에서 거행됐고, 잠간 회복했지만 결국 1960년에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루이스 자신의 건강도 악화되어 1963년 64세의 나이로 주님께로 돌아갔습니다.

C.S. 루이스의 마지막 인터뷰 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C.S.루이스가 BBC 방송에서 행한 대담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이랍니다. 그의 육성으로 직접 들어보셔요.




이건 C.S. Lewis: My Life's Journey라는 제목으로 David Payne이 루이스의 삶과 그의 시대를 연기한 것입니다.



이건 The Question of God: C.S. Lewis and Sigmund Freud라는 제목으로 행한 하버드 의대 심리학자 Armand Nicholi의 강연입니다.

2004년 가을 PBS에서 같은 제목으로 방영된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Part 1 <-- 이건 part 1의 1/7인데 잘 찾아다녀야 합니다.




책 목차

1.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인간의 본성의 법칙
--몇 가지 반론
--이 법칙의 실재성
--이 법칙의 배후에 있는 것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2.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하나님의 침공
--충격적인 갈림길
--완전한 참회
--실제적인 결론

3. 그리스도인의 행동
--도덕의 세 요소
--기본 덕목
--사회도덕
--도덕과 정신분석
--성도덕
--그리스도인의 결혼
--용서
--가장 큰 죄
--사랑
--소망
--믿음

4.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만드는 것과 낳는 것
--삼위이신 하나님
--시간과 시간 너머
--좋은 전염
--고집센 장난감 병정들
--몇 가지 부연 설명
--가장합시다
--기독교는 쉬울까, 어려울까?
--대가를 계산하기
--호감 주는 사람이냐, 새 사람이냐
--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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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13, 2008

St. Symeon the New Theologian: The Three Methods of Prayer



세 가지 기도 방법

St. Symeon the New Theologian

엄성옥, 필로칼리아 4 (서울: 은성, 2008), pp. 88-102.


그리스 교부들 중에서 신 신학자 시메온(949-1022)만큼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의 제자인 니키타스 스티타토스(Nikitas Stithatos)가 저술한 전기가 있을 뿐 아니라, 시메온 자신의 저술에서 생생한 개인적인 언급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정교회의 신비적 전통에서의 영적 아버지 제도의 중요성을 예증해준다. 시메온은 소아시아의 지방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11살 때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삼촌에게로 보내졌다. 부모들은 그가 장래에 황실에서 근무하기를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14세 때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스튜디오스 수도원 소속의 "경건한 시메온"이라는 수도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일은 그의 미래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젊은 시메온의 영적스승이 된 경건한 시메온(St. Symeon the Studite, c.917-986/7)은 사제로 서임되지 않은 평신도 수도사였다. 동방 기독교에서는 종종 수도회에 속하지 않은 수도사들이 영적 지도 사역을 행했으며, 때로는 수녀들이나 수도사가 아닌 사람들도 영적 지도를 행했다. 신 신학자 시메온은 특히 사제가 아닌 수도사들이 고해성사를 받고 사죄를 행하는 것을 옹호하는 논문을 저술했다.

경건한 시메온의 지도를 받으면서 젊은 시메온의 기도 생활은 급속하게 발달했다. 그는 아직 세속생활을 하고 있던 20살쯤 때에 처음으로 피조된 것이 아닌 거룩한 빛의 환상을 받았고, 그 후 일련의 그러한 환상들을 받았다. 그는 다시 세속적인 생활을 하다가 977년에 스튜디오스 수도원에 수련수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경건한 시메온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 데 분개한 그 공동체의 수도사들 때문에 그는 일 년이 못되어 그곳을 떠나야 했다. 영적 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은 그를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성 마마스(St. Mamas)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수도사가 되었고, 980년경에 사제직에 서임되고 25년 동안 수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 수도원은 쇠퇴하고 있었지만, 그의 지도하에 크게 부흥했다 성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영적 스승으로 유명해졌고, 많은 유명한 평신도들이 그를 찾아와서 죄를 고백하고 조언을 구했다. 성 시메온은 자기의 지도를 받는 수도사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목자였다. 동시에 그는 표준을 높이 두고 따르는 "열성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수도사들이 자주 성찬을 받기를 기대했고. 경건한 시메온의 가르침을 좇아 성찬을 받을 때에는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지나친 기대 때문에 996-8년에 수도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시메온은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화해하는 데 성공했다. 몇 년 후 그의 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이 사망했을 때 시메온은 공개적으로 그를 성인으로 기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수도원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교회 당국자들에게 고발했다. 시메온은 평신도 고해 성사에 관한 가르침 때문에 의심을 받았다. 이처럼 계속되는 공격 때문에 시메온은 1005년에 대수도원장 직을 사임했다. 그는 4년 후인 1009년에 총대주교와 성의회(Holy Synod) 앞에서 재판을 받고, 보스포로스 해안에 있는 팔로우키톤으로 유배되었다. 이 판결은 곧 취소되었고 그는 다시 주교직에 복귀되었지만, 그는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유배지에서 살다가 1022년 3월에 사망했다.

추종자들이 그에게 "신 신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한 것을 볼 때, 그는 매우 존경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신학자"라는 용어는 오늘날과 같은 학문적인 의미가 아니라 기도의 사람(a person of prayer), 직접적인 경험에 기초를 두고서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정교회에서 시메온의 시대 이전에 "신학자"라는 호칭은 주로 복음서 기자 요한, 그리고 동방교회에서 세 명의 위대한 고위 성직자들 중하나로 존경받는 인물로서 관상적인 시들을 저술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에게만 사용되었다. 시메온이 "신 신학자"라고 불린다는 것은 그가 이 두 사람들과 함께 내적 기도의 전승에 대한 신실한 증인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메온은 이러한 경험적인 의미에서 "신학자"일 뿐 아니라 신비생활의 "선교사"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상적인 연합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또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들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환상들에 대해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같은 죄인을 이처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위해서는 더 큰 긍휼을 행하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가장 좋은 것이 여러분모두의 것이 될 것입니다."

성 마카리우스와 성 니코데무스는 성 시메온의 저술들 중에서 두 편을 이 책에 수록했다. 첫 번째 저술인 『사랑에 관하여』(On Love)는 시메온이 성 마마스의 대수도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도사들에게 행한 설교들이나 교리문답 중 하나이다. 그는 여기에서 조지(George)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의 내면생활에 대해서 삼인칭으로 이야기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청년은 시메온 자신이라고 여겨진다. 조지라는 이름은 그가 수도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사용했던 세례명이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거룩한 수도사"라고 지칭한 그의 영적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드러내준다. 젊은 시메온은 고행자 마가(Mark the Ascetic)의 글을 읽으면서 특히 "너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라"는 명령, 그리고 "성령의 능력들"에 대한 언급에 감명을 받았다.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신 신학자의 가르침의 중심사상들 중 하나이다. 그는 최초로 하나님의 빛을 보면서 기쁨을 눈물을 흘린 것에 대해 묘사하면서, 그 일이 자신이 세상적인 분심거리들로 인해 번잡한 평신도 시절에 발생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외적인 상황과는 상관없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관상의 고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 작품인 『153편의 실질적이고 신학적인 본문들』(One Hundred and Fifty-Three Practical and Theological Texts)은 여러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복합적인 글이다. §§1-118은 신 신학자의 226편의 본문들 중에서 취한 것이고, §§119-52는 신 신학자의 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의 글이다. §153의 첫 부분은 니키타스 스티타토스가 저술한 신 신학자의 전기 §31에서 취한 것이다.

신 신학자의 저술들 중에서 취한 부분에서는 그가 즐겨 사용한 여러 가지 주제들이 언급된다: 거룩한 빛(§§68, 105-6), 눈물의 은사(§§67,69), 성령을 의식적으로 경험해야 할 필요성 (§85), 영적 스승의 사역(§§6-19, 38-9, 41). 수도사들에게 과거의 모든 연결고리들, 특히 가족들과 완전히 결별할 것을 요구한 데서 시메온의 엄격함이 분명히 나타난다(§§3-8). 한편 그는 개인의 소명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추상적으로 어떤 형태의 삶이 다른 형태의 삶보다 더 고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들면, 은둔 생활이 공주(公住) 생활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각 사람에게는 각기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은 특별한 길이 가장 선하고 고귀한 삶의 형태이다(§§88-92). 사막에 거주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결혼하여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관상의 고지에 다가갈 수 있다.

경건한 시메온의 저술인 그 뒤의 본문에서는 스튜디오스 수도원만큼 조직적인 큰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저자는 엄격한 가난, 자기 의지의 근절,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단순성, 불필요한 분규에 얽히는 일을 피할 것 등을 강조한다. 그는 양심의 가책은 속죄의 고행이 아니라 즐거운 경험이 되어야 한다는 것(§140), 하나님의 빛을 보는 것(§150), 영적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 (§§129, 141) 등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것들은 후일 그의 제자인 신 신학자 시메온이 발달시킨 주제들이다. 경건한 시메온은 사랑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사랑이 기도보다 더 위대하다"(§143)라고 표현한다. 신 신학자 시메온도 이 말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6l).



신 신학자 시메온의 것으로 간주되는 글:

"세 가지 기도 방법"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cf Corinth,

The Philokalia.




개 론


『거룩한 기도와 경청의 방법』(Method of Sacred Prayer and Attentiveness)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짧은 글에서는 예수기도와 결합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정신 신체적 기법을 권한다. 이 글은 적어도 14세기부터 신 신학자 시메온의 저술로 간주되어 왔지만, 1927년 이후로 저자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하우세르(Irénée Hausherr)는 이 글과 니키포로스(Nikiphoros)라는 수도사의 논문 정신 신체적 기법을 어느 정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깨어 있음과 마음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On Watchfulness and the Guaring cf the Heart) 사이에 비슷한 구절들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니키포로스가 이 두 글의 저자라고 결론짓는다. 실제로 니키포로스가 『세 가지 기도 방법』의 저자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전통적으로 신 신학자 시메온을 저자로 여기는 데에는 적어도 한 가지 참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만일 이 글이 시메온의 것이 아니라면, 그의 제자들의 것일 것이다. 당분간 이 글의 정확한 저술 연대와 출처는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다. 성 마카리우스와 니코데무스가 이 저서를 현대 그리스어로 의역했으며, 현재 우리의 번역본은 하우세르의 원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세 가지 기도 방법』의 중심 주제는 마음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다. 저자는 자신이 묘사하는 처음 두 가지 기도 방법은 불완전하며, 마음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위험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다. 이 글을 비롯하여 다른 글에서 사용되는 "마음"(heart)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감정과 성정(性情)뿐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완전체로 간주된 인간의 영적 중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글에서 저자가 말하는 마음이란 "영혼의 모든 능력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세 가지 기도방법』의 저자는 마음을 지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특징을 포함하는 정신 신체적 기법을 제안한다: 첫째는 턱을 가슴에 대고 배꼽을 응시하는 자세 , 둘째는 호흡을 제어하여 서서히 속도를 늦추는 것 ; 셋째는 지성이 내면을 탐색하면서 마음의 장소를 찾는 것. 이것은 예수기도와 병행하기 보다는 예수기도에 선행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예수기도를 행하기에 앞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돕기 위한 선행 활동이 되어야 한다.

현대 서방의 저자들은 이 정신 신체적 기법을 요가나 수피즘에서 사용되는 방법들과 비교해왔지만, 그것들 사이의 유사한 점들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기도 방법』의 저자는 이 기법을 특별히 기독론적인 배경 안에 둔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기도를 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데 있다. 그러한 기법을 잘못 사용할 때에는 육체적인 건강과 영적인 건강에 심각한 해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채택되어야 한다. 『세 가지 기도 방법』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잘못이 없는 확실한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적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정교회 내의 거의 모든 교사들은 정신 신체적기법은 노련한 교사의 개인적인 지도하에서만 실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육체적인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도 예수기도를 완전히 실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간단히 설명된 기법은 인간에 대한 건전한 교리에 의존하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옹호될 수 있다. 그레고리 팔라마스(St. Gregory Palamas)는 인간은 몸과 영혼의 통일체라고 지적하는데, 그것은『세 가지 기도 방법』의 서두에서도 분명히 진술된다. 몸은 우리의 완전한 개성의 본질적인 측면이므로 기도할 때에 등한시 되거나 무시하지 말고 역동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세 가지 기도방법

서문

There are three methods of prayer and attentiveness, by means of which the soul is either uplifted or cast down. Whoever employs these methods at the right time is uplifted, but whoever employs them foolishly and at the wrong time is cast down. Vigilance and prayer should be as closely linked together as the body to the soul, for the one cannot stand without the other. Vigilance first goes on ahead like a scout and engages sin in combat. Prayer then follows afterwards, and instantly destroys and exterminates all the evil thoughts with which vigilance has already been battling, for attentiveness alone cannot exterminate them. This, then, is the gate of life and death. If by means of vigilance we keep prayer pure, we make progress; but if we leave prayer unguarded and permit it to be defiled, our efforts are null and void.

기도와 경성警省(醒)과 관련된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영혼은 이것들에 의해서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 방법들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지만, 부적절하고 어리석게 사용하는 사람은 아래로 떨어집니다. 깨어 경계하는 것과 기도는 몸과 영혼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경계함은 죄와의 전쟁에서 정찰병처럼 선두에 섭니다. 그 뒤에 기도가 따르면서 깨어 경계함과 이미 교전하고 있는 모든 악한 생각들을 즉시 파하고 근절합니다. 주의를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악한 생각들을 근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사의 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경계함으로써 기도를 순수하게 보존한다면 진보하지만, 기도를 지키지 않고 버려두어 더럽혀지는 것을 허용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헛되고 무익하게 될 것입니다.

Since, then, as we said, there are three methods of attentiveness and prayer, we should explain the distinctive features of each, so that he who aspires to attain life and wishes to set to work may with firm assurance select what suits him best; otherwise through ignorance he may choose what is worse and forfeit what is better.

경성과 기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으므로, 생명을 얻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알맞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각각의 방법의 특징을 설명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무지로 말미암아 좋은 것을 박탈당하고 좋지 못한 것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기도 방법

The distinctive features of the first method of prayer are these. When a person stands at prayer, he raises hands, eyes and intellect heavenwards, and fills his intellect with divine thoughts, with images of celestial beauty, of the angelic hosts, of the abodes of the righteous. In brief, at the time of prayer he assembles in his intellect all that he has heard from Holy Scripture and so rouses his soul to divine longing as he gazes towards heaven, and sometimes he sheds tears. But when someone prays in this way, without him realizing it his heart grows proud and exalted, and he regards what is happening to him as the effect of divine grace and entreats God to allow him always to be engaged in this activity. Such assumptions, however, are signs of delusion, because the good is not good when it is not done in the right way.

첫 번째 기도방법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서서 두 손과 두 눈과 지성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리며, 자신의 지성에 거룩한 생각들, 천상의 아름다움과 천군들과 의인들의 거처에 관한 심상들로 채웁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기도할 때에 거룩한 성경에서 들은 모든 것을 지성 안에 모아 정리하며, 하늘을 응시하면서 영혼을 고양시켜 거룩한 것을 갈망하게 하며, 때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서 자기의 마음이 우쭐대고 교만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에게 발생하는 것을 거룩한 은혜의 결과라고 여기며, 항상 이러한 활동에 자신이 개입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식으로 행해지지 않는 선은 선이 아니므로 그러한 태도는 망상의 표식입니다.

If, then, such a person is pursuing a life of stillness and seclusion, he will almost inevitably become deranged. And even if this does not happen to him, it will be impossible for him to attain a state of holiness or dispassion. Those who adopt this method of prayer have also been deluded into thinking that they see lights with their bodily eyes, smell sweet scents, hear voices, and so on. Some have become completely possessed by demons and wander from place to place in their madness. Others fail to recognize the devil when he transforms himself into an angel of light (II Corinthians 2:14); and, putting their trust in him, they continue in an incorrigible state of delusion until their death, refusing to accept the counsel of anyone else. Still others, incited by the devil, have committed suicide, throwing themselves over a precipice or hanging themselves. Indeed, who can describe all the various forms of deception employed by the devil? Yet from what we have said any sane person can understand the kind of harm that may result from this method of attentiveness. Even if someone who has adopted this method may perhaps avoid the evils we have mentioned because he lives in a community -- for it is solitaries who are especially subject to them -- none the less he will pass his entire life without making any progress.

그러한 사람이 침묵의 은둔생활을 추구한다면, 필연적으로 정신착란될 것이며,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해도 거룩함이나 무정념의 상태에 도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방식을 채택하는 사람들은 미혹되어 자신이 육체적으로 빛을 보고 향기를 맡고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완전히 귀신에게 사로잡혀 미쳐서 사방으로 배회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를 알아보지 못하고(고후 11:14) 그를 신뢰하여 죽을 때까지 미혹되어 구제불능의 상태에 머물면서 어떤 사람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한, 마귀의 선동을 받은 사람들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목을 매어 자살하기도 합니다. 마귀가 사용하는 다양한 형태의 속임수를 어떻게 모두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첫 번째 집중의 방법이 초래하는 해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방법을 채택한 사람이 한 공동체 내에서 살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해악들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 은둔자가 이러한 해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 그의 평생은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독거자들은 특히 그러한 해를 입기 쉽습니다).

두 번째 기도 방법

The second form of prayer is this. A person withdraws his intellect from sensory things and concentrates it in himself, guards his senses, and collects all his thoughts; and he advances oblivious of the vanities of this world. Sometimes he examines his thoughts, sometimes pays attention to the words of the prayer he is addressing to God, and sometimes drags back his thoughts when they have been taken captive; and when he is overcome by passion he forcefully strives to recover himself.

두 번째 기도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기도자는 지성을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거두어들이고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하여, 자신의 감각들을 지키고, 모든 상념을 한곳에 모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의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때로는 자기의 생각들을 성찰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자신의 기도말에 귀 기울이며, 때로 상념들에게 사로잡힌 생각들을 되찾아오며, 또 자신이 상념에게 압도당할 때에는 회복하기 위해 힘껏 노력합니다.

One who struggles in this way, however, can never be at peace or win the crown of victory. He is like a person fighting at night: he hears the voices of his enemies and is wounded by them, but he cannot see clearly who they are, where they come from, and how and for what purpose they assail him. Such is the damage done to him because of the darkness in his intellect. Fighting in this manner, he cannot ever escape his noetic enemies, but is worn out by them. For all his efforts he gains nothing. Falsely imagining that he is concentrated and attentive, he falls victim unawares to self-esteem. Dominated and mocked by it, he despises and criticizes others for their lack of attentiveness. Imagining that he is capable of becoming the shepherd of sheep, he is like the blind man who undertakes to lead the blind (Matthew 15:14).

그러나 이런 식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결코 평화나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치 컴컴한 밤에 싸우는 사람과 같아서, 원수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지만,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오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공격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는 지성 안의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피해를 입습니다. 이런 식으로 싸우기 때문에 그는 정신(理性으로 이해되는)적인 원수들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며, 그들에 의해 기력을 소모합니다. 그는 노력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집중하고 경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지중에 자만에 빠집니다. 그는 자부심의 지배와 농락을 당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이 부족한 것을 멸시하고 비판합니다. 그는 자신이 양들의 목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마치 소경을 인도하는소경처럼 됩니다(마15:14).

Such 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second method of prayer, and everyone one striving after salvation can see what harm it does. Yet this second method is better than the first, just as a moonlit night is better than a night that is pitch-dark and starless.

이것이 두 번째 기도 방법의 특징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노력하는 사람은 이 방법이 끼치는 해로움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별도 없는 어두움보다는 달빛이 낫듯이, 이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 방법보다 낫습니다.

세 번째 기도방법

Let us now begin to speak about the third method of prayer, which is truly astonishing and hard to explain. For those ignorant of it, it is not only difficult to understand but virtually incredible, and there are very few to be found who practice it. It seems to me that it has deserted us along with the virtue of obedience. For it is the love of obedience that delivers us from entanglement with this evil world, rendering us free from anxiety and impassioned craving. It makes us wholehearted and unflagging in pursuit of our aim -- provided, of course, that we find an unerring guide. For if through obedience you make yourself dead to every worldly and bodily attachment, how can anything transient enslave your intellect? If you entrust all the care of your soul and body to God and to your spiritual father, no longer living for yourself or desiring the good opinion of others, what anxiety can distract you?

이제 세 번째 기도 방법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랍고 설명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믿을 수도 없으며, 그것을 연습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우리는 복종의 덕과 함께 이 기도 방법을 상실한 듯합니다. 복종에 대한 사랑은 악한 세상과 뒤얽혀 있는 우리를 구해주고 걱정과 상념에 물든 갈망으로부터 자유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우를 범치 않는 안내자를 발견하기만 한다면야, 우리로 하여금 지칠 줄 모르고 전심전력을 다해 목표를 추구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복종을 통해서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애착에 대해 자신을 죽인다면, 어찌 무상한 것들이 당신의 지성을 사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거나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끄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몸과 영혼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과 영적 아버지께 전적으로 맡긴 사람이 어찌 근심에 시달릴 수 있겠습니까?

This third method, then, destroys the invisible wiles of the demons, with which as with ropes they seek to drag down the intellect into all manner of devious thoughts. Set at liberty, the intellect wages war with its full strength, scrutinizing the thoughts insinuated by the enemy and with masterful dexterity expelling them, while the heart in its purity offers prayers to God. This is the beginning of a life of true seclusion, and those who fail to make such a beginning exhaust themselves in vain.

이 세 번째 방법은, 마귀들이 지성을 온갖 교활한 생각들로 끌어들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궤계들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순결한 마음(심장)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안, 자유하게된 지성은 전력을 발휘해 싸우면서, 원수가 은근히 심어준 생각들을 면밀히 검사하여 완벽한 솜씨로 그것들을 몰아냅니다. 이것이 참된 은둔생활의 출발점이며, 이런 식으로 출발하지 못하는 사람은 헛되이 노력을 소진합니다.

The starting point of this third method of prayer is not to gaze upwards, to raise one's hands aloft, to concentrate one's thoughts and to call down help from heaven. These, as we said, are the marks of the first form of delusion. Nor does it begin, as the second method does, by keeping guard over the senses with the intellect, while failing to observe the enemies who attack from within. In such a case, a person is struck by the demons instead of striking them; when wounded he is unaware of it; taken captive, he cannot retaliate against his captors. His enemies constantly attack him, and from behind and even face to face, and fill him with self-esteem and arrogance.

이 세 번째 기도 방법의 출발점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생각을 집중하며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첫 번째 형태의 허상의 표식들입니다. 또 그것은 두 번째 방법처럼 내면에서 공격하는 원수들을 관찰하지 못한 채 지성을 사용하여 감각을 지킴으로써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행하는 사람은 마귀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귀들에게 공격 당하게 되며, 상처를 입어도 의식하지 못하며, 잡혀도 자기를 사로잡아오는 자에게 반격하지 못합니다. 원수들은 끊임없이 배후에서, 심지어 직접 대면하여 공격하면서 그에게 자부심과 오만을 채워줍니다.

If you desire to embark on this light-giving and joyful task, begin as follows. You must first practice exact obedience, as described above, and so act always with a pure conscience; for without obedience it is impossible for your conscience to be pure. And you must keep your conscience pure in three respects: first, with respect to God, you must keep your conscience pure by refraining from doing anything that conflicts with the worship due to Him. With respect to your spiritual father do everything he tells you to do, neither more nor less, and be guided by his purpose and will. With respect to other people, you must keep your conscience pure by not doing to them anything that you hate (Tobit 4:15) and that you do not want them to do to you. With respect to material things, you must take care not to misuse them, whether food, drink, or clothing. In brief, do everything as if you were in the presence of God, so that your conscience does not rebuke you in any way.

만일 이 빛을 주는 기쁨에 찬 임무에 착수하기를 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시작하십시오. 우선 위에서 묘사된 것처럼 항상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엄격한 복종을 실천하십시오. 복종 없이는 양심이 깨끗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양심을 깨끗이 보존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상충되는 어떠한 일이라도 행함이 없도록 깨끗한 양심을 보존해야 합니다. 둘째는 영적 아버지에 대하여는, 그분이 명하는 것을 더하거나 감하지 말고 그대로 행하며 그분의 목적과 뜻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셋째는 사람들과 물건들에 대해 양심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당신이 싫어하는 일 및 당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그들에게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토빗 4:15). 물건들과 관련해서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나 의복을 남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하여 양심이 당신을 책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영문번역 없음>>

집중의 참된 특성 및 그 근거를 설명했으므로, 이제는 그것의 특징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바르고 참된 집중과 기도란 마음이 기도하는 동안 지성이 마음을 지켜 돌보는 것입니다. 지성은 항상 마음 안에서 순찰해야 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관대하시다는 것을 마음 안에서 맛본(cf. 시 34:8) 지성은 마음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며, 베드로처럼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성은 항상 마음 안에 깨어 있으면서 원수가 심어주는 생각들을 거절하고 몰아낼 것입니다. 이 수행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모질고 어려운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입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경험은 있지만 아직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숨막히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맛본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고 외칩니다.

교부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 15:19-2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또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뿐 아니라 안도 깨끗이 하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마 23:26). 그들은 마음을 지킴으로써 다른 모든 덕을 소유할 수 있지만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덕도 굳게 세워질 수 없다고 확신하고서, 모든 형태의 영적 수고를 포기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이 임무에만 전념했습니다. 어떤 교부들은 이 수행을 마음의 정적이라고 표현했고, 어떤 사람들은 경청이라고 표현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은 깨어 경계하여 물리침 이라고 표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생각들을 조사하고 지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어쨌든 그들 모두 자신의 마음 밭을 경작했고, 거룩한 만나를 먹었습니다(cf. 출 16:15).

전도서에서는 이것을 언급하여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며"(전 11:9), 마음에서 노염을 물아내고"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전 10:4)고 말합니다. 주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며"(마 15:19); "근심하지도 말라" (눅 12:29)고 말씀하셨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 (마 7:14)라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5:3), 다시 말해서, 세상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말했고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엡 6:12)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행자 마크, 요한 클리마쿠스, 헤시키우스, 시내 산의 필로테우스, 은둔자 이사야, 바르사누피우스, 그리고 『교부들의 낙원』(The Paradise of the Fathers)이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거룩한 교부들도 마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In short, if you do not guard your intellect you cannot attain purity of heart, so as to be counted worthy to see God (Matthew 5:18). Without such watchfulness you cannot become poor in spirit, or grieve, or 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 or be truly merciful, or pure in heart, or a peacemaker, or be persecuted for the sake of justice (Matthew 5:3-10). To speak generally, it is impossible to acquire all the other virtues except through watchfulness. For this reason you must pursue it more diligently than anything else, so as to learn from experience these things, unknown to others, that I am speaking to you about. Now if you would like to learn also about the method of prayer, with God's help I will tell you about this too, in so far as I can.

간단히 말해서, 지성을 지키지 않으면 깨끗한 마음을 획득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cf. 마5:18). 깨어 경계하지 않으면 심령이 가난해지거나 애통하거나 의를 갈망하거나 온유하거나 마음이 깨끗해지거나 화평케 하는 자가 되거나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수 없습니다(cf. 마 5:3-10). 일반적으로 말해서, 깨어 경계하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덕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배우려면 무엇보다 깨어 경계함을 더욱 부지런히 추구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도 배우기를 원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아는한 힘껏 그것에 대해서 말해주겠습니다.

Above all else you should strive to acquire three things, and so begin to attain what you seek. The first is freedom from anxiety with respect to everything, whether reasonable or senseless -- in other words, you should be dead to everything. Secondly, you should strive to preserve a pure conscience, so that it has nothing to reproach you with. Thirdly, you should be completely detached, so that your thoughts incline towards nothing worldly, not even your own body.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획득함으로써 당신이 구하는 것을 달성하기를 시작하십시오.
첫째는 이성적인 것이든지 감각없는 것이든지 모든 사물과 관련하여 근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둘째, 깨끗한 양심을 보존하여 스스로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합니다. 셋째, 완전히 초연함으로써 당신의 생각들이 세상에 속한 것, 심지어 자신의 육신조차 지향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Then sit down in a quiet cell, in a corner by yourself, and do what I tell you. Close the door, and withdraw your intellect from everything worthless and transient. Rest your head on your chest, and focus your physical gaze, together with the whole of your intellect, upon the center of your belly or your navel. Restrain the drawing-in of breath through your nostrils, so as not to breathe easily, and search inside yourself with your intellect so as to find the place of the heart, where all the powers of the soul reside. To start with you will find there darkness and an impenetrable density. Later, when you persist and practice this task day and night, you will find, as though miraculously, an unceasing joy. For as soon as the intellect attains the place of the heart, at once it sees things of which it previously knew nothing. It sees the open space within the heart and it beholds itself entirely luminous and full of discrimination. From then on, from whatever side a distractive thought may appear, before it has come to completion and assumed a form, the intellect immediately drives it away and destroys it with the invocation of Jesus Christ. From this point onwards the intellect begins to be full of rancor against the demons and, rousing its natural anger against its noetic enemies, it pursues them and strikes them down. The rest you will learn for yourself, with God's help, by keeping guard over your intellect and by retaining Jesus in your heart. As the saying does, "Sit in your cell and it will teach you everything."

그 다음에는 조용한 골방에 홀로 앉아서 다음과 같이 행하십시오. 문을 닫고, 무가치하고 덧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성을 거두어들이십시오. 그 다음에는 고개를 숙여 턱을 가슴에 닿게 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시선을 배꼽에 두십시오. 코를 통해 들이쉬는 호흡을 억제하면서 지성으로 하여금 내면에서 영혼의 모든 능력들이 거주하는 장소인 마음(심장)을 찾아보게 하십시오. 우선 그곳에서 어둠과 꽤뚫을 수 없는 물질(impenetrable density)을 발견할 것입니다. 밤낮으로 이것을 꾸준히 실천하면, 신기하고도 끊이지 않는 기쁨을 발견할 것입니다. 지성은 마음(심장)의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전에 알았던 것들이 무(無)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성은 마음 안에서 광활한 공간을 보며, 자신이 전적으로 명석하고 온전히 분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부터는 어느 쪽에서 산만한 생각이 나타나든지 그것이 완성되어 형태를 취하기 전에, 지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것을 몰아내고 소멸시킵니다. 이때부터 지성은 마귀들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기 시작하며, 이성적으로 분별 가능한 원수들에 대해 본성적인 분노를 일으키면서 그것들을 추적하여 쓰러뜨립니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당신이 계속 지성을 지키고 경계하고 마음(심장)속에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스스로 배울 것입니다. "골방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골방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Q&A:

질문 : 왜 수도사는 첫째 형태와 둘째 형태의 경계에 의해서 온전함을 회득할 수 없습니까?

대답 : 왜냐하면 적절한 순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 클리마주스는 이 방법들을 사다리로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정념들을 죽이고, 어떤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편찬송을 실천하면서 보내고, 어떤 사람은 기도에 헌신하며, 또 어떤 사람은 깊은 관상에 집중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살펴볼 때에는 사다리를 사용하여 유추해봅시다.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은 꼭대기에서 시작해서 내려오지 않고 바닥에서 출발하여 위로 올라갑니다. 그는 첫째 계단을 오른 후에 둘째 계단을 오르고 차례로 계속 올라갑니다. 우리도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성장하는 어린이들처럼 우리 앞에 놓인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여 한 단계씩 전진하다보면 마침내 장성한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될 것입니다.

수도 상태의 첫 단계는 정념을 억제하는 것이며, 이는 초심자들의 단계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여 사춘기에서 청년기로 진보하는 두 번째 단계는 부지런히 시편 영창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념들이 억제되고 매장되었을 때에 실천하는 시편 영창은 혀에 즐거움이 되고 하나님이 영접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방 땅에서. 즉 정념이 물든 마음은 여호와께 찬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cf. 시 137:4). 이것이 진보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표식입니다.

영적으로 청년기에서 성인 단계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특징인 세 번째 단계는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충분히 진보한 사람들의 단계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사춘기 소년이나 청년들과 다르듯이, 기도와 시편영창은 다릅니다.

영성생활에는 네 번째 단계. 즉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노년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관상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하며, 온전한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사다리의 꼭대기에 도착하여 여정이 끝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정하시고 배열하신 상태이므로, 어린아이는 사다리의 첫째 계단에 올라가고 계속하여 네 계단을 올라 온전함에 이르지 않고서는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거듭남을 원하는 사람이 빛을 향해 오르는 첫 단계는 정념들을 죽이는 것, 다시 말해서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지키지 않고서는 정념들을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단계는 시편 영창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정념들에게 저항함으로써 그것들을 죽여 매장한 후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향한 열망이 지성을 불태우기 때문입니다. 이 열망으로 인해 힘을 얻은 지성은 마음을 둘러싸서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 산만한 생각들을 집중과 경청으로 물리칩니다. 이처럼 지성은 둘째 단계, 즉 경청과 기도의 단계에 전념합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을 자극하며, 정념의 바람은 마음 깊은 곳을 거세게 휘젓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원함으로써 악한 영들이 완전히 정복되며, 소동은 마치 밀랍이 불에 녹듯이 사라집니다. 마귀들은 마음 밖으로 쫓겨났지만 감각을 통해서 외적으로 지성을 어지럽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피상적으로만 지성을 괴롭히기 때문에, 지성은 곧 평온함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지성은 결코 마귀들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자유는 완전히 장성한 사람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초연하며 쉬지 않고 마음에 집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중과 경청을 획득한 사람들은 그 후에 조금씩 노년기의 지혜, 즉 관상의 단계로 상승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사람들의 단계입니다.

이 모든 단계를 적절한 시기에 순서대로 실천하여 완성한다면, 먼저 당신의 마음에서 정념이 제거될 것이며, 그 후에 완전히 시편 영창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감각들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지성의 표면을 어지럽게 하는 악한 생각들을 대적할 수 있으며 영적인 눈과 육신의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면서 순수하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들이 공중에 매복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가끔씩만 위를 응시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깨어 경성함을 통해서 정화되는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와 열매도 거룩할 것입니다(cf. 롬 11:16). 그러나 만일 앞에서 말한 순서를 따르지 않은 채 영적인 것을 보려고 두 눈과 지성으로 하늘을 바라본다면, 진리가 아니라 환상을 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직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청의 첫 번째 방법과 두 번째 방법은 우리를 진보하게 하지 못합니다. 집을 지을 때에 기초를 세우기 전에 지붕을 얹지 못합니다. 먼저 기초를 놓은 후에 벽을 쌓고 마지막에 지붕을 얹습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집의 영적 기초를 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지키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념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영적인 집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외적인 감각에 의해서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영들의 소동을 둘째 형태의 경청을 통해서 물리쳐야 하며, 되도록 신속하게 그것들의 공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 후에 지붕을 얹어야 합니다. 즉,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적 인 집이 완성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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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November 10, 2008

The Philokalia - 예수기도의 삼단계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the sinner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다음은 한국러시아정교회 싸이트에서 퍼온 글: 예수의 기도; 필로칼리아


예수기도의 성서적 근원


  • 기도의 간단 명료함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마6:7 표준새번역)

  • 예수기도는 주님의 이름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은 그의 이름에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열성적으로 부르며 호소하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쓰여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다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지막 이름입니다. 예수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라고 쓰여 있습니다.(빌2:9-10)

    이 이름으로 마귀는 쫓겨나가고 (눅10:17), 기도가 응답 받고(요14:13-14),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습니다(행전3:6-7). 예수님의 이름은 그치지 않는 영적인 힘입니다.

  • 예수기도의 말들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여리고 근처 길가에 앉아있던 소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눅18:38), 나병환자 열 사람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였다.(눅17:13)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눅18:13).

  • 예수기도는 우리들의 죄를 인식하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방황하는 것을 알게하는 영적인 여행을 떠나게 합니다. 예수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이 절대로 필요함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요일1:8).


예수기도의 삼단계

기도는 살아있는 현실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므로 어떠한 분석이나 분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기도를 통하여 영적 생활을 성숙시키고자하는 이들에게 넓고 일반적인 안내를 위해서 19세기 러시아의 수도자 은둔자 훼오판은 기도를 수행하는 단계를 셋으로 구분을 지었습니다.


1. 말로하는 기도 또는 입술의 기도. 간단한 암송의 단계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러한 기도의 단계는 우리에게 있어서 외적이고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영혼은 인간의 마음과 심장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2. 마음의 혼란 없이 기도하는 단계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음의 혼란없이 기도하게 되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훼오판은 "마음이 말에 집중되어 있는" 기도라고 말하였습니다.

3. 심장의 기도가 되는 단계
이 상태에서는 기도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 됩니다. 그러한 기도는 성령의 선물이고 탕아처럼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눅15:11-32). "그리고 또 여러분은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갈4:6) 심장의 기도인 예수기도는 위의 성경말씀처럼 성령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기도의 열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우리 한 가운데 있는 왕국의 현존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무명 러시아 작가의 <순례자의 길 The Way of a Pilgrim>에는 예수기도가 두가지 구체적인 효과를 나타냄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내가 마음속 깊이 기도할 때 내 주의의 모든 것이 기쁘고 경이롭게 보였다. 나무들, 풀들, 새들, 공기, 햇빛은 그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을 올리고 있는 듯 했다."라고 합니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와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시 나는 내 방랑길을 출발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전처럼 걱정에 가득 차서 걷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나를 기쁘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해를 끼치면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얼마나 달콤한가'라고 생각하면 모욕과 분노는 모두 사라지고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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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November 5, 2008

The Way of a Pilgrim


니이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의 말미에 말하기를;

역사란 하나님의 능력있는 행위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기술한 이야기이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 이전의 하나님의 행동이나 시간 이후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보다도, 시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영생이란 지금, 여기 있는 실존의 특질quality 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생활이 창조에서 주어진 것을 보존한다거나 최후의 속량에서 주어질 것을 위한 준비라기보다도, 현재의 갱신에 대한 하나님의 가능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인간의 응답'을 구체화한 행위를 '기도'라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여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영생의 삶을 누리며, 현재의 갱신에 대한 하나님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은혜의 통로가 또한 기도입니다.

니이버는 계속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현재가 곧 역사라는 견해를 가지고, 창조와 문화의 세계가 최후로 종말을 고한다는 데 대한 기대보다도, 만물을 끌어올려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더욱 민감하다. 그들(개변주의자들)의 표현방식은 시간적이 아니라 공간적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운동은 상향적인 운동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과 흠모의 힘찬 파도에 의하여 높이 올려진 인간의 영혼과 행위와 사상의 상승rising 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있는 변화된 인간의 삶이다. 인간으로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자신을 위하여 몸과 영혼을 가진 인간을 만드시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으로 하여금 그를 통하여 구원받게하신 하나님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잠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웃을 발견하고 세상을 밝히는 빛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만물을 끌어올려서 변화시키는 logos의 우리가운데 거하심!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과 흠모의 힘찬 파도에 의하여 높이 들려진 우리 인간의 영혼 행위 사유의 상승!! 이를 교통케 하시는 성령님의 권능과 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11월 독서회의 책은: 기도:영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수의 기도 - 오강남 번역 입니다. 소개는 링크에서 보시고, 이와 같은 책 The Way of a Pilgrim 을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의 원전은
The Philokalia 라고 하는 동방정교회 교부(수도사)들의 기도에 대한 묵상을 모아놓은 책으로서 기도와 영성에 대한 오리지날 저작 중의 하나입니다.


다음은 동방정교회의 chant입니다.

Russian Orthodox chant 순례자를 발견하셔요~
Russian Orthodox Chant in Lent (부활절 전 40일 동안의 금식기도 기간 동안)
Orthodox chant 14 Divna 뭐라카는지 몰라서 기도에 방해도 안되고^^ 매력적인 천사의 목소리!
Orthodox chant 시편 1편 Blessed is the Man 정교회에서 듣는 컬컬한 (진품)목소리, 위의 목소리는 un오쏘독씨!!

중세유럽의 순례자들의 노래 모음: The Way of the Pilgrim: Medieval Songs of Travel

Como Poden Per Sas Culpas
Seigneur, sachiez qui ore ne s'en ira
Cantiga de Santa María 189, Ben pode Santa María guarir de toda poçon
Clauso chronos
Bonum est confidere

Bache Bene Venies
Los Set gotxs recomptarem

중세 음류시인의 시를 현대음악으로 만든 (秘敎스럽지만) 작품 중엔 단연 Carl Orff의 Carmina Burana, 그 중 유명한 것:

O Fortuna
In Trutina
Tempus Est Iocundum 이걸 중세 mandolin으로 연주하면? 춤과 함께!
Ecce Gratum
Tannz
Florest Silva
Chramer, gip die varwe mir

내용은 포도주와 여자와 사랑에 대한 것으로서, 1280년대 Benedictine monastery of Beuren에서 발견된 Latin, Old German, Old French로 쓰여진 단편 시들이랍니다. 궁금하시면 여기에 영문번역을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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