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October 16, 2008

그리스도와 문화 - 중용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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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이버는 3장 말미에 [2장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와 [3장 문화의 그리스도]에서와 같이 서로 극과 극인 듯한 무리들의 공통점을 분석하며 신학적 변론을 하는 와중에 "삼위일체"를 언급합니다.

니이버는 말하기를;
영지주의자들은 삼위보다도 더 많은 수를 요구하였고, 자유주의자들은 더 적은 수를 요구하였다. 이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 예수를 인간 안에서 일하는 내재적, 신적神的 정신(spirit)과 일치시키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내재적, 합리적, 정신적, 도덕적인 원리가 자연과 그 자연을 산출하고 지배하는 능력 등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문화적 윤리적 생활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진과 불 속에 나타난 능력과 조용히 작은 목소리로 인간의 마음속에 속삭이듯 말하는 그분 사이에는 어떤 일치점이 있는 것인가? 인간이 자연에 직면할 때 그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자는 무자비하고 맹목적인 힘인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지를 구명해야하는 문제이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전능한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문화를 보전하려는 사람들의 사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이고 아주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종말론적 비젼, 즉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무자비하고 캄캄한 멸망의 운명이 자기의 이상적 세계 위에 임박해 있음을 보았을 때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과학과 그의 건축은 자연의 주어진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경우에는 도저히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에도 일어나는 문제이다... 이 도전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3분의 1의 진리만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니이버는 4장에 들어가며 "중립적 교회 the church of the center" 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의 "신앙고백"을 "삼위일체"적으로 합니다. 그 입장을 토대로 4,5,6장을 펴나갑니다. 오늘날 프린스톤 연합교회에서 우리가 고백해야할 신앙의 공통분모를 잘 드러내지 않았는가 하여 여기에 요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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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와 세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중립적 교회는 이 조항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토론 속에 모든 문화의 근거가 되는 자연의 개념을 도입한다. 그런데 이 자연은 선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올바로 정돈하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님에게 복종하셨고 또 이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도록 연합되신 분이다.

이 신념이 지배하는 곳에는 그리스도와 세상이 단순히 서로 대립되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문화로서의 "세상"은 하나님 없는 영역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

(2) 인간은 그 본성으로 볼 때 하나님에게 복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에게서 분리된 그리스도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된 자연의 창조주도 아니다. 그들(중립적 교회)이 의미하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복종은 자연적 문화적 인간의 구체적 현실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활동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히 본능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은 필연의 세계에 살면서도 자유를 지니고 살아야하는 피조물인 때문에, 문화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하나의 요청 ein Postulat 이다. 즉, 하나님에게 복종함으로써 많은 가치를 추구하게 되어있다.

중립적 교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주요 운동의 또 하나는;
(3) 죄의 보편성과 근본성에 대한 어떤 신념의 합치이다.

2장의 문화에 대립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거룩한 공동체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3장의 문화의 기독교인들은 죄가 인간 인격의 심연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용의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서는 개인적으로 보나 공동체적으로 보나, 거룩함을 발견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4) 은혜와 율법에 대하여는;

은혜의 우위성과 복종하는 행위의 필요성에 대하여 인정할 때에, 인간의 문화적 활동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분리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은혜로써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은 은혜의 경험을 문화 활동에서 분리시키지도 못한다. 인간 사회에서 보이는 형제에게 봉사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그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런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적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통일된 한 그룹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니이버는 거기에 적어도 세가지 구분된 부류가 있다고 하며 (i) 종합론자 (ii) 이원론자 (iii) 개변주의자conversionists 로 나눕니다.

(i) 종합주의synthetic or architectonic자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둘 다 긍정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함께 주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구분선을 명백하게 보존합니다. 그리함으로써 주 예수는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어서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도 않는다는 역설적인 신념을 고백합니다. 그들은 쉽게 가치존재에 종속시키지도 않으며 가치에 존재를 종속시키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logos 이면서 동시에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와 문화를 함께 긍정할 경우에 그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그리스도는 그 성격에 있어서 안이한 화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그리합니다.

종합주의자에게 문화는 그 기원에 있어서 신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이며, 거룩하면서도 범죄적이며, 필연과 자유를 함께 가진 영역이며, 이성과 계시가 함께 적용되는 장소입니다. 종합주의자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3장 문화의 그리스도]론자와 구별되며, 동시에 문화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2장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론자들과 갈라서는 것입니다.

(ii) 한편 이원론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문화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구별하면서 동시에 그 둘을 결부시킬 정당한 이유를 추구하고 있는 점에서는 종합론자와 같습니다.

이들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선 자리,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생활의 근본 과제는 기독교 공동체와 이교적 세상 사이에 구분선을 그을 때 부딪치는 문제가 아니며, 인간이 자연과 충돌할 때 그리스도가 문화의 정신적 세력 편에 서 있는 분이라고 할 때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원론자는 충돌 가운데 살고 있으며, 한 위대한 논쟁점 앞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충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충돌입니다. 즉 문제점이 하나님의 의와 나의 의 사이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 우리의 국가와 우리의 교회, 우리의 이교적 또는 기독교적 사업, 이런 모든것들과 더불어 한편에는 우리가 서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다른 한편에 서 있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보면,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문제는 사람이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물을 질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와 이교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들의 논리적 출발점은 하나님과 인간의 전쟁에서 생긴 화해와 용서의 위대한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여기에 충돌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라는 사실이 이 출발점에서부터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은 자명한 이성의 진리로 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은혜에 대한 신앙과 그와 상관된 죄에 대한 지식은 십자가를 통해 옵니다.

하나님 자신인 진리와 선의 형상을 모독하며 파기하려고 꾀하는 인간들이 살고있는 이 무서운 세상을 진지하게 직면해 보지 못한 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신의 자비와 인간의 도덕적 과오를 안이하게 수락하는 것과는 온전히 다른 질서에서 나온 것이라 합니다.

이원론자의 출발점인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서 이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은혜와 죄에 관한 그 근본적인 상황이 변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은혜는 하나님 안에 있고 죄는 인간 안에 있습니다.하나님의 은혜는 만나와 같은 능력이 아니며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중개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행동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대결하는 역사적 완충지대를 넘어서 인간에게 도래한 화해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그 무엇이 그 은혜로운 행동에 감격한 바울이나 루터의 응답 속에 반사되더라도, 바울이나 루터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본다 할지라도 한 반영reflection으로 밖에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은혜스러움을 사람들이 자기 자신 안에 찾으려 할 때에는, 그것이 즉석해서 사라지고 맙니다. 마치 내가 나의 은인을 배반하고 그것이 나의 덕행이라고 생각할 때, 그 은혜끼친 이에대한 나의 감사가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주를 알고 그에게 나아와 그를 신뢰하는 믿음은, 믿는 그 자신의 본래의 가능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가 신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에 있어서 사람이 그 화해의 말씀을 들은 후의 상황도, 듣기 전 상황과 마찬가지로, 은혜는 온전히 하나님 편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죄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이요, 사람은 죄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영광의 주 앞에 설 때, 인간들의 모든 사업과 일을 주님의 선의 표준에서 보면 아주 부적당한 것일 뿐 아니라, 더럽고 타락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종합론자인 클레멘트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바울과 루터와 같은 이원론자가 다른점은 인간의 모든 행위에 부패와 타락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는, 철학자의 지혜와 무식자의 우둔함이 다를 것이 없으며, 살인자의 죄와 법관의 처형 사이에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업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원론자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기는 하지만). 다만 자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나누일 수 없이 자기와 연합되어 있는 전 인류, 그리고 또 자기 자신에게 내리고 있는 심판에 대하여 증언할 뿐입니다.

문화에 대해서 이원론자는, 그 자신도 그 문화에 속해있는 자로서 도저히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문화 안에서, 또 문화로 말미암아 그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이 죄악 중에있는 세상을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잠시라도 존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원론자는 역설paradox이라고 보여지는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 편에서서 하나님을 만나지만, 그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편이 아닌 저쪽에서 오는 것으로 설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긴장 속에 있는 그는 계시와 이성, 율법과 은혜, 창조주와 구속주 등의 대립된 형태의 용어로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그의 말이 역설적일 뿐 아니라 그의 행위도 또한 그러합니다.

그는 율법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게 아니라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는 죄인이지만 의롭습니다. 그는 의심하는 자 같으나 믿는 자입니다. 그는 구원의 확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칼날 위로 걸어가는 것 같이 불안정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것이 새로와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맨 처음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그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그 자신을 숨기고 계십니다. 신자는 그가 믿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걸어가며, 보는것으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이원론자들의 핵심용어; 율법과 은혜,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iii) 개변주의자conversionist의 이해는 이원론자와 가까운데,

그들의 기독론은; 그리스도가 새 율법을 주신 분이라는 것보다도 그가 속죄주라는 것을 주장하며, 하나님은 인류의 최선의 정신적 원천을 표징하는 분이라는 것보다도 인간이 만나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공간적, 외부적인 인간 행동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는 인간의 마음을 심사하며 잠재의식적 삶을 심판합니다. 그는 인간의 가장 완강하고 독살스런 병,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을 고칩니다. 그는 인간의 가장 깊은 데 숨어있는 번식력이 강한 죄, 즉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 무애無愛, 절망을 용서합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이념과 권고와 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단순화시키지 않으며, 깊은 겸손으로 인간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논증하기보다도 무덤에서 다시 살아남으로써 그것을 시위합니다.

개변주의자가 이원론자와 구별되는 점은 그들이 문화에 대하는 태도가 더 적극적이요 희망적이라는 점입니다. 이 입장은 세가지 신학적 신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1) 창조

창조에 비해 속량을 강조했던 이원론자와는 달리, 개변론자는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두 주제를 모두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통치 밑에서 창조적인 능력과 하나님 말씀의 질서화에 의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창조에 대한 큰 관심은 이원론자가 등한시한 기독론의 일면을 발전시켰습니다. 한편으로는 말씀logos 즉 하나님의 아들이 창조에 동참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한 옛날에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능력 안에 있는 만물의 논리적 순간적인 시초와 직접적인 기원이라는 의미에서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의 성육신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큰 관심을 가짐으로써, 다만 그의 죽음 부활 그리고 권능으로 올 재림에 나타난 구속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 창조의 세계 속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행하는 아들이 그의 질서화행위 없이는 있어본 적이 없는 인간 문화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2) 창조 때의 선善에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

이원론자가 창조와 타락을 거의 영지주의적으로 표시할 수 있을 만큼 근접시킨데 반해, 개변주의자는 타락을 창조와 구분합니다. 이원론자에게 문화제도는 부패를 막기위한 질서, 무정부의 예방, 육신생활의 지도 등 일시적인 문제들에만 관계된 것이라고 합니다. 개변주의자는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을 주장하는 교리에 찬동하는 점에서 이원론자와 합치되지만, 그들은 타락을 창조로부터 구분하며 또한 육체적 생명의 상태로 부터 구별하는데 극히 날카롭습니다. 타락은 창조의 반대이지, 결코 그 계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에게 미치는 결과는 인간 편에만 나타나지, 하나님 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선한 본성은 부패해졌습니다. 이것은 존재해서는 안될 사물처럼 악한 것이 아니라, 비틀어지고 꼬이고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문화는 부패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악이 아니라 전도된 선입니다. 그러므로 문화는 개변의 문제이지 새 창조로 대치할 문제는 아니라 합니다. 물론 그 개변이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일종의 신생을 초래합니다.

(3) 역사관

역사가 근본적으로 다만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의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극적인 상호행동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역사 안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타적 기독교인들에게는, 역사란 기독교 문화의 발흥과 이교 문명의 사멸을 기술한 이야기 입니다.

문화의 기독교인에게는, 역사란 자연과 정신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종합론자에게는, 역사란 영혼이 하나님과의 궁극적인 교제를 율법 이성 복음 교회의 치하에서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이원론자에게 있어서 역사란, 신앙과 불신앙이 투쟁하는 시간,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때와 그것이 완성될 때의 중간 기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개변론자에게는, 역사란 하나님의 능력있는 행위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기술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에게는 종말론적 미래가 종말론적 현재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의미하는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 이전의 하나님의 행동이나 시간 이후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보다도, 시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영생이란 지금, 여기 있는 실존의 특질quality 입니다. 그러므로 개변주의자들은 창조에서 주어진 것을 보존한다거나 최후의 속량에서 주어질 것을 위한 준비라기보다도 현재의 갱신에 대한 하나님의 가능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만나는 현재가 곧 역사라는 견해를 가지고, 창조와 문화의 세계가 최후로 종말을 고한다는 데 대한 기대보다도, 만물을 끌어올려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더욱 민감합니다.

그의 표현방식은 시간적이 아니라 공간적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운동은 상향적인 운동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과 흠모의 힘찬 파도에 의하여 높이 올려진 인간의 영혼과 행위와 사상의 상승rising 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있는 변화된 인간의 삶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위하여 몸과 영혼을 가진 인간을 만드시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으로 하여금 그를 통하여 구원받게하신 하나님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개변주의의 주제는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복음서는 복음을 그리스Greek적 개념으로 번역하여 문화를 새로운 수준으로 상승시켰다는 점에서 문화적 개변 자체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창조에 대한 진술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창조된 세계는 근본적으로 선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응답 속에서 자기 모순이 발생하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타락 사상, 선의 전도라는 사상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응답과 창조주에 대한 인간 세계의 응답을 끊임없이 대조함으로써 잘 드러냅니다. 역사관에 있어서, 역사 안에 있는 시간적 차원, 즉 과거와 미래가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다분히 종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영생'이라는 말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도다"(요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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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October 2, 2008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삼위일체론

김 명룡 (장신대 교수)


서 언

기독교 교리 가운데 삼위일체론은 일반적으로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극난한 교리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고, 많은 이들은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한다. 삼위일체론은 정말로 이해가 안되는 그런 극난한 교리일까?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한국교회 안에는 이단적으로 보이는 잘못된 삼위일체론이 활개를 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론은 성서에 근거가 없고, 교회가 발전시킨 사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 그런 신관이 성서 안에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먼저 밝혀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 (고후 5:19)라고 전한 바울의 메시지가 삼위일체론 이라는 점이다. 삼위일체론이 성서와 관계 없는 고대교회의 사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삼위일체론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안되는 극난한 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삼위일체론을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사변도 아니고 이해가 안되는 극난한 어떤 교리도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 삼위일체론이 무언가 잘못 왜곡되어 전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삼위일체의 정통신조인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 (381년)를 설명하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I.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381년) 신조와 정통 삼위일체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사도신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닌, 2000년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조로, 또한 가장 정통적인 신조로 꼽히는 신조이다. 이 신조가 사도신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니는 이유는 사도신조는 동방 정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서방교회만의 신조인데 반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서교회가 공히 가장 귀중한 정통신조로 인정하는 에큐메니칼 신조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에는 사도신조만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이 정통신조 가운데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상당한 비극이며 바른 신학적 판단에 어떤 결함을 야기 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연계될 수 있다.

Icon depicting Emperor Constantine and the Fathers
of the First Council of Nicaea (325) as holding 
the Nicene Creed in its 381 form.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무엇이 정통인가 이단인가를 판별하는 결정적 표준이고, 어떤 교회가 바른 신앙 위에 서 있는지를 규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 권위를 가진 신조이다. 한국 장로교회 안에 널리 알려져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일부 장로교회의 신조로서 전 세계 교회라는 큰 시각에서 볼 때는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는 그 권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일명 삼위일체 신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삼위일체론 연구에 있어서 결정적 시금석을 제공하는 신조인데, 이 신조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은 바른 삼위일체론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을 야기 시킬 수 있다.

그러면 바른 삼위일체론 이해에 결정적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신조일까? 우리는 바른 삼위일체론 연구를 위해 먼저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로서 빛으로 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피조 된 것이 아니라 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사, 고난을 받으시며 장사지낸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경대로 사흘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고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로 더불어 동일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성령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세상에서의 영생을 바라봅니다.
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와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입니다" 와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는 중요한 세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즉 이 신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믿고 있다) 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신조의 첫째 단락은 성부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고, 둘째 단락은 성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기까지는 무수한 신학적 논쟁과 이단과의 투쟁이 있었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는 참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만 적용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 보다 열등한 어떤 존재로 보려고 했던 아리우스(Arius)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으로 선포했다. 즉 니케아 공의회는 성부 하나님만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아리우스파의 일신론을 부정하고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신성을 지닌 또 한 분의 하나님이신 성자가 계시고 이 성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325년의 니케아 신조 - 현재 각 종파에서 사용하는 영문판 - 의 성자에 대한 고백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이를 선포하고 있다.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합해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라 칭한다)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다.

니케아 회의와 제2차 Ecumenical Council (381년)에서 채택된 신조의 원문 비교와 역사적 정황에 대한 wiki. (moderator 註)

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보면 셋째 단락에서 성령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독특한 고백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는다"는 표현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똑 같은 권능과 위엄과 신성을 지닌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즉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외에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 성령이신 하나님은 성부나 성자에 열등한 어떤 신이 아니고 신성에 있어서 똑같은 권능과 위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정통신조인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일반적인 믿음과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세분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즉 성부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즉 성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이 세 분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 신조는 이 세 분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어느 곳에서도 서도 선포하고 있지 않다. 정통 삼위일체론의 결정적인 신조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을 뿐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는 조그마한 암시도 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교회에서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이 역동적 일신론이든 양태론적 일신론이든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고 기독교의 정통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끊임없이 도전해 오고 정통신앙을 위태롭게 했던 일신론 이단을 물리치고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세 분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한 신조였던 것이다.

Ⅱ.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사이에 362년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회의에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항목이 결정되는데 기본도식은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였다. 이 기본 도식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희랍어는 개체를 뜻하는 말인데 곧 하나님은 세 분이시라는 말이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라는데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그러면 "우시아"라는 말은 무엇일까? 이 "우시아"라는 말은 본질 (nature)을 뜻하는 말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같은, 즉 동일한 신성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말이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성부와 성자 사이의 "호모우시온"(동일본질) 사상을 이어받으면서 이 "호모우시온"을 성령이신 하나님께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론은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결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삼위일체론이다. 즉,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세 하나님), 이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위엄과 권능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규정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 이 세 하나님은 같은 하나의 본질(우시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라고 선언하고 있고, 성령이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신성과 위엄에 있어서 동일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동방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은 몰트만 (J. Moltmann)에 의하면 사회적 삼위일체론이었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세 하나님께서 상호간의 사귐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사귐의 삼위일체론을 뜻하는 말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는 바실(Basil), 니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와 나치안즈의 그레고리 (Gregory of Natianz)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있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 있는 동방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을 캅파도키아 교부들이라 부른다. 이 캅파도키아 교부들 가운데 맏형격인 바실은 세 분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의 코이노니아 (koinonia) 개념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나치안즈의 그레고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족형의 유비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귐은 지상의 인간의 가족 사이의 사귐과는 물론 무한한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지상적 유비는 아담-하와-셋이라는 가족이었다고 가르쳤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이 괴상한 방식으로 한 분이 되신다는 식으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즉, 오늘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3=1의 교리가 고대교회에서는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머리 속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 3=1의 교리는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속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Ⅲ. 페리코레시스(침투 혹은 순환)로서의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삼위일체론의 기본도식인 "하나의 본질(우시아)-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표현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권능을 지닌 같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신조였다.

그러면 이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은 어떻게 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해 결정적인 표현을 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교부는 다메섹의 요한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고, 이 세 하나님은 본질이 같으신 하나님 이신데, 이 세하나님은 상호 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됨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가르쳤다.

이 상호 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의 의미는 예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 14:7-11 참고)고 언급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은 성부가 성자이시고 성자가 성부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신다. 이런 까닭에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아들이 행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의 신비는 다메섹의 요한에 의하면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는 양태는 성자와 성부가 성령 안에 거하시는 양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페리코레시스 (perichoresis)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윤무輪舞"라는 말에서 유래 된 말이다. 그것은 무대에서 무희들이 손을 맞잡고 원형의 춤을 추는 것에서 기인된 말이다. 예컨데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가 손을 맞잡고 원형의 춤을 출 때 두 무용수는 사람은 분명 둘이지만 하나의 춤과 하나의 연기와 표상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께서 만드시는 사역이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희랍의 신들은 페리코레시스적 존재가 아니었다. 희랍의 여러 신들은 상호 간의 갈등과 투쟁과 싸움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은 사랑의 깊은 사귐으로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안에 계신다. 즉 성서의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지닌 존재로, 독자의 길을 걷는 세 신들이 아니고 하나이신 하나님이다.

Ⅳ. 터툴리안(Tertullian)의 삼위일체 도식의 신학적 오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정통적 신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세 하나님의 모습을 분명히 하고 있는 반면,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는 표현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즉, 하나님은 세 분이신데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이 원래의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도식이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우리들은 삼위일체론을 생각 할 때 언제나 세 하나님께서 한 분이 되시는, 즉 3=1의 교리를 삼위일체론이라고 믿고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 할 때 "한 본체(숩스탄티아)와 세 인격(페르조나)"으로 표현했다. 이 표현에서 한 본체란 말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 인격이라고 표현되고 있는 라틴어의 "페르조나(persona)"는 사실은 인격으로 번역하면 안되는 말인데, 왜냐하면 '페르조나'는 터툴리안이 살던 시대에는 개체성을 지닌 한 인격체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고, 무대에서 배우가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즉 어떤 배우가 왕으로 분장해서 왕의 역할을 할 때 그때 이 '페르조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페르조나'는 가면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였다. 따라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의 도식을 다시 번역하면 "한 본체 (숩스탄티아)와 세 역할(페르조나)" 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신데 세가지 얼굴을 갖고 세가지 역할을 한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고대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양태론 이단에 매우 근접하고 있는 표현이다. 사실상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의 매우 어두운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문제가 많은 삼위일체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유감스럽게도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이 되었는데, 이는 어거스틴(Augustinus)이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면서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기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세 하나님께는 독자적인 개체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한 분 하나님의 내적 분리를 통해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만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성령이시다고 가르쳤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K.Barth)와 칼 라너(K. Rahner)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대가들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 바르트는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에서의 '페르조나'는 계몽시대 이후의 개체성이 들어 있는 의미의 인격이 아니었고, 단지 역할이라는 의미로 터툴리안 시대에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바르트는 삼위일체 도식을 "한 인격체(Person)와 세 존재양태(Seinsweise)”로 표현했다. 바르트가 표현한 세 존재양태는 터툴리안의 세 '페르조나'를 오늘의 독일어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바르트에 이어서 라너는 더욱 터툴리안의 표현에 가깝게 삼위일체 도식을 “한 인격체(Person)와 세 본체의 양태(Subsistenzweise)”로 표현했다. 이것은 터툴리안이 한 하나님을 하나의 본체로 표현한 것에 유래되고 있는데, 세 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의 본체가 드러나는 세가지 양태로 표현한 것이다. 바르트와 라너의 삼위일체 도식은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의 20세기적 발전인데, 모두 양태론의 그림자를 벗기 어려운, 문제가 많은 삼위일체론 이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고대교회의 터툴리안에서 20세기의 칼 바르트와 칼 라너에 이르기까지 양태론적 성향의 삼위일체론의 하나의 흐름이 존재하는 반면 또 하나의 삼위일체론의 중요한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3=1의 교리를 삼위일체론으로 보는 흐름이다. 이 흐름은 터툴리안에서 어거스틴으로 이어 내려오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사고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동방교회의 캅파도키아 교부들에 의해 주장된 하나님은 세 분 이시다는 사고를 종합한 것인데,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에게서 뚜렷이 나타나고 오늘에 있어서는 스코틀랜드의 개혁파 신학자 토랜스(T. F. Torrans)와 독일 프라이브르그(Freiburg)의 카톨릭 신학자 그레스하케(G. Greshake)에게서 명백히 살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3=1의 교리는 언뜻 보기에는 동서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종합한 가장 훌륭한 삼위일체론으로 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종합될 수 없는 두 개의 사고를 합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삼위일체론을 이해 할 수 없는 교리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진리도 아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근본적 문제는 그것이 양태론적 성향의 삼위일체론이든, 3=1의 교리를 주장하는 삼위일체론이든 동서교회가 공히 고백하는 가장 귀중한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니케아-콘스타티노플 신조는 모든 형태의 일신론과 대립되어 있는 삼위일체적 신조인데,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두 개의 흐름 모두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하는 일신론의 터전 위에 있기 때문이다.

Ⅴ. 삼신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

한국교회 내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하면 정통이고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말하면 이단이라고 보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는 바른 사고도 아니고 정통신조에 입각한 사고도 아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서방교회의 전통 안에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바른 고백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서방교회 신학의 삼위일체론의 전제가 전 세계교회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충돌되고 있다는 점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 유의해야 하는 것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들었던 캅파도키아의 교부들이 그들의 대적이었던 일신론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삼신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이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 신학의 토의들에서 삼신론의 비난은 사실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세신들'에 관한 이론을 대변한 기독교 신학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비난은 먼저 고대의 아리우스파가 행했던 비난이었고, 그 다음에는 정통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비난이었다. 그 후에 이 비난은 동방교회 신학에 대한 서방교회의 비난이 되었고, 오늘날 그것은 자신의 현대적 양태론을 숨기는 데에 봉사하고 있다. 이슬람 유일신론의 전망에서 볼 때,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은 - 어거스틴 혹은 토마스, 바르트 혹은 칼 라너, 판넨베르그 혹은 그레스하케 등 - '삼신론자' 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고수하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이다.

몰트만이 말한 것처럼 이슬람의 유일신관에서 보면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과 기독교회들은 삼신론자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자들과 기독교회들은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신 하나님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태론적 이단의 눈으로 볼 때는 정통 삼위일체론은 언제나 삼신론이다. 그리고 삼신론은 언제나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일신론 이단들이나 양태론적 이단들이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공의 이론이었다는 몰트만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에서 이탈한 서방교회가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를 유지하고 있었던 동방교회를 비판한 이론이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바른 삼위일체론은 한 쪽에는 일신론과 다른 한 쪽에는 삼신론을 두고 그 가운데를 선택하는 3=1의 교리가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세 분 하나님께서 페리코레시스적 삶인 상호 내주와 함께 하심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특한 삶과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나님은 상호내주와 함께 거하심으로 하나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셨다.

결 언

"성령이신 하나님은 다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와 같은 표현을 우리는 한국교회 내에서 자주 듣게 된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일신론 이단으로 흐르는 표현이고,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이다. 바른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 거하시고 성령 안에서 우리를 만나신다는 표현이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그리스도의 영"(롬 8:9) 이시다.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혼동하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되는 괴상한 교리가 삼위일체론이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위협하는 삼위일체론은 모두 잘못된 삼위일체론이고 이단적인 삼위일체론이다. 사과는 하나지만 껍질과 속과 씨가 있듯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다는 표현 역시 잘못된 삼위일체론의 비유이다. 위와 같은 비유는 일신론의 위장일 뿐이다. 위와 같은 비유가 삼위일체의 비유로 한국교회 안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철저한 일신론적 사고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믿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이슬람과 같은 일신론의 이교적 사상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론은 일신론과의 투쟁과 대립을 통해 형성된 교리였다. 그것은 일신론과 삼신론의 중간에 있는 교리가 아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똑같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려는 교리였다. 그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오순절 이후 성령의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세 분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바탕이 된 교리였다. 그런 까닭에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의 경험밖에 없는 유대교의 일신론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이었고, 이런 까닭에 초대교회는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이름으로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 터툴리안과 톨스토이

라은성 교수, 국제신학대

The Tertullian Project <-- 터툴리안의 모든것!

I. 생애

터툴리안(약155–230)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입니다. 참 긴 이름이지요. 당시 그의 부친은 로마 장교로서 카르타고에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난 터툴리안은 덕스러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터툴리안은 아마도 모든 일에 있어 부지런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문성도 뛰어났습니다. 특별히 로마법에 관해 심오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직업상 법률가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차분하고 냉정한 이성을 지닌 인물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약 197~198년경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글쎄요. 어떻게 개종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니 분명한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겠죠. 역사는 기록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삼위일체’(trinitas)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교부입니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를 ‘한 본질과 세 위격들’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신ㆍ구약’ 성경이라는 용어도 처음으로 그가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위일체를, 즉 하나님에 관해 알려고 할 때에 반드시 터툴리안의 설명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죠.

약 200년경 결혼한 그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로마제국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46-211)의 핍박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터툴리안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이유는 몬타니즘(Montanism)을 로마교회가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몬타누스파는 재혼을 금했는데 로마감독의 권위를 가지고 재혼을 허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217~222년 경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 <겸양에 관하여>를 쓴 후 역사의 기록에서 벗어났습니다.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으로 개종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몬타니즘은 초대교회 때, 즉 2세기 중엽에 일어난 기독교의 한 종파였습니다. 창설한 자는 ‘몬타누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령 운동을 강조한 종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몬타누스는 두 여인, 즉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와 함께 동행했는데 그녀들은 성령의 인도를 직접적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위대한 여인들의 발자취>라는 책의 3장 ‘프리스킬라: 이단자’를 보면, 몬타니즘에 관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는 동안 일부 개종자들이 이상한 교리들을 수용하고 채택했다. 예수님은 몇몇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와서 미혹시킬 것이라고 예언하신 적이 있다(마 13:20-22). 몬타니스트들이 강조하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그 결과 사도들은 성도들을 미혹시키기 시작하는 이단적 가르침들에 대해 교회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데 주력했다(행 20:29-30; 벧후 2:1-3). 하지만 이단 사설은 교회 전체에 퍼져 나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하였다(요일 2:19). 2세기 말 소아시아 지방에 프리기안이라는 곳에 이단자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성령께서 교회에 새로운 계시를 주시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두 명의 여인 프리스킬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는 그 계시를 받는 선지자들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받은 계시를 ‘새 예언’(New Prophecy)라고 불렀다. 새 예언은 박해와 금식에 저항하고, 재혼을 금하고, 죄를 미워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단과 정통>의 129~133페이지를 읽어보시면 그 궁금증이 시원하게 풀릴 것이라 믿어집니다.

II. 저서

아무튼 터툴리안은 탁월한 변증가, 논리적인 변증가, 철의 의지를 지닌 변증가였습니다. 진실하고 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단호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차분한 성품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을 왜곡하거나 사실을 과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도덕성을 과장하는 경우도 혹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학문성을 평가 절하해서는 안됩니다. 그의 탁월한 논리적 사고는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는 무려 31권의 작품들을 집필했습니다. 대부분이 변증적 작품, 논쟁적 작품, 교의적 작품, 도덕적 작품들 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변증적 작품들 중에서 <이교도들에 관하여>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권은 이교의 도덕들을 비판하고, 2권은 바로(Varro)라는 사람이 제시한 이교 신앙들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책 <변증학>은 197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이전의 선배들처럼 이교를 비판하고 기독교인들의 순수성을 변호합니다. 특별히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부당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세 번째 책인 <영혼의 증거에 관하여>는 197~200년에 쓰인 작품으로, 6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마치 <변증학>의 부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200~206년에 쓰여진 <유대인들에 반대하여>는 기독교의 진실성을 예언서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모두 14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두 번째 범주는 논쟁적 작품들입니다. 이단들에 관한 책으로, 이레니우스처럼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가지고 이단자들에 반대했습니다. 1~14장은 신실한 성도들에게 이단과 이단자들을 경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5~37장은 이단자들도 성경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정당함을 말하지만, 성경은 진실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의 것이지 거짓 신앙을 소유한 자들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38~44장은 이단자들이 지닌 기강들은 도둑과 강도들이 지닌 것과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두 번째 책인 <마르키온에 반대하여>는 이단자 마르키온에 대해 비판한 책입니다.

세 번째 범주에 해당되는 교의적 작품들은 주로 <세례에 관하여>, <스콜피온 해독제>, <그리스도의 몸과 부활에 관하여>, <프락세아스에 반대하여>, <영혼에 관하여>등입니다. 그 가운데 <프락세아스에 반대하여>는 성부 고난설을 주장하는 지도자인 프락세아스에 반대해 쓴 작품입니다. 이 당시 프락세아스는 아프리카 지방에 거짓 교리를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터툴리안은 그에게 삼위일체 위격들의 구별과, 존재의 단일성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와 성육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합니다.

네 번째 범주에 속하는 도덕적 작품들 가운데 <기도에 관하여>가 있습니다. 이 작품의 1~9장은 주기도문을 세밀하게 설명하는 작품입니다. 10~27장은 선한 기도의 도덕적 조건, 육체적 조건, 그리고 예식적 조건들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28~29장은 기도의 유효성을 설명합니다. 다음은 <회개에 관하여>, <자선에 관하여>, <여성들을 존경함에 관하여>입니다. 이 책에서는 여성들의 옷차림, 장식을 간단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젊은 여성들에 관하여>, <결혼에 관하여>, <과부에 관하여>, <순교자들에 관하여>, 그리고 <인내에 관하여>등이 있습니다.

마지막 범주는 기강에 관한 작품들입니다. <구경거리에 관하여>, <양심에 관하여>, <핍박에 관하여>, <우상숭배에 관하여>, <외투에 관하여>가 있습니다.

이상의 저서들 중 몇 가지만 간추려 읽어보도록 합시다. 먼저 <변증학>에 관한 작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레니우스가 영지주의에 반대하여 큰 공헌을 했던 것처럼 터툴리안도 역시 이단들에 반대하여 큰 공헌을 했습니다.

다음은 <변증학>의 21장 6절, 19장 3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두 분은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또 성령으로부터 나오시는 성령도 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에 수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근원에서부터 나오시는 분이시며 결코 분리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기독교 기강과 신앙에 대한 진리가 현존하는 곳에서, 성경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성경의 설명도 발견할 수 있고 모든 기독교 전통 진리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기도에 관하여>의 6장 2절의 내용인데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영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생명이며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떡이 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떡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그분의 몸은 떡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는 말씀을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말씀드리면, 일용할 양식을 간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기 위함을 기도하며 그분의 몸과 분리되지 않도록 간구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프락세아스에 반대하여>의 2장 1절.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처럼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십니다. 말씀이신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이 만들어졌고 그분이 없이는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분이 성부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사람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분이 성경에 따라 고통을 당하셨고, 죽으셨고, 그리고 장사되셨음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분이 성부의 우편에 앉아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분이 죽은 자와 산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약속에 따라 성부께서 성령을 즉 모든 자들의 신앙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을 보내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신앙의 이와 같은 규율은 복음의 시작한 후에 있었습니다. 초기 이단자들이 일어나기 전에도 말입니다.”

터툴리안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정통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오리겐과는 달리 그리스 철학을 증오한 자였습니다. 영혼이 선재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 개념은 후에 있을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별히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성부 고난설’에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삼위일체 개념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경륜(economy), 위격, 그리고 본질’ 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그는 ‘믿음의 규율’을 언급했는데 이는 교회의 권위 있는 전통을 의미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전통이 아니라 바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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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 명혁 목사의 글로서, 니이버의 <그리스도와 문화> 그리고 터툴리안과 그의 시대상황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성육) 요1:14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의 사건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간 문화의 옷을 입은 복음의 ‘토착화’ 사건은 기독교 역사의 특성중의 하나인데, 양자(신인 및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바로 설정하는 것은 해결하기 힘든 ‘영속적인’(enduring)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300여년 동안 세계에 전파되었을 때 복음은 전파된 지역의 문화의 옷을 입고 각각 다른 형태의 기독교를 형성했다. 즉,

1) 시리아의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 ‘안디옥 학파’의 기독교, 2) 북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교, 3) 로마를 중심으로 한 ‘로마 학파’의 기독교, 4) 북 아프리카의 칼타고를 중심으로 한 ‘라틴/아프리카 학파’의 기독교, 5) 희랍의 콘스탄티노풀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 학파’의 기독교를 형성했다.

이는 한국과 일본과 태국에 전래된 기독교의 형태와 특성이 각각 다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으므로 그것을 정죄하는 대신 그대로 받아드리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고전9:22

리차드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문화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로 나타난 기독교 문화는 문화를 적대시하는 기독교 문화로, 초대교회의 터툴리안, 중세의 수도원주의, 종교개혁 시대의 메노나이트, 근세의 톨스토이 등에 의해 표현된 ‘반문화적’ 기독교 문화였다.

둘째로 나타난 기독교 문화는 기독교의 이념과 문화의 이념을 조화시키려는 기독교 문화로, 초대교회의 노스틱주의, 중세의 아벨라르, 근세의 릿츨에 의해 표현된 ‘적응적’ 기독교 문화였다.

셋째로 나타난 기독교 문화는 문화를 완성시키려는 기독교 문화로, 초대교회의 저스틴과 클레멘트,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근세의 조셉 버틀러 등에 의해 표현된 ‘종합적’ 기독교 문화였다.

넷째로 나타난 기독교 문화는 기독교의 이념과 문화의 이념을 역설적으로 보는 이원론적 기독교 문화로, 초대교회의 말시온, 중세의 옥캄, 종교개혁시대의 루터, 근세의 키엘케골 등에 의해 표현된 ‘역설적’ 기독교 문화였다.

다섯째로 나타난 기독교 문화는 문화를 개종 시키려는 기독교 문화로, 초대교회의 어거스틴, 종교개혁시대의 칼빈, 근세의 요나단 에드워즈와 마우리스 등에 의해 표현된 역동적 ‘변혁주의적’ 기독교 문화였다.

초대교회에 형성된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의 특성들을 간단히 살펴본다.

히브리 전통에 선 ‘안디옥 학파’의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인성을 강조하고 성경의 역사적 및 문자적 해석을 주장했다.

헬라 전통에 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신성을 강조하고 성경의 비유적 및 영적 해석을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교가 철학적이고 문화적이고 종합적이었는데 비해, ‘안디옥 학파’나 ‘라틴/아프리카 학파’의 기독교는 반 철학적이고 반 문화적이고 반 종합적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가 철학이 복음에 이르는 준비이며 문화적 요구와 그리스도의 요구를 조화시키려고 한데 비해, ‘라틴/아프리카 학파’의 터툴리안은 철학이 복음과 역행하며 문화적 요구와 그리스도의 요구가 서로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로마 학파’의 기독교는 법과 제도와 전통을 강조했고, 콘스탄티노풀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 학파’의 기독교는 의식과 신비를 강조했다.

이는 한국의 기독교가 감성적인데 비해 일본의 기독교가 지성적이며, 화란의 기독교가 정적인데 비해 흑인들의 기독교가 동적인 것과 비슷하다.

서로 대립되는 ‘라틴/아프리카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문화에 대한 상반되는 특성을 살펴본다.

‘라틴/아프리카 학파’의 터툴리안은 원죄가 사회 속에까지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질서에서 멀리 떠나야 하며 세속적 집회와 세속적 직업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써커스, 극장, 경기장 등에서 공연되는 게임이나 쇼에 참석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터툴리안은 여인들의 장식과 화장 등도 마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배격했으니, "피부를 약물로 문지르고, 뺨을 연지로 칠하고, 눈을 검댕이로 두드러지게 만드는 여인들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우리 나라 초기의 고신 교단의 입장과 비슷했다.

그러나 터툴리안이 "레슬링 같은 운동을 마귀의 노름"이라고 일축해 버린 데 비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는 레슬링이 여자들에게는 적당치 않으나 남자들에게는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위해 좋은 운동이라고 말했고, 여인들이 화려한 옷, 자주색 옷, 짧은 치마, 보석 장식, 화장품 등등을 사용하는 것은 욕정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되어 금했으나, "금 장식물이나 부드러운 옷을 입는 것을 전적으로 금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며 "지나친 마음의 충동을 일으켜 방종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억제한다면, 적절하게 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했다. 화장품도 적당하게, 즉 남자가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사용하면 무방하다고도 했다. 우리 나라의 기장 교단의 입장과도 비슷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롬12:2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의 다양한 문화 전통들을 비판하고 종합하여 하나의 역동적이고 균형 잡힌 세계관과 문화관을 이룩했다. 어거스틴의 세속관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악한 세력의 소산이라고 정죄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로 보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선물로 극구 예찬하기도 했다. 어거스틴이 현세의 역사발전 과정과 세속질서를 "목적에 이르기 위한 잠정적인 수단과 과정"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역사과정과 세속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섭리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고 확신했으므로 결국 역사와 세속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즉 어거스틴은 세속질서와 문화질서에 대하여 부정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입장 및 변혁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종말에 완성될 구원 사역이 세속 및 문화 질서 안에서 지금 부분적으로 실현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인간과 사회와 문화의 ‘변혁’을 이루어가는 신자들의 삶은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하나님의 구속 섭리에 대한 전적인 신뢰 때문에 현세에 대한 비관적 어거스틴은 내세에 대한 낙관적 어거스틴으로 바뀌어졌다. 우리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그 변혁을 시도하면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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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신학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보라색’이 있고, 열정적이고 배타적인 ‘붉은색’이 있고,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파란색’이 있다. 북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성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보라’ 색깔의 신학을 주창했고, 로마에 뿌리를 두고 북아프리카 칼타고에서 형성된 라틴 학파는 열정적이고 배타적인 ‘붉은’ 색깔의 신학을 주창했으며, 예루살렘에 뿌리를 두고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형성된 안디옥 학파는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파란’ 색깔의 신학을 주창했다.

오늘은 북아프리카 칼타고에서 형성된 열정적이고 배타적인 ‘붉은’ 색깔의 신학의 내용과 특성을 살펴본다.

“철학은 이단의 어머니”‘신앙과 이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들이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나타났는데, 라틴 학파는 양자와의 관계를 ‘불연속적’이고 ‘상호 배타적’인 관계로 보았다.

라틴 학파의 터툴리안(150-220)은 그의 저술 <이단논박>에서 이성과 철학 일반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을 취했다.<이단논박>7절에서 “철학은 이단에게 장비를 제공하고 있다. 예루살렘과 아덴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What has Jerusalem to do with Athens?) 고 외치며 철학을 비판했다. 터툴리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을 가진 후에는 탐구가 필요 없다고 단정했다. 같은 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사변이 필요 없으며 복음 이후에는 탐구가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이교 세계를 향해서 분명하고 강하게 변증하기 위해서였다.

터툴리안은 신앙의 절대성과 배타성을 <이단논박>13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신앙의 규칙(Rule of Faith) 즉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하나의 신앙에 대해서는 어떠한 질문도 용납되지 않는다. 물론 신앙의 규칙이 방해 받지 않는 범위 안에서 토론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을 말하면, 잘못된 것을 알게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무식하게 있는 것이’(remain ignorant) 낫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했지(눅18:42) 네 성경 지식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단논박>1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성경에 관한 토론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복통과 두통을 가져올 뿐이다.” “Arguments about Scriptures achieve nothing but a stomach-ache or a headache.” 결국 터툴리안은 “모순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I believe because it is absurd.) 라고 외치면서 신앙의 절대성과 역설성과 모순성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셨다. 이와 같은 일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다. 이것은 극히 어리석은 말이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는 장사 되었다가 다시 사시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실하다.” (“그리스도의 육신에 대하여” 5).

“세상이 기뻐할 때 우리는 차라리 슬퍼하자”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들이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나타났는데, 라틴 학파는 양자간의 관계를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로 보았다. 터툴리안은 세상과 문화 일반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터툴리안은 리차드 니버가 분류한 대로 ‘반 문화적 입장’(Christ against Culture)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다.

“터툴리안은 원죄가 사회 속에까지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니버, “그리스도와 문화” p.5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질서에서 멀리 떠나야 하며 세속적 직업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써커스, 극장, 경기장, 등에서 공연되는 게임이나 쇼에 참석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와 같은 것들은 마귀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마귀 때문에 만들어진,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에 관하여” 24).

“조각, 회화, 문학, 수학, 체육, 첨성술, 연예, 교육, 정치, 병무 등의 세속적 직업을 일괄적으로 정죄했다. (“우상숭배에 관하여” 5,8-11, 18-19).

터툴리안은 재물을 악한 것으로 보며 돈을 사랑하는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여인들의 장식과 화장 등도 마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배격했으니, “피부를 약물로 문지르고, 뺨을 연지로 칠하고, 눈을 검댕으로 두드러지게 만드는 여인들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여인의 옷에 관하여” 5).

터툴리안의 입장이 좀 극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가 사고와 삶에 있어서 항상 세속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터툴리안은 세속화와 우상숭배를 경계하면서 이렇게 글을 썼다.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으로부터 교회로 온다. 원수의 작업장으로부터 하나님의 집으로 온다. 우상을 만들던 손을 하나님께 높이 든다. 마귀에게 내주었던 손으로 주님의 몸을 만진다. 우상 제조업자들이 성직자의 자리까지 차지한다. 이것은 탄식스러운 일이요 뿌끄러운 일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손을 한번 그리스도에게 얹었지만 이들은 날마다 그의 몸을 괴롭힌다. 여러 종류의 수공업은 모두 우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책망을 받을 만한 일이다.” (“우상숭배에 관하여” 7,8).

그리스도인들이 이교적 축제에 참여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했다. “그와 같을 경우에 하나님의 종이 옷이나 음식이나 다른 방법으로 이교적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가? 사도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말한 것은 형제들에 관해서 말한 것이다. 즉 믿는 형제들과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는 빛과 어두움이 사귐이 있을 수 없고 생명과 죽음의 사귐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세상이 기뻐할 때 너희는 슬퍼하라’고 했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기뻐하면 세상과 함께 슬퍼하게 될까 봐 염려된다. 우리는 세상이 기뻐할 때 차라리 슬퍼하자. 그래야 세상이 슬퍼할 때 기뻐하게 될 것이다.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서 즐거워할 때 부자는 고통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세상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방인들과 함께 살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죽도록 허용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세상에서 살지만 그들의 잘못을 함께 나눌 수는 없다.”

터툴리안의 입장이 좀 극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밴틸 교수는 터툴리안을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지명하면서 우리는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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