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정수, 교회와 신학 21집, 1989. 5. 12. 369-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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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서양음악이 함께 들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초창기에도 한국 전통음악을 교회의 음악으로 세워 보려고 노력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길선주 목사, 게일 선교사 등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흐름은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무시해도 될만큼 사소하지 않았다. 이 글의 앞 부분은 이러한 초창기의 지도자들의 생각과 70년대 이후 일어난 교회음악의 토착화 노력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당시와 오늘의 변화된 음악환경에 비추어 생각해본다. 초창기의 사료들이 아직 충분히 검토된 단계는 아니기 때문에 논의에 많은 제약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음악을 교회에 수용하는 데에는 날카로운 정신적 대립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는 <신앙 지향적인 방향>과 <민족 지향적인 방향>이다. 이 두 방향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러나 이 두 방향이 의미가 있으려면 적절하게 서로 보완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민족의 음악이 교회적 음악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가능성에 관해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한국 전통음악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점검하였다. 산만한 나열같은 이 부분은 이미 있어왔던 전통음악적 교회음악과 그 주장하는 바를 고려하여 어떻게 하면 더 용이하게 교회가 한국 전통음악을 수용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첨예하게 찬반이 대립하기 쉬운 이 문제는 좋게 풀리는 경우에 대단히 창조적인 열매들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아직은 찬반 사이의 긴장감이 팽팽하다. 이러한 긴장의 전제조건이 되는 "걱정"들과 "소망"들을 교회적인 방법을 통해 풀어 보려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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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업시 깃븜으로 찬송하난 것이 팔년동안 하나님을 찻다가 오늘날 예수의 피로 내 죄를 씨심을 받엇다 하며 업대여 시로 찬숑하기를 죠선노래 모양으로 부르고....."
위의 글은 1913년 6월2일의 그리스도 회보에 기록된 것으로 천화신을 섬겼던 무녀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곡들이 각 지방의 민요와 흡사하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보아 민요적인 것과 비슷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찬양을 들으면 아무리 이런 종류의 노래를 교회에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경건치 못한 노래라고 비난하기보다는 그의 구원을 기뻐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음악의 토착화라고 말하기에는 한국 교회의 전체적인 사건이거나 지속적이지 못하고 개인적이고 임시적이었다. 당시에 이러한 일들이 기독교와 한국 문화가 만남으로써 간헐적으로 발생했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토속적 음악들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아니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는 무속을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당시 각 마을마다 있었던 성황당이나 사당들이 없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무속을 생각나게 하는 노래들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에 무당들은 교화의 대상이 되어 무당들이 -위에 소개한 신문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더러 기독교인이 된 사례가 더러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음악의 중심그룹이었던 세 집단, 즉 무당, 광대, 기생에 대해 기독교는 반대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변변한 음악가 그룹이 없었다는 점이 한국 교회와 전통음악의 관계를 좋지 않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교회음악의 토착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무녀의 찬양도 관계되는 것을 교회화시키는 일을 토착화의 목표로 생각한다. 즉 한국의 전통적, 토속적 음악이나 이와 관련 있는 기독교 음악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의 음악문화적인 틀이 자국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①이것이 복음수용에 더 효과적일 수 있고(왜냐하면 우리에게 체질화 되었다고 보기 때문, ②우리의 민족적 자존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수용의 효과적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한국 교회음악의 토착화 운동은 100여년이 늦었다. 그 때에 토착화를 실행했어야 그 말뜻에 걸맞다. 왜냐하면 당시의 토착적이었던 것은 이미 그 뿌리가 상당히 뽑혀있고 다른 뿌리가 더 깊숙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토착화"란 말은 그 지역의 문화와 사람에게 맞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의 음악적 특성이 100여년 전과는 달라지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식으로 음악을 만든다면 서양적 음악을 만들 수밖에 없다. 토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전통음악적인 것은 오늘날 교인들에게(특히 청소년층) 다시 체질화 시켜야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새롭게 체질화시킬 수 있는 청소년층이 전통음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옛 세대에 비해 덜 갖고 있다. 이들이 살아있는 광대, 기생, 무당의 음악으로 이것을 체험한 세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구세대와 신세대가 전통을 보는 입장이 달라졌고 전통음악의 의미가 달라진 것을 본다.1)
아직까지도 우리의 노래 관습에는 전통음악적인 근본이 남아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의 주장자들은 한국의 교회에서 틀리게 불리는 것을 관찰하여 그 증거로 삼는다. 즉 틀리게 불리는 찬송가들이 주로 오음음계나 한국적 리듬음계로 변형된다고 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음악적 체질이 국악적 틀을 그대로 갖고있는 증거라는 것이다.2)
그런데 ‘잘못 부르는’데에 나타난‘한국적 특성’이 그대로 교회음악의 한국적 방향전환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오창하는 사람들이 ‘한국적’교회음악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오창하는 옛 세대들이 갖는 음악에 관한 특이한 입장을 반영해 준다. 그래서 옛 세대들에게는 전통음악이 기피해야 할 음악으로, 신세대 들에게는 ‘민족의 음악’으로 이해된다.
나이가 많은 세대층에서도 전통음악의 의미변화를 시도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떠돌아다니는 가사에 민요를 붙였거나, 민요식의 성가를 개인적으로 쓰려고 만든 사람들도 이미 있었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그 세대에서 일반화되지 못했다. 전통음악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지 않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초기의 한국교회에서 비기독교적 종교체계와 사회적 하부계층을 연상케 했던 음악을 우리의 전통음악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토착화론은 우리 민족에게 체질화되어 있다는‘보편성’의 관점에서보다는 민족적 자존의 문제에서 볼 때에 더 큰 타당성을 지닌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경우, 전통음악적 교회음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의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의무는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의 기호 문제를 넘어 서 있고, 적합하느냐 부적합하느냐의 문제도 우선 제껴둘 수 있게 한다. 이 의무의 강조 뒤에는‘민족적 자아’가 상실되면 좋지 않다는 생각, 또는 더 나아가서 수치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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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한국교회에서는 토착화라는 명칭이 없이 이 문제가 자연적으로 발생했다. 즉 당시의 민요나 민요적인 노래들을 취하여 한국인에게 맞는 교회음악을 성립시키려던 노력이 그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한 사람 중에는 길선주 목사같은 한국인도 있었고 게일(J. S. Gale)과 같은 선교사도 있었다.
길선주 목사는 전통음악을 교회에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인 길진경 목사가 쓴 글에 의하면 1909년에 길선주 목사가 이름 있는 악사들을 그가 시무하던 평양의 장대현교회에 초빙하여 "교회 의식에 맞는 가락과 그 가락에 맞는 성경귀절을 선택 연구하는 데에 힘을 쓰는 한편, 교회명절과 특별행사 때마다 연주해서 교회의 아악에 대한 향심을 부추겼다"고 한다. 길목사는 이러한 음악이 수입된 찬송가들을 대체하기를 바랐고 이를 위해 상당한 돈을 투자하였으나 편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3)
길선주 목사는 「수심가」에 맞추어 전도자로서의 심정을 노래로 남기기도 했다.4) 길선주 목사 작사의 노래는 후에 주기철 목사의 " 영문밖의 길"과 손양원 목사의 "낮에나 밤에나"처럼 그 내용이 대단히 서글픈 성격의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후의‘부흥성가’종류로서 사람들 사이에 불렸다. 즉 교회에서 공식화되지 못하고 주변으로 밀린 것이다.
게일 역시 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세우고자 상당히 조직적으로 노력했고, 오늘날 토착화 논쟁을 펴는 한국인의 관점과 매우 흡사한 사고를 했다. 그는 한국인이 서양노래를 즐겁게 잘하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이것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겠느냐 하는 의심을 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한 한국 민요적 성격을 가진 찬송가를 한국교회가 갖기를 원했다.5)
그는 서양곡조라도 한국음악에 맞춰 부를 수 있으면 그렇게 하기를 원했고 또한 스스로 한국의 뱃노래에 맞추어 가사를 짓기도 한 것으로 여겨진다.6) 그러나 그보다 더 적극적인 생각이 보이는 것은 찬송가 가사를 현상모집할 때에 시의 체격을 서양식의 것이 아닌 동양식의 것만을 택하라고 한 것이다.7)
게일 선교사가 지은 가사를 사용한 뱃노래는 1915년에 발간된 『창가집』에 악보로 나타난다.8) 이 악보의 음악은 그로브(P. L. Grove) 선교사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거기에 실린 곡의 선율까지 만든 것이 아니라, 화성만 붙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로브는 한국 사람들이 틀리게 부르는 것까지도 그대로 수용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미 불리고 있던 곡을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는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한국인들이 부르는 그대로, 반음이 없는 방식으로 악보를 그렸고, 거기에 맞는 화성을 붙였다.9)
초창기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던 다른 선교사들 역시 원래 서양 찬송가만을 주장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후에 『신정찬송가』(1931)를 만들면서 한국민요적인 노래의 삽입을 주장한 쪽이 선교사 찬송가 위원들이었고, 반대한쪽이 한국인 찬송가 위원들이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며 거기에 관한 기록이 이 찬송가의 서문에 실려 있다.10)
선교 초기에 신교보다 더 많이 전통음악을 사용했던 천주교도 신교처럼 전통음악과의 단절을 경험한다. 천주교가 한국에 유입될 때에는 박해받는 상황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정체를 민요로 숨겨야 할 입장에 있었고 서양의 교회음악을 직접적으로 접할 기회도 갖지 못한 편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음악을 취하는데 그것이 ‘천주가사’였다. 그러나 역시 천주교도 박해가 없을 때에 그 토착화된 입장을 스스로 벗어난다. 이는 전통음악을 사용하는 천주가사가 다분히 임시방편적인 조치로 생각되었음을 반증한다. 카톨릭과는 반대로 신교는 선교에 있어서 박해를 받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민요로 자신들을 두드러지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신구교를 망라하여 전통음악과 교회는 그 조화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여러 예술 중에서 음악은 특히 서양의 것에 취약했다. 양악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음악은 어떤 다른 예술 분야보다 전통적인 것과의 갈등을 크게 겪었다. 문학은 우리의 글로 쓰는 것이라서 신문학(신소설, 신시 등)으로 처리될 있었으며, 우리의 언어생활에 잘 맞지 않는 한문으로부터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구어체로 옮겨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교회는 번역 성경을 한글 위주로 만들었다. 미술에서도 서양미술이 전통예술에게 커다란 충격이 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보는 그림들 중에는 아직도 동양화(한국화)가 더 많다. 그런데 유독 음악에서만은 ‘서양음악의 지배’라고 말해도 될만큼 서양음악에 의해 전통음악의 위치가 위축되어 있다.
교회는 그 문화가 화가와 가깝지 않았고 음악가들과 가까웠다. 한국의 초기 양악가들은 거의 교회출신임을 보여주는 반면, 문학과 미술분야에서는 그러한 전면적인 현상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편으로 국악인 중에 기독교인이 적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광대나 기생으로서 사회적으로 고립된 계층에 속했었고, 종교적 관계도 주로 불교나 무속에 가까이 있었다. 또한 그들의 음악으로는 교회에 발붙이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그들이 기독교인이었다 해도). 이들의 신분적 특징은 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이중으로 막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이들이 자기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는 교회에 들어오기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일을 버리고 교회에 들어 왔다고 해도 기피의 대상이 되어 활동이 어려운 입장이었을 것이다. 교회만이 이들에게 이러한 대접을 한 것은 아니었다. 즉 사대부나 평민들도 전통음악인에 대해서는 같은 입장을 갖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 점차 서양의 찬송가가 불리기 시작한 때에도 남자들은 교회음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흔적이 드물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마우리(E. M. Mowry)선교사가 1913∼14년경 조직한 남성만의 찬양대는 이러한 풍토에서는 대단히 획기적이고, 이채로운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11) 1910년 이전에는 회중찬양이 아닌 대표찬양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여자들이었는데, 이들도 나이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노래하는 것은 좀 특별하게 보였다.12)
따라서 초기에는 찬양의 상당부분이 여자들의 임무였다. 이 여성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년층이라기보다는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의 학생이었다. 물론 남학생들도 교회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그 역할이 여학생들의 것에 비교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남자들의 문화’로 특정 지워지는 기존의 한국문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당시에 교회음악의 토착화를 시도하는 것은 길선주 목사나 게일 선교사처럼 떠돌아다니는 민요에 가사를 붙이는 방법 이외에 별다른 길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에는 작곡가들이 없었기 때문에 창작적 성가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궁중음악의 전통은 누구나 다 아는 보편성을 띠지 못했고 제한된 곳의 행사를 위한 음악이었다. 그리고 작곡가들이 있을 때에도 교회음악은 작곡되지 않았다. 후의 홍난파, 현재명도 기독교인들이었지만 교회음악을 작곡한 것이 극소수이다. 이들은 전통음악에 대해서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한 사람들이며, 서양음악의 매혹에 사로잡히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또한 이들이 서양식으로라도 찬송가를 작곡했다 해도 당시에 당장 공식적 찬송가책에 수록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당시에 일반 유행가나 민요 등에 가사를 붙인 ‘부흥성가’들이 계속 있어 왔으나 교회의 공식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앞의 생각들에 비추어 보면 초창기에도 토착적인 노래는 앞에 소개한 무녀의 경우와 같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으나 교회 내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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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논하는 테마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은 초창기 한국교회에 나타난 ‘애국가’종류이다. 이는 당시에 찬송가로 쓰고 있던 외국의 민요와 국가(올드 랭 사인, 영국국가)에 한국 사람들이 애국적 가사를 붙인 것들이다. 이 노래들은 독립문 완공식에 배재학당 학생들에 의해 불렸고 또 윤치호의 「애국가」는 그가 "역술"한 「찬미가」(1905)책에 실리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토착화라는 말에 부합되기보다는 현실정치적 필요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당시의 우리나라가 처한 국가적 위기에 나타난 애국운동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찬미가」가 감리교 공인의 책이 못되고, 다른 찬송가책들에서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탈락시킨 선교사들이 우리의 애국운동을 무시했다고 후에 비판이 있게 된다.13)
민경배 교수의 이러한 비판은 애국운동사의 측면에서 보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애국적 가사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1935년에 있었던 김교신의 찬송가 비판을 민경배 교수의 비판과 비교해 보면 대단히 의미심장한 대립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김교신 역시 당시에 찬송가책 발간에 책임이 있었던 선교사를 비판한다("조선어 모르는〔아펜셀러〕박사"). 그러나 그 비판의 이유는 민경배 교수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즉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과 같은 "누구나 없이 조선사람 된 자는 이 찬송가를 부를 때에 일종의 흥분을 느끼지 않는 이가 없을" 노래를 삽입하고 「샘물과 같은 보혈은」처럼 "영혼 속으로서" 부르는 노래는 뺏다는 것이다.14) 김교신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애국적 노래가 찬송가로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생각에서는 민족성으로 영성을 대체할 수 없다는 주장을 읽을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견해들을 좀 더 단순화 시켜 대치시킨다면 "민족이냐 신앙이냐"와 같은 양자택일적 사고로 압축시킬 수 있다. 물론 어느 쪽이나 이러한 양극화된 생각이 언어로 발설되면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른다. 왜냐면 이 중의 한쪽을 택하게 되면 신자가 아니든지 민족이 아니든지 하는 입장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사고는 바람직스럽지 않지만 은연 중에 앞의 두 예에서 드러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러한 대결구조가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해 쉽게 동원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신앙'이나 '민족'의 문제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반한다는 데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김교신과 같은 신앙중심의 사고는 '민족'의 문제가 세상적인 문제이고 종국에는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교회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에 민경배 교수의 경우는 세상적인 문제, 그 중에서도 '민족'의 운명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교회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탈세상적인 사고로 세상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고 비난할 것이다. 반면에 김교신의 입장은 '민족'을 강조하는 것이 공허해진 '신앙'을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의심할 수 있다.
이러한 양면은 한쪽 지점을 택하면 대단히 쉽게 나올 수 있는 방향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갈급한 열망을 갖고 있다. 여기의 두 방향은 충돌을 가지고 올 소지가 다분히 있기 때문에 이 양쪽 거점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에게 민족에 대한 기여만을 강조하는 경우 신앙의 영적인 면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초기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민족문제의 해결을 기독교를 통해 이루어 보려고한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떠나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쪽으로 건너간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또한 순수한 민족종교로 옮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한글학자 주시경은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파악하고 이른바 '민족종교'로 귀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단지 서양의 대표 기관일 뿐, 영적인 문제와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단지 사회문제의 해결만을 그 유일한 목표로 삼을 경우 교회는 종교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사회적인 기구로 되고 말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입장을 받아드리기 어렵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를 우리나라의 음악적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기구만으로 취급하면 교회가 그러한 일을 즐거이 행할 수 없도록 하는 것과 같다. 특히 교회 밖에서 교회 안의 음악을 보면서 거기에 '서양의 것' 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경우 교회 안에서 공감대가 성립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교회성가를 작곡하고 다른 종교의 노래도 작곡하는 일은 위와 같은 태도로 교회를 본다고 믿게 만든다. 이런 점을 교회의 답답한 배타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교회의 동의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교회의 영적 성향에 적합한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우리의 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같이 생각하지 않는 민족주의적 교회음악의 방향은 '교회적 '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에 영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 역시 민족적인 것을 무조건 비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나쁜 일방성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민족 전체를 포용하고, 같이 찬양하는 방식이 꼭 반(反)교회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민족의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민족의 소망을 담는 찬양 역시 교회에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옛 무속이나 다른 종교와 관련이 있는 음악일지라도 가사가 바뀜으로 인해 그 음악의 의미가 바뀔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조금 쉽게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음악을 듣고 좋지 않은 연상작용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적인 연상작용과 상관없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얼마든지 그런 방향의 찬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에게 교회가 서양문화만을 허용하고 우리를 드러내는 음악을 거부한다고 생각게 만드는 것은 결코 교회를 위해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국의 교회는 변화된 자신의 입장에 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독교 진리를 건드리지 않는한 선교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통음악을 한국교회에 접목시키려고 했던 길선주 목사의 생각은 당시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잊혀져 버렸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교회의 부채로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신앙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이었고 3.1운동때에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신앙’과 ‘애국’의 양면을 결합한 그의 생각과 행적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모범적인 표상으로 남아 있다. 음악에서도 민족을 생각한 그의 시도는 좌절되었고 무시되었다. 또한 그 자신도 민족예술이 교회에서 금기시 되고 있던 상황을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평소에 젊은이들에게 자주 했다고 하는 말을 그의 아들 길진경 목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민족문화와 외국문화와의 갈등이 시작된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장차 우리의 문화를 상실하는 예언이 될 것이다. 특히 교회는 흥왕하고 있으나, 우리의 문화를 망각하고 우리의 예술을 도외시한다면 멀지 아니해서 교회가 교회인지 구별할 수 없는 집단으로 화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외국문화와 우리의 문화의 교차로가 된 오늘의 교회가 외국문화의 산실의 전제적인 그림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15)
기독교를 ‘민족의 종교’로 그려본 사람은 상당히 많다. 그러나 이를 위한 구체적 프로그램을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민족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생각할 때에 음악적 문제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신앙’이나 ‘민족’을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하지 않았고 어느 한쪽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손쉬움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이 두 가지의 융합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또한 당시에 무속이나 기타 종교, 그리고 쾌락적 행사와 관련이 깊다고 간주되는 음악에서 ‘민족의 것’이라는 매우 긍정적인 면을 보았고,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고립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거론된 길선주 목사의 생각과 노력은 우리나라의 교회음악사에서 전형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크게 주목받은 흔적이 거의 없다. 특별히 양악가들의 지원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악인들이 전통음악을 교회음악으로 만들려 해도 당대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가졌으리라고 짐작된다. 왜냐하면 길선주 목사는 국악을 그 자체로 교회음악화 하려고 했다기 보다 이를 편곡하여 교회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길선주 목사는 김영환에게 전통음악의 편곡을 의뢰했으나 작곡을 배우지 않아 할 수 없다고 거절을 받는다.16)
따라서 음악을 작곡학적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고 악보가 없는 전통음악을 채보하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다 해도 이는 길선주 목사의 극히 개인적인 숙제였다. 전통음악이 교회에 맞지 않는 불경건한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더 많았다.
특히 이 음악들이 불교, 무속 등과 관련이 있어서 교회에서 일반화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교회가 서양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었다. 선교의 면에서도 서양 찬송가가 큰 어려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길선주 목사도 선교의 방향에서라기보다는 민족자존의 면에서 전통음악을 주장한 것을 본다. 그러나 ‘민족자존’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교회를 걱정하게 한다.
특히 전통음악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적극적 반대를 하지 않으면서도 ‘걱정’의 태도를 갖는 사람들이 있다. 그 걱정의 근원적인 핵심은 ‘민족’이나 ‘한국’의 개념이 ‘기독교 진리’의 입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신학적 문제이다. 무속과 타종교를 생각나게 하는 음악이 어떻게 기독교적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들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응답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세속적이거나 타종교적인 것이 어떻게 기독교화 되었는지를 다룬 일이 있다. 즉 세속적 유행음악과 거의 같은 복음성가 음악을 다루면서 여기에 관한 해답을 제시해 보려고 했었다.17)
그 해답의 핵심 중의 하나는 음악 역시 사람처럼 ‘거듭 날’수 있다는 것이다. 시편의 ‘소산님’의 노래, 칼빈의 민요적 시편가, 헨델의 메시아 중의 몇 노래, 영국의 캐롤들은 원래 세속적이었던 것이 ‘교회적’이 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세속음악의 의미 변화는 마치 전에 어떠한 죄를 지었는가를 묻지 않고 지금 어떠한 믿음을 갖고 있는가를 보아 용납하는 기독교적‘구원’과 흡사한 것으로 보았다.
한국의 교회음악은‘민족적인 것’이‘교회적인 것’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려면 상당한 자기극복과 이질감 해소에 노력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음악이 어떻게‘거듭 날’수 있단 말인가 하고 니고데모처럼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거듭 남’이 출생환경을 영적으로 뛰어넘는 것을 뜻한다면 음악에서도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 앞에서 소개한 무녀의 "죠션노래"는 중생한 자의‘거듭난 노래’가 아닌가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는 그 음악의 의미변화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
5
오늘날까지의 한국의 교회음악이 보여주는 특징은 서양의 교회음악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찬송가도, 성가대 합창음악도,‘교회음악사’와 같은 책들도 번역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우리의 음악가들이 작곡한 교회음악은 비교적 눈에 뛰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역사가 100년이 지나면서 새로운 움직임이 자라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청소년층을 중심하여 급속하게 보편화된 복음성가 운동이고, 하나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기준으로 우리의 교회음악을 세우자는 운동이다. 복음성가운동은 음향재생기, 라디오매체, 또는 기타반주로 연주되는 형태 등을 통해 별 논의도 없이 주로 70년대에 즉각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비해 한국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세우자는 논의는 지속적으로 있어 왔으나 아직 교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복음성가나 전통음악성가는 교회음악을 논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있다. 하지만 복음성가는 이미‘실질적’교회음악이 되어 있으나 전통음악성가는 아직도 그러한 단계에 와 있지 못하다. 다만 전통음악성가를 옹호하는 입장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통음악 성가를 주장하는 측에서 볼 때에 한국교회의 음악환경은 매우 비관적이다. 이는 확고한 민족주의자가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도 한국교회의 찬송가책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수준이다. 우리의 찬송가 수가 너무 적다. 여기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지나치게 전통음악적 배경을 갖지 않는 한국인의 찬송가도 많이 있는데 이것조차 거부되는 곳이 우리의 찬송가책이다. 과거 한국의 교회는 우리의 음악문화 전통과의 접촉을 어려워했다는 것을 우리의 찬송가책들이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60년대까지는 찬송가나 성가대 합장음악이 우리나라 작곡가들에 의해 -양악적인 것과 전통음악적인 것을 망라하여- 대단히 작은 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교회음악 토착화 논쟁은 별로 많지 않은 전통음악적 교회음악을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에 음악은 많지 않고 주장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 작곡된 교회음악들을 보면 한국적이려고 하는 노력을 기울인(5음음계, 전통적 장단) 음악의 수가 더 많다. 이제는 많은 곡들을 가지고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온 것이다.
전통음악적 요소가 교회에 뿌리를 잘못 내리는 것은 음악의 모든 부분에 해당되지 않고 일정한 부분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음음계적 음악의 선율에 관해서는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박재훈의 「지금까지 지내온 것」 나운영의「시편 23편」(약간 예외적 부분도 있으나 크게 보아 5음음계 음악), 김보훈의 「주만 위해」등은 교회에서 널리 불리우는 곡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들은 아주 전통적인 유형의 음악이 아니다. 이것들이 전통적 관련성을 생각하고 작곡된 것임이 분명하나 그 전통성이 상징적인 성격의 것이다. 아주 한국적인 성격의 음계인 (남도)계면조로 작곡된 찬송가들이 더러 있으나 잘 불리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렇게 보면 선율적인 면도 지나치게 민속음악적인 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유리해 보인다. 전통적 리듬이 대단히 강하게 드러난 음악 중에 불리는 것을 찾기가 힘들다. 또한 전통적인 타악기를 쓰는 경우에는 더욱 거부감을 많이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에 놓여 있는 오르간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는 국악적 교회음악을 상당히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이 악기들이 할 수 있는 전통음악적 방법은 극히 제한되어 있고 많은 부분을 서양음악화 시킨다. 이 악기들의 이론적 바탕이 서양음악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수도 있겠으나 전통음악이 모습 그대로 퍼지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통음악 쪽에서는 이 악기들을 대체할만한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가야금과 같은 악기로 반주를 한다고 하면 그 소리가 회중들의 목소리에 눌려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조금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로는 피리가 있으나 선율악기라는 점과 제한된 음역 때문에 대체악기로 생각해 보기는 어렵다. 소리가 큰 타악기만으로는 더 제한된 역할만을 하게 된다.
우리의 전통음악은‘듣는 음악’으로서 상당한 취약성을 갖고 있다. 특히 음악을‘하는 것’으로가 아니라‘듣는 것’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점이 전통음악과의 접근을 막는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음악‘하는 음악’에 속한다. 따라서 불러보거나 실제로 연주를 해 보아야 그 음악의 묘미에 접하게 된다. 그래서 들려주기보다는 해보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그러나 연주와 노래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보면 우선 들어보고 좋아야 실제로 하게 된다.
전통음악이 우리 사회에서 보편화되면, 교회에서도 더 쉽게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대중음악적 성격의 복음성가가 쉽게 교회 안에 뿌리내린 것을 보아서 짐작해 본 것이다.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해내려면 통용되는 음악의 보편성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악이 일반 사회에서 대중화되면 될수록 교회음악으로의 전망도 더 밝아질 것으로 기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교회가 수동적으로 따라갈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양악을 퍼뜨렸듯이 전통음악의 보편화에도 앞장서는 편이 더 떳떳할 것으로 여겨진다. 국악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전통음악이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대중음악 가수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들이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대중가요 가수들에게 그들의 노래방법을 버리고 다른 식으로 노래하라고 말할 수 없다. 국악인들도 자신들의 방법으로 더욱 확신 있는 찬양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교회음악이 교회에서 공식성을 갖게 되는 것은 공식적 찬송가책에 실림으로써 가능하다. 물론 교회가 공식적 찬송가책에 실린 찬송가들을‘공식적 교회음악’이라고 부르는 일도 없고 거기에 관한 확고한 규범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찬송가책이 성경에 버금가는‘교회의 책’임에도 그렇다. 찬송가책에 실리고 안 실리는 일에 전통음악적 성격이 방해가 되는지 안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인의 찬송가들이 찬송가책에 실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기존 찬송가들에 대한 방어적 경향이 많고, 또한 널리 불리는 것 중심으로 곡을 택하다 보면 새로 작곡된 것들이 귀에 익지 않아 무시당하기 쉽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개편」과「통일」찬송가에 실려있는 한국인의 찬송가들을 보면 우리 작곡가들의 찬송가들을 뽑는 과정이 달라졌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불과 몇 사람이 교파별로 사람별로 안배하는 선곡방법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토착적인 찬송가책은 더 큰 어려움을 갖는다. 지금까지 찬송가책에 실린 것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음악 토착화운동의 주요인물들이 아직 살아 있다. 그래서 토착화 성가를 찬송가책에 싣자는 주장은 자신들의 찬송가가 찬송가책에 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이는 서양식으로 작곡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경우는 논의가 예기치 않는 곳으로 흘러가기 쉽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처음부터 찬송가책에 수록될 것을 주장하기보다는 같은 뜻을 가진 교인들이나 기관들이 그러한 찬송가책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복음성가들의 경우에는 널리 일반화된 관행이다. 많은 교회들이 공식적 찬송가 이외에도 별도의 복음성가책을 가지고 있다. 복음성가 역시 토착화성가처럼 많은 반대자를 갖고 있다. 그러나 복음성가가 부수적 책으로 전파된다고 하여 그 영향력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 비하면 토착적 성가는 개인의 작품집이거나 실험적 논의의 부산물이다.
또한 이미 있는 노래에 가사를 붙임으로써 ‘토착화 된’부흥성가들은 기도원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공인 찬송가책에 수록될 것을 탐하지 않는다. 복음성가는 주로 교회의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반면에 부흥성가는 영적 체험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정통음악을 강조하는 토착화 주장을 받쳐주는 큰 그룹이 교회 안에 형성되어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이 토착화 성가 운동을 교회 밖의 움직임처럼 보이게 한다.
또 상기해 볼만한 일은 「개편」 찬송가에 한국인 찬송가들이 실리기 이전에 「청년 찬송가」(1959)를 통해 널리 보편화된 박재훈의 「믿는자여 어이할꼬」와 「어서 돌아오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곡들은 공식적 찬송가책에까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찬송가 공회와 같은 기관은 공식적 찬송가 이전에 이러한 부수적 찬송가의 보급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찬송가책에 실리는 것은 확실히 모험에 속하며 좋은 결실을 예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작사가나 작곡자들에게 발표의 터가 필요하다.
이러한 여과적 중간단계를 거치는 찬송가들이 우리나라 찬송가책의‘한국화’를 더 촉진시키리라고 생각된다. 찬송가책에 실리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음악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성가대가 부르는 합창음악은 찬송가책과 같은 공식성을 주는 것이 없다. 그 선곡은 성가대 지휘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전형적인 전통음악적인 것은 많이 불리지 않는다. 김두완의 「본향을 향하네」, 「서로 사랑하자」 김보훈의 「엘리야의 하나님」, 박제훈의 「목마른 사슴같이」, 이안삼의 「선하신 목자」 등이 자주 불리지만, 전통음악의 직접적 수용을 보이지 않는 곡들이다.18)
물론 서양음악 유입 이후에 발생한‘가곡’들을 우리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위의 곡들도‘한국적’이라는 표현에 맞으리라고 생각하지만‘선율성’과‘서정적인 정감’을 가진 이러한‘가곡’적 방향은 아직까지는 역사적 성격의 것으로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새로운 전통’은 그 이전의 토착적 전통을 우리의 기본적 전통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위기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통음악적 노력이 결코 쉽지 않은 것임을 가리킨다.
6
오늘날 한국 전통음악의 계승자는 누구인가? 국악인인가? 아니면 불교의 승려들인가? 무당인가? 기생인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들 역시 옛날과 같은 방식으로 전통음악을 계승하고 있지 않으며 어느 정도는 그 음악의 성격을 변질시켜 실제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민족 전통에 대한 생각이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이들에게만‘민족의 음악’을 맡기고 말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교회는 이제 그 의미가 변화되는 도중에 있는 음악을 교회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기독교는 이러한 방식의 민족에 대한 기여를 놓치면 안된다. 이는 단지‘문화적일’수만 있는 폐단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도 전통음악과의 접목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기독교 음악’은 곧 서양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기독교가 한국음악 전통의 합당한 상속자가 되어지기를 소망한다. 물론 이러한 전통의 계승이‘상징적인 성격’에 머무르지 않고 역동적인 싱앙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변형은 있기 마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는 더 이상 약한 교회가 아니다. 한국의 교회는 초창기의 규모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소수적 국외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상당수적 중심권에 위치해 있다. 이제 교회는 사람들에게 쉽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전혀 교회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교회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대해 사회적 기여를 해달라고 하는 요청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수용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를 귀찮다고 여기지 말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교회음악이 우리의 음악에도 기여해 달라는 외부적 요구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민족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태도가 필요해 보인다. 이 태도와 함께 길선주 목사의‘걱정’과‘소망’이 함께 한다면 더 이상 바람직한 일이 없겠다. 이 모든 일들을 이루려면 당장에 공식성을 탐하기보다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비공식적이고 자발적인 부분에서 전통음악의 교회적 수용을 추진해야 좋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식적인 찬송가들보다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들이 더욱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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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세대는 우리의 전통음악을 주로 (국악)의 개념으로 만난다. 이는 원래의 이 음악이 갖는 상관성과는 멀어지고 <민족의 음악> 으로 정리된 때문이다. 홍정수: 『미학적 음악론』 정음문화사. 1986. p.192-223.
2) 예를들어, 문성모: 한국전통음악에서 본 찬송가 틀리게 부르기의 원인분석↗「교회음악」1987봄호 p.18-24 매우 흥미로운 이 논문은 틀리게 부르는 것을 틀리게 불렀다고 해서는 안되고 "다르게 부른 것이요 한국식으로 부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문승의「찬송가의 오창 및 그 내용분석」 「교회음악 41호-42호, 1986여름호∼가을.겨울호」은 같은 현상들을 광범위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3) 길진경: 『靈溪 吉善宙』종로서적, 1980 p.218. 이 책에서 말하는 ‘아악’이 어떠한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아마 ‘정악’이나 ‘궁중악’에 가까운 것이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저자가 ‘아악’과 ‘창극’을 다른 곳에서(p.212)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길선주 목사는 도움이 된다면 불교적 음악과 무용까지도 수용한 모습을 보여준다(1918년 장대현 교회의 성탄절 전야에는 아악 연주와 여승의 북춤이 있었다는 것이다. p.268)
4) 이 노래(츄풍석음가)는 「예수교 회보」 (1912. 10. 8 권41호)에 실려 있다.
5) The Korean Repisitory 1896. 9. p.377.
6) 「그리스도 신문」 1901.5.9. 지은이와 이름은 없으나 그런 경우 대개 편집자 게일의 것으로 추정된다.
7) 「 예수교회보」 1913.1.28.(제 4권 제 4호)와 그 다음호 (2.4 제 4권 제 5호)에 두 번 현상모집이 실림.
8) 백부인(白婦人, Mrs. Becker), 안애리(安愛理, Mrs. Baird): 『창가집』 평양 야소교서원 발행. 제1부 11번 곡 Boat Song.
9) 앞의 책: 제2부 10번곡 Old Hundred.
10) "죠션 구곡을 찬미로 사용할가하난 문뎨도 잇섯스나 됴치못한 샤회와 관계가 잇스니 불합하다고 죠션인위원의 반다ㅣ로 즁지하니라."
11) 어떤 책들은 1909년에 마우리 선교사가 한국에 온 이후에 장대현 교회에서 성가대를 육성하고 숭실전문학교의 합창부와 취주악부를 조직했다는 원진희(「교회음악약사」 대한기독교서회 1978.p133)의 기록을 오해하여 그 해로부터 곧장 성가대가 세워진 것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마우리 선교사 자신은 "about 1913 or 1914"라고 말한다. 길진경(각주3에서 인용된책 p.220}. 그 정확한 연대는 검증할 필요가 있다.
12)
13) "언필칭 토착신앙의 표현이 찬송의 참뜻이다 하다가도 그 당시 이 서러운 겨레의 구원에 눈물짓던 교회의 솟은 신앙의 언어를 그 찬송가에 안실어 결국 따로 발행했던 선교사들의 성실성 여부를 다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민경배: 한국교회 찬송가의 변천과정→「예배와 음악」 대한 기독교서회. 1975. p47.
14) 「찬송가의 변혁」 ↗『성서조선』 1933. 6. p.120
15) 길진경(각주 3의 책)p.253.
16) 김영환은 당시에 장대현교회의 교인이었고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음. 길진경(각주 3의 책)p.218.
17) 「교회음악, 예배음악, 신자들의 찬양」 ↗『교회와 신학』 제19집 1987. p.415∼445
18)홍정수: 『교회음악개론』 장신대출판부 1988. p.83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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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30, 2008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역사와 바람직한 한국인 창작 찬송가의 모색
조 남극 (한신대학 신학대학원 실천신학 석사학위(1999) 논문)
I. 서 론
1. 연구의 동기와 목적
한국 교회는 선교 100년을 지나면서 끊임없는 발전과 성장을 이루었고,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보내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난 선교 1세기를 돌아보면 한국 교회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한 발전을 이루었는데도, 이와 함께 찬송가 역시 많은 어려움의 과정 속에서 그 나름대로의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양적인 부흥과 성장에 비하여 질적인 성장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한 예로 찬송가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여 왔으나, 더욱 깊이 있고 성숙한 예배를 드리게 하고 기독교인의 삶을 더욱 올바르게 자라게 하는 질적인 성장을 위한 요소로서는 부족함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 찬송가는 한국 교회의 연합과 분열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여러 과정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내려 왔고, 한국 교회의 여망이던 개신교 『통일찬송가』1)가 1983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만들어진 찬송가임에도 불구하고, 1천만여 기독교인의 영적 생활과 신앙생활을 위한 도구로서의 그 역할에 있어서 문제점과 부족함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통일찬송가』(1983)에는 복음가(Gospel Song)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수는 거의 과반수에 이른다. 이는 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찬송가를 번역하여 편찬할 때, 주로 그 당시 미국에서 사용하던 많은 복음 가들을 사용하였으며, 이렇게 들어온 복음가들이 계속적으로 전해져서 한국 찬송가의 정형으로 자리잡아 현재의 『통일찬송가』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의 공적 찬송가에 복음가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겐 복음가가 표준 찬송가가 되었고 찬송가를 편찬하는 이들이나 작곡, 작사하는 이들도 복음가를 찬송가의 표준으로 삼고있는 것이다.
원래 찬송가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노래로 이루어져야 함2)에도 불구하고 우리 찬송가에는 복음가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찬송가로서의 원래의 의미와 맞지 않는다. 또한, 복음가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개념보다는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것과, 하나님에 관하여 인간에게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를 위한 찬송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3)
복음가는 대부분 19세기 미국의 대중 전도집회를 통하여 만들어진 노래인데, 가사의 내용이 전도집회를 위한 제한된 주제를 다루고 있고 불신자나 초신자를 위한 극히 초보적인 신앙의 수준을 나타내는 곡이 대부분이어서 전도집회가 아닌 교회의 올바른 예배와 성숙한 신앙을 위한 영적인 노래가 되지 못한다. 초기 선교사들은 무지한 한국인들에게 신앙의 기초와 복음을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어린이의 수준에 맞는 이와 같은 복음가와 주일학교 노래를 교회 찬송가에 많이 포함시켰는데, 한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이 복음가들이 더 많이 불려지고 교회의 찬송가에 포함하게 되어, 복음가가 개신교의 공적 찬송가의 중심이 되고, 개신교는 복음가를 교회 찬송가의 전통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 우리가 부르는 『통일찬송가』의 내용은 대부분 극히 제한된 주제와 시대적 배경의 노래로 한국 초기 선교사에 의해 채택되고 번역된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신앙적 언어로 된 곡들이 많이 들어있다. 이러한 우리 찬송가의 곡의 구성과 내용만 보더라도, 우리가 부르는 『통일찬송가』는 수정하고 보완해야할 부분이 많이 있다고 판단된다.
한국에서 창작 찬송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전파될 때부터 있었으나 큰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 나운영과 박재훈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의 창작 찬송가들이 쏟아져 나왔고 현재는 그 수가 약 1500에서 2000곡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창작 찬송가들이 실려있는 찬송가집으로는 우선 1967년 당시 교회가 연합으로 쓰던 합동찬송가를 개정한 개편찬송가 이며 발행되었는데 여기에 한국인 창작 찬송이 모두 27곡 실려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1983년에 발행한 현행찬송가, 통일찬송가에는 이보다 줄어든 17곡인 전체의 3%밖에 되지 않는 한국인 창작 찬송이 실려있다.
찬송가의 편찬 목적은 첫째, 우리의 신앙고백을 우리 스스로가 하자는 것과, 둘째, 우리 정서에 맞는 찬송가로 찬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고백을 우리 스스로 하자는 것에는 별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우리 정서에 맞는 찬송을 만드는 것은 매우 미흡하다. 가락을 보아도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찬송이 많지 않고 작곡자의 이름만 가리면 현행 영미 계통의 수입찬송가와 다를 바 없는 곡들이 대부분이다. 가사적인 측면에서도 기존의 번역 찬송가의 가사와 내용상 별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올바른 찬송가는 예배에 있어서 그 예배를 더욱 은혜롭게 이끌며, 설교 이상의 교훈을 성도들에게 전하며, 성도들의 신앙의 고백과 기쁨을 대신한다. 또한 성도의 삶을 더욱 성숙하고 은혜롭게 만든다. 이러한 찬송가를 위해 필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교회가 더욱 성장하고 성숙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교인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찬송가가 이에 부응하여 변화되고 발전되어야 한다고 보며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2. 연구의 내용과 범위
필자는 먼저 올바른 찬송가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역사를 살펴보고 다음으로는 찬송가를 활용하는 예배와 예배찬송을 살펴보고, 우리 찬송의 나아갈 방향을 조명해 볼 것이다.
먼저 『통일찬송가』는 한국 기독교 교회의 여러 교단에서 쓰였던 찬송가를 중심으로 묶여져 있고, 『통일찬송가』의 곡의 유형과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국 찬송가의 역사와 유입경로 등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에 한국 찬송가의 역사적 편찬 과정을 아래와 같이 세 시대로 구분하여 찬송가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첫째, 1890년대에서 1908년에 걸친 선교사에 의해 주도된 찬송가 편찬 시기, 둘째, 1930년대의 선교사와 한국인의 공동 편찬 시기, 셋째, 1949년 이후의 한국인 주도의 찬송가 편찬시기로 나누어 다루려고 한다.
3장에서는 한국 창작 찬송가의 문제점을 살피면서 찬송가는 순수한 한국적이어야 하고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찬송가다워야 한다. 그리고 한국인 창작 찬송가가 몇 곡이나 되는지, 현주소를 알아보고 한국인 창작 찬송가의 한계를 알아본다.
4장에서는 바람직한 한국 창작 찬송가를 모색하면서 한국 찬송가의 가사와 곡조를 한국화 할 수 있는 전망을 알아보고 한국인이 창작한 찬송가를 쓰기 위해서 우리가락 찬송을 만드는 당위성과 만드는 방법론, 그리고 찬송가 한국화의 가능성을 성서적 측면에서, 사회적 측면에서, 교육적 측면에서 가능성을 알아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바람직한 한국 창작 찬송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Ⅱ.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역사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나라에는 이미 중국에서 찬송가가 들어와 있었다. 우리 나라의 찬송가의 역사는 선교사가 들어오기전 이미 시작이 되었다. 초기 한국 교회의 찬송가는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편집되고 발행되었다. 신정 찬송가」(1931)는 아펜젤러(Henny. G. Appenzeller)가 편찬 위원장이 되고 일반 위원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편집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우리 손으로 찬송가를 편집하여 발행하게 되었다.4)
한국 개신교 찬송가는 처음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함께 찬송가를 발행하여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찬양가」(1894)와 「찬미가」(1896)로 나뉘어 발행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최초의 통합 「찬송가」인「찬숑가」(1908)가 발행되고, 그 후 다시 감리교의 「신정찬송가」(1931)와 장로교의 「신편찬송가」(1935)로 나뉘어진다. 조국의 해방과 함께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당시에 교세를 확장한 성결교회가 참여하여 하나의 찬송가를 만들기로 결의하고「합동찬송가」(1949)가 발행된다. 그 후 「새찬송가」(1962)와 「개편찬송가」(1967)가 새로이 발행되고 「합동찬송가」도 함께 사용하였다. 이에 찬송가의 통합을 결의하고 오랜 노력 끝에 선교 100주년 기념으로 「통일찬송가」(1983)가 발행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파간의 통합된 찬송가의 발행을 위하여 노력하여 온 것이다.
통합된 찬송가들은 각 교파간의 이해가 얽혀 각기 사용하던 자신들의 찬송가에서 얼마나 많은 수의 찬송이 채택되느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지 내용의 발전에는 관심이 거의 없는 행정적인 차원에서 편집된 찬송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찬송가 통합의 주된 목적은 각기 다른 찬송가를 사용하는 데서 오는 불편을 없애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개정된 찬송가들은 전에 사용하던 찬송가보다 수준 높은 찬송가를 만들기 위하여 찬송가 개정 원칙을 정하고 찬송가 편찬에 임하였다. 그 결과 개정된 모든 찬송가들은 내용 면에서 전에 사용하던 찬송가들에 비하여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다.
찬송가의 통합을 가리켜 교회 연합이 발전되어 있는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색으로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신앙적 유산이라고5)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세계적으로 보아 통일된 찬송가를 쓰는 나라는 없다. 이는 각 교파간의 신학적 견해와 음악에 대한 문화적 배경, 찬송에 대한 전통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로교는 객관적 종교 경험을 중시하고 성서의 찬송을 운율화한 시편가를 사용하고, 감리교는 주관적 종교 경험을 중심으로 한 웨슬레의 찬송, 루터 교회는 독일 찬송(Chorale), 영국 교회의 찬송(Hymn)으로 사용하고 있다.
찬송가는 마땅히 각 교파간의 전통적인 찬송을 기초로 일반적인 찬송을 첨가하여 편집한 교파적인 찬송가가 바람직하며 그러한 찬송가가 세계적인 추세라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리나 문화적 배경, 찬송에 대한 전통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경우에도 무리한 통합은 찬송가 발전에 장애가 되었고, 서로 비교 발전할 수 있는 경쟁적인 기회마저 잃어서 찬송가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음을 우리 찬송가의 역사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6)
1. 선교 초기 선교사들의 편찬 시대 (1890년대 ∼ 1908년)
1) 『찬미가』(1892) : 최초의 번역찬송 모음집
한국어 번역 찬송이 최초로 출간된 것은 감리교 선교사들이 편찬한 『찬미가』이고 1892년 서울에서 출판되었다. 감리교 선교부에서 당시 번역되어 불려지던 한국어 번역찬송 27편을 모아 소책자로 만든 것이며 편찬 위원은 배재학당 교사였던 존스 목사와 이화 학당 교사인 로드웨일러 양이었다. 『찬미가』(1892)는 번역 찬송을 다 수록한 최초의 가사판 찬송가이며, 감리교 전용찬송가로 1895년 『찬미가』의 증보수정판이 나오기 전까지 사용하였다.7)
2) 『찬양가』(1894) : 최초의 악보 찬송가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1894년 출간한 『찬양가』는 한국 최초의 악보 찬송가로 117편의 찬송을 4성부 악보와 같이 찬송가로서의 규모를 갖춘 한국 찬송가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서양 음악 보급에 기초를 놓은 가장 중요한 찬송가라고 할 수 있다. 『찬양가』(1894)에 수록되어 있는 117편의 찬송 중에 9편은 우리 한국인의 창작 찬송이고 108편은 번역 찬송이다. 여기에 수록된 찬송은 언더우드의 번역이 가장 많다고 볼 수 있는데 총 25편이다.8)
처음에 찬양가는 장로교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부가 합의하여 같이 쓰기로 하고 존스(Jones)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일임하였으나 감리교 존스 선교사가 귀국하여 2년간 자리에 없는 동안 독자적으로 언더우드가 출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감리교와 장로교 일부에서 반대하게 되는데, 그 반대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년도 회의에서 결정된 편찬안과 틀리다.
둘째, 타인의 번역 찬송을 수록하면서 번역자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
셋째, 하나님으로 쓰기로 결정하였던 호칭 대신 '아버지' 혹은 '여호와'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넷째, 다른 사람이 번역한 찬송을 임의로 고쳤다.
다섯째, 장로교적 교회론을 간접적으로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이 때문에 일어난 마찰로 감리교회에서는 『찬양가』의 사용을 반대하게 되었다.9)
『찬양가』(1894)중 9곡(4장, 29장, 38장, 40장, 61장, 93장, 113장, 114장, 115장)은 한국인이 작사한 한국인의 창작 찬송이다. 『찬양가』(1894)에 수록된 한국인의 찬송으로 오늘날까지 불려지는 것은 한 편도 없으며, 백홍준의 창작찬송으로 알려진 "어렵고 어려오나"(『찬양가』93장)는 『찬숑가』(1908)에 수록되어 1930년대까지 불려졌다. 『찬양가』(1894)에 수록된 번역찬송은 18세기 영국의 복음적 찬송이 가장 많은데, 왓츠(Isaac Watts, 1674 - 1748) 13편, 웨슬리(Charles Wesley, 1707 - 1788) 7편, 뉴톤(John Newton, 1725 - 1807) 5편 등 42편이며, 19세기 영국찬송이 29편, 17세기 영국찬송이 4편으로 모두 75편의 영국 찬송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세기 미국 찬송은 26편인데 대부분이 복음찬송으로 불리스(P. P. Bliss, 1838 - 1876) 5편, 크로스비(F. J. Crosby, 1820 - 1915) 2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작시자 미상 찬송이 4편이며 주기도문, 송영(7장, 117장)으로 되어 있다.
【표1】
18세기 영국의 복음적 찬송 / 왓츠13편,웨슬리7편,뉴톤5편등42편
19세기 영국 찬송 / 29편
17세기 영국 찬송 / 4편
19세기 미국 찬송 / 26편(블리스 5편, 크로스비2편)
작시자 미상 찬송 / 4편
주기도문, 송영 / 7장, 117장
『찬양가』(1894)에는 88곡이 악보로 되어 있는데, 19세기 미국 찬송 곡이 60곡, 영국 찬송 곡이 19곡, 기타 9곡으로 미국 곡이 70%이다.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찬송가 작곡가인 메이슨(L. Mason, 1792 - 1872)이 작곡, 또는 편곡한 곡이 16곡으로 가장 많고, 블리스와 도온(W. H. Doane, 1832 - 1915) 등 복음찬송 작곡가들의 곡이 25곡으로 3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복음찬송들은 대부분 후렴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며, 생키(I. D. Sankey, 1840 - 1908)의 곡이『복음찬송가집』(Gospel Hymns, 1875 - 1891)에 수록된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전도집회 찬송이다.10)
3) 초기 장로교 찬송가 : 『찬셩시』(1895)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를 채택하지 않은 북부 장로회 선교부에서는 1895년 『찬셩시』라는 명칭으로 찬송가 54편을 수록한 새 찬송가를 가사판으로 출판하였는데, 한국인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번역찬송을 택하였다.
『찬셩시』에 수록된 번역 찬송은 『찬양가』(1894)에서 온 찬송 20편(언더우드 17편, 존스목사 1편, 펜윅 1편, 한국인 1편)과 새로 수록된 찬송으로 번역자가 확실한 찬송 13편(Mrs. Baird 10편, Miss Perry 1편, Miss Rothweiler 1편, G. H. Jones 1편)이 있고, 베어드 여사의 한국어 찬송 10편 중 5편(찬셩시12, 40, 41, 48, 50장)은 번역찬송이 아니고 한국어 창작 찬송인데, "예수 인도 하쇼서"(찬셩시 40장, 통일 421장)는 현행 『통일찬송가』(1983)에도 포함되어 있다.
『찬셩시』(1895)는 베어드 여사가 찬송가의 원 가사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곡조를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대체적인 내용을 한국어로 재구성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인이나 선교사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다.11) 그러나 『찬셩시』는 장로교의 또 다른 찬송가로서 번역찬송가의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고, 장로교 내에서도 북장로회 중심의 선교 지역이었던 서북지역에서만 주로 사용된 지역 한계성 또는 편중성 및 선교부에 따른 찬송가 구별 사용의 분파성을 대두시킨 측면도 없지 않다.12)
4) 초기 감리교 찬송가. 『찬미가』(1895)
최초로 찬송가가 발간된 것은 1892년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H. Jones) 목사와 로드웨일러(Louis G. Rothweiler)양이 공동으로 만든 『찬미가』였다. 여기에서는 악보 없이 노래만 적혀 있었으며 당시 널리 불려지던 번역찬송 27곡이 편집되었다.13)
감리교에서는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를 쓰지 않기로 하고, 1895년 감리교 선교부의 연차 모임에서 『찬미가』(1892)의 증보, 수정판을 출간하기로 결정했으며, 찬송 81편이 수록된 『찬미가』를 1895년에 출간하였다. 번역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다음과 같다.
【표2】
H.G.Underwood /「찬미가」14장, 21장, 22장, 23장, 50장, 52장, 56장, 58장, 61장, 65장, 66장, 67장, 73장 (총13편)
Mrs. Baird /「찬미가」29장, 31장, 32장, 33장, 40장, 41장, 62장, 63장, 74장, 80장 (총10편)
Mrs. Noble /「찬미가」39장, 49장, 77장 (총3편)
Mrs. Johnes /「찬미가」43장
Korean lady /「찬미가」53장
『찬미가』(1895)는 가사 판으로 가사의 원문인 영문가사 첫줄과 어떤 곡조인지를 알려주는 곡명, 운율, 곡조가 수록된 원 찬송가의 명칭과 장수를 표시해 주고 있어, 번역찬송들이 어느 찬송가에서 왔는지 알 수 있다.
【표3】
Methodist Hymnal (19C) /57곡
Gospel Hymnal (1883) /14곡
Epworth Hymns /3곡
Finest of the Wheat (1890) /1곡
Franklin Square Collection /1곡
「찬양가」(1894) /5곡
예배용 찬송은 대부분 『미국 감리교 찬송가』(Methodist Hymnal)에서 왔고, 전도집회 찬송인 복음찬송(Gospel Songs)이Gospel Hymns Consolidated 와 The Finest of The Wheat에서 왔으며, 성탄 케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찬미가』15장)"이 Franklin Square Collection에서 왔다. 『찬미가』(1895)에는 총 81편 중 18편이 19세기 미국의 복음찬송이다.14) 이 찬송가에서 처음 신의 칭호를 '하나님'으로 사용하였으며 전체 번역에서 언어의 구사가 조금 부드럽게 표현되었다.15)
5) 『찬미가』(제2판, 1895)
감리교에서는 언더우드의 『찬양가』의 사용을 거부하는 존스(George H. Jones) 목사와 로드웨일러(Louis G. Rothweiler) 공편으로 1895년에 『찬미가』를 발간하였다. 이것은 1892년의 『찬미가』를 수정 보충하여 81편의 찬송을 수록하고 있는데 악보는 실려 있지 않고 곡명과 미국 「감리교 찬송가」(Methodist Hymnal)의 페이지 표시로 곡조를 지시하고 있다.16)
6) 『찬미가』(제3판, 1897)
『찬미가』(1895)에는 81편이 수록되었는데, 여기에 9편을 첨가하여 90편이 수록된 『찬미가』(제3판)가 1897년에 나왔다. 여기에 한국인의 창작찬송 두 편이 새로 나타났다. "우리 죄악 심중하야" (『찬미가』87장)는 배재대 학생이, "유태 국에 나신 구주" (『찬미가』89장)는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작사했다. 『찬미가』(1897)에는 십계명과 주기도문, 그리고 사도신경이 수록되었다.17)
7) 최초로 운율시편가가 수록된 『찬셩시』(1898)
『찬셩시』(1895,초판)의 제 2판은 1898년에 가사 판으로 84편으로 증보되어 출간되었는데 장로교 예배 음악의 특징인 운율시편가가 14편이 수록되어있다. 14편의 운율시편가는 주로 미국 찬송가 곡조에 넣어 부르도록 운율 화한 것인데 한국 최초의 구약 한글 역인 『시편촬요』(1898)의 번역자 피터스(Alexander A. Pieters, 1872 ∼ 1958)가 한국어로 운율 화한 것이다. 피터스는 시편 62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시편촬요』를 출간했는데 여기에 수록된 시편중 『찬셩시』(1898)에 14편(시편 3편, 8편, 19편, 20편, 23편, 67편, 95편, 100편, 114편, 121편, 124편, 126편, 130편, 138편)이 운율화 되어 나타났다. 현행 『통일찬송가』(1983)에는 14편의 운율시편가 중 다음 5편이 수록되어 있다.
【표4 : 『통일찬송가』(1983)에 수록된 피터스의 운율 시편가】
찬셩시(1898) // 통일 찬송가(1983)
시편 편수/ 가사 첫 줄 / 장 //가사 첫 줄 / 장
시편 20편/너의 환난 만날 때에/74 //내가 환난 당할때에 /428
시편 67편 /쥬여 우리 무리를 /76 //주여 우리 무리를 /47
시편 121편 /눈을 들어 산 보리니 /79 //눈을 들어 산을 보니 /433
시편 130편 /내가 깁흔 곳에서 /82 //내가 깊은 곳에서 /479
시편 138편 /내가 일심으로 /83 //내가 한 맘으로 /17
『찬셩시』(1898)에 수록된 84곡 중 60%인 50곡이 『미국 장로교 찬송가』(N. L. D - The New Laudes Domini, 1892)에서 왔는데 이것은 당시 미국의 보수적이며 복음 적인 남부 장로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찬송가로 장로교 목사 로빈슨(Charles S. Robinsos)이 편찬했고 찬송가 가사 1228편과 800여곡의 곡조가 수록된 우수한 찬송가로, 한국에 온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이 『미국 장로교 찬송가』를 표준 찬송가로 사용했다. 『찬셩시』(1898)에 있는 84곡 중 9곡은 『복음찬송가』(Gospel Hymns)에서 온 것으로, 이것은 쌩키와 맥그라나한(J. McGranahan), 스테빈스(G. C. Stebbins)가 펴낸 미국의 유명한 『복음찬송가』(Gospel Hymal)의 제1집에서 제4집까지의 합병 판인데, 1883년 『복음찬송가』Gospel Hymns Consolidated로 나온 책이다.18)
그 밖에 한 곡은 미국의 부흥회 노래집 (The Finest of the Wheat, 1890)에서 왔으며 그 밖의 20여곡은 자료를 표시해 주지 않았다. 이 책은 『찬양가』나 감리교의 『찬미가』보다 훨씬 쉽고 세련된 번역찬송가가 다수 포함하게 되는데, 이는 베어드(A. L. Baird)여사와 밀러(F. S. Miller)목사의 번역이 다수 수록되었기 때문이다.19)
8) 『찬미가』(제5판, 1900)
『찬미가』(제5판)는 글자를 크게 하여 노인들이 보기 쉽게 하였고, 찬송가 수도 이전보다 많은 176장을 수록하였으며, 존스 목사와 로드웨일러양이 편찬하였다.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총 176곡 중 125곡이 『미국 감리교 찬송가』(Methodist Hymnal)에서 온 것이고, 6곡이 『미국 장로교 찬송가』에서 온 것으로 이들은 표준 찬송가로 분류되는 것이며, 미국의 부흥회 노래 집인 『복음 찬송가』(Gospel Hymns, 1883)에서 온 것이 24곡, 다른 부흥회 노래 집인 Thy Finest of the Wheat에서 온 것이 7곡으로 31곡이 19세기 부흥회 노래 집에서 온 것이다.20)
이 책에는 특히 '교회에 학습할 사람이 밧난 레문', '쟝셩한 사람 셰례 례문', '쥬의 성만찬 베프난 례문' 등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21)
9)『찬셩시』(제3판, 1900)
이 책은 『찬셩시』(제2판 1898)보다 3편이 증보되어 87편이 수록되었는데, 이 3곡은 한국인의 창작곡이다. 추가된 곡은 다음과 같다.22)
【표5】
찬 셩 시(1900) // 통일 찬송가(1983)
장수 / 가사 첫 줄 // 가사 첫 줄 / 장 수
85장 / 턴부님께 빕니다 // 성부님께 빕니다 / 286장
86장 / 지나간 밤 보호하사 // 지난 밤에 보호하사 /66장
87장 / 턴디간의 가득하고 // 천지 주관 하는 주님 /244장
10) 『찬미가』(제6판, 1902)
감리교의 『찬미가』제5판의 176편보다 29편이 증보되어 205편이 수록되었으며 가사 판으로 출간되었다. 노블(W. A. Noble)여사의 새 번역 찬송이 몇 편 수록되었다고 전해지나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23)
11)『찬셩시』(1902)
찬송가 109편과 시편 14편의 모두 123편이 수록되었는데, 『찬셩시』(1900년 제3판)보다 37편이 증가되어, 『찬셩시』(1905년) 73 - 109자이 새로 수록된 찬송으로 간주된다. 24)
12) 『찬미가』(최종판, 1905)
『찬미가』(1902년, 제6판)에는 찬송가 205편이 수록되어 있다. 『찬미가』(제7판)는, 감리교회의 찬미가 교정위원에 의해 수정, 편찬되어 찬송가 183편과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외에 주일예배예문, 세례, 학습, 성찬예문, 결혼식, 장례식 예문 등을 수록한 초기 감리교의 최종판 『찬미가』이다. 『찬미가』(1905)목차에는 『찬셩시』에서 31편, 『찬양가』에서 1편, 『찬양가』와 『찬셩시』에 모두 수록된 찬송 중에서 3편, 모두 35편이 장로교 찬송가에서 왔음을 표시해 주고 있어, 감리교가 장로교의 우수한 찬송을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5)
이 『찬미가』(1905년 제8판)도 가사 판으로 감리교의 『찬미가』는 악보 판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수록 찬송곡 183곡의 원자료 찬송가집의 명칭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26)
【표6】
미국 표준 찬송가집
Methodist Hymnal(19C) 미국 감리교 찬송가 / 119곡
New Laudes Domini(1892) 미국 장로교 찬송가 /6곡
복음 찬송과 부흥회 노래집
Gospel Hymnal Complete(1894) /40곡
Finest of the Wheat(1890,1892) /6곡
Church Hymnal and Gospel Songs(1898) /4곡
Young People's Hymnal /3곡
Epworth Hymnal /1곡
Sacred Songs and Solos(1873) /1곡
표시 없는 것 /3곡
13) 『찬셩시』(악보판, 1905)
선교 초기에 발행된 찬송가 중 악보판은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년, 초판)와 『찬셩시』(1905)뿐이며, 『찬미가』는 악보판을 내지 못하였다.27)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는 128쪽이나 되며 117편 찬송을 수록하였다. 이 찬송가가 나옴으로써 부르는데 산만하였던 어려움 들이 점차 해소되었으며 찬송가가 정착되게 되었다.
내용으로는 왓츠(13편)와 웨슬레(7편)를 비롯한 18, 19세기 영국계 찬송 60여편, 미국 찬송 20여편 등 영국과 미국의 복음 찬송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 창작 찬송이 7편이 들어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다.
『찬양가』는 서상륜과 최오명 등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번역되었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편찬하였다.28)
『찬셩시』(1905)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한 것으로 악보는 4성부로서 『찬양가』(1894)와 같이 일절 가사만 악보 사이에 넣고 가사 전체를 악보 밑에 넣었다. 『찬셩시』(1905)에는 찬송가 137편과 피터스의 운율 시편가 14편으로 총 151편이 수록되어 있다.
『찬셩시』(1905)에 수록된 곡조의 원자료 찬송가 집은 다음과 같다.
【표7】
원 자 료 집 명 칭 / 수록곡수
① New Laudes Domini(1892) /91곡
② Gospel Hymnal Consolidated(1883) /24곡
③ Gospel Hymnal No.5(1887) /8곡
④ Church Hymnal and Gospel Songs(1898) /2곡
⑤ Finest of the Wheat(1890) /1곡
⑥ Epworth Hymnal /1곡
⑦ Songs for Young People /1곡
⑧ Presbyterian Book of Praise /1곡
⑨ Canadian Presbyterian Book of Praise /1곡
『찬셩시』(1906년, 가사판)에 나타난 찬송 곡의 원자료는 모두 9종류로 총 151곡 중 91곡이 『미국 장로교 찬송가』에서 온 것이고 찬송가집 ②, ③, ④, ⑤번은 19세기 미국의 복음 찬송가 집으로, 부흥회 노래로 되어있는 것들이다. 한국 초기의 장로교 찬송가는 19세기 『미국의 장로교 찬송가』에서 표준 찬송가를 가져왔으며, 그 밖의 복음찬송들은 19세기 미국의 『복음찬송가』에서 주로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29)
14) 최초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통일찬송가인 『찬숑가』(1908)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기『찬양가』, 『찬성시』, 『찬미가』를 사용하여 오던 중, 장로교 공의 회는 1902년 찬송가의 통합을 결의하고 1905년에 감리교와 합동하여 찬송가의 공동 편찬과 발행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찬숑가』(266장)를 조선 예수교 서회 발행으로 출판하였다. 최초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통합 찬송가인 『찬숑가』가 이루어진 것은 1906년 베어드(Mrs. W. M. Baird)와 밀러(F. S. Miller), 그리고 벙커(D. A. Bunker)등이 모여 의논한 결과이다.30) 이들의 합동원칙은 이미 사용하던 찬송가를 토대로 새 찬송도 첨가하되 말은 존경어로 구조가 명확하며 의사가 정당하고 교리에 적절한 것만 쓰기로 하였다. 이 찬송가는 1908년 출간되었는데 가사 판으로 262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찬숑가』(1908)란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악보 판은 출판비 관계로 1909년 피터스 목사 내외의 도움으로 사적으로 출판하였다. 『찬송가』(1908)에 수록된 곡조의 원자료집(총 262곡중)은 다음과 같다.
【표8】
원자료집 명칭 / 수록 곡수
① New Laudes Domini (N. L. D) /155곡
② Gospel Hymnal Complete /70곡
③ Church Hymnal and Gospel Songs /8곡
④ Finest of the Wheat /6곡
⑤ Epworth Hymnal /1곡
⑥ Young People's Hymnal /1곡
⑦ Songs for Young People /1곡
『찬숑가』(1908)에 수록된 262곡 중 155곡이 『미국 장로교 찬송가』에서 왔고, 70곡이 『복음찬송가집 완성판』(Gospel Hymnal Complete, 1894)에서 왔으며 8곡이 『복음성가집』(Church Hymnal and Gospel Songs, 1898)에서, 그리고 6곡이 『복음 찬송집』(Finest of the Wheat, 1890, 1894)에서 채택한 것으로 84곡이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부흥회 노래 집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찬숑가』(1908)에 수록된 262곡중 삼분의 일을 19세기 미국의 부흥회 노래가 차지하고 있고, 『찬셩시』나 『찬미가』보다 복음찬송(Gospel Song)이 증가되었음을 보여 준다. 『찬숑가』(1908)는 1930년대에 감리교의 『신정찬송가』(1931)와 장로교의 『신편 찬송가』(1935)에 220여편, 현행 『통일 찬송가』(1983)에 178편이 수록되어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핵심을 이루어온 찬송가라고 할 수 있다.31)
『찬숑가』(1908)의 번역은 선교초기 찬송가 중 가장 세련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 번역자중 가장 공헌이 큰 베어드 여사의 번역과 편찬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베어드 여사의 번역이 탁월한 이유에 대하여 민경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문학적 기량은 섬세하였고, 깊은 경건 속에 있었으며, 그의 찬송가는 유난히 무리 없는 소박한 신앙의 감격을 노래하는 문체를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한국말을 리듬의 차원에서 첫째 음절에 악센트를 가진 강약 조가 악센트가 없는 음절로 시작되는 약강조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한문에서 나온 어색한 말들 대신에 아주 평범한 일상어를 구사한 점 등의 이유가 있다」32) 라고 말한다.
이 『찬송가』의 장점을 정리하면:
첫째, 6곡의 한국 고유의 곡조로 부르게 된 것과
둘째, 한국 고유의 곡을 붙인 찬송은 교창으로 부를 수 있게 하였고,
셋째, 절기 찬송 12곡을 묶었다. (성탄절 찬송 6곡 : 제66 - 71장, 부활절 찬송 6곡 : 제81 -86장)
넷째, 번역문이 세련되고 완벽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찬송가』악보 판 초판은 1909년 피터스목사 부부에 의해 출간되었는데 이는 자금이 부족하여 출판 경비를 사적으로 충당하여 일본 요꼬하마에서 인쇄한 것이다. 『찬숑가』(1908)보다 4편이 추가되어 266편으로 증가되었고, 267장은 '백만명 구령가(A Million Souls for Jesus)'가 수록되어 있다.
『찬숑가』의 악보 판 제2판은 1916년 출간되었는데 피터스 목사 부인이 부르기 쉽도록 곡조를 낮게 건조한 것이 특징이며, 출간된 지 4개월만에 매진되었다. 악보 판 제3판은 1922년에, 제4판은 1925년에 발간되었다.
『찬숑가』(1909, 악보 판)는 세 번째 발간된 악보찬송가 이지만 한국 교회의 부흥기에 20여 년을 사용해 왔으며, 여기에 수록된 19세기 미국의 찬송가 곡조와 주일학교 노래, 그리고 부흥회 노래(Gospel Song)가 한국교회음악의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33)
15) 장로교 감리교 찬송가의 분열
1924년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 공의회에서 그 첫 해 사업으로 『신정 찬송가』의 발행을 결의하고 1928년 그 편집을 시작하여 4년동안 계속하여 1931년에 출판하게 된다. 총 314장의 찬송 중의 『찬숑가』에서 반 수 이상을 채택하였고 새로운 70여 곡의 찬송은 『청년 찬송가』(한국 청년을 위한 찬송가)에서 70여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번역하여 채택한 것은 아주 적은 수이며, 공개 응모를 통한 한국인 찬송시 6편이 포함되어 편집되었다.34)
최종 개정 위원에 한국인 위원 김인식과 변성옥 목사가 참여한 것이다. 찬송가 편집에 한국인 위원이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이 문서상으로 나타난 것은 『신정 찬송가』가 처음이라고 생각된다.
찬송 개정 원칙은 7개로 정하고 그를 기준으로 하여 개정을 하였는데, 특히 음악과 우리 말의 음절과 어세와 음악의 결합에서 많은 고심을 하였고 찬송가학이 발달한 후에 이 문제를 해결하여 줄 것을 후세에 부탁하고 있다. 다음은 신정 찬송가의 7가지 개정 원칙이다.
① 우리말 번역이 원문에 가까운지?
② 번역이 아닌 찬송은 잘 쓰여지고, 찬송으로 쓸만한지?
③ 가사가 음악의 리듬과 어세가 일치하는지?
④ 전에 사용하던 음악에서 교정된 것인지?
⑤ 전에 사용하던 음역이 적당한지?
⑥ 절수를 줄여도 무방한지?
⑦ 곡조가 찬송으로 적합한지? 그렇지 않으면 더 나은 것이 없는지?35)
이렇게 『신정 찬송가 』는 『찬숑가』를 기초로 하여 개정한 찬송가로 많은 발전이 있는 찬송가이나 장로교 총회에서 총회와 협의 없이 출판하였다하여 사용을 거부하였다.36)
이 7가지 외에도 『찬숑가』에 있던 "조선구곡은 좋지 못한 사회와 관계에 있어서 불합리하다"는 위원들의 반대를 중시하여 삭제하였다.37) 그런데 이 『신정 찬송가』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장로교 총회는 장로교 총회와 협의 없이 출판하였다는 점과 교열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사용을 거부했다. 이런 반발과 문제들을 당시 신문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 박경호는 『신정찬송가』에 있어서 가사의 수정이 너무 지나쳤다고 비평했다. 예를 들어 『신정 찬송가』의 "태양빛 보다 더 밝은 곳"보다는 구 찬송가에 있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이 더 낫고 구 『찬숑가』는 수 십여 년 동안 조선 각 교회에서 사용되었으므로 교인들이 좋아하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 "예수 일흠 권세여" "내 주를 가까이" "성재 성재 성재"(거룩 거룩 거룩)와 같은 여러 장의 40만 교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마음에 밝혀서 그들의 민요가 되고 전설이 되어 왔는데 이런 것을 전부 정정하고 장수까지 모두 바꾼 것은 충분한 고려 없이 편집한 것이라고 했으며 또한 평양 신학교 음악 강사 권태희는 "구 찬송가 제 10 ∼ 14장"은 조선 구곡에 맞추어진 것인데 그것이 비록 단순한 곡으로 되어 있을지라도 이런 찬송가를 제거해 버린 것은 잘못이다. 박경호는 "신구 책에 있는 곡조가 자체로서는 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서양 곡에 서투른 조선 민족이 불러야 할 서양 곡이라면, 반드시 또한 많은 고려와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조선사람은 선율적이요, 운율적인 동시에 화성적은 아니다. 곡조의 선택은 조선 사람의 음악적 경향을 잘 이해하는 음악 전문가에게 맡겨주시오"라고 하였다.38)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우리 나라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주장들이라 볼 수 있다. 권태희의 "구 찬송가 제 10 ∼ 14장"은 조선 구곡에 맞추어진 것인데 …… 이런 찬송가를 더 요구할지언정 제거 해 버린 것은 잘못이다. …… 라는 주장과, 박경호의 서양 곡에 서투른 조선 민족이 불러야 할 서양 곡이라면, 반드시 또한 많은 고려와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조선사람은 선율적이요, 운율적인 동시에 화성적은 아니다. 곡조의 선택은 조선 사람의 음악적 경향을 잘 이해하는 음악 전문가에게 맡겨주시오"라고 한 주장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발언들이다. 김교신도 "이것이라면 개정인가 개요인가, 신앙 없는 음악가의 찬송가 편찬과, 조선말 모르는 박사의 성서개역이 조선에만 볼 수 있는 일이니 반도의 영계도 탄식하지 않는가"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선교사들의 주도로 되어 민족 주체성을 무시하였다는 비판이었다.39)
그리하여 장로교 총회는 1934년 "찬송가는 종교교육부에 맡겨서 더욱 잘 편찬하도록" 가결하였다.40) 결국 장로교 총회 종교 교육부는 1935년 6월에 『신편 찬송가』(400장)를 발행하였다. 『신편 찬송가』는 『찬숑가』, 『신정 찬송가』, 『부흥성가』측에 허락을 얻어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편찬하였고 부흥성가의 복음가를 채택한 것은 새로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편 찬송가』는 오늘과 같은 새로운 철자법에 의해 출판된 최초의 찬송가이다.41) 편집 위원장은 종교교육부 총무 정인과였다. 여기에서 판권을 둘러싼 이권의 개재가 있어서 한국 기독교사에 오점을 남겼다. 42)
2. 선교사와 한국인 공동 편찬시대 (1930년대)
1) 감리교 찬송가인 『신정 찬송가』(1931)
『신정 찬송가』(1931년, 초판)는 최초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찬송인 『찬숑가』(1908년, 초판)를 개정, 증보한 찬송가로 번역의 원문에 충실하여 찬송가로서의 합당성 여부를 가사와 그 억양의 음 곡과의 어울림 문제, 음곡 자체와 그 편곡 등을 제정 기준으로 삼아 편집했다.43) 원래는 장로교와 감리교 공용 찬송가로 편찬되었으나 장로교가 『신편 찬송가』(1935년, 초판)를 발행하였기 때문에 『신정 찬송가』(1931)는 감리교 전용 찬송가로 『합동 찬송가』(1949)가 나오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장로교, 감리교의 연합공의회는 1924년 명칭을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로 바꾸고 첫 연합사업으로 새로운 찬송가의 발간을 추진하였다. 위원장은 아펜젤러(Henry D. Appenzeller)였으며, 위원으로는 감리교의 변성옥과 장로교의 김인식, 그리고 장로교 선교사 공위량(William C. Kerr)등이 활약했다. 공위량 선교사의 안식년 때는 안대선(W. J. Anderson)선교사가 대신하였다. 총314장을 선정하였는데 그 중 반수이상이 『찬숑가』(1908)에서 택한 것이고, 70편이 『청년찬송가』(1922)에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 6편은 한국인 창작찬송으로 응모를 통해 채택된 것이며 나머지는 새로운 번역찬송이었다.
『신정 찬송가』(1931)에 수록한 한국인 창작 찬송가는 다음과 같다.
【표9】
장 수 / 가사 첫 줄 / 작사자
89 / 눈물밧헤 떠러진 / P.K.Ko(고황경)
126 / 캄캄한 밤 쌀쌀한 바람불때 / Helen Kim(김활란)
196 / 캄캄한 밤중에 뷘들에서 / P.Oh(오빈)
158 / 예수는 우리의 생명되고 / C.M.Kim
219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 Nam Kung Ok(남궁억)
230 / 금슈강산 내 동포여 / Bessie Im(임배세)
『신정 찬송가』(1931)에 대한 비평 중에는 익숙하게 쓰고있던 가사를 너무 많이 수정했다는 당시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 박경호의 지적이 있었으며, 또한 곡조의 논란으로 조선 고유의 곡으로 된 구곡을 없앤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평양신학교 음악강사 권태희의 지적이 있는 등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한국인 위원들의 반대로 제거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를 민경배 교수는 한국 전통의 전설이나 민담의 심층 구조가 기독교에 전입될 가능성에 대한 초대 우리 교인들의 경계를 살필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아무리 토착적이고 민족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도덕성이나 회개의 문제와 상충한다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을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44) 반대로, 새로운 찬송을 많이 편입한 점과 가사와 음악의 억양을 조화시킨 점, 곡조를 원래대로 환원한 점, 가사의 번역을 원문에 가깝게 한 점등의 장점도 가지고 있다.
『신정 찬송가』(1931)에 처음 수록된 찬송가로 『통일 찬송가』(1983)에 포함된 것은 61편으로 다음과 같다 : 16장, 25장, 31장, 48장, 58장, 59장, 63장, 70장, 75장, 93장, 96장, 98장, 109장, 110장, 111장, 112장, 116장, 118장, 130장, 131장, 138장, 146장, 148장, 154장, 160장, 207장, 217장, 234장, 240, 245장, 246장, 247장, 255장, 270장, 283장, 297장, 310장, 312장, 318장, 320장, 321장, 327장, 335장, 336장, 338장, 347장, 358장, 359장, 360장, 371장, 373장, 383장, 394장, 395장, 398장, 410장, 414장, 423장, 429장, 432장, 443장, 448장, 458장, 471장, 477장, 490장, 499장, 523장, 537장, 540장, 548장.(통일 찬송가 장수).45)
2) 장로교 찬송가, 『신편 찬송가』(1935)
1922년에 열린 장로교 총회(제21회)에서는 『신정 찬송가』(1931)는 총회와 협의 없이 출판되었고 교열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원래 장로교 감리교 연합찬송으로 편찬된 『신정 찬송가』(1931)의 채택을 거부하고, 1943년 장로교 총회(제23회)에서는 종교 교육부에 맡겨서 더욱 잘 편찬하도록 가결하였다. 장로교 총회 종교 교육부는 1935년 6월에 『신편 찬송가』를 발행하였는데, 편집위원장은 종교교육부 총무인 정인과였다. 이리하여 『신정 찬송가』(1931)는 감리교회에서만 사용하고 장로교회는 『신편 찬송가』(1935)를 사용하므로 한국 교회는 1930년대에 찬송가를 둘러싸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불화가 노출되었다.46)
『신편 찬송가』(1935)는 총 400장으로 되었는데 구 『찬숑가』(1908)중 늘 부르지 않는 것 40장을 삭제하고, 『신정 찬송가』등 좋은 것 70장과 새 찬송가 100장 가량을 첨부했다. 그러나, 『찬숑가』(1908)와 찬송가 장수를 같게 하고 빠진 것만 새 찬송으로 첨가하여 교인들이 찾기 쉽게 하였다.
1935년 7월 1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종교 교육부 부장 장홍범이 쓴 『신편 찬송가』(1935년, 초판)의 서문에 새로 번역된 찬송가는 미국 장로교 총회 종교 교육부에서 최근에 발행한 새로운 찬송들을 적지 않게 넣었고, 현재 조선 교회의 사정과 요구에 응하여 부흥가를 다수 편입하였는데, 그 중에는 성결교의 『부흥가』에서 가져온 것이 여러 장 되며, 찬송가 취택 여부를 300여명의 조선 목사와 교회 찬양대 인도자 40여명의 의견을 들어서 했다고 나타나 있다. 또한 1937년의 제 3판부터는 처음으로 교독할 시편 교독문이 수록되었다.
『신편 찬송가』(1935)는 『합동 찬송가』(1949)가 나오기까지 장로교 전용 찬송가로 사용되었는데, 『찬숑가』(1908)에서 220여편을 그대로 택하고 가사도 개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찬숑가』(1908)를 계승하는 한국 교회의 찬송가의 주류가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정인과 총무는 1937년 종교교육부에서 사임하였으나 『신편 찬송가』의 판권을 개인 명의로 하여 해방 이후까지 불법 이득을 보았으며, 찬송가 편찬에 관계하여 불만스런 오점을 남겼다.47)
『신편 찬송가』(1935)에 처음 수록된 찬송가로 『통일 찬송가』(1938)에 포함된 것은 61편으로 다음과 같다. : 2장, 24장, 27장, 33장, 41장, 65장, 68장, 73장, 74장, 76장, 78장, 88장, 105장, 107장, 120장, 123장, 140장, 156장, 157장, 165장, 171장, 172장, 179장, 205장, 235장, 248장, 258장, 265장, 267장, 276장, 278장, 279장, 290장, 292장, 298장, 301장, 324장, 330장, 333장, 352장, 353장, 356장, 357장, 361장, 363장, 369장, 418장, 436장, 439장, 455장, 463장, 466장, 469장, 470장, 472장, 479장, 514장, 526장, 539장, 542장, 543장,(통일 찬송가 장수).48)
3) 성결교 찬송가, 『부흥성가』(1930)
성결교회는 미국의 감리교 신자였던 카우만(C. E. Cowman, 1868 ∼ 1924)선교사 내외가 일본 동경에서 1901년 창설한 개신교 예수교 종파로, 처음에는 교회 이름을 "복음 전도관"이라고 하였다. 이 교파의 창립 정신은 '전도'에 힘을 쓰는 일이었고, 이에 전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성서 학원을 세우게 된다. 1905년에는 동경의 동경성서학원을 중심으로 성결교의 전신인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ty Society)가 창설되었고, 1917년 교회 조직을 바꾸어 동양선교회 "성결(Holiness)교회"로 발전하였다. 한국에서는 동경성서학원을 나온 김상준이 1907년 5월 30일 종로 염동에 "동양 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세운 것이 시초이며, 그 이후 1921년 교회 이름이 "성결교회"로 바뀌었는데, 이때 사용한 성결교회의 찬송가는 미국의 부흥회 노래인 복음찬송을 번역하여 『복음가』(Gosple Song Book)라는 명칭으로 출간되었고, 후에는 『부흥성가』(Holy Revival Hymns)라는 명칭으로 출간되었다.
동양선교회의 최초 찬송가 집은 『복음가』인데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찬송가의 신앙적 특징은 19세기 후반 미국 교회에서 널리 애창되던 복음성가의 주류 그대로였다. 곧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과 구원 얻은 기쁨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간증하는 일,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이 그 감격으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전도한다는 그런 것들이었다. 또한 이 선교회의 전도 요체인 사중복음(四重福音), 즉 확고한 구원, 성결한 생활, 신유의 신앙, 재림의 신앙, 그런 것들이 골격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강렬한 신앙 고백이 이 『복음가』의 특징이었다.49)
이것의 증보판이 『신중 복음가』(New Gosple Song)인데 1919년에 악보 판으로 출간되었고, 이것의 재판인 『신중 복음가』(1924년 악보 판)에는 11곡이 추가된 211곡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다시 『신중복음가』(1924)에 31편이 증보되어 1930년에는 『부흥성가』(Holy Revival Hymns)라는 명칭으로 출간되었는데, 총242곡이 수록되어있고, 하인스(P. E. Haines)목사의 부인과 렴형우라는 한국인이 31편의 새로운 찬송가를 선택하여 번역하였다. 특별히 원래의 작사, 작곡가에게 저작권 사용 승인을 받은 점이 특징이다.50)
1937년 발간된 『부흥성가』(제10판)에는 245장으로 3편이 증가되었는데, 이 증보된 3편중에는 『통일 찬송가』(1983) 449장인 "이 세상의 친구들"이 들어가 있다.
『부흥성가』는 1949년 『합동 찬송가』에 거의 흡수되어 한국 개신교 찬송가에 중요한 주류를 이루는 미국의 복음 찬송의 유입을 증가시킨 중요한 자료가 된 찬송가이다.
『통일 찬송가』(1983)에 수록된 찬송가 중 88편이 성결교의 『복음가』와 『부흥성가』를 통해 처음 유입된 부흥회 노래(Gosple Song)인데, 『신중 복음가』(1919)에서 64편, 『신중 복음가』(1924)에서 5편, 『부흥성가』(1930)에서 18편, 『부흥성가』(1937)에서 1편이 왔다.
『통일 찬송가』(1983)에 수록된 『신중 복음가』(1919)에서 온 찬송가 64편은 다음과 같다. : 6장, 43장, 71장, 82장, 83장, 91장, 99장, 133장, 135장, 142장, 162장, 163장, 164장, 168장, 189장, 190장, 193장, 194장, 195장, 199장, 200장, 202장, 204장, 206장, 211장, 213장, 214장, 220장, 222장, 224장, 231장, 233장, 251장, 253장, 262장, 275장, 281장, 308장, 331장, 334장, 388장, 393장, 399장, 400장, 401장, 402장, 403장, 408장, 409장, 412장, 416장, 425장, 456장, 459장, 484장, 486장, 489장, 502장, 510장, 528장, 532장, 541장,(통일 찬송가 장수).51)
『통일 찬송가』(1983)에 수록 된 『신중 복음가』(1924)에서 온 찬송가 5편은 다음과 같다. : 191장, 208장, 417장, 485장, 544장(통일 찬송가 장수).52)
『통일 찬송가』(1983)에 수록된 『부흥성가』(1930)에서 온 찬송가 18편은 다음과 같다. : 72장, 97장, 158장, 210장, 223장, 226장, 259장, 271장, 293장, 387장, 392장, 427장, 446장, 464장, 473장, 482장, 483장, 505장,(통일 찬송가 장수).53)
3. 한국인 편찬시대(1945 ∼ 1994)
1.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합동 찬송가』(1949)
1930년대 각 교파들이 각기 다른 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인식하고 1946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가 찬송가 통합에 동의하였다. 이에 각 교파가 2명씩 찬송가 합동 연구위원회를 파견하여 1년간 연구를 거듭하였다.54) 여기서 세 교파는 그들이 사용하는 찬송가 중에서 각 교파의 특이한 것은 전부 편입하기로 하고, 공통된 것은 가사를 적절히 선택하여 편찬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1948년 각 교파 총회에서 5인씩을 선정, 파견하여 한국 기독교 연합회 주재 하에 합동을 추진하였는데, 그 결과 부록에 성경 교독문을 첨부하여 찬송가라는 명칭으로 『합동찬송가』(586장)가 1949년 발행되었다. 이 『합동 찬송가』는 신편 찬송가에서 거의 100%, 『신정 찬송가』에서 약 9%, 『부흥성가』에서 약 9%가 채택되었다.
성결교회가 『합동 찬송가』통합에 참가한 것은 새로운 일이며, 이로 인해 새로운 결과가 나타났다. 『신편 찬송가』와 『신정 찬송가』는 약 40%의 『복음가』를 포함하고 있으며, 『부흥성가』는 약 80%의 복음가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새 찬송가를 합본한 합동 찬송가는 약 55%의 복음가를 포함한 찬송가가 되었다. 그 외에도 별다른 연구 없이 합본한 관계로 같은 곡조에 유사한 가사의 찬송이 중복되었고, 많은 수의 복음가, 외국 국가와 민요, 세속 곡조 등이 비판 없이 편집 발행되어, 전에 출판된 장로교와 감리교가 사용한 찬송가에 비교하면 아주 수준 낮은 찬송가가 되었다. 그래서 합동 찬송가는 통합이외에는 의미도 발전도 없는 찬송가가 된 것이다.55)
찬송가는 총 586장 그리고 교독문은 시편28편과 기타성구 10편 이외 총 38편의 교독문이 찬송가 뒤에 첨부되었다.56)
2. 『새찬송가』(1962)
『합동 찬송가』의 사용을 거부하고 『신편 찬송가』를 사용하여 오던 장로교 고려 파 총회는 1957년 독자적으로 찬송가 편찬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1959년 장로교 합동 측은 세계교회협의회(W. C. C)를 탈퇴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를 결의하고 동시에 계속하여 참가하여 오던 『합동 찬송가』의 출판 사업도 하나의 에큐메니칼 계획이라 선언하고 합동 사업에서 탈퇴하였다. 그리고 『합동 찬송가』의 사용을 거부하고 『신편 찬송가』를 사용하여 오던 장로교 고려파는 새로운 찬송의 편찬을 위하여 자체적으로 찬송가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와 같이 장로교 고려파 총회와 합동측 총회의 두 위원회가 서로 달리 찬송가 편찬 사업을 벌이던 중 1960년 12월 13일 두 총회가 연합하게 되고, 그 기념 사업의 하나로 1962년 『새찬송가』(671장)를 편찬하였다.57)
『새 찬송가』(1962)는 총 671장인데 『신편 찬송가』를 기초로 구미 각국의 우수한 찬송을 첨부하여, 원작에서 직접 번역하는 원칙으로 편찬되었는데, 새로운 찬송으로 독일찬송(새찬송가 15장, 17장, 48장, 79장, 181장, 391장 등)과 일본찬송(새찬송가 192장, 566장, 580장, 597장 등)의 새로운 찬송들이 소개되었으나, 한국인 창작 찬송은 첨가되지 않았다.
『새찬송가』(1962)에 처음 수록된 찬송으로 통일 찬송가에 가사가 그대로 채택된 찬송가는 76편으로 다음과 같다 : 18장, 19장, 20장, 21장, 29장, 32장, 35장, 38장, 39장, 40장, 45장, 49장, 62장, 69장, 80장, 84장, 86장, 87장, 89장, 117장, 137장, 139장, 143장, 151장, 169장, 174장, 178장, 192장, 198장, 203장, 218장, 221장, 227장, 229장, 238장, 239장, 250장, 254장, 268장, 277장, 302장, 309장, 319장, 323장, 349장, 350장, 354장, 362장, 382장, 385장, 386장, 404장, 406장, 407장, 413장, 420장, 424장, 447장, 451장, 454장, 462장, 467장, 468장, 476장, 480장, 488장, 491장, 494장, 503장, 507장, 509장, 513장, 530장, 549장, 550장, (통일 찬송가 장수).58)
『새찬송가』의 특징으로서 찬송가 앞부분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그리고 예배 전 묵상 성구와 예배 후 묵상성구를 실었고, 뒷부분에는 53편의 교독문과 십계명을 실은 것이 있으며, 『새찬송가』는 다른 찬송가와는 달리 매 곡마다 운율표시와 메트로놈 기호를 사용하는 템포의 표시, 그리고 악구 표시(Phrase mark)와 숨쉬는 표시(Breath mark)가 있으며, 독창곡도 삽입하였다는 특징이 있다.59)
3. 『개편찬송가』(1967)
교회가 자라고 성숙함에 따라 『합동 찬송가』(1949)의 개편의 필요성을 느껴 1963년 감리교, 기장, 예장, 성결교, 기독교연합회가 합하여 찬송가 개편 작업에 착수하여 1963년 3월 5일에는 다음의 찬송가 개편 8개 원칙을 작성하였다.
① 찬송가 중 중첩된 것은 단일화한다.
② 국가, 민요 등의 곡목과 가사 등은 재검토한다.
③ 찬송가는 종류별로 편찬하도록 한다.
④ 예배 찬송을 더욱 보강한다.
⑤ 특정 예배시 사용할 찬송을 보충한다.
⑥ 한국 작가들의 찬송을 증보할 것을 고려한다.
⑦ 교독문을 보충한다.
⑧ 가사를 일률적으로 검토한다.
※ 이 밖에도 묵도찬송, 송영찬송, 아멘 찬송 등을 대폭 보강하여 1967년 『개편 찬송가』(600장)가 대한 기독교 서회 발행으로 출판되었다.60)
『개편찬송가』는 합동 찬송가를 기초로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개편한 찬송가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27편의 한국 찬송의 채택이다. 한국 찬송 중 67장, 86장, 237장, 298장은 『청년찬송』(생명의 말씀사)에 있었던 찬송이며, 그 외의 찬송은 새로이 작곡된 시작과 곡조들이다. 그러나 개편 결과, 개편 찬송가에는 많은 수의 복음가가 삭제되었고, 이에 성결교회 총회에서 굉장한 반대론이 대두되었으며, 심지어 사용을 거부하자는 논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찬송가 위원에는 복음가의 가사와 곡조를 검토하여 찬송가 마자막 부분에 부록으로 20여 곡을 선택하여 발행하게 된 것이다.61) 한국인 창작 찬송은 다음과 같다.
곽상수, 27장 우리 예배를 받으소서. 55장 잠들기 전에, 463장 참사랑 하오리다.
구두희, 533장 어머니 날, 545장 우리 집
김두완, 461장 주님의 은혜
나운영, 298장 손들고 옵니다, 538장 감사절 찬송
박재훈, 237장 어서 돌아오오, 401장 믿는 자여 어이할 고, 464장 주의 크신 은혜
박태준, 172장 인생을 건지신 주, 473장, 귀한 주의 사랑, 482장 주와 함께 살리라
안신영, 213장 하나의 세계, 488장 하늘가는 길
이동훈, 212장 교회의 노래, 214장 복음의 씨, 321장 의로운 배한척, 402장 일하러 가세, 565장 부름 받은 젊은이
이유선, 37장 죽도록 충성하리, 387장 부름 받아 나선이 몸
장수철, 67장 주는 나의 목자, 86장 구주 예수 나셨다.62)
또한 합동 찬송가에 비해서 개편 찬송가에 새로 수록된 찬송은 예배용 24곡, 일반적 찬송 115곡, 절기용 25곡, 복음찬송 3곡, 흑인영가 2곡, 청년용 3곡, 송영27곡, 한국 찬송가 21곡 등으로 모두 220여 곡이나 되었다.63)
종래의 한국 찬송가가 선교사들의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했던 복음가, 부흥가들로 주축을 이룬데 비하여, 『개편 찬송가』(1967)는 예배 찬송과 교회의 의식에 관계된 찬송을 많이 보강하므로 부흥회 중심의 경향에서 예배 중심의 찬송가로 변화를 시도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과거 천당에 대한 타계적인 찬송이 많이 감소된 반면, 현세적이고 기독교적 자세와 윤리를 강조하는 찬송이 첨부되었으며 가사가 현대어로 수정된 것 등을 볼 수 있다. 이리하여 1949년에 만든 『합동 찬송가』에 이어 『새찬송가』(1962), 『개편 찬송가』(1967)의 등장으로 한국교회에 다시 세 가지 찬송가를 사용하는 분열을 거쳐 왔다.
『개편 찬송가』(1967년)에 처음으로 수록된 찬송으로 『통일 찬송가』(1983)에 채택된 찬송은 75편으로 다음과 같다 : 5장, 7장, 8장, 10장, 11장, 13장, 22장, 26장, 37장, 47장, 51장, 52장, 53장, 54장, 60장, 64장, 77장, 103장, 104장, 106장, 125장, 128장, 129장, 132장, 134장, 136장, 145장, 155장, 160장, 173장, 175장, 237장, 256장, 261장, 266장, 285장, 288장, 296장, 303장, 304장, 305장, 311장, 317장, 322장, 341장, 345장, 346장, 355장, 369장, 374장, 380장, 381장, 405장, 415장, 437장, 438장, 445장, 452장, 453장, 460장, 461장, 493장, 515장, 517장, 518장, 519장, 520장, 521장, 522장, 527장, 533장, 536장, 546장, 547장, (통일 찬송가 장수).64)
4. 한국 개신교 『통일찬송가』(1983)
1974년 개신교 찬송가의 통일을 목적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에서 조사한 설문지 여론조사에 의하면, 조사에 응한 전국 교회의 95%가 하나의 통일된 찬송가를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고,65) 이에 따라 1970년대 중반 『찬송가 합동추진 위원회』가 조직되고, 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편찬 원칙을 정했다.
① 『개편찬송가』(합동찬송가 포함)와 『새 찬송가』를 한 찬송가로 편찬한다.
② 이미 애창되고 있는 가사는 곡이 다르다 할지라도 수록하고, 또한 한 곡이 여러 가사로 애창되고 있는 것도 수록하기로 한다.
③ 번역 가사의 교정은 성경과 신학적인 관점에서 교정하되 이미 한국화 되어 있는 가사는 가급적 교정을 피하도록 한다.
④ 총 985장 중에서 사용 빈도수를 고려하여 500장에서 55장 이내로 엄선하여 편찬한다.
⑤ 교독문은 한글 개역판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문장을 정리한다.
위와 같은 원칙 아래 『통일찬송가』는 1982년 발행을 예정하였으나, 예정보다 늦은 1983년 11월 20일 여러 어려운 여건 가운데 『통일찬송가』가 발행되었다.66) 이 때 참여한 교단은 구세군 대한 본영, 기독교 대한 감리회, 기독교 대한복음교회,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기독교 한국 침례교회, 기독교 한국 하나님의 교회, 대한 기독교 나사렛 성결교회, 대한 기독교 하나님의 교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대한 예수교 장로회(고신), 대한 예수교 장로회(ICCC),대한 예수교 성경 장로회, 대한 예수교 대한 감리회,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한국 기독교장로회, 한국 그리스도교회, 한국 루터교회, 이렇게 20교단이었다.67) 여기서 만들어진 이 통일찬송가의 명칭은 『찬송가』로서 그 동안 한국 개신 교회가 사용해 오던 세 가지 찬송가인 『합동찬송가』(1949), 『새찬송가』(1962), 『개편찬송가』(1967)를 하나로 통일한 것이다. 『통일찬송가』(1983)에는 총 558곡이 수록되었는데 80%이상이 미국과 영국의 번역 찬송이며, 특히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미국의 부흥회 노래인 복음찬송(Gosple Songs)이 270여 편으로 과반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선교 초기부터 선교사에 의해 번역되어 소개된 찬송으로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작 한국 찬송은 한편도 첨부된 것이 없으며 번역 복음찬송인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102장), 한 편이 새로 추가되었으며, 한국인의 창작 찬송은 개편찬송가 1967년에 수록된 27편 등 17편이 수록되었고, 김연준과 나인영의 곡(92장, 272장)이 새로 첨부되었다. 찬송을 항목별로 보면 예배 72편, 성부 성자 성신 찬양 108편, 구원 37편, 천국 14편, 성경 8편, 교회 42편, 성례전, 15편, 절기와 행사 17편, 성도의 생애 138편, 송영 13편 등 총합 55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68) 현행 통일찬송가에는 미국의 『복음 찬송가집 완성판』(Gospel Hymns Complets, 1894년)에 수록된 614곡의 복음찬송 중 101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 19세기 미국인의 작사, 작곡으로 된 것은 76곡, 영국계 가사에 붙여진 미국인 작곡의 곡은 25곡으로 다음과 같다.
【표10】
19세기 미국인 작사, 작곡의 복음찬송 (76곡)
35장, 46장, 91장, 95장, 99장, 101장, 134장, 142장, 150장, 159장, 163장, 167장, 172장, 184장, 186장, 187장, 197장, 201장, 204장, 215장, 219장, 220장, 222장, 228장, 230장, 232장, 235장, 241장, 252장, 257장, 258장, 260장, 275장, 276장, 277장, 291장, 299장, 313장, 314장, 315장, 218장, 321장, 323장, 326장, 329장, 330장, 336장, 337장, 342장, 356장, 385장, 395장, 397장, 400장, 410장, 411장, 419장, 424장, 434장, 444장, 457장, 470장, 476장, 480장, 482장, 487장, 492장, 496장, 500장, 501장, 511장, 524장, 529장, 532장, 534장
영국계 가사에 붙여진 19세기 미국인 작곡의 복음찬송 (25곡)
12장, 88장, 98장, 138장, 146장, 149장, 185장, 190장, 191장, 209장, 212장, 236장, 249장, 274장, 349장, 365장, 370장, 375장, 391장, 412장, 442장, 481장, 512장, 535장, 539장
이렇게 『복음찬송가』(Gospel Hymns)에 수록된 복음찬송의 가사와 곡을 그대로 채택한 것은 6곡으로, 현행 『통일찬송가』(1983)에는 모두 107곡의 복음찬송이 Gospel Hymns에서 온 것이다.
Gospel Hymns(1894년) 이외의 기타 자료에서 온 19세기 미국인 작사, 작곡의 복음찬송은 64곡이며, 곡은 미국인의 것이지만 기타 가사에 붙여진 복음 찬송은 15곡으로 다음과 같다.
【표11】
19세기 미국인 작사, 작곡의 복음찬송 (64곡)
43장, 49장, 63장, 71장, 83장, 86장, 133장, 162장, 168장, 177장, 179장, 182장, 183장, 193장, 195장, 202장, 207장, 224장, 226장, 231장, 234장, 263장, 295장, 308장, 327장, 331장, 340장, 343장, 344장, 351장, 352장, 354장, 360장, 362장, 383장, 377장, 382장, 399장, 403장, 408장, 439, 446장, 455장, 456장, 458장, 465장, 466장, 468장, 469장, 474장, 478장, 484장, 485장, 488장, 489장, 490장, 495장, 497장, 498장, 502장, 505장, 506장, 541장, 543장,
기타 가사의 복음찬송 (15곡)
미국 가사 추정 96장, 198장, 199장, 200장, 300장, 425장, 463장
한국어 가사 206장, 214장, 253장, 368장, 388장
일본어 가사 262장, 278장
18세기 영국 82장
또한 19세기 영국인 작사, 작곡의 복음찬송은 3곡(173장, 265장, 472장)이다.
20세기에 작사, 작곡된 미국 복음찬송 중 작품 연대가 확실한 것은 42곡인데 이를 작곡 연대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표12】
1900 ∼ 1907년 (16곡)
72장, 84장, 93장, 194장, 217장, 270장, 289장, 293장, 353장, 361장, 373장, 414장, 432장, 473장, 483장, 530장
1910 ∼ 1919년 (14곡)
87장, 97장, 135장, 137장, 158장, 208장, 210장, 271장, 392장, 404장, 417장, 499장, 513장, 544장
1920 ∼ 1929년 (10곡)
89장, 102장, 139장, 218장, 319장, 359장, 447장, 449장, 509장, 519장
1930 ∼ 1938년 (2곡)
151장, 268장
작곡 연대 미상의 복음찬송으로 20세기 초기의 곡으로 추정되는 것은 23곡으로 다음과 같다.
【표13】
20세기 초 추정 복음찬송 (23곡)
164장, 189장, 192장, 198장, 200장, 223장, 259장, 302장, 324장, 333장, 406장, 409장, 413장, 423장, 425장, 427장, 462장, 463장, 464장, 491장, 494장, 507장, 542장
그 밖에 영국계 가사에 붙여진 20세기 미국인 작곡의 복음찬송은 3곡(169장, 332장, 387장)이며, 20세기 영국인 작사, 작곡의 복음찬송은 2곡(213장, 350장)이다.
기타 20세기의 복음찬송은 15곡으로 178장, 205장, 211장, 221장, 233장, 251장, 358장, 393장, 394장, 396장, 401장, 402장, 416장, 486장, 528장이다.
이렇게 하여 볼 때 현행 『통일찬송가』에 수록된 복음찬송은 모두 85곡이며, 19세기 복음찬송 189곡과 합하여 모두 274곡의 복음찬송이 현행 통일찬송가에 수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69) 복음찬송가 외에 『통일찬송가』에 수록된 찬송가 곡조는 260여 곡 이르는데, 미국곡이 117곡으로 가장 많으며, 영국곡이 101곡, 독일곡이 19곡, 한국곡이 17곡 등이다. 그 밖에 화란곡이 3곡, 러시아곡이 2곡, 스코틀랜드 민요곡이 2곡 있으며, 핀란드, 스웨덴, 스위스, 유대교 회당 곡이 1곡씩 수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현행 통일찬송가에는 미국 복음찬송 275곡과 18 ∼ 19세기 영 · 미 찬송가 210곡을 합하여 500여 곡 이상이 영 · 미 계통의 곡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70)
『통일찬송가』는 선교 100주년에 이룩한 교회의 일치와 연합 사업의 결실로서, 세 종류의 찬송가를 사용하던 불편을 해소하고 한 가지 찬송가로 같이 부르는 기쁨과 감격을 줄 수 있었던 장점이 있었으나, 찬송가의 질적인 면을 고려할 때 많은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즉 교회의 공적 찬송가로서 내용과 편집 면에서 전문성이 결여되어 예배를 위한 찬송이 부족하며, 표기방법, 작사자, 작곡자의 표기에 오류가 많으며. 예배를 위한 공적 찬송가71)가 아닌 한국교인들의 애창곡 집과 같은 성격을 띠며, 번역이나 곡의 선택에 있어서 100년간 선교사들이 암시적으로 사용했던 부흥회 노래를 찬송가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72) 또한 한국인이 지은 한국인의 찬송이 부족하며, 구약시대부터 중세와 종교개혁 기를 걸쳐 찬송의 모델이 되었던 '시편가'에 대한 생각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73) 1970년 후반 이후 8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우리 나라는 문화적인 면에서 많은 발전을 하였다. 그러나 서양 음악의 도입에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던 찬송가는 발전 아닌 퇴보를 하였다. 외국의 찬송가와 비교하지 않고 1930년대 발행된 『신정찬송가』와 『시편찬송가』에 비교하여도 새로이 편찬된 『통일찬송가』의 수준이 이들에 미치지 못함은 물론, 바로 전에 사용하던 『새 찬송가』와 『개편찬송가』에 그 내용이 크게 뒤지고 있다. 편찬 원칙도 없어 찬송가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특히 사용 빈도수를 중심으로 한 찬송가는 복음가를 많이 수록하고 표준 찬송을 많이 삭제하겠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 교파를 초월한 찬송가 통일에 대한 발상 자체가 찬송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다.
한국 교회는 크게 나누어 3가지 성향의 교회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진보나 중도적인 성향의 교회이다. 진보적 성향의 기독교 장로교, 감리교, 중도적인 성향의 장로교 통합측과 성결교는 예배와 찬송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표준 찬송이 많은 『개편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둘째, 보수적 교회인 장로교 합동측과 장로교 고려파는 비교적 장로교적 성향의 찬송가인 『새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셋째, 집회적인 성향의 예배를 드리는 순복음교회, 침례교들은 복음가와 익숙한 찬송이 많은 『합동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들의 성향과 특성에 맞게 찬송가를 사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교회나 교파간에 성향에 알맞은 찬송가를 사용하면 서로 비교, 발전될 수 있으며 서로간의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74)
Ⅲ. 한국 창작 찬송가와 문제점
1. 한국적 찬송가의 의미
1970년대 이후 우리의 음악 즉, 한국적 음악을 찾기 위한 노력들이 많이 진행 되어왔다. 그것은 예배 예전의 토착화의 운동과 함께 지속되었는데 그렇다면 한국적 음악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여성들이 하는 신학이 여성 신학이 아니고, 민중들이 하는 것이 민중신학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국 사람이 작곡한 것을 모두 한국적이라고 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그들의 작품이 서양의 기법과 형식을 가지고 작곡되어 졌다면 그것은 엄격히 말해 한국적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을 지닌다.
한국 찬송가가 무엇인가? 이것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지만, 우선 왜 한국인을 위해 수입 찬송가가 아닌 국산 찬송가 만들기가 필요한가부터 따져 본다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찬송가는 한국적이어야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우리 찬송가가 필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의존해 왔던 서양 찬송이 우리에게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서양식 음계나 박자, 리듬, 화성, 못갖춘마디 등을 지양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잘 부를 수 있는 쉽고 채질에 맞는 찬송가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이 만들기는 했으나 분위기나 내용상 서양의 찬송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노래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찬송가 만들기 작업이란 서양 찬송가의 레파토리를 늘려주려는 노력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식의 찬송가란 무엇이겠는가를 계속 물으면서 노하루를 쌓아가는 작업이다. 나아가서 고유한 기독교 문화 창달이란 거창한 목표를 지향하는 찬송가 만들기 작업이라면 그 찬송들이 지극히 한국적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75)
현재 『통일찬송가』(1983)에 수록된 한국인 창작 찬송가는 558장 중에 17곡76)으로 전체의 3%이다. 이러한 수치는 너무 미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찬송가에 관한 한 우리 것에 대하여 어디에 내놓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또한 현행 『통일찬송가』(1983)에 17곡의 한국인 작곡의 찬송이 있다고는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 대부분은 서양음악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2) 찬송가는 찬송가다워야 한다.
왜 국산 찬송가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두 번째 해답은 찬송가가 부르는 이들에게 쉬워야 한다는 것이다. 찬송을 부르는 대상은 교회 안에 모여든 천차만별의 회중인데 이들은 교회 밖에서는 민중이요 대중으로 불리운다.
찬송이란 바로 이 회중의 노래이어야 하며, 이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교회 내에 있는 엘리트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 가곡이 아니다. 회중이 곧 민중이요 대중이고, 따라서 회중의 노래인 찬송이 온 회중이 공감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회중 찬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본질상 민중의 노래나 대중의 노래와 맥을 같이해야 한다. 즉 쉬워야 하고 부담없이 심금을 울려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찬송은 민요이며 대중가요라고 과감히 정리해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서양의 수입 찬송들은 우리에게 적합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적 찬송가를 만드는 기본 정신은 '보편성과 약자에 대한 관심'이어야 한다. 찬송은 그것을 부르는 회중이 연령, 신분, 교육의 정도, 빈부, 지방, 남녀노소의 구분을 넘어서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어야 하고 공감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가진 본래의 음계나 리듬이나 분위기의 노래가 아니므로 악보대로 따라 부르지 못하며, 대부분의 경우에 회중들은 이 서양찬송들을 우리 식으로 나름대로 편곡해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편곡은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악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즉 우리 민족에게 쉬운 노래가 어떤 형태의 것인가를 회중들이 무의식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77)
그러므로 한국 찬송가란 단순히 음계나 리듬, 박자 등을 한국식으로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회중들에게 쉽고 널리 공감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회중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78)
이와 같이 한국 창작 찬송가는 열악한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열악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을 했던 작곡가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을 보면 나운영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음악이 보다 한국적이려면 네 가지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한다. 1단계는 일본 색과 서양색의 잔재를 일소하는 것이며, 2단계는 국악 가운데서 민족적 요소를 발견하여 그것을 소재로 하여 작품해야 하며, 3단계는 중국의 아악, 당악 음을 포함해서 외국 음악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섭취해야 하고, 4단계는 이상의 세 가지 단계를 토대로 삼아 한국 음악을 창조하는 데 적합한 실제적인 기법을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79)
그러면서 더 나아가 민족성과 시대성을 떠난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작품이라 할 수 없으며 또한 이 민족성과 시대성이 희박한 작품도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라고 말하고 또한 우리의 민족성과 시대성을 망각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이를 무시해서도 안될 것이라고 말한다.80)
한국적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국악'의 음악적 내용을 현대적으로 승화시켜 나가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창작계에서의 자기반성과 우리 음악의 틀을 하루 빨리 체계화, 현대화시키는 것에서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인 창작 찬송가의 현주소
찬송은 부르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대부분이 서양 사람들이 작사, 작곡한 것을 부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모두 서양 사람들의 신앙고백이므로 그들의 정서에 맞는 가사일 수밖에 없고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고백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81) 따라서 우리의 찬송가 현실을 감안해 보면 우리 예배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이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의 기독교는 차분한 분석에서 연구를 거치지 않은 체 서구인들의 의식과 생활양식에서 형성된 신앙의 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82)
그러나 우리의 현실과는 다르게 기독교의 음악은 타종교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원불교나 불교에서 만든 찬불가는 기독교의 찬송가를 모델로 한 것이다. 4성부로 되어진 이 음악들의 곡은 물론, 책의 겉모양이나 체계 역시 비슷하다. 또한 불교계에는 작곡가들이 드물어 기독교 출신 작곡가들에게 작곡을 의뢰하여, 이 일로 말썽난 일도 있다.83)
물론 천주교가 흡수한 신교의 음악은 우리들의 작곡이 아니고 서양인들의 것이다. 이 찬송가들은 교인들에 의해 오랫동안 불려져 내려 왔고, 아직까지는 신교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 음악이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로 '한국신교적'이라 할만 하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신교는 아직도 '서양적'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84)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홍정수 교수는 우리의 찬송가는 교회음악가들에게 일을 부탁해서 만들어진 부분은 매우 적고, 서양의 것을 번역한 것이 거의 전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라고 말하며 일은 쉽겠지만, 생각한 흔적이 드물고 우리의 찬송가를 모델로 한 불교나 원불교의 음악이 미숙하지만 모두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작곡임을 생각해 보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앞선 사람이 나중 되었으며 기독교는 많은 사람을 두고 활용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85)
한국의 20여 교단은 1974년 개신교 찬송가의 통일을 목적으로 모여 1983년 12월 통일찬송가를 출판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가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라 해도 통합된 찬송가책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대표적인 문제점은 새로운 찬송가의 편입이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서 새로운 찬송가 확산에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방해하는 역할도 한다는 점이다. 한국인 창작 찬송가가 많이 실리지 않은 관계로 인해서 한국 교회 음악의 자원이 사용되지 않고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86) 우리의 것에 대해서는 이러한 대접과 귀한 자원을 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것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입장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 예의 하나로 우리의 찬송가에는 찬송이 아닌 독일 국가가 두 장씩이나(127, 245) 들어가 있는 형편인데 꼭 그래야만 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우리가 몰랐다면 몰라도 엄연히 현재의 독일 국가임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추리를 해 본다. 우리 기독교가 너무나 한국적인 것을 배격하지나 않았는지....., 혹은 그러한 일에 앞장서지나 않았는지.... 한 번 생각 해 볼일이다. 서양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고 동양적인 우리의 것은 모두 무속적이고 미신적인 것이란 말인가? 더구나 찬송가집에 편집되어 있는 노래들은 한결같이 서양적인 것들이다. 심지어 한국인에 의한 작곡까지도 모두 서양적인 것에 기초를 두고 써내려 간 것들이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진정 한국인에 의한 한국적 방식의 찬송이 아쉽기만 하다.
우리의 예배 현장에서는 우리의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 단편적인 예로 찬송가를 들 수 있는데, Ⅲ장 1절에서 밝혔듯이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으로 1983년에 출판한 통일찬송가를 보면 한국인의 작사, 작곡으로 된 찬송가는 558곡 중 17곡으로 3%밖에 되지 않아서 그 전에 출판된 개편찬송가에 실린 27곡보다 10곡이나 줄어들었다.87) 그나마 있는 찬송가도 예배 현장에서 제대로 불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다른 나라들은 스스로 만든 찬송가가 우리들 보다 단연 많다. 스스로 만든 찬송가의 수가 한국의 전체 곡 수의 3%정도인데 반해 중국은 12%, 일본은 25%이다. 특히 미국은 88%나 된다. 거의 90%가 스스로 만든 찬송가들이다.88) 우리 찬송가를 외국인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원인 중에 하나가 우리 찬송의 출판에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작사, 작곡을 묶어 출판한 작곡가들이 많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출판사들이 이러한 곡들의 출판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의 이름을 달고 작품집들이 나오지만 실제적으로 작곡가 자신이 경제적 부담을 가져야 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출판사들이 한국인의 작품을 출판하는 경우는 대중성이 있는 것만을 골라내어 다른 번역 곡들과 함께 묶어 출판한다.89) 이렇기 때문에 교회음악 현장에서는 쓸만한 곡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며 그나마 소신 있게 일하던 한국인 창작 찬송의 작곡가들은 그들의 의지를 더 이상 펼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출판사란 영리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토양으로 인해 우리의 찬송은 많이 보급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나마 1983년에 출판한 통일 찬송가에 우리 한국인의 작곡가들이 만든 찬송이 있기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찬송과 작곡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표14】
찬 송 / 작 시 / 년 도 / 작 곡 / 년 도
53 / 김정준 / 1967 / 곽상수 / 1967
92 / 마경일 / 1967 / 김연준 / 1983
256 / 석자영 / 1952 / 박재훈 / 1952
261 / 김재준 / 1966 / 이동훈 / 1967
272 / 홍현석 / 1967 / 나인용 / 1983
303 / 박병섭 / 1967 / 이동훈 / 1967
304 / 주요한 / 1967 / 구두희 / 1967
305 / 전영택 / 1967 / 구두희 / 1967
311 / 임옥인 / 1967 / 박재훈 / 1967
317 / 전영택 / 1943 / 박재훈 / 1943
355 /이호운 / 1951 / 이유선 / 1967
369 /정용철 / 1966 / 곽상수 / 1967
378 / 정용철 / 1967 / 이유선 / 1967
453 / 최봉춘 / 1956 / 장수철 /1966
460 / 박재훈 / 1967
461 / 김활란 / 1921 / 이동훈 /1967
493 / 이호훈 / 1967 / 박태준 / 1967
한국에서 창작 찬송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전파될 때부터 있었으나 큰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남의 찬송을 번역해서 부르기보다는 우리의 찬송을 직접 만들어야 되겠다는 열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하다. 이것은 전통음악이 교회 밖에서 민족의 음악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사랑받기 시작하면서, 교회 안에서도 지금까지 전통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자세를 번성하고 찬송은 마땅히 우리가락으로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진 결과이다.90)
3. 한국 창작 찬송가의 한계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서양 지향적인 것이 된 이유는 기독교 자체보다 우리의 환경 문화 때문이다. 음악에 비교적 낮은 가치를 두었던 장로교, 감리교 등에 의해 음악이 전파되고, 음악가들이 배출되었던 것은 우리의 토양이 얼마만큼 음악에 대해 편협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91)
따라서 우리의 찬송을 한국인 스스로 만들지 못했던 이유로 서양선교사들의 선교정책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서양 선교사들은 한국민족에 비하여 자신들이 우월한 민족임을 자부한 것처럼 자신들의 문화가 한국고유의 문화보다 우수하다는 선입견과 문화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으며 이들은 한국인에게 우리 고유의 음악이 아름답고 우수하다는 것을 가르쳐 줄 지식도 없었고 마음도 없었다. 그러므로 배재, 이화학당 이후 설립되는 기독교 학교마다 서양음악만을 가르쳤고, 우리 전통음악은 가르치지 못하였다.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치하에는 일제의 우리 전통음악 말살 정책 때문이었다. 일제는 한일 합방이후 한국을 영원히 일본 땅으로 만들고 한국인을 황국 신민화 하여 민족혼을 없애버리려 하였다.92)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하여 교회에서의 우리의 음악은 설자리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 창작 작곡가들의 음악이 실제로 쓰이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홍정수 교수는 4가지를 그 원인을 들고 있다.
① 공적인 찬송가책에서 이들의 음악이 거의 실리지 않고 있다.93)
② 성가대 지휘자들이 한국인 창작 곡들을 연주하는데는 매우 인색하다.
③비교적 쉬운 음악을 쓰는 사람들은 음악가(특히 작곡가)들로부터 무시당한다.
④ 작곡가들이 교회의 요구를 지나치게 빗나가서 연주될 수 없거나, 안이한 생각으로 작곡하여
음악적으로 충실하지 못한 작품들도 많다.94) 이러한 다양한 원인중의 다른 하나로 찬송가 편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데 『신정찬송가』(1931) 편찬 작업 때에 한국 전통 선율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좋지 못한 연상작용"(bad association)을 염려하는 한국인 편찬위원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서문에서 밝혀져 있다. 이러한 나쁜 연상작용에 대한 염려는 당시 일반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는 것이었고 교회 특유의 현상이 아니었다. 또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선교사들이 전통음악 사용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고, 한국인 스스로가 반대한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다.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오늘날의 찬송가책에서도 한국인 작곡의 찬송가들은 장식적 수량에 그치고, 전통적 선율을 사용하는 데에는 매우 민감한 거부반응이 있다. 한국인에 의해 교회음악이 본격적으로 작곡되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출판 활동이 매우 미흡했다. 그리고 출판된 것들도 대부분 70년대 이후의 것들이다.95) 그만큼 우리의 교회는 우리의 음악에 대해 오랜 동안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갈등을 일으켰던 부분이 제사, 축첩, 주초, 안식일 문제 등에 관하여 나타난 갈등현상인데 당시에는 이러한 관습을 버리는 것이 기독교인이 된 증표 같은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시각이 우리 나라의 전통 음악을 어떻게 보았겠는가 하는 것이 또한 관심거리이다. 유감스럽게도 이에 관하여 아직 이렇다할 자료는 구하지 못했지만 대체로 비판적이었으리라 하는 심증을 가질 수 있다. 즉 정악과 아악은 조선조의 지배계층의 유교적 관습과 결부되어 있었고 그리고 민속악은 그렇지 않아도 천시되던 계급에 의해 전수 되기도 했거니와 일제시대 이후에는 기생조합과 관련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술과 도박과 담배를 금할 정도의 경건한 금욕주의적 생활을 권하던 개신교의 경우는 더구나 신앙생활과 관계없는 풍류나 잡회, 가무 등에 대하여 동정적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며 전통의 여러 관습(그 중에 무속 신앙 등도 있다)과 결부되어 있는 우리 나라의 전통 음악에 대해서는 다분히 의심쩍은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전통 문화에 대립됨으로써 교회는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전통문화를 위축시키는데 앞장 선 격이 되었던 것이다.
Ⅳ. 바람직한 한국인 창작 찬송가의 모색
많은 현실적 문제들이 찬송가 발전에 저해 요소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무조건 통일이란 아름다운 이름이 찬송가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제는 양적으로 늘어난 기독교인들에게 양질의 찬송가가 요구되는 것이다. 통일이란 아름다운 이름은 아무 것에나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찬송가 발전의 역사는 시대적, 개인적, 교단적 믿음의 신념과 특색에 따라서 영향을 미치며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96) 우리의 교회는 이러한 관점으로 살펴볼 때 아쉬운 점이 많다.
1. 한국 찬송가의 전망
한국 개신교의 예배 음악적 과업은 기독교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토착성있는 표현을 계속 추구해 나가는 일이다. 현재 한국 개신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서구와 북미의 찬송을 배우고 애창해 왔다. 그러기에 찬송가 하면 마치 4부 합창곡으로 된 몇 가지 악곡 형식에 따른 제한적인 형태의 찬송 곡만을 연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찬송을 작시하거나 작곡할 경우에는 서양의 긴 운율(Long Meter, 8. 8. 8. 8)이나 보통 운율(Common Meter, 8. 6. 8. 6), 짧은 운율(Short Meter, 6. 6. 8. 6)등으로 작시하고 거기에 따라 작곡하는 경향이 많다.
1) 찬송 가사의 한국화
'한국화'라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적인 정서와 감정을 담은 '가사의 창작'이요, 한국인의 느낌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곡의 창작'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나운영은 "음악의 측면에서 본 찬송가 가사"라는 글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사를 쓸 때에 대체로 7·5조로 쓰기 때문에 7·5조를 예로 가사와 곡조의 형식의 일치를 제시하고 있다.
【표15】
가 사 / 곡 조
7·5조 2행 / 한 도막 형식(큰 악절1개 ; 8마다)
7·5조 3행 / 작은 세 도막(작은 악절 3개 ; 12마다)
7·5조 4행 / 두 도막 형식(큰 악절 2개 ; 16마다)
7·5조 5행 / 확대 두 도막 형식(20마디) 또는 축소 세 도막 형식(20마디)
7·5조 6행 / 세 도막 형식(큰 악절3개 ; 24마디)
찬송 가사를 쓸 때에 7·5조 4행 또는 6행만을 고집하지 말고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써야만 변화 있는 곡조가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가사가 후렴구를 지닐 경우는 4행 + 후렴 4행은 후렴이 너무 길어서 지루한 감을 주어 적당치 않고, 4행 + 후렴 2행으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97)
가사의 리듬과 곡조의 리듬은 일치되어야 한다. 곡조는 어디까지나 가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가사와 곡조의 리듬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모순일 뿐만 아니라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운율을 가사의 숫자만 맞추면 되는 줄 알고 작시한다면 어색한 것은 물론 가사의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좋은 찬송가는 먼저 가사가 좋아야 좋은 곡조가 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찬송가의 한국화를 위하여 신소섭은 '예배와 찬송학'에서 이렇게 제언한다.
① 4·4조 또는 3·4조의 부활
우리 나라의 판소리의 창본과 시조의 가사를 보면 판소리는 4·4조로 되어 있고, 시조는 주로 3·4조로 되어 있다. (심청가)의 창본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천지 만물 삼겨날 제 / 날 짐생은 알을 낳고/
길 짐생은 새끼치고 / 백초도 싹나는 뒤"...//
(시조)의 가사를 인용하면,
"동창이 밝았느냐 /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하놈은 / 상기 아니 일었느니 /
재 삼 넘어 사래 긴 밭을 / 언제 갈여 하느냐. //
이와 같이 우리 고유의 가사 형식인 4·4조 또는 3·4조를 부활시켜 3행 또는 4행 또는 6행으로 가사를 쓰게 되면 결과적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한국 곡조가 탄생할 것이 분명하다. 이 가사에 6/8박자로 작곡을 하면 자연히 한국적 리듬의 곡조가 되는 것이다.
② 시적 매력이 있는 가사
찬송가는 먼저 가사만으로도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찬송가 가사에 있어서 글자 수를 맞추는 데만 급급한 나마지 시적이 아닌 표현이 되거나 또는 어려운 한문식의 낱말이 섞인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점은 하루 속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찬송가를 만들기 위해 작곡가는 시를 이해해야 하고 시인은 음악을 이해해야 좋은 곡조를 만들 수 있다. 특별히 찬송가는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여 영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98)
2) 찬송가 곡조의 한국화
우리 한국인은 한국인의 정서로 찬송을 정착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찬송의 토착화'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 이러한 연구는 신소섭씨가 정리한 글을 참조해 찬송가 곡조의 한국화의 방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한국화란 무엇인가?
① 멜로디는 5음 음계로 되어야 한다.
② 타령장단으로 작곡되어야 한다.
③ 평조, 계면조로 작곡되어야 한다.
④ 3도 화성으로 작곡되어야만 경건하고 은혜스럽다는 편견을 우선 버려야 한다.
◈ 리듬의 처리
① 2·4박자보다는 3박자가 좋다.
② x/4박자보다는 x/8박자가 좋다.
③ 당김법(Syncopation) 리듬도 사용할 수 있다.
④ 곡조 도중에 박자를 바꿀 수 있다.
◈ 멜로디의 처리
① 5음 음계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즉 Fa, Si, ??, ??, ??등이 경과음 또는 보조음 식으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② 더블 하모닉 스케일(Double Harmonic Scale ; Do, Re??, Mi, Fa, Sol, La??, Si)도 사용할 수 있다.
③ 가사와 곡조의 악센트(Accent), 리듬(Rhythm), 종지법이 잘 맞아야 한다.
◈ 화성(Harmony)의 처리
① 3도 화성만을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② 현대 화성을 활용해야 한다.
③ 3도 화성에 있어서 3음을 생략할 수 있다(Open Chord).
④ 3도 화성과 현대 화성을 절충 사용해도 좋다.
⑤ 대위 법적 처리도 바람직하다.
◈ 연주법
① ??????는 ???????식으로 연주해야 한다.
②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은 ∼∼∼∼식으로 연주해야 한다.
③ 민요, 시조, 판소리 창법으로 연주해야 한다.99)
한국인 창작 찬송가를 말할 때 우선 작곡하는 일이 요청된다. 연주는 어느 정도 되고 있지만, 우리가 애써서 만든 곡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작곡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좋은 작품들도 드물다.
2. 우리가락 찬송가
1) 우리가락 찬송의 당위성
소위 토착화된 찬송 또는 한국적인 찬송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버써 한국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 사이에서부터 있었다. 예를 들자면 선교사 게일(J. S. Gale), 또는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셀라(H. G. Appenzeller)이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 등의 선교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의 최초의 목사가 된 길선주 목사도 한국 찬송가의 가락을 찾아보기 위하여 무당이나 국악을 전공하는 사람을 찾아가 묻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몇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토착화된 찬송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그 당시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왜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가?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로 중요한 것은 이 토착 찬송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 주도되지 못하고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가지의 이유가 있다. 우선 우리 민족의 사대주의적 경향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해를 1884년으로 잡고 최초의 찬송가는 1893년의 언더우드의 '찬양가'로 잡는다면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불과 10년이 못되어 100% 서양 멜로디의 노래를 담은 '찬양가'가 한국 최초의 찬송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토착 찬송을 한국인이 스스로 만들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의 복음 이해와 신앙 형태는 경건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것이었다. 즉 복음은 개인의 회심과 구원의 내적 확신을 위한 것이며(경건주의), 그 회심과 학신은 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주관주의) 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선교 정책은 20세기말을 세계의 종말로 간주하여 빨리 모든 백성에게 복음을 '들려주기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복음을 받은 이 땅의 문화와 관습과 제도 등 재래의 좋은 유산의 가치를 거의 부정하고 정죄하는 배타적 신앙을 조정하였으며, 개인의 구원만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내세주의는 이런 유산을 문제삼을 흥미도 필요성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배재, 이화학당 이후 설립되는 기독교 학교마다 서양음악만을 가르쳤고, 우리 전통음악은 가르쳐지지 못하였다.
토착찬송을 한국인 스스로 만들지 못했던 세 번째 이유는 일제의 우리전통 음악 말살 정책 때문이었다. 일제는 한일합방이후 한국을 영원히 일본땅으로 만들고 한국인을 황국신민화하여 민족혼을 없애버리려 하였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일제는 35년동안의 통치기간동안 창씨개명, 신시참배 등을 강요하며 일본어를 국어라고 부르도록 하고 일본 역사를 국사라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일본음악을 국악(아악)으로 부르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음악의 학교 교육을 금지 시키고 일본 음악만을 부르도록 하였다. 우리전통 음악은 이때부터 교육의 장을 잃어버리고 이 땅에는 서양음악과 일본음악이 판을 치게 되었다.
찬송은 단순히 노래가 아니라 신앙고백이다. 이제 100년을 넘은 한국 교회가 자신의 신앙고백을 해야할 때가 되었다고 볼 때, 한국 찬송가는 글자그대로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겠고 한국인을 위한 찬송가가 되어야 하겠다.100)
2) 우리 가락 찬송을 만드는 방법론
(1) 우리 가락 찬송의 의미와 기본 정신
우리 식 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은 인위적이거나 억지가 아니라 필연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우선 찬송이 신앙고백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우리 교회 스스로가 찬송가를 만들어 내야하며 또 음악적, 가사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우리 고유의 찬송을 만들 필요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은 어떤 찬송가를 만들어야 하는가?
찬송가란 교회 내의 음악적 상식을 가진 몇몇 그룹들을 위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찬송가를 부르는 대상은 천차만별이며 여기에는 교육의 정도, 지방색,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차별을 둘 수가 없다. 그러므로 찬송가에는 이러한 천차만별의 회중을 가능한 한 많이 포용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약자에 대해 관심이 있어야 한다.101) 기독교는 민중의 종교이지 귀족의 종교가 아니다. 예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즐거워했던 모습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찬송에서도 그들을 소외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시의 교육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찬송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민족의 복음화를 꿈꾸는 한국의 기독교라면 이 서양찬송이 시골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려우며, 제대로 부르기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102)
한마디로 찬송가는 음악을 잘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부를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쉬워야 하고, 여러 가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다 포용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 나라의 공식 찬송가는 음악적 수준을 지켜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 곡에 대해서는 큰 아량을 보이면서도 한국인 작곡가의 곡에 대해서는 지나친 선곡 기준을 보인다. 그래서 현재 찬송가에 실린 한국인 작곡의 찬송가들이 대부분 서양인 작곡의 번역 곡보다 더 높은 수준을 갖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많이 불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103)
이제는 기독교 내에서도 한국의 전통에 따른 음악을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일부의 작곡가는 이 방향에서 수년간 작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크게 진척되지 못한 것은 아직도 한국 전통음악과 관련해서는 부정적인 연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전통음악을 듣고 무당, 기생들을 연상하지 않는 세대에서는 이 일이 쉽게 이루어 질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우리의 정신적 환경에서 민족주의가 어떠한 이데올로기보다도 강하고, 이 상황이 쉽게 변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도 창조적으로 교회음악에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104)
(2) 우리 가락 찬송을 위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들
우리가락으로 만든 찬송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부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어야만 한다.
첫째로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통음악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이름만 한국인이지 사실상 우리 고유 음악에 대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성장하였다. 그 대신 서양음악에 대한 교육은 철저히 받아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고유 음악에 대해 무식하게 되었고 이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전통음악에 대해 아름답고 품위있는 음악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유산인 국악은 철저히 천한음악, 기생음악, 술집음악, 놀이판의 유흥음악이란 생각을 그대로 이어받게 되었다.
우리는 솔직히 국악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아는 바가 없으니 흥미가 없고 모처럼 들어보아도 국악은 그 곡이 그 곡 같아서 특징이 없이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다가 갑자기 국악이 흘러나오면 방송을 돌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자들에게 국악은 귀에 거슬리는 거추장스러운 음악일 뿐이다.
우리는 토착 찬송을 만들기에 앞서 시급히 국가적 차원에서 학교 음악 교육을 통하여 우리 민족이 우리 음악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우리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풍토를 이루어야 하겠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전통 음악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기독교인들은 자연히 우리가락 찬송을 즐겨 부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락 찬송을 위해 해결 할 두 번째 문제점은 토착 찬송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토착 찬송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소위 교회내의 운동권 그룹이나 사회 참여의 주장이 강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어져 왔다. 그리고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온건, 보수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토착 찬송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보수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일수록 서양적인 찬송을 선호하고 토착찬송을 경시하는데도 문제가 있고, 토착찬송을 만드는 급진적 사회참여 세력들이 복음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달리하여 보다 현실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기사를 실음으로써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부를 마음이 나지 않는 찬송이 되어버린데도 문제가 있다. 어쨌든 우리 가락으로 만들어진 찬송가는 기독교 내의 어는 특정 그룹의 전유물이 되어 버려서는 안된다. 기독교인 모두가 부를 수 있는 찬송이라야 한다.
세 번째 문제점은 우리가락 찬송에 대한 목회자들의 적극적인 수용이다
우리 가락 찬송에 대한 목회자들의 적극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회중찬송은 실제로 목회 현장에서 불리워질 때만이 생명력이 있다. 우리 나라 목회 현장에는 아직도 목회자들의 절대적 권한이 인정되고 있으며 음악분야 에서도 예외는 아니다.105) 예배 찬송의 선택도 전적으로 목회자에 의해 선곡되고 있는 상태에서 목회자들의 우리 찬송 수용의 여부가 우리의 찬송을 살릴 수 있는 관건이다.
이것이 힘들다면 교회나 음악 목회자를 많이 양성해야 할 것이다. 음악 목회자가 없거나 또는 맡은 임무를 다하지 못할 때 담임목회자의 오류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나타난다. 관심은 있으나 전문 지식의 부족으로 오는 문제와 무관심으로부터 오는 오류이다.106) 이러한 오류들을 깨지 않고서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가락 찬송을 부르기 전에 우리 전통음악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어린아이가 동물원 원숭이를 구경하는 것 같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우리 전통 음악을 대해서는 안되고 진정 마음으로부터 우리 음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107) 학교에서 우리의 전통음악이 교육되지 않는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교회교육에서 즉 주일학교를 통하여 우리의 전통음악을 가르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이에 우리의 찬송가도 그 목표를 진정한 한국 음악의 성취에 둔 공통적 열망과 총체적 노력에 힘입어 현대의 우리 사고에 맞고, 폭넓은 언어와 문화를 담아내는 전통적인 예배찬송가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3) 가사에 관한 문제
가사의 문제는 곡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회중들이란 곡보다 우선 가사를 보고 찬송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곡은 모르더라도 우선 가사가 자신의 신앙고백과 일치된다고 생각 될 때는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토착 찬송은 위에서 말했듯이 가사적 측면에서도 보편성과 약자에 대한 관심이 강조되어져야 한다. 적어도 우리식의 찬송가에 적합한 가사란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추상적이고 시적인 외국 가사를 그대로 번역하여 쓴다든지, 어려운 한자어나 고사성어나 현행 국어사전에도 없는 옛 용어나 사투리를 쓰는 것은 찬송가 가사로서 적합하지 않다. 또 지나친 줄임말도 의미 전달이 곤란하므로 적합하지 않다. 찬송가의 가사는 교육수준이 낮은 어떤 사람이 들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쉬운말로 쓰여져야 한다. 노래를 듣고도 이해를 못하여 가사를 눈으로 확인해야 겨우 말뜻을 이해하는 정도의 가사는 이미 보편성을 상실한, 찬송가 가사로서는 부적합한 것이다.108)
3. 찬송가 한국화의 가능성
찬송가를 한국화 하려고 할 때 우선 해결해야 될 문제는 전통음악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는 일이다. 전통음악은 우리의 사고 속에서 품격 높은 민족의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또한 품위있는 궁중 음악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민간 음악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서 쓰여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즉 민중의 음악은 속(俗)되지 않으며 따라서 '민속(民俗)음악'이 아니라 '민(民)음악' 혹은 '민간(民間)음악', '민중(民衆)음악' 또는 '民中음악' 등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능성의 근거를 성서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 그리고 교육적 측면에서 살펴 보려고 한다.
1) 성서적 측면에서의 가능성
구약시대의 노래 모음이었던 시편은 대부분 표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표제들 중에는 히브리인에게 친숙한 민요곡으로 생각되는 곡명들이 나오는데 이는 이미 제2성전 시대에 시편을 대중적인 민요 곡조에 얹어 불렀음을 말하고 있다. 알-다스헷(??????????????)은 시57, 58, 59, 75편의 표제인데 뜻은 '터트리지 말아라', '파괴하지 말아라'라는 뜻이며 포도를 따면서 부르는 노동요이다.109) 알-하깃딧(????????????????)이란 표제는 시8,81, 84편에 나오는 일반적으로 이것도 일종에 노동요인 '포도 밟는 노래'의 가락에 맞추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것은 수확한 포도를 발로 밟아 즙을 내는 작업을 하면서 부르는 민요이다.110)
알-아앨렛 하샤알(???????? ??????????????)은 시22편에 나오는데 '암사슴이 새벽 일찍이' 혹은 '새벽 암사슴'이라는 히브리인들의 민요이고, 알-소사님(????????????????)은 시45, 69편의 표제로서 '백합화'라는 민요 곡조에 얹어 부르는 것이다.111)
신약성서에는 에베소서 5장 19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에 대하여 오스카 죈겐(Oskar Söhngen)은 시(?αλμοσ)는 시편, 찬미(υμνοσ)는 창작 찬송, 신령한 노래(ωδεπνοιματικη)는 보다 자유로운 형태의 영가, 즉 오늘날의 복음성가와 같은 노래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 나라 공동 번역에는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시편과 더불어 창작 찬송과 자유로운 형태의 영가들이 예배 음악으로 사용되어 지는데 이런 음악들은 당시 민간 음악의 영향을 받았고 이방인의 가락도 들어 있었으며 가사 중에는 성서가 아닌 자유로운 것도 택했는데 후에 서방의 카톨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동방정통교회는 이를 정죄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찬송을 한국화 하자는 주장은 성서가 가르쳐 주는 방법론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며 성서의 사상에 위배되는 비성서적 행위가 아니다. 히브리 민족과 헬라 문화권의 민요와 민간 음악이 야웨 신앙을 노래하는 도구로 쓰여질 수 있었다면 오늘 이 시대의 우리에게 있어서 한국의 전통음악도 우리 민족의 신앙고백을 위한 가장 적절한 문화 유산인 것이다.112)
2) 사회적 측면에서의 가능성
한국 교회 안에서 아직도 우리 가락으로 된 찬송가가 많지 못한 이유는 한국 교회가 19세기말의 문화적 상황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가 그대로 있으며 전통음악이나 악기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비 신앙적인 일로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는 아직도 '국악'을 기생 음악, 술집 음악, 유흥 음악 정도로 생각하여 천시하고 비웃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전통 음악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과 배타적 태도로 일관해 오고 있는 동안 교회 밖에서는 전통음악이 민족의 음악으로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고 있다.
우리의 것을 사랑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 간직하고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다. 섹스물이나 폭력물이 아닌 순수한 판소리 음악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 '서편제'의 흥행 성공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교회는 토끼처럼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우리 사회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민족 문화의 진정한 가치가 숨겨진 그 결승점에서 서서히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이 사회를 비교해 볼 때 교회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전통 문화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오아시스 속의 사막처럼 고립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종교란 사회와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고 더구나 기독교는 사회 안에서 언제나 제 몫을 담당해야 생존할 수 있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전통 문화에 대한 이러한 교회 밖의 인식 변화에 대해 더 이상 무감각 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이제라도 무관심의 잠에서 깨어나 전통음악을 민족의 음악으로, 나아가서 교회의 음악으로 수용하므로 사회로부터 문화적 고립을 면해야 할 것이다.113)
3) 교육적 측면에서의 가능성
사회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것이 교육이다. 한 나라의 교육 과정(Curriculum)이란 그 사회의 각종 변화에 맞추어 개정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교육 과정도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전통음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크게 개선되고 있다.
현재에는 초, 중, 고의 음악 교과서에서 서양 노래와 한국 노래를 각각 50%씩 싣도록 의무화하고 있으며 전통음악에 대한 감상과 실습도 종전보다 크게 개선되었다. 아직도 목표에는 크게 미흡하지만 이러한 학교 교육은 우리 음악의 본래적인 품위와 가치를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일깨워줄 수 있을 것이고 전통음악이 더 이상 기생음악이나 술집 음악으로 푸대접받는 일을 면하게 해 줄 것이고, 민족 음악에 대한 교회내의 인식에도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 생각 속에 전통음악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싹틀 때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서양 찬송에 매달리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에게는 우리가락 찬송이 더 자연스러운 신앙고백이 될 것이다.114)
Ⅴ. 결 론
서양 찬송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아닌 찬송을 억지로 부르려고 하니 목에 힘만 들어가고 재미가 없는 것이다. 찬송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억지 찬송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결과를 낳으며 죄를 범하게 된다. 즉, 찬송 자체를 제대로 부르려고 신경을 쓰다가 정작
찬송의 대상인 하나님을 망각해 버리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의 현장에서 부르는 찬송가는 우리의 찬송이라기 보다는 옷만 갈아입은 서양의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3%정도의 우리의 것을 갖고 있는 실정이며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찬송가의 개선 방향을 조명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한국찬송가의 형성 배경과 과정들을 살펴보며, 우리 찬송가는 원 기독교 찬송가의 정통적 주류에서 다소 벗어난 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으며, 두 번째로는 이를 개선해 보고자 한국인 창작 찬송가의 현실을 살펴보면서 한국 찬송가는 복음가 위주가 아닌 예배 찬송가로서 역사적인 정통성을 가져야 하고, 성도와 교회를 더욱 성숙하게 발전 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또한 좋은 찬송가를 통해 하나님께 더욱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시대가 요구하는 다각적인 찬송으로서 누구에게나 공유될 수 있는 찬송가이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통일찬송가』는 역사적으로 18, 19세기의 영국과 미국의 찬송가인 복음가와 부흥찬송을 모태로 하여 형성되고 성장했는데, 그것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찬송가가 편찬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기인한다. 그것은 당시의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찬송, 특히 미국 부흥가의 찬송 곡들을 토대로 그것이 한국 찬송가에 뿌리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찬송가 편찬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있는 찬송가를 재편집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앞으로 다시 편찬될 찬송가를 기대하면서 몇 가지 주장을 하려고 한다.
첫째, 교독문으로만 낭독하고 있는 그 많은 시편들을 찬송가로 부르자는 것이다. 구약의 유대 성전 예배의식에서 엄연히 의식순서로 되어있었고, 회당예배에서도 시편을 불러 찬송 드리는 것은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중세와 예수 종교개혁시대를 통하여 찬송가로서 권위를 갖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시편 찬송을 부러야 할 것이다.
둘째, 찬송가가 조금 더 많은 연령층을 공유해야 할 것이다. 지금 통일 찬송가는 청년이나 젊은 층을 별로 고려하지 않고 편집되어 새로운 곡의 스타일, 리듬, 화성으로 젊은이를 위한 찬송가가 있어야 한다. 요즘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예배나 모임에서는 찬송가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모임에서는 복음성가가 중요한 레퍼토리로 사용되며, 감각적이고도 신앙의 깊이가 부족한 복음성가의 사용으로, 올바른 신앙의 정립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셋째, 한국인의 창작된 찬송이 더 많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찬송가들을 번역하여 사용되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며, 한국인이 한국인의 신앙을 담은 가사를 직접적으로 곡의 멜로디와 화성에 맞는 찬송가를 편찬해야 할 것이다. 이는 문성모의 저서 『민족음악과 예배』에서도 알 수 있는데, 그는 "한국 찬송은 한국인의 심성과 문화에 맞아야 하며, 도시 교인이나 시골 교인이나, 교육 수준이 높은 자이거나 낮은 자이거나 구분 없이 모두 쉽게 공감하고 따라 부를 수 있는 한국의 교회 공동체를 위한 찬송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115)
이와 같이 필자는 한국인이 쓴 좋은 찬송을 많이 개발하여 우리 찬송가에 접목시키고, 세계의 여러 좋은 찬송가와 함께 우리의 신앙과 감정을 하나님께 바르게 나타낼 수 있는 그러한 찬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넷째, 교회음악인의 양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말하고 싶다. 앞으로 21세기에 사용할 한국교회의 찬송가가 새로이 출판할 예정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새로 개편될 21세기의 찬송가는 2000년 8월이 되어야 최종적으로 결정이 되겠지만 현재 결정 된 사실은 통일찬송가의 558곡 중 79곡이 삭제되고 새로운 찬송이 169곡이 추가되어 644곡을 이루는 21세기 찬송가가 탄생될 것이다. 새로이 추가된 169곡 중에 56곡이 외국 곡이며, 한 두 곡은 현재 많이 불려지는 외국인이 쓴 곡이 들어가고 그 나머지는 한국인이 쓴 찬송가가 첨부될 예정이다. 8월까지 남은 기간 중에 더욱 신중하게 고려하여 21세기 찬송가는 화성이나 리듬 면에서도 고전적인 것으로부터 현대적인 감각을 가진 것들로 이루어 저야 할 것이다. 현재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대학원 내에는 찬송가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시간이나 여건이 제공되지 않는다. 찬송은 예배와 설교의 부속물인 양 여기는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찬송가, 더 나아가서 교회음악에 대한 지식과 중요성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교회에서 음악 부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회음악에 헌신되고 관심 있는 사람들을 더욱 후원하고 교육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수준 있고 체계적인 교회음악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흔히 '찬송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곡조 붙은 기도'라고 대답하는 것을 볼 있는데 이는 가장 기본적인 문자적 의미부터 잘못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찬송은 결코 기도가 아니다. 기도와 같은 요소는 있지만 기도의 한 부류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찬송은 사전에 보면 '찬성하여 칭찬함, 아름다움을 일컫고 덕을 기림'이라고 풀이했다.
찬송의 한문 단어의 뜻을 풀이해 보면 讚: 기릴 찬 頌: 기릴 송으로 풀이할 수 있다. 즉 칭찬, 공덕을 칭송, 성덕을 칭송하여 고함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전을 보면 頌讚(송찬)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찬송의 의미를 가진 이 단어가 옛날에는 고관대작들을 경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어떤 사람의 아름다운 인품을 흔히 德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도 하나님이 지니는 어떤 성품을 덕이라고 표현하는 곳이 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찬송은 '하나님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시대와 형식에 구별 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권능을 높이는 모든 노래'를 일단은 총체적으로 찬송이라 부르면 된다는 것이다.
찬송에는 신학이 담겨져 있다. 찬송의 내용은 설교 말씀과 같이 다양한 주제를 가지며, 깊이 있는 찬송을 부를수록 우리의 신앙은 깊어가게 된다. 우리의 현행 『통일찬송가』는 선교 초기 부흥회에 맞는 복음찬송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이러한 찬송을 부르는 우리의 예배의 현실은 아직도 초보적인 '부흥회'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배가 바뀌려면 먼저 찬송이 변하여야 한다. 미국은 100여 년 전 기독교와 함께 복음찬송이라는 찬송의 한 줄기를 우리에게 전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지난 현재의 미국 찬송은 그때와는 달리 새롭게 변하여 예배찬송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위해 다양한 노력과 연구 끝에 새로운 찬송들을 개발하여 기독교인의 삶을 더욱 은혜롭고 성숙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100여 년 전 들어왔던 복음찬송이 찬송가의 전통인양 그것만을 고집하며 살아왔고, 우리의 예배마저 거의 성숙해 가지 못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이제 이러한 찬송가를 과감히 던져버리고, 새로운 현대적인 감각의 언어와 문화를 담은 폭넓은 다양한 찬송을 수용하여 좀더 성숙한 교회, 성숙한 신앙 인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도 우리들이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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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찬송가는 1983년 한국찬송가공회 에서 나온 것으로 그 명칭은 『찬송가』이지만, 이 논문에서는 이 찬송가를 『통일 찬송가』(1983)라고 표기하였다.
2) 이영기, 『찬송가론』(대구 : 계명대학교 출판부, 1991), p.182.
3) 김남수, 『교회와 음악 그리고 목회』(서울 : 요단출판사, 1995), p.229.
4)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서울 : 호산나 음악사, 1995), pp.215-216.
5) 박봉배, "찬송가의 조속한 통합을 바라며", 『기독교사상』, 통권 제270호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80, 12), p.84.
6)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216.
7)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음악연구원, 1997), p.98.
8) 위의 책, p.100.
( * 『찬양가』(1894)에 수록된 언더우드의 번역 찬송가 : 3장, 9장, 10장, 11장, 15장, 18장, 19장, 23장, 24장, 25장, 32장, 34장, 47장, 56장, 64장, 69장, 79장, 81장, 82장, 83장, 88장, 91장, 96장, 103장, 109장, 총25편)
9) 염행수, 『찬송가학』(서울 : 도서출판 생수, 1996), p.191.
10)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00-101.
11) 위의 책, p.102.
12) 한영제, 『한국성서,찬송가 100년』(서울 : 기독교문사, 1987), p.68.
13) 조숙자 , 조명자, 『서울 :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1』, p.205.
14)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03-104.
15) 염행수, 『찬송가학』, p.60.
16) 조숙자 , 조명자, 『찬송가학』(서울 :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1), p.212.
17)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04-105.
18) 위의 책, p.105.
19) 위의 책, p.106.
20) 위의 책, p.107.
21) 한영제, 『한국성서 , 찬송가 100년』, p.133.
22)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108.
23) 위의 책, p.108.
24) 위의 책, p.109.
25) 위의 책, pp.108-109.
26) 위의 책, pp.112-113.
27) 위의 책, pp.111-112.
28) 김양선, 『한국기독교 연구』(서울 : 기독교 문화사, 1971), p.74.
29)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1-112.
30)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218.
31)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2-114.
32) 민경배, 『한국교회 찬송가사』(서울 : 도서출판 생수, 1993), pp.105-108.
33)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4-115.
34) 강신우, 『찬송가의 올바른 이해』(서울 : 기독교 음악사, 1983), p.49.
35) 조선예수교 서회, 『신정찬송가』(서울 : 1931), 서문.
36) 민경배, "찬송가의 조속한 통합을 바라며", 『기독교 사상』, 통권 제270호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5), p.43.
37) 조선예수교 서회, 『신정찬송가』, 서문.
38) 기독신보, 1935년 2월 27일자.
39) 김교신, "찬송가의 변형:, 『성서조선』(1933년 6월호).
40)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3회 회록, (1934년 9월), p.49.
41)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재』, p.219.
42) 민경배, 『예배와 음악』(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05), p.50.
43)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4-115.
44) 민경배, 『한국교회 찬송가사』, p.116.
45)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5-118.
46) 조숙자 , 조명자, 『찬송가학』, p.229.
47) 민경배, 『예배와 음악』(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05).
48)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8-121.
49) 민경배, 『한국교회 찬송가사』, p.44.
50) 한영제, 『한국성서 , 찬송가 100년』, p.139.
51)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음악연구원, 1997), pp.121-124.
52) 위의 책, p.123.
53) 위의 책, p.124.
54) 대한기독교서회(편), 『합동찬송가』 (서울 : 1949), 서문.
55)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p.220-221.
56)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125.
57)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221.
58)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126.
59) 염행수, 『찬송가학』, p.203.
60) 민경배, 『한국교회 찬송가사』, p.183.
61)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p.222-223.
62) 이유선, 『기독교 음악사』(서울 : 기독교문사, 1988), p.222.
63) 염행수, 『찬송가학』, p.206.
64)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26-128.
65) 강신우, 『찬송가의 올바른 이해』(서울 : 기독교음악사, 1983) p.50.
66)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229.
67) 강신우, 『찬송가의 올바른 이해』, p.50.
68) 이유선, 『기독교 음악사』(서울 : 기독교문사, 1988), p.224.
69) 조숙자, "한국찬송가와 미국 Gospel Song", 『여성신학과 한국교회』(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97), pp.327-331.
70) 위의 책, p.335.
71) 예배를 위한 공적 찬송은 주일 예배 찬송을 뜻하는 것으로 기도회나 집회 시에 부르는 찬송과는 구분된 찬송을 말한다.
72)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128-129.
73) 박근원, "새로운 예배 시편",『예배자료 21』, 제3권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98), 서문.
박근원 교수는 예배자료 21에서 시편가의 사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구약성서의 시편 모음은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이 시편들에 감명 받은 찬송이나 기도를 통해서 우리 모두의 찬양과 기도에 변함없는 영향을 끼쳐왔다. 그도 그럴 것이 시편은 예수 자신 뿐 아니라 초대 교회 그의 제자들에게 찬송가였고 기도서였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들은 시편이야말로 자기네 주님의 생애와 섬김에 관한 예언이라고 생각하였다. 시편은 신약성서 안에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다. 신약성서와 초대교회 교부들의 기록들 가운데 있는, 예언으로서의 시편 해석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시편을 사용하게 될 실마리가 되었다"
74)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p.241-242.
75)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서울 : 한들, 1995), p.107.
76) 현행『통일찬송가』(1983)의 한국인 창작 찬송가는 학자들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본고에서는 현행 찬송가 우측 상단에 있는 작곡자 명이 한국인으로 표기된 곡들을 중심으로 17곡이라는 견해를 따랐다. 그 내용은 53장, 92장, 256장, 261장, 272장, 303장, 304장, 305장, 311장, 317장, 365장, 369장, 371장, 378장, 453장, 461장, 493장이다.
77)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 pp.108-109.
78) 김이호, 『찬송가 연구 제 2 권』(서울 : 도서출판 지혜원, 1999), p.178.
79) 나운영, "한국 교회음악의 현대화 과제", 『기독교 사상』, 1967년 6월, p.66.
80) 나운영, "한국 교회음악의 진로", 『기독교 사상』, 1958년 5월, p.38.
81) 김인수, "초기 한국인작사 찬송가에 나타난 신앙", 『장신 월보 제 40호』, 1994년 11월 22일 (서울 : 장신월보사), p.3.
82) 정장복, "한국문화와 기독교 예배 예전의 연접에 관한 고찰", 『예배학 부교재』 (서울 : 장신대예배학교실, 1994), p.39.
83) 홍정수, "한국의 창작 교회음악, 그 진단과 전망", 『교회음악』, 1988년 봄, p.93.
84) 위의 책, p.94.
85) 위의 책, p.96.
86) 홍정수, "2000년대를 향한 장신대의 교회음악 교육", 『2000년대를 향한 신학과 교육』(서울 : 장로회 신학대학 출판부, 1992), p.238-9.
87) 한태근, "한국의 청소년 교회음악 이대로 좋은가?", 『교회음악』(1987년 여름), p.15.
88) 정치근, "부끄러운 한국 찬송가", 『교회음악』(1987년 가을), p.30.
89) 홍정수, "2000년대를 향한 장신대의 교회음악 교육", p.99.
90)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 p.104.
91) 홍정문, 『교회음악 개론』(서울 :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2), p.94.
92) 문성모, "우리가락 찬송가에 대하여", 『교회음악』(1989년 가을, 겨울호), p.19.
93) 현행 찬송가인 『통일찬송가』(1983)에 한국인 작곡가로는 곽상수, 김연준, 박재훈, 이동훈, 나인용, 이동훈, 구두희, 이유선, 장수철, 박태준 등 10인 이다.
94) 홍정수, "한국의 창작교회음악 그 진단과 전망", p.31.
95) 홍정문, 『교회음악 개론』, p.99.
96) 김남수, "예배와 회중 찬송", 『복음과 실천』(대전 : 침신대출판부, 1993), p.446.
97) 나운영, "음악의 측면에서 본 찬송가 가사", 『교회음악』(1981, 가을호 통권25호), p.17-19.
98) 신소섭, 『예배와 찬송학』 (서울 : 아가페 문화사, 1997), pp.242-243.
99) 신소섭, 『예배와 찬송학』, pp.244-245.
100)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 pp.152-157.
101) 문성모, "우리가락 찬송가에 대하여", 『교회음악』(1989년 가을, 겨울호), p.20.
102) 문성모, "한국 전통음악에서 본 찬송가 틀리게 부르기의 원인분석", 『교회음악』(1987년 봄), p.24.
103) 홍정수, 『교회음악 개론』, p.103.
104) 위의 책, p.95.
105) 문성모, "우리가락 찬송가에 대하여", p.22.
106) 김남수, "예배와 회중찬송", p.446.
107) 문성모, "우리가락 찬송가에 대하여", p.24.
108) 문성모, 『우리가락 찬송가』(서울 : 한국 국악 선교회, 1989), pp.118-127.
109)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 p.340.
110) 위의 책, p.341.
111) 위의 책, p.340.
112) 위의 책, pp.341-342.
113) 위의 책, p.348.
114) 위의 책, p.349.
115)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 p.350.
<
I. 서 론
1. 연구의 동기와 목적
한국 교회는 선교 100년을 지나면서 끊임없는 발전과 성장을 이루었고,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보내어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난 선교 1세기를 돌아보면 한국 교회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한 발전을 이루었는데도, 이와 함께 찬송가 역시 많은 어려움의 과정 속에서 그 나름대로의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양적인 부흥과 성장에 비하여 질적인 성장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한 예로 찬송가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여 왔으나, 더욱 깊이 있고 성숙한 예배를 드리게 하고 기독교인의 삶을 더욱 올바르게 자라게 하는 질적인 성장을 위한 요소로서는 부족함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 찬송가는 한국 교회의 연합과 분열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여러 과정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내려 왔고, 한국 교회의 여망이던 개신교 『통일찬송가』1)가 1983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만들어진 찬송가임에도 불구하고, 1천만여 기독교인의 영적 생활과 신앙생활을 위한 도구로서의 그 역할에 있어서 문제점과 부족함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통일찬송가』(1983)에는 복음가(Gospel Song)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수는 거의 과반수에 이른다. 이는 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찬송가를 번역하여 편찬할 때, 주로 그 당시 미국에서 사용하던 많은 복음 가들을 사용하였으며, 이렇게 들어온 복음가들이 계속적으로 전해져서 한국 찬송가의 정형으로 자리잡아 현재의 『통일찬송가』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의 공적 찬송가에 복음가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겐 복음가가 표준 찬송가가 되었고 찬송가를 편찬하는 이들이나 작곡, 작사하는 이들도 복음가를 찬송가의 표준으로 삼고있는 것이다.
원래 찬송가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노래로 이루어져야 함2)에도 불구하고 우리 찬송가에는 복음가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찬송가로서의 원래의 의미와 맞지 않는다. 또한, 복음가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개념보다는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것과, 하나님에 관하여 인간에게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를 위한 찬송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3)
복음가는 대부분 19세기 미국의 대중 전도집회를 통하여 만들어진 노래인데, 가사의 내용이 전도집회를 위한 제한된 주제를 다루고 있고 불신자나 초신자를 위한 극히 초보적인 신앙의 수준을 나타내는 곡이 대부분이어서 전도집회가 아닌 교회의 올바른 예배와 성숙한 신앙을 위한 영적인 노래가 되지 못한다. 초기 선교사들은 무지한 한국인들에게 신앙의 기초와 복음을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어린이의 수준에 맞는 이와 같은 복음가와 주일학교 노래를 교회 찬송가에 많이 포함시켰는데, 한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이 복음가들이 더 많이 불려지고 교회의 찬송가에 포함하게 되어, 복음가가 개신교의 공적 찬송가의 중심이 되고, 개신교는 복음가를 교회 찬송가의 전통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 우리가 부르는 『통일찬송가』의 내용은 대부분 극히 제한된 주제와 시대적 배경의 노래로 한국 초기 선교사에 의해 채택되고 번역된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신앙적 언어로 된 곡들이 많이 들어있다. 이러한 우리 찬송가의 곡의 구성과 내용만 보더라도, 우리가 부르는 『통일찬송가』는 수정하고 보완해야할 부분이 많이 있다고 판단된다.
한국에서 창작 찬송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전파될 때부터 있었으나 큰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 나운영과 박재훈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의 창작 찬송가들이 쏟아져 나왔고 현재는 그 수가 약 1500에서 2000곡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창작 찬송가들이 실려있는 찬송가집으로는 우선 1967년 당시 교회가 연합으로 쓰던 합동찬송가를 개정한 개편찬송가 이며 발행되었는데 여기에 한국인 창작 찬송이 모두 27곡 실려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1983년에 발행한 현행찬송가, 통일찬송가에는 이보다 줄어든 17곡인 전체의 3%밖에 되지 않는 한국인 창작 찬송이 실려있다.
찬송가의 편찬 목적은 첫째, 우리의 신앙고백을 우리 스스로가 하자는 것과, 둘째, 우리 정서에 맞는 찬송가로 찬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고백을 우리 스스로 하자는 것에는 별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우리 정서에 맞는 찬송을 만드는 것은 매우 미흡하다. 가락을 보아도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찬송이 많지 않고 작곡자의 이름만 가리면 현행 영미 계통의 수입찬송가와 다를 바 없는 곡들이 대부분이다. 가사적인 측면에서도 기존의 번역 찬송가의 가사와 내용상 별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올바른 찬송가는 예배에 있어서 그 예배를 더욱 은혜롭게 이끌며, 설교 이상의 교훈을 성도들에게 전하며, 성도들의 신앙의 고백과 기쁨을 대신한다. 또한 성도의 삶을 더욱 성숙하고 은혜롭게 만든다. 이러한 찬송가를 위해 필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교회가 더욱 성장하고 성숙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교인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찬송가가 이에 부응하여 변화되고 발전되어야 한다고 보며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2. 연구의 내용과 범위
필자는 먼저 올바른 찬송가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역사를 살펴보고 다음으로는 찬송가를 활용하는 예배와 예배찬송을 살펴보고, 우리 찬송의 나아갈 방향을 조명해 볼 것이다.
먼저 『통일찬송가』는 한국 기독교 교회의 여러 교단에서 쓰였던 찬송가를 중심으로 묶여져 있고, 『통일찬송가』의 곡의 유형과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국 찬송가의 역사와 유입경로 등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에 한국 찬송가의 역사적 편찬 과정을 아래와 같이 세 시대로 구분하여 찬송가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첫째, 1890년대에서 1908년에 걸친 선교사에 의해 주도된 찬송가 편찬 시기, 둘째, 1930년대의 선교사와 한국인의 공동 편찬 시기, 셋째, 1949년 이후의 한국인 주도의 찬송가 편찬시기로 나누어 다루려고 한다.
3장에서는 한국 창작 찬송가의 문제점을 살피면서 찬송가는 순수한 한국적이어야 하고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찬송가다워야 한다. 그리고 한국인 창작 찬송가가 몇 곡이나 되는지, 현주소를 알아보고 한국인 창작 찬송가의 한계를 알아본다.
4장에서는 바람직한 한국 창작 찬송가를 모색하면서 한국 찬송가의 가사와 곡조를 한국화 할 수 있는 전망을 알아보고 한국인이 창작한 찬송가를 쓰기 위해서 우리가락 찬송을 만드는 당위성과 만드는 방법론, 그리고 찬송가 한국화의 가능성을 성서적 측면에서, 사회적 측면에서, 교육적 측면에서 가능성을 알아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바람직한 한국 창작 찬송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Ⅱ.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역사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나라에는 이미 중국에서 찬송가가 들어와 있었다. 우리 나라의 찬송가의 역사는 선교사가 들어오기전 이미 시작이 되었다. 초기 한국 교회의 찬송가는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편집되고 발행되었다. 신정 찬송가」(1931)는 아펜젤러(Henny. G. Appenzeller)가 편찬 위원장이 되고 일반 위원으로는 한국 사람들이 편집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우리 손으로 찬송가를 편집하여 발행하게 되었다.4)
한국 개신교 찬송가는 처음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함께 찬송가를 발행하여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찬양가」(1894)와 「찬미가」(1896)로 나뉘어 발행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최초의 통합 「찬송가」인「찬숑가」(1908)가 발행되고, 그 후 다시 감리교의 「신정찬송가」(1931)와 장로교의 「신편찬송가」(1935)로 나뉘어진다. 조국의 해방과 함께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당시에 교세를 확장한 성결교회가 참여하여 하나의 찬송가를 만들기로 결의하고「합동찬송가」(1949)가 발행된다. 그 후 「새찬송가」(1962)와 「개편찬송가」(1967)가 새로이 발행되고 「합동찬송가」도 함께 사용하였다. 이에 찬송가의 통합을 결의하고 오랜 노력 끝에 선교 100주년 기념으로 「통일찬송가」(1983)가 발행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파간의 통합된 찬송가의 발행을 위하여 노력하여 온 것이다.
통합된 찬송가들은 각 교파간의 이해가 얽혀 각기 사용하던 자신들의 찬송가에서 얼마나 많은 수의 찬송이 채택되느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지 내용의 발전에는 관심이 거의 없는 행정적인 차원에서 편집된 찬송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찬송가 통합의 주된 목적은 각기 다른 찬송가를 사용하는 데서 오는 불편을 없애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개정된 찬송가들은 전에 사용하던 찬송가보다 수준 높은 찬송가를 만들기 위하여 찬송가 개정 원칙을 정하고 찬송가 편찬에 임하였다. 그 결과 개정된 모든 찬송가들은 내용 면에서 전에 사용하던 찬송가들에 비하여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다.
찬송가의 통합을 가리켜 교회 연합이 발전되어 있는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색으로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신앙적 유산이라고5)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세계적으로 보아 통일된 찬송가를 쓰는 나라는 없다. 이는 각 교파간의 신학적 견해와 음악에 대한 문화적 배경, 찬송에 대한 전통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로교는 객관적 종교 경험을 중시하고 성서의 찬송을 운율화한 시편가를 사용하고, 감리교는 주관적 종교 경험을 중심으로 한 웨슬레의 찬송, 루터 교회는 독일 찬송(Chorale), 영국 교회의 찬송(Hymn)으로 사용하고 있다.
찬송가는 마땅히 각 교파간의 전통적인 찬송을 기초로 일반적인 찬송을 첨가하여 편집한 교파적인 찬송가가 바람직하며 그러한 찬송가가 세계적인 추세라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리나 문화적 배경, 찬송에 대한 전통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경우에도 무리한 통합은 찬송가 발전에 장애가 되었고, 서로 비교 발전할 수 있는 경쟁적인 기회마저 잃어서 찬송가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음을 우리 찬송가의 역사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6)
1. 선교 초기 선교사들의 편찬 시대 (1890년대 ∼ 1908년)
1) 『찬미가』(1892) : 최초의 번역찬송 모음집
한국어 번역 찬송이 최초로 출간된 것은 감리교 선교사들이 편찬한 『찬미가』이고 1892년 서울에서 출판되었다. 감리교 선교부에서 당시 번역되어 불려지던 한국어 번역찬송 27편을 모아 소책자로 만든 것이며 편찬 위원은 배재학당 교사였던 존스 목사와 이화 학당 교사인 로드웨일러 양이었다. 『찬미가』(1892)는 번역 찬송을 다 수록한 최초의 가사판 찬송가이며, 감리교 전용찬송가로 1895년 『찬미가』의 증보수정판이 나오기 전까지 사용하였다.7)
2) 『찬양가』(1894) : 최초의 악보 찬송가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1894년 출간한 『찬양가』는 한국 최초의 악보 찬송가로 117편의 찬송을 4성부 악보와 같이 찬송가로서의 규모를 갖춘 한국 찬송가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서양 음악 보급에 기초를 놓은 가장 중요한 찬송가라고 할 수 있다. 『찬양가』(1894)에 수록되어 있는 117편의 찬송 중에 9편은 우리 한국인의 창작 찬송이고 108편은 번역 찬송이다. 여기에 수록된 찬송은 언더우드의 번역이 가장 많다고 볼 수 있는데 총 25편이다.8)
처음에 찬양가는 장로교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부가 합의하여 같이 쓰기로 하고 존스(Jones)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일임하였으나 감리교 존스 선교사가 귀국하여 2년간 자리에 없는 동안 독자적으로 언더우드가 출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감리교와 장로교 일부에서 반대하게 되는데, 그 반대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년도 회의에서 결정된 편찬안과 틀리다.
둘째, 타인의 번역 찬송을 수록하면서 번역자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
셋째, 하나님으로 쓰기로 결정하였던 호칭 대신 '아버지' 혹은 '여호와'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넷째, 다른 사람이 번역한 찬송을 임의로 고쳤다.
다섯째, 장로교적 교회론을 간접적으로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이 때문에 일어난 마찰로 감리교회에서는 『찬양가』의 사용을 반대하게 되었다.9)
『찬양가』(1894)중 9곡(4장, 29장, 38장, 40장, 61장, 93장, 113장, 114장, 115장)은 한국인이 작사한 한국인의 창작 찬송이다. 『찬양가』(1894)에 수록된 한국인의 찬송으로 오늘날까지 불려지는 것은 한 편도 없으며, 백홍준의 창작찬송으로 알려진 "어렵고 어려오나"(『찬양가』93장)는 『찬숑가』(1908)에 수록되어 1930년대까지 불려졌다. 『찬양가』(1894)에 수록된 번역찬송은 18세기 영국의 복음적 찬송이 가장 많은데, 왓츠(Isaac Watts, 1674 - 1748) 13편, 웨슬리(Charles Wesley, 1707 - 1788) 7편, 뉴톤(John Newton, 1725 - 1807) 5편 등 42편이며, 19세기 영국찬송이 29편, 17세기 영국찬송이 4편으로 모두 75편의 영국 찬송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세기 미국 찬송은 26편인데 대부분이 복음찬송으로 불리스(P. P. Bliss, 1838 - 1876) 5편, 크로스비(F. J. Crosby, 1820 - 1915) 2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작시자 미상 찬송이 4편이며 주기도문, 송영(7장, 117장)으로 되어 있다.
【표1】
18세기 영국의 복음적 찬송 / 왓츠13편,웨슬리7편,뉴톤5편등42편
19세기 영국 찬송 / 29편
17세기 영국 찬송 / 4편
19세기 미국 찬송 / 26편(블리스 5편, 크로스비2편)
작시자 미상 찬송 / 4편
주기도문, 송영 / 7장, 117장
『찬양가』(1894)에는 88곡이 악보로 되어 있는데, 19세기 미국 찬송 곡이 60곡, 영국 찬송 곡이 19곡, 기타 9곡으로 미국 곡이 70%이다.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찬송가 작곡가인 메이슨(L. Mason, 1792 - 1872)이 작곡, 또는 편곡한 곡이 16곡으로 가장 많고, 블리스와 도온(W. H. Doane, 1832 - 1915) 등 복음찬송 작곡가들의 곡이 25곡으로 3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복음찬송들은 대부분 후렴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며, 생키(I. D. Sankey, 1840 - 1908)의 곡이『복음찬송가집』(Gospel Hymns, 1875 - 1891)에 수록된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전도집회 찬송이다.10)
3) 초기 장로교 찬송가 : 『찬셩시』(1895)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를 채택하지 않은 북부 장로회 선교부에서는 1895년 『찬셩시』라는 명칭으로 찬송가 54편을 수록한 새 찬송가를 가사판으로 출판하였는데, 한국인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번역찬송을 택하였다.
『찬셩시』에 수록된 번역 찬송은 『찬양가』(1894)에서 온 찬송 20편(언더우드 17편, 존스목사 1편, 펜윅 1편, 한국인 1편)과 새로 수록된 찬송으로 번역자가 확실한 찬송 13편(Mrs. Baird 10편, Miss Perry 1편, Miss Rothweiler 1편, G. H. Jones 1편)이 있고, 베어드 여사의 한국어 찬송 10편 중 5편(찬셩시12, 40, 41, 48, 50장)은 번역찬송이 아니고 한국어 창작 찬송인데, "예수 인도 하쇼서"(찬셩시 40장, 통일 421장)는 현행 『통일찬송가』(1983)에도 포함되어 있다.
『찬셩시』(1895)는 베어드 여사가 찬송가의 원 가사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곡조를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대체적인 내용을 한국어로 재구성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인이나 선교사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다.11) 그러나 『찬셩시』는 장로교의 또 다른 찬송가로서 번역찬송가의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고, 장로교 내에서도 북장로회 중심의 선교 지역이었던 서북지역에서만 주로 사용된 지역 한계성 또는 편중성 및 선교부에 따른 찬송가 구별 사용의 분파성을 대두시킨 측면도 없지 않다.12)
4) 초기 감리교 찬송가. 『찬미가』(1895)
최초로 찬송가가 발간된 것은 1892년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H. Jones) 목사와 로드웨일러(Louis G. Rothweiler)양이 공동으로 만든 『찬미가』였다. 여기에서는 악보 없이 노래만 적혀 있었으며 당시 널리 불려지던 번역찬송 27곡이 편집되었다.13)
감리교에서는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를 쓰지 않기로 하고, 1895년 감리교 선교부의 연차 모임에서 『찬미가』(1892)의 증보, 수정판을 출간하기로 결정했으며, 찬송 81편이 수록된 『찬미가』를 1895년에 출간하였다. 번역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다음과 같다.
【표2】
H.G.Underwood /「찬미가」14장, 21장, 22장, 23장, 50장, 52장, 56장, 58장, 61장, 65장, 66장, 67장, 73장 (총13편)
Mrs. Baird /「찬미가」29장, 31장, 32장, 33장, 40장, 41장, 62장, 63장, 74장, 80장 (총10편)
Mrs. Noble /「찬미가」39장, 49장, 77장 (총3편)
Mrs. Johnes /「찬미가」43장
Korean lady /「찬미가」53장
『찬미가』(1895)는 가사 판으로 가사의 원문인 영문가사 첫줄과 어떤 곡조인지를 알려주는 곡명, 운율, 곡조가 수록된 원 찬송가의 명칭과 장수를 표시해 주고 있어, 번역찬송들이 어느 찬송가에서 왔는지 알 수 있다.
【표3】
Methodist Hymnal (19C) /57곡
Gospel Hymnal (1883) /14곡
Epworth Hymns /3곡
Finest of the Wheat (1890) /1곡
Franklin Square Collection /1곡
「찬양가」(1894) /5곡
예배용 찬송은 대부분 『미국 감리교 찬송가』(Methodist Hymnal)에서 왔고, 전도집회 찬송인 복음찬송(Gospel Songs)이Gospel Hymns Consolidated 와 The Finest of The Wheat에서 왔으며, 성탄 케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찬미가』15장)"이 Franklin Square Collection에서 왔다. 『찬미가』(1895)에는 총 81편 중 18편이 19세기 미국의 복음찬송이다.14) 이 찬송가에서 처음 신의 칭호를 '하나님'으로 사용하였으며 전체 번역에서 언어의 구사가 조금 부드럽게 표현되었다.15)
5) 『찬미가』(제2판, 1895)
감리교에서는 언더우드의 『찬양가』의 사용을 거부하는 존스(George H. Jones) 목사와 로드웨일러(Louis G. Rothweiler) 공편으로 1895년에 『찬미가』를 발간하였다. 이것은 1892년의 『찬미가』를 수정 보충하여 81편의 찬송을 수록하고 있는데 악보는 실려 있지 않고 곡명과 미국 「감리교 찬송가」(Methodist Hymnal)의 페이지 표시로 곡조를 지시하고 있다.16)
6) 『찬미가』(제3판, 1897)
『찬미가』(1895)에는 81편이 수록되었는데, 여기에 9편을 첨가하여 90편이 수록된 『찬미가』(제3판)가 1897년에 나왔다. 여기에 한국인의 창작찬송 두 편이 새로 나타났다. "우리 죄악 심중하야" (『찬미가』87장)는 배재대 학생이, "유태 국에 나신 구주" (『찬미가』89장)는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작사했다. 『찬미가』(1897)에는 십계명과 주기도문, 그리고 사도신경이 수록되었다.17)
7) 최초로 운율시편가가 수록된 『찬셩시』(1898)
『찬셩시』(1895,초판)의 제 2판은 1898년에 가사 판으로 84편으로 증보되어 출간되었는데 장로교 예배 음악의 특징인 운율시편가가 14편이 수록되어있다. 14편의 운율시편가는 주로 미국 찬송가 곡조에 넣어 부르도록 운율 화한 것인데 한국 최초의 구약 한글 역인 『시편촬요』(1898)의 번역자 피터스(Alexander A. Pieters, 1872 ∼ 1958)가 한국어로 운율 화한 것이다. 피터스는 시편 62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시편촬요』를 출간했는데 여기에 수록된 시편중 『찬셩시』(1898)에 14편(시편 3편, 8편, 19편, 20편, 23편, 67편, 95편, 100편, 114편, 121편, 124편, 126편, 130편, 138편)이 운율화 되어 나타났다. 현행 『통일찬송가』(1983)에는 14편의 운율시편가 중 다음 5편이 수록되어 있다.
【표4 : 『통일찬송가』(1983)에 수록된 피터스의 운율 시편가】
찬셩시(1898) // 통일 찬송가(1983)
시편 편수/ 가사 첫 줄 / 장 //가사 첫 줄 / 장
시편 20편/너의 환난 만날 때에/74 //내가 환난 당할때에 /428
시편 67편 /쥬여 우리 무리를 /76 //주여 우리 무리를 /47
시편 121편 /눈을 들어 산 보리니 /79 //눈을 들어 산을 보니 /433
시편 130편 /내가 깁흔 곳에서 /82 //내가 깊은 곳에서 /479
시편 138편 /내가 일심으로 /83 //내가 한 맘으로 /17
『찬셩시』(1898)에 수록된 84곡 중 60%인 50곡이 『미국 장로교 찬송가』(N. L. D - The New Laudes Domini, 1892)에서 왔는데 이것은 당시 미국의 보수적이며 복음 적인 남부 장로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찬송가로 장로교 목사 로빈슨(Charles S. Robinsos)이 편찬했고 찬송가 가사 1228편과 800여곡의 곡조가 수록된 우수한 찬송가로, 한국에 온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이 『미국 장로교 찬송가』를 표준 찬송가로 사용했다. 『찬셩시』(1898)에 있는 84곡 중 9곡은 『복음찬송가』(Gospel Hymns)에서 온 것으로, 이것은 쌩키와 맥그라나한(J. McGranahan), 스테빈스(G. C. Stebbins)가 펴낸 미국의 유명한 『복음찬송가』(Gospel Hymal)의 제1집에서 제4집까지의 합병 판인데, 1883년 『복음찬송가』Gospel Hymns Consolidated로 나온 책이다.18)
그 밖에 한 곡은 미국의 부흥회 노래집 (The Finest of the Wheat, 1890)에서 왔으며 그 밖의 20여곡은 자료를 표시해 주지 않았다. 이 책은 『찬양가』나 감리교의 『찬미가』보다 훨씬 쉽고 세련된 번역찬송가가 다수 포함하게 되는데, 이는 베어드(A. L. Baird)여사와 밀러(F. S. Miller)목사의 번역이 다수 수록되었기 때문이다.19)
8) 『찬미가』(제5판, 1900)
『찬미가』(제5판)는 글자를 크게 하여 노인들이 보기 쉽게 하였고, 찬송가 수도 이전보다 많은 176장을 수록하였으며, 존스 목사와 로드웨일러양이 편찬하였다.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총 176곡 중 125곡이 『미국 감리교 찬송가』(Methodist Hymnal)에서 온 것이고, 6곡이 『미국 장로교 찬송가』에서 온 것으로 이들은 표준 찬송가로 분류되는 것이며, 미국의 부흥회 노래 집인 『복음 찬송가』(Gospel Hymns, 1883)에서 온 것이 24곡, 다른 부흥회 노래 집인 Thy Finest of the Wheat에서 온 것이 7곡으로 31곡이 19세기 부흥회 노래 집에서 온 것이다.20)
이 책에는 특히 '교회에 학습할 사람이 밧난 레문', '쟝셩한 사람 셰례 례문', '쥬의 성만찬 베프난 례문' 등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21)
9)『찬셩시』(제3판, 1900)
이 책은 『찬셩시』(제2판 1898)보다 3편이 증보되어 87편이 수록되었는데, 이 3곡은 한국인의 창작곡이다. 추가된 곡은 다음과 같다.22)
【표5】
찬 셩 시(1900) // 통일 찬송가(1983)
장수 / 가사 첫 줄 // 가사 첫 줄 / 장 수
85장 / 턴부님께 빕니다 // 성부님께 빕니다 / 286장
86장 / 지나간 밤 보호하사 // 지난 밤에 보호하사 /66장
87장 / 턴디간의 가득하고 // 천지 주관 하는 주님 /244장
10) 『찬미가』(제6판, 1902)
감리교의 『찬미가』제5판의 176편보다 29편이 증보되어 205편이 수록되었으며 가사 판으로 출간되었다. 노블(W. A. Noble)여사의 새 번역 찬송이 몇 편 수록되었다고 전해지나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23)
11)『찬셩시』(1902)
찬송가 109편과 시편 14편의 모두 123편이 수록되었는데, 『찬셩시』(1900년 제3판)보다 37편이 증가되어, 『찬셩시』(1905년) 73 - 109자이 새로 수록된 찬송으로 간주된다. 24)
12) 『찬미가』(최종판, 1905)
『찬미가』(1902년, 제6판)에는 찬송가 205편이 수록되어 있다. 『찬미가』(제7판)는, 감리교회의 찬미가 교정위원에 의해 수정, 편찬되어 찬송가 183편과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외에 주일예배예문, 세례, 학습, 성찬예문, 결혼식, 장례식 예문 등을 수록한 초기 감리교의 최종판 『찬미가』이다. 『찬미가』(1905)목차에는 『찬셩시』에서 31편, 『찬양가』에서 1편, 『찬양가』와 『찬셩시』에 모두 수록된 찬송 중에서 3편, 모두 35편이 장로교 찬송가에서 왔음을 표시해 주고 있어, 감리교가 장로교의 우수한 찬송을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5)
이 『찬미가』(1905년 제8판)도 가사 판으로 감리교의 『찬미가』는 악보 판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수록 찬송곡 183곡의 원자료 찬송가집의 명칭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26)
【표6】
미국 표준 찬송가집
Methodist Hymnal(19C) 미국 감리교 찬송가 / 119곡
New Laudes Domini(1892) 미국 장로교 찬송가 /6곡
복음 찬송과 부흥회 노래집
Gospel Hymnal Complete(1894) /40곡
Finest of the Wheat(1890,1892) /6곡
Church Hymnal and Gospel Songs(1898) /4곡
Young People's Hymnal /3곡
Epworth Hymnal /1곡
Sacred Songs and Solos(1873) /1곡
표시 없는 것 /3곡
13) 『찬셩시』(악보판, 1905)
선교 초기에 발행된 찬송가 중 악보판은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년, 초판)와 『찬셩시』(1905)뿐이며, 『찬미가』는 악보판을 내지 못하였다.27)
언더우드의 『찬양가』(1894)는 128쪽이나 되며 117편 찬송을 수록하였다. 이 찬송가가 나옴으로써 부르는데 산만하였던 어려움 들이 점차 해소되었으며 찬송가가 정착되게 되었다.
내용으로는 왓츠(13편)와 웨슬레(7편)를 비롯한 18, 19세기 영국계 찬송 60여편, 미국 찬송 20여편 등 영국과 미국의 복음 찬송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 창작 찬송이 7편이 들어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다.
『찬양가』는 서상륜과 최오명 등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번역되었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편찬하였다.28)
『찬셩시』(1905)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한 것으로 악보는 4성부로서 『찬양가』(1894)와 같이 일절 가사만 악보 사이에 넣고 가사 전체를 악보 밑에 넣었다. 『찬셩시』(1905)에는 찬송가 137편과 피터스의 운율 시편가 14편으로 총 151편이 수록되어 있다.
『찬셩시』(1905)에 수록된 곡조의 원자료 찬송가 집은 다음과 같다.
【표7】
원 자 료 집 명 칭 / 수록곡수
① New Laudes Domini(1892) /91곡
② Gospel Hymnal Consolidated(1883) /24곡
③ Gospel Hymnal No.5(1887) /8곡
④ Church Hymnal and Gospel Songs(1898) /2곡
⑤ Finest of the Wheat(1890) /1곡
⑥ Epworth Hymnal /1곡
⑦ Songs for Young People /1곡
⑧ Presbyterian Book of Praise /1곡
⑨ Canadian Presbyterian Book of Praise /1곡
『찬셩시』(1906년, 가사판)에 나타난 찬송 곡의 원자료는 모두 9종류로 총 151곡 중 91곡이 『미국 장로교 찬송가』에서 온 것이고 찬송가집 ②, ③, ④, ⑤번은 19세기 미국의 복음 찬송가 집으로, 부흥회 노래로 되어있는 것들이다. 한국 초기의 장로교 찬송가는 19세기 『미국의 장로교 찬송가』에서 표준 찬송가를 가져왔으며, 그 밖의 복음찬송들은 19세기 미국의 『복음찬송가』에서 주로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29)
14) 최초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통일찬송가인 『찬숑가』(1908)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기『찬양가』, 『찬성시』, 『찬미가』를 사용하여 오던 중, 장로교 공의 회는 1902년 찬송가의 통합을 결의하고 1905년에 감리교와 합동하여 찬송가의 공동 편찬과 발행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찬숑가』(266장)를 조선 예수교 서회 발행으로 출판하였다. 최초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통합 찬송가인 『찬숑가』가 이루어진 것은 1906년 베어드(Mrs. W. M. Baird)와 밀러(F. S. Miller), 그리고 벙커(D. A. Bunker)등이 모여 의논한 결과이다.30) 이들의 합동원칙은 이미 사용하던 찬송가를 토대로 새 찬송도 첨가하되 말은 존경어로 구조가 명확하며 의사가 정당하고 교리에 적절한 것만 쓰기로 하였다. 이 찬송가는 1908년 출간되었는데 가사 판으로 262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찬숑가』(1908)란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악보 판은 출판비 관계로 1909년 피터스 목사 내외의 도움으로 사적으로 출판하였다. 『찬송가』(1908)에 수록된 곡조의 원자료집(총 262곡중)은 다음과 같다.
【표8】
원자료집 명칭 / 수록 곡수
① New Laudes Domini (N. L. D) /155곡
② Gospel Hymnal Complete /70곡
③ Church Hymnal and Gospel Songs /8곡
④ Finest of the Wheat /6곡
⑤ Epworth Hymnal /1곡
⑥ Young People's Hymnal /1곡
⑦ Songs for Young People /1곡
『찬숑가』(1908)에 수록된 262곡 중 155곡이 『미국 장로교 찬송가』에서 왔고, 70곡이 『복음찬송가집 완성판』(Gospel Hymnal Complete, 1894)에서 왔으며 8곡이 『복음성가집』(Church Hymnal and Gospel Songs, 1898)에서, 그리고 6곡이 『복음 찬송집』(Finest of the Wheat, 1890, 1894)에서 채택한 것으로 84곡이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부흥회 노래 집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찬숑가』(1908)에 수록된 262곡중 삼분의 일을 19세기 미국의 부흥회 노래가 차지하고 있고, 『찬셩시』나 『찬미가』보다 복음찬송(Gospel Song)이 증가되었음을 보여 준다. 『찬숑가』(1908)는 1930년대에 감리교의 『신정찬송가』(1931)와 장로교의 『신편 찬송가』(1935)에 220여편, 현행 『통일 찬송가』(1983)에 178편이 수록되어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핵심을 이루어온 찬송가라고 할 수 있다.31)
『찬숑가』(1908)의 번역은 선교초기 찬송가 중 가장 세련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 번역자중 가장 공헌이 큰 베어드 여사의 번역과 편찬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베어드 여사의 번역이 탁월한 이유에 대하여 민경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문학적 기량은 섬세하였고, 깊은 경건 속에 있었으며, 그의 찬송가는 유난히 무리 없는 소박한 신앙의 감격을 노래하는 문체를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한국말을 리듬의 차원에서 첫째 음절에 악센트를 가진 강약 조가 악센트가 없는 음절로 시작되는 약강조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한문에서 나온 어색한 말들 대신에 아주 평범한 일상어를 구사한 점 등의 이유가 있다」32) 라고 말한다.
이 『찬송가』의 장점을 정리하면:
첫째, 6곡의 한국 고유의 곡조로 부르게 된 것과
둘째, 한국 고유의 곡을 붙인 찬송은 교창으로 부를 수 있게 하였고,
셋째, 절기 찬송 12곡을 묶었다. (성탄절 찬송 6곡 : 제66 - 71장, 부활절 찬송 6곡 : 제81 -86장)
넷째, 번역문이 세련되고 완벽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찬송가』악보 판 초판은 1909년 피터스목사 부부에 의해 출간되었는데 이는 자금이 부족하여 출판 경비를 사적으로 충당하여 일본 요꼬하마에서 인쇄한 것이다. 『찬숑가』(1908)보다 4편이 추가되어 266편으로 증가되었고, 267장은 '백만명 구령가(A Million Souls for Jesus)'가 수록되어 있다.
『찬숑가』의 악보 판 제2판은 1916년 출간되었는데 피터스 목사 부인이 부르기 쉽도록 곡조를 낮게 건조한 것이 특징이며, 출간된 지 4개월만에 매진되었다. 악보 판 제3판은 1922년에, 제4판은 1925년에 발간되었다.
『찬숑가』(1909, 악보 판)는 세 번째 발간된 악보찬송가 이지만 한국 교회의 부흥기에 20여 년을 사용해 왔으며, 여기에 수록된 19세기 미국의 찬송가 곡조와 주일학교 노래, 그리고 부흥회 노래(Gospel Song)가 한국교회음악의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33)
15) 장로교 감리교 찬송가의 분열
1924년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 공의회에서 그 첫 해 사업으로 『신정 찬송가』의 발행을 결의하고 1928년 그 편집을 시작하여 4년동안 계속하여 1931년에 출판하게 된다. 총 314장의 찬송 중의 『찬숑가』에서 반 수 이상을 채택하였고 새로운 70여 곡의 찬송은 『청년 찬송가』(한국 청년을 위한 찬송가)에서 70여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번역하여 채택한 것은 아주 적은 수이며, 공개 응모를 통한 한국인 찬송시 6편이 포함되어 편집되었다.34)
최종 개정 위원에 한국인 위원 김인식과 변성옥 목사가 참여한 것이다. 찬송가 편집에 한국인 위원이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이 문서상으로 나타난 것은 『신정 찬송가』가 처음이라고 생각된다.
찬송 개정 원칙은 7개로 정하고 그를 기준으로 하여 개정을 하였는데, 특히 음악과 우리 말의 음절과 어세와 음악의 결합에서 많은 고심을 하였고 찬송가학이 발달한 후에 이 문제를 해결하여 줄 것을 후세에 부탁하고 있다. 다음은 신정 찬송가의 7가지 개정 원칙이다.
① 우리말 번역이 원문에 가까운지?
② 번역이 아닌 찬송은 잘 쓰여지고, 찬송으로 쓸만한지?
③ 가사가 음악의 리듬과 어세가 일치하는지?
④ 전에 사용하던 음악에서 교정된 것인지?
⑤ 전에 사용하던 음역이 적당한지?
⑥ 절수를 줄여도 무방한지?
⑦ 곡조가 찬송으로 적합한지? 그렇지 않으면 더 나은 것이 없는지?35)
이렇게 『신정 찬송가 』는 『찬숑가』를 기초로 하여 개정한 찬송가로 많은 발전이 있는 찬송가이나 장로교 총회에서 총회와 협의 없이 출판하였다하여 사용을 거부하였다.36)
이 7가지 외에도 『찬숑가』에 있던 "조선구곡은 좋지 못한 사회와 관계에 있어서 불합리하다"는 위원들의 반대를 중시하여 삭제하였다.37) 그런데 이 『신정 찬송가』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장로교 총회는 장로교 총회와 협의 없이 출판하였다는 점과 교열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사용을 거부했다. 이런 반발과 문제들을 당시 신문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 박경호는 『신정찬송가』에 있어서 가사의 수정이 너무 지나쳤다고 비평했다. 예를 들어 『신정 찬송가』의 "태양빛 보다 더 밝은 곳"보다는 구 찬송가에 있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이 더 낫고 구 『찬숑가』는 수 십여 년 동안 조선 각 교회에서 사용되었으므로 교인들이 좋아하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 "예수 일흠 권세여" "내 주를 가까이" "성재 성재 성재"(거룩 거룩 거룩)와 같은 여러 장의 40만 교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마음에 밝혀서 그들의 민요가 되고 전설이 되어 왔는데 이런 것을 전부 정정하고 장수까지 모두 바꾼 것은 충분한 고려 없이 편집한 것이라고 했으며 또한 평양 신학교 음악 강사 권태희는 "구 찬송가 제 10 ∼ 14장"은 조선 구곡에 맞추어진 것인데 그것이 비록 단순한 곡으로 되어 있을지라도 이런 찬송가를 제거해 버린 것은 잘못이다. 박경호는 "신구 책에 있는 곡조가 자체로서는 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서양 곡에 서투른 조선 민족이 불러야 할 서양 곡이라면, 반드시 또한 많은 고려와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조선사람은 선율적이요, 운율적인 동시에 화성적은 아니다. 곡조의 선택은 조선 사람의 음악적 경향을 잘 이해하는 음악 전문가에게 맡겨주시오"라고 하였다.38)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우리 나라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주장들이라 볼 수 있다. 권태희의 "구 찬송가 제 10 ∼ 14장"은 조선 구곡에 맞추어진 것인데 …… 이런 찬송가를 더 요구할지언정 제거 해 버린 것은 잘못이다. …… 라는 주장과, 박경호의 서양 곡에 서투른 조선 민족이 불러야 할 서양 곡이라면, 반드시 또한 많은 고려와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조선사람은 선율적이요, 운율적인 동시에 화성적은 아니다. 곡조의 선택은 조선 사람의 음악적 경향을 잘 이해하는 음악 전문가에게 맡겨주시오"라고 한 주장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발언들이다. 김교신도 "이것이라면 개정인가 개요인가, 신앙 없는 음악가의 찬송가 편찬과, 조선말 모르는 박사의 성서개역이 조선에만 볼 수 있는 일이니 반도의 영계도 탄식하지 않는가"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선교사들의 주도로 되어 민족 주체성을 무시하였다는 비판이었다.39)
그리하여 장로교 총회는 1934년 "찬송가는 종교교육부에 맡겨서 더욱 잘 편찬하도록" 가결하였다.40) 결국 장로교 총회 종교 교육부는 1935년 6월에 『신편 찬송가』(400장)를 발행하였다. 『신편 찬송가』는 『찬숑가』, 『신정 찬송가』, 『부흥성가』측에 허락을 얻어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편찬하였고 부흥성가의 복음가를 채택한 것은 새로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편 찬송가』는 오늘과 같은 새로운 철자법에 의해 출판된 최초의 찬송가이다.41) 편집 위원장은 종교교육부 총무 정인과였다. 여기에서 판권을 둘러싼 이권의 개재가 있어서 한국 기독교사에 오점을 남겼다. 42)
2. 선교사와 한국인 공동 편찬시대 (1930년대)
1) 감리교 찬송가인 『신정 찬송가』(1931)
『신정 찬송가』(1931년, 초판)는 최초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찬송인 『찬숑가』(1908년, 초판)를 개정, 증보한 찬송가로 번역의 원문에 충실하여 찬송가로서의 합당성 여부를 가사와 그 억양의 음 곡과의 어울림 문제, 음곡 자체와 그 편곡 등을 제정 기준으로 삼아 편집했다.43) 원래는 장로교와 감리교 공용 찬송가로 편찬되었으나 장로교가 『신편 찬송가』(1935년, 초판)를 발행하였기 때문에 『신정 찬송가』(1931)는 감리교 전용 찬송가로 『합동 찬송가』(1949)가 나오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장로교, 감리교의 연합공의회는 1924년 명칭을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로 바꾸고 첫 연합사업으로 새로운 찬송가의 발간을 추진하였다. 위원장은 아펜젤러(Henry D. Appenzeller)였으며, 위원으로는 감리교의 변성옥과 장로교의 김인식, 그리고 장로교 선교사 공위량(William C. Kerr)등이 활약했다. 공위량 선교사의 안식년 때는 안대선(W. J. Anderson)선교사가 대신하였다. 총314장을 선정하였는데 그 중 반수이상이 『찬숑가』(1908)에서 택한 것이고, 70편이 『청년찬송가』(1922)에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 6편은 한국인 창작찬송으로 응모를 통해 채택된 것이며 나머지는 새로운 번역찬송이었다.
『신정 찬송가』(1931)에 수록한 한국인 창작 찬송가는 다음과 같다.
【표9】
장 수 / 가사 첫 줄 / 작사자
89 / 눈물밧헤 떠러진 / P.K.Ko(고황경)
126 / 캄캄한 밤 쌀쌀한 바람불때 / Helen Kim(김활란)
196 / 캄캄한 밤중에 뷘들에서 / P.Oh(오빈)
158 / 예수는 우리의 생명되고 / C.M.Kim
219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 Nam Kung Ok(남궁억)
230 / 금슈강산 내 동포여 / Bessie Im(임배세)
『신정 찬송가』(1931)에 대한 비평 중에는 익숙하게 쓰고있던 가사를 너무 많이 수정했다는 당시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 박경호의 지적이 있었으며, 또한 곡조의 논란으로 조선 고유의 곡으로 된 구곡을 없앤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평양신학교 음악강사 권태희의 지적이 있는 등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한국인 위원들의 반대로 제거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를 민경배 교수는 한국 전통의 전설이나 민담의 심층 구조가 기독교에 전입될 가능성에 대한 초대 우리 교인들의 경계를 살필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아무리 토착적이고 민족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도덕성이나 회개의 문제와 상충한다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을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44) 반대로, 새로운 찬송을 많이 편입한 점과 가사와 음악의 억양을 조화시킨 점, 곡조를 원래대로 환원한 점, 가사의 번역을 원문에 가깝게 한 점등의 장점도 가지고 있다.
『신정 찬송가』(1931)에 처음 수록된 찬송가로 『통일 찬송가』(1983)에 포함된 것은 61편으로 다음과 같다 : 16장, 25장, 31장, 48장, 58장, 59장, 63장, 70장, 75장, 93장, 96장, 98장, 109장, 110장, 111장, 112장, 116장, 118장, 130장, 131장, 138장, 146장, 148장, 154장, 160장, 207장, 217장, 234장, 240, 245장, 246장, 247장, 255장, 270장, 283장, 297장, 310장, 312장, 318장, 320장, 321장, 327장, 335장, 336장, 338장, 347장, 358장, 359장, 360장, 371장, 373장, 383장, 394장, 395장, 398장, 410장, 414장, 423장, 429장, 432장, 443장, 448장, 458장, 471장, 477장, 490장, 499장, 523장, 537장, 540장, 548장.(통일 찬송가 장수).45)
2) 장로교 찬송가, 『신편 찬송가』(1935)
1922년에 열린 장로교 총회(제21회)에서는 『신정 찬송가』(1931)는 총회와 협의 없이 출판되었고 교열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원래 장로교 감리교 연합찬송으로 편찬된 『신정 찬송가』(1931)의 채택을 거부하고, 1943년 장로교 총회(제23회)에서는 종교 교육부에 맡겨서 더욱 잘 편찬하도록 가결하였다. 장로교 총회 종교 교육부는 1935년 6월에 『신편 찬송가』를 발행하였는데, 편집위원장은 종교교육부 총무인 정인과였다. 이리하여 『신정 찬송가』(1931)는 감리교회에서만 사용하고 장로교회는 『신편 찬송가』(1935)를 사용하므로 한국 교회는 1930년대에 찬송가를 둘러싸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불화가 노출되었다.46)
『신편 찬송가』(1935)는 총 400장으로 되었는데 구 『찬숑가』(1908)중 늘 부르지 않는 것 40장을 삭제하고, 『신정 찬송가』등 좋은 것 70장과 새 찬송가 100장 가량을 첨부했다. 그러나, 『찬숑가』(1908)와 찬송가 장수를 같게 하고 빠진 것만 새 찬송으로 첨가하여 교인들이 찾기 쉽게 하였다.
1935년 7월 1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종교 교육부 부장 장홍범이 쓴 『신편 찬송가』(1935년, 초판)의 서문에 새로 번역된 찬송가는 미국 장로교 총회 종교 교육부에서 최근에 발행한 새로운 찬송들을 적지 않게 넣었고, 현재 조선 교회의 사정과 요구에 응하여 부흥가를 다수 편입하였는데, 그 중에는 성결교의 『부흥가』에서 가져온 것이 여러 장 되며, 찬송가 취택 여부를 300여명의 조선 목사와 교회 찬양대 인도자 40여명의 의견을 들어서 했다고 나타나 있다. 또한 1937년의 제 3판부터는 처음으로 교독할 시편 교독문이 수록되었다.
『신편 찬송가』(1935)는 『합동 찬송가』(1949)가 나오기까지 장로교 전용 찬송가로 사용되었는데, 『찬숑가』(1908)에서 220여편을 그대로 택하고 가사도 개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찬숑가』(1908)를 계승하는 한국 교회의 찬송가의 주류가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정인과 총무는 1937년 종교교육부에서 사임하였으나 『신편 찬송가』의 판권을 개인 명의로 하여 해방 이후까지 불법 이득을 보았으며, 찬송가 편찬에 관계하여 불만스런 오점을 남겼다.47)
『신편 찬송가』(1935)에 처음 수록된 찬송가로 『통일 찬송가』(1938)에 포함된 것은 61편으로 다음과 같다. : 2장, 24장, 27장, 33장, 41장, 65장, 68장, 73장, 74장, 76장, 78장, 88장, 105장, 107장, 120장, 123장, 140장, 156장, 157장, 165장, 171장, 172장, 179장, 205장, 235장, 248장, 258장, 265장, 267장, 276장, 278장, 279장, 290장, 292장, 298장, 301장, 324장, 330장, 333장, 352장, 353장, 356장, 357장, 361장, 363장, 369장, 418장, 436장, 439장, 455장, 463장, 466장, 469장, 470장, 472장, 479장, 514장, 526장, 539장, 542장, 543장,(통일 찬송가 장수).48)
3) 성결교 찬송가, 『부흥성가』(1930)
성결교회는 미국의 감리교 신자였던 카우만(C. E. Cowman, 1868 ∼ 1924)선교사 내외가 일본 동경에서 1901년 창설한 개신교 예수교 종파로, 처음에는 교회 이름을 "복음 전도관"이라고 하였다. 이 교파의 창립 정신은 '전도'에 힘을 쓰는 일이었고, 이에 전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성서 학원을 세우게 된다. 1905년에는 동경의 동경성서학원을 중심으로 성결교의 전신인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ty Society)가 창설되었고, 1917년 교회 조직을 바꾸어 동양선교회 "성결(Holiness)교회"로 발전하였다. 한국에서는 동경성서학원을 나온 김상준이 1907년 5월 30일 종로 염동에 "동양 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세운 것이 시초이며, 그 이후 1921년 교회 이름이 "성결교회"로 바뀌었는데, 이때 사용한 성결교회의 찬송가는 미국의 부흥회 노래인 복음찬송을 번역하여 『복음가』(Gosple Song Book)라는 명칭으로 출간되었고, 후에는 『부흥성가』(Holy Revival Hymns)라는 명칭으로 출간되었다.
동양선교회의 최초 찬송가 집은 『복음가』인데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찬송가의 신앙적 특징은 19세기 후반 미국 교회에서 널리 애창되던 복음성가의 주류 그대로였다. 곧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과 구원 얻은 기쁨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간증하는 일,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이 그 감격으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전도한다는 그런 것들이었다. 또한 이 선교회의 전도 요체인 사중복음(四重福音), 즉 확고한 구원, 성결한 생활, 신유의 신앙, 재림의 신앙, 그런 것들이 골격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강렬한 신앙 고백이 이 『복음가』의 특징이었다.49)
이것의 증보판이 『신중 복음가』(New Gosple Song)인데 1919년에 악보 판으로 출간되었고, 이것의 재판인 『신중 복음가』(1924년 악보 판)에는 11곡이 추가된 211곡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다시 『신중복음가』(1924)에 31편이 증보되어 1930년에는 『부흥성가』(Holy Revival Hymns)라는 명칭으로 출간되었는데, 총242곡이 수록되어있고, 하인스(P. E. Haines)목사의 부인과 렴형우라는 한국인이 31편의 새로운 찬송가를 선택하여 번역하였다. 특별히 원래의 작사, 작곡가에게 저작권 사용 승인을 받은 점이 특징이다.50)
1937년 발간된 『부흥성가』(제10판)에는 245장으로 3편이 증가되었는데, 이 증보된 3편중에는 『통일 찬송가』(1983) 449장인 "이 세상의 친구들"이 들어가 있다.
『부흥성가』는 1949년 『합동 찬송가』에 거의 흡수되어 한국 개신교 찬송가에 중요한 주류를 이루는 미국의 복음 찬송의 유입을 증가시킨 중요한 자료가 된 찬송가이다.
『통일 찬송가』(1983)에 수록된 찬송가 중 88편이 성결교의 『복음가』와 『부흥성가』를 통해 처음 유입된 부흥회 노래(Gosple Song)인데, 『신중 복음가』(1919)에서 64편, 『신중 복음가』(1924)에서 5편, 『부흥성가』(1930)에서 18편, 『부흥성가』(1937)에서 1편이 왔다.
『통일 찬송가』(1983)에 수록된 『신중 복음가』(1919)에서 온 찬송가 64편은 다음과 같다. : 6장, 43장, 71장, 82장, 83장, 91장, 99장, 133장, 135장, 142장, 162장, 163장, 164장, 168장, 189장, 190장, 193장, 194장, 195장, 199장, 200장, 202장, 204장, 206장, 211장, 213장, 214장, 220장, 222장, 224장, 231장, 233장, 251장, 253장, 262장, 275장, 281장, 308장, 331장, 334장, 388장, 393장, 399장, 400장, 401장, 402장, 403장, 408장, 409장, 412장, 416장, 425장, 456장, 459장, 484장, 486장, 489장, 502장, 510장, 528장, 532장, 541장,(통일 찬송가 장수).51)
『통일 찬송가』(1983)에 수록 된 『신중 복음가』(1924)에서 온 찬송가 5편은 다음과 같다. : 191장, 208장, 417장, 485장, 544장(통일 찬송가 장수).52)
『통일 찬송가』(1983)에 수록된 『부흥성가』(1930)에서 온 찬송가 18편은 다음과 같다. : 72장, 97장, 158장, 210장, 223장, 226장, 259장, 271장, 293장, 387장, 392장, 427장, 446장, 464장, 473장, 482장, 483장, 505장,(통일 찬송가 장수).53)
3. 한국인 편찬시대(1945 ∼ 1994)
1.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합동 찬송가』(1949)
1930년대 각 교파들이 각기 다른 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인식하고 1946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가 찬송가 통합에 동의하였다. 이에 각 교파가 2명씩 찬송가 합동 연구위원회를 파견하여 1년간 연구를 거듭하였다.54) 여기서 세 교파는 그들이 사용하는 찬송가 중에서 각 교파의 특이한 것은 전부 편입하기로 하고, 공통된 것은 가사를 적절히 선택하여 편찬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1948년 각 교파 총회에서 5인씩을 선정, 파견하여 한국 기독교 연합회 주재 하에 합동을 추진하였는데, 그 결과 부록에 성경 교독문을 첨부하여 찬송가라는 명칭으로 『합동찬송가』(586장)가 1949년 발행되었다. 이 『합동 찬송가』는 신편 찬송가에서 거의 100%, 『신정 찬송가』에서 약 9%, 『부흥성가』에서 약 9%가 채택되었다.
성결교회가 『합동 찬송가』통합에 참가한 것은 새로운 일이며, 이로 인해 새로운 결과가 나타났다. 『신편 찬송가』와 『신정 찬송가』는 약 40%의 『복음가』를 포함하고 있으며, 『부흥성가』는 약 80%의 복음가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새 찬송가를 합본한 합동 찬송가는 약 55%의 복음가를 포함한 찬송가가 되었다. 그 외에도 별다른 연구 없이 합본한 관계로 같은 곡조에 유사한 가사의 찬송이 중복되었고, 많은 수의 복음가, 외국 국가와 민요, 세속 곡조 등이 비판 없이 편집 발행되어, 전에 출판된 장로교와 감리교가 사용한 찬송가에 비교하면 아주 수준 낮은 찬송가가 되었다. 그래서 합동 찬송가는 통합이외에는 의미도 발전도 없는 찬송가가 된 것이다.55)
찬송가는 총 586장 그리고 교독문은 시편28편과 기타성구 10편 이외 총 38편의 교독문이 찬송가 뒤에 첨부되었다.56)
2. 『새찬송가』(1962)
『합동 찬송가』의 사용을 거부하고 『신편 찬송가』를 사용하여 오던 장로교 고려 파 총회는 1957년 독자적으로 찬송가 편찬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1959년 장로교 합동 측은 세계교회협의회(W. C. C)를 탈퇴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를 결의하고 동시에 계속하여 참가하여 오던 『합동 찬송가』의 출판 사업도 하나의 에큐메니칼 계획이라 선언하고 합동 사업에서 탈퇴하였다. 그리고 『합동 찬송가』의 사용을 거부하고 『신편 찬송가』를 사용하여 오던 장로교 고려파는 새로운 찬송의 편찬을 위하여 자체적으로 찬송가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와 같이 장로교 고려파 총회와 합동측 총회의 두 위원회가 서로 달리 찬송가 편찬 사업을 벌이던 중 1960년 12월 13일 두 총회가 연합하게 되고, 그 기념 사업의 하나로 1962년 『새찬송가』(671장)를 편찬하였다.57)
『새 찬송가』(1962)는 총 671장인데 『신편 찬송가』를 기초로 구미 각국의 우수한 찬송을 첨부하여, 원작에서 직접 번역하는 원칙으로 편찬되었는데, 새로운 찬송으로 독일찬송(새찬송가 15장, 17장, 48장, 79장, 181장, 391장 등)과 일본찬송(새찬송가 192장, 566장, 580장, 597장 등)의 새로운 찬송들이 소개되었으나, 한국인 창작 찬송은 첨가되지 않았다.
『새찬송가』(1962)에 처음 수록된 찬송으로 통일 찬송가에 가사가 그대로 채택된 찬송가는 76편으로 다음과 같다 : 18장, 19장, 20장, 21장, 29장, 32장, 35장, 38장, 39장, 40장, 45장, 49장, 62장, 69장, 80장, 84장, 86장, 87장, 89장, 117장, 137장, 139장, 143장, 151장, 169장, 174장, 178장, 192장, 198장, 203장, 218장, 221장, 227장, 229장, 238장, 239장, 250장, 254장, 268장, 277장, 302장, 309장, 319장, 323장, 349장, 350장, 354장, 362장, 382장, 385장, 386장, 404장, 406장, 407장, 413장, 420장, 424장, 447장, 451장, 454장, 462장, 467장, 468장, 476장, 480장, 488장, 491장, 494장, 503장, 507장, 509장, 513장, 530장, 549장, 550장, (통일 찬송가 장수).58)
『새찬송가』의 특징으로서 찬송가 앞부분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그리고 예배 전 묵상 성구와 예배 후 묵상성구를 실었고, 뒷부분에는 53편의 교독문과 십계명을 실은 것이 있으며, 『새찬송가』는 다른 찬송가와는 달리 매 곡마다 운율표시와 메트로놈 기호를 사용하는 템포의 표시, 그리고 악구 표시(Phrase mark)와 숨쉬는 표시(Breath mark)가 있으며, 독창곡도 삽입하였다는 특징이 있다.59)
3. 『개편찬송가』(1967)
교회가 자라고 성숙함에 따라 『합동 찬송가』(1949)의 개편의 필요성을 느껴 1963년 감리교, 기장, 예장, 성결교, 기독교연합회가 합하여 찬송가 개편 작업에 착수하여 1963년 3월 5일에는 다음의 찬송가 개편 8개 원칙을 작성하였다.
① 찬송가 중 중첩된 것은 단일화한다.
② 국가, 민요 등의 곡목과 가사 등은 재검토한다.
③ 찬송가는 종류별로 편찬하도록 한다.
④ 예배 찬송을 더욱 보강한다.
⑤ 특정 예배시 사용할 찬송을 보충한다.
⑥ 한국 작가들의 찬송을 증보할 것을 고려한다.
⑦ 교독문을 보충한다.
⑧ 가사를 일률적으로 검토한다.
※ 이 밖에도 묵도찬송, 송영찬송, 아멘 찬송 등을 대폭 보강하여 1967년 『개편 찬송가』(600장)가 대한 기독교 서회 발행으로 출판되었다.60)
『개편찬송가』는 합동 찬송가를 기초로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개편한 찬송가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27편의 한국 찬송의 채택이다. 한국 찬송 중 67장, 86장, 237장, 298장은 『청년찬송』(생명의 말씀사)에 있었던 찬송이며, 그 외의 찬송은 새로이 작곡된 시작과 곡조들이다. 그러나 개편 결과, 개편 찬송가에는 많은 수의 복음가가 삭제되었고, 이에 성결교회 총회에서 굉장한 반대론이 대두되었으며, 심지어 사용을 거부하자는 논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찬송가 위원에는 복음가의 가사와 곡조를 검토하여 찬송가 마자막 부분에 부록으로 20여 곡을 선택하여 발행하게 된 것이다.61) 한국인 창작 찬송은 다음과 같다.
곽상수, 27장 우리 예배를 받으소서. 55장 잠들기 전에, 463장 참사랑 하오리다.
구두희, 533장 어머니 날, 545장 우리 집
김두완, 461장 주님의 은혜
나운영, 298장 손들고 옵니다, 538장 감사절 찬송
박재훈, 237장 어서 돌아오오, 401장 믿는 자여 어이할 고, 464장 주의 크신 은혜
박태준, 172장 인생을 건지신 주, 473장, 귀한 주의 사랑, 482장 주와 함께 살리라
안신영, 213장 하나의 세계, 488장 하늘가는 길
이동훈, 212장 교회의 노래, 214장 복음의 씨, 321장 의로운 배한척, 402장 일하러 가세, 565장 부름 받은 젊은이
이유선, 37장 죽도록 충성하리, 387장 부름 받아 나선이 몸
장수철, 67장 주는 나의 목자, 86장 구주 예수 나셨다.62)
또한 합동 찬송가에 비해서 개편 찬송가에 새로 수록된 찬송은 예배용 24곡, 일반적 찬송 115곡, 절기용 25곡, 복음찬송 3곡, 흑인영가 2곡, 청년용 3곡, 송영27곡, 한국 찬송가 21곡 등으로 모두 220여 곡이나 되었다.63)
종래의 한국 찬송가가 선교사들의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했던 복음가, 부흥가들로 주축을 이룬데 비하여, 『개편 찬송가』(1967)는 예배 찬송과 교회의 의식에 관계된 찬송을 많이 보강하므로 부흥회 중심의 경향에서 예배 중심의 찬송가로 변화를 시도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과거 천당에 대한 타계적인 찬송이 많이 감소된 반면, 현세적이고 기독교적 자세와 윤리를 강조하는 찬송이 첨부되었으며 가사가 현대어로 수정된 것 등을 볼 수 있다. 이리하여 1949년에 만든 『합동 찬송가』에 이어 『새찬송가』(1962), 『개편 찬송가』(1967)의 등장으로 한국교회에 다시 세 가지 찬송가를 사용하는 분열을 거쳐 왔다.
『개편 찬송가』(1967년)에 처음으로 수록된 찬송으로 『통일 찬송가』(1983)에 채택된 찬송은 75편으로 다음과 같다 : 5장, 7장, 8장, 10장, 11장, 13장, 22장, 26장, 37장, 47장, 51장, 52장, 53장, 54장, 60장, 64장, 77장, 103장, 104장, 106장, 125장, 128장, 129장, 132장, 134장, 136장, 145장, 155장, 160장, 173장, 175장, 237장, 256장, 261장, 266장, 285장, 288장, 296장, 303장, 304장, 305장, 311장, 317장, 322장, 341장, 345장, 346장, 355장, 369장, 374장, 380장, 381장, 405장, 415장, 437장, 438장, 445장, 452장, 453장, 460장, 461장, 493장, 515장, 517장, 518장, 519장, 520장, 521장, 522장, 527장, 533장, 536장, 546장, 547장, (통일 찬송가 장수).64)
4. 한국 개신교 『통일찬송가』(1983)
1974년 개신교 찬송가의 통일을 목적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에서 조사한 설문지 여론조사에 의하면, 조사에 응한 전국 교회의 95%가 하나의 통일된 찬송가를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고,65) 이에 따라 1970년대 중반 『찬송가 합동추진 위원회』가 조직되고, 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편찬 원칙을 정했다.
① 『개편찬송가』(합동찬송가 포함)와 『새 찬송가』를 한 찬송가로 편찬한다.
② 이미 애창되고 있는 가사는 곡이 다르다 할지라도 수록하고, 또한 한 곡이 여러 가사로 애창되고 있는 것도 수록하기로 한다.
③ 번역 가사의 교정은 성경과 신학적인 관점에서 교정하되 이미 한국화 되어 있는 가사는 가급적 교정을 피하도록 한다.
④ 총 985장 중에서 사용 빈도수를 고려하여 500장에서 55장 이내로 엄선하여 편찬한다.
⑤ 교독문은 한글 개역판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문장을 정리한다.
위와 같은 원칙 아래 『통일찬송가』는 1982년 발행을 예정하였으나, 예정보다 늦은 1983년 11월 20일 여러 어려운 여건 가운데 『통일찬송가』가 발행되었다.66) 이 때 참여한 교단은 구세군 대한 본영, 기독교 대한 감리회, 기독교 대한복음교회,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기독교 한국 침례교회, 기독교 한국 하나님의 교회, 대한 기독교 나사렛 성결교회, 대한 기독교 하나님의 교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대한 예수교 장로회(고신), 대한 예수교 장로회(ICCC),대한 예수교 성경 장로회, 대한 예수교 대한 감리회,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한국 기독교장로회, 한국 그리스도교회, 한국 루터교회, 이렇게 20교단이었다.67) 여기서 만들어진 이 통일찬송가의 명칭은 『찬송가』로서 그 동안 한국 개신 교회가 사용해 오던 세 가지 찬송가인 『합동찬송가』(1949), 『새찬송가』(1962), 『개편찬송가』(1967)를 하나로 통일한 것이다. 『통일찬송가』(1983)에는 총 558곡이 수록되었는데 80%이상이 미국과 영국의 번역 찬송이며, 특히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미국의 부흥회 노래인 복음찬송(Gosple Songs)이 270여 편으로 과반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선교 초기부터 선교사에 의해 번역되어 소개된 찬송으로 한국 개신교 찬송가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작 한국 찬송은 한편도 첨부된 것이 없으며 번역 복음찬송인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102장), 한 편이 새로 추가되었으며, 한국인의 창작 찬송은 개편찬송가 1967년에 수록된 27편 등 17편이 수록되었고, 김연준과 나인영의 곡(92장, 272장)이 새로 첨부되었다. 찬송을 항목별로 보면 예배 72편, 성부 성자 성신 찬양 108편, 구원 37편, 천국 14편, 성경 8편, 교회 42편, 성례전, 15편, 절기와 행사 17편, 성도의 생애 138편, 송영 13편 등 총합 55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68) 현행 통일찬송가에는 미국의 『복음 찬송가집 완성판』(Gospel Hymns Complets, 1894년)에 수록된 614곡의 복음찬송 중 101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 19세기 미국인의 작사, 작곡으로 된 것은 76곡, 영국계 가사에 붙여진 미국인 작곡의 곡은 25곡으로 다음과 같다.
【표10】
19세기 미국인 작사, 작곡의 복음찬송 (76곡)
35장, 46장, 91장, 95장, 99장, 101장, 134장, 142장, 150장, 159장, 163장, 167장, 172장, 184장, 186장, 187장, 197장, 201장, 204장, 215장, 219장, 220장, 222장, 228장, 230장, 232장, 235장, 241장, 252장, 257장, 258장, 260장, 275장, 276장, 277장, 291장, 299장, 313장, 314장, 315장, 218장, 321장, 323장, 326장, 329장, 330장, 336장, 337장, 342장, 356장, 385장, 395장, 397장, 400장, 410장, 411장, 419장, 424장, 434장, 444장, 457장, 470장, 476장, 480장, 482장, 487장, 492장, 496장, 500장, 501장, 511장, 524장, 529장, 532장, 534장
영국계 가사에 붙여진 19세기 미국인 작곡의 복음찬송 (25곡)
12장, 88장, 98장, 138장, 146장, 149장, 185장, 190장, 191장, 209장, 212장, 236장, 249장, 274장, 349장, 365장, 370장, 375장, 391장, 412장, 442장, 481장, 512장, 535장, 539장
이렇게 『복음찬송가』(Gospel Hymns)에 수록된 복음찬송의 가사와 곡을 그대로 채택한 것은 6곡으로, 현행 『통일찬송가』(1983)에는 모두 107곡의 복음찬송이 Gospel Hymns에서 온 것이다.
Gospel Hymns(1894년) 이외의 기타 자료에서 온 19세기 미국인 작사, 작곡의 복음찬송은 64곡이며, 곡은 미국인의 것이지만 기타 가사에 붙여진 복음 찬송은 15곡으로 다음과 같다.
【표11】
19세기 미국인 작사, 작곡의 복음찬송 (64곡)
43장, 49장, 63장, 71장, 83장, 86장, 133장, 162장, 168장, 177장, 179장, 182장, 183장, 193장, 195장, 202장, 207장, 224장, 226장, 231장, 234장, 263장, 295장, 308장, 327장, 331장, 340장, 343장, 344장, 351장, 352장, 354장, 360장, 362장, 383장, 377장, 382장, 399장, 403장, 408장, 439, 446장, 455장, 456장, 458장, 465장, 466장, 468장, 469장, 474장, 478장, 484장, 485장, 488장, 489장, 490장, 495장, 497장, 498장, 502장, 505장, 506장, 541장, 543장,
기타 가사의 복음찬송 (15곡)
미국 가사 추정 96장, 198장, 199장, 200장, 300장, 425장, 463장
한국어 가사 206장, 214장, 253장, 368장, 388장
일본어 가사 262장, 278장
18세기 영국 82장
또한 19세기 영국인 작사, 작곡의 복음찬송은 3곡(173장, 265장, 472장)이다.
20세기에 작사, 작곡된 미국 복음찬송 중 작품 연대가 확실한 것은 42곡인데 이를 작곡 연대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표12】
1900 ∼ 1907년 (16곡)
72장, 84장, 93장, 194장, 217장, 270장, 289장, 293장, 353장, 361장, 373장, 414장, 432장, 473장, 483장, 530장
1910 ∼ 1919년 (14곡)
87장, 97장, 135장, 137장, 158장, 208장, 210장, 271장, 392장, 404장, 417장, 499장, 513장, 544장
1920 ∼ 1929년 (10곡)
89장, 102장, 139장, 218장, 319장, 359장, 447장, 449장, 509장, 519장
1930 ∼ 1938년 (2곡)
151장, 268장
작곡 연대 미상의 복음찬송으로 20세기 초기의 곡으로 추정되는 것은 23곡으로 다음과 같다.
【표13】
20세기 초 추정 복음찬송 (23곡)
164장, 189장, 192장, 198장, 200장, 223장, 259장, 302장, 324장, 333장, 406장, 409장, 413장, 423장, 425장, 427장, 462장, 463장, 464장, 491장, 494장, 507장, 542장
그 밖에 영국계 가사에 붙여진 20세기 미국인 작곡의 복음찬송은 3곡(169장, 332장, 387장)이며, 20세기 영국인 작사, 작곡의 복음찬송은 2곡(213장, 350장)이다.
기타 20세기의 복음찬송은 15곡으로 178장, 205장, 211장, 221장, 233장, 251장, 358장, 393장, 394장, 396장, 401장, 402장, 416장, 486장, 528장이다.
이렇게 하여 볼 때 현행 『통일찬송가』에 수록된 복음찬송은 모두 85곡이며, 19세기 복음찬송 189곡과 합하여 모두 274곡의 복음찬송이 현행 통일찬송가에 수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69) 복음찬송가 외에 『통일찬송가』에 수록된 찬송가 곡조는 260여 곡 이르는데, 미국곡이 117곡으로 가장 많으며, 영국곡이 101곡, 독일곡이 19곡, 한국곡이 17곡 등이다. 그 밖에 화란곡이 3곡, 러시아곡이 2곡, 스코틀랜드 민요곡이 2곡 있으며, 핀란드, 스웨덴, 스위스, 유대교 회당 곡이 1곡씩 수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현행 통일찬송가에는 미국 복음찬송 275곡과 18 ∼ 19세기 영 · 미 찬송가 210곡을 합하여 500여 곡 이상이 영 · 미 계통의 곡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70)
『통일찬송가』는 선교 100주년에 이룩한 교회의 일치와 연합 사업의 결실로서, 세 종류의 찬송가를 사용하던 불편을 해소하고 한 가지 찬송가로 같이 부르는 기쁨과 감격을 줄 수 있었던 장점이 있었으나, 찬송가의 질적인 면을 고려할 때 많은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즉 교회의 공적 찬송가로서 내용과 편집 면에서 전문성이 결여되어 예배를 위한 찬송이 부족하며, 표기방법, 작사자, 작곡자의 표기에 오류가 많으며. 예배를 위한 공적 찬송가71)가 아닌 한국교인들의 애창곡 집과 같은 성격을 띠며, 번역이나 곡의 선택에 있어서 100년간 선교사들이 암시적으로 사용했던 부흥회 노래를 찬송가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72) 또한 한국인이 지은 한국인의 찬송이 부족하며, 구약시대부터 중세와 종교개혁 기를 걸쳐 찬송의 모델이 되었던 '시편가'에 대한 생각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73) 1970년 후반 이후 8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우리 나라는 문화적인 면에서 많은 발전을 하였다. 그러나 서양 음악의 도입에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던 찬송가는 발전 아닌 퇴보를 하였다. 외국의 찬송가와 비교하지 않고 1930년대 발행된 『신정찬송가』와 『시편찬송가』에 비교하여도 새로이 편찬된 『통일찬송가』의 수준이 이들에 미치지 못함은 물론, 바로 전에 사용하던 『새 찬송가』와 『개편찬송가』에 그 내용이 크게 뒤지고 있다. 편찬 원칙도 없어 찬송가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특히 사용 빈도수를 중심으로 한 찬송가는 복음가를 많이 수록하고 표준 찬송을 많이 삭제하겠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 교파를 초월한 찬송가 통일에 대한 발상 자체가 찬송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다.
한국 교회는 크게 나누어 3가지 성향의 교회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진보나 중도적인 성향의 교회이다. 진보적 성향의 기독교 장로교, 감리교, 중도적인 성향의 장로교 통합측과 성결교는 예배와 찬송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표준 찬송이 많은 『개편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둘째, 보수적 교회인 장로교 합동측과 장로교 고려파는 비교적 장로교적 성향의 찬송가인 『새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셋째, 집회적인 성향의 예배를 드리는 순복음교회, 침례교들은 복음가와 익숙한 찬송이 많은 『합동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들의 성향과 특성에 맞게 찬송가를 사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교회나 교파간에 성향에 알맞은 찬송가를 사용하면 서로 비교, 발전될 수 있으며 서로간의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74)
Ⅲ. 한국 창작 찬송가와 문제점
1. 한국적 찬송가의 의미
1970년대 이후 우리의 음악 즉, 한국적 음악을 찾기 위한 노력들이 많이 진행 되어왔다. 그것은 예배 예전의 토착화의 운동과 함께 지속되었는데 그렇다면 한국적 음악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여성들이 하는 신학이 여성 신학이 아니고, 민중들이 하는 것이 민중신학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국 사람이 작곡한 것을 모두 한국적이라고 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그들의 작품이 서양의 기법과 형식을 가지고 작곡되어 졌다면 그것은 엄격히 말해 한국적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을 지닌다.
한국 찬송가가 무엇인가? 이것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지만, 우선 왜 한국인을 위해 수입 찬송가가 아닌 국산 찬송가 만들기가 필요한가부터 따져 본다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찬송가는 한국적이어야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우리 찬송가가 필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의존해 왔던 서양 찬송이 우리에게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서양식 음계나 박자, 리듬, 화성, 못갖춘마디 등을 지양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잘 부를 수 있는 쉽고 채질에 맞는 찬송가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이 만들기는 했으나 분위기나 내용상 서양의 찬송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노래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찬송가 만들기 작업이란 서양 찬송가의 레파토리를 늘려주려는 노력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식의 찬송가란 무엇이겠는가를 계속 물으면서 노하루를 쌓아가는 작업이다. 나아가서 고유한 기독교 문화 창달이란 거창한 목표를 지향하는 찬송가 만들기 작업이라면 그 찬송들이 지극히 한국적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75)
현재 『통일찬송가』(1983)에 수록된 한국인 창작 찬송가는 558장 중에 17곡76)으로 전체의 3%이다. 이러한 수치는 너무 미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찬송가에 관한 한 우리 것에 대하여 어디에 내놓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또한 현행 『통일찬송가』(1983)에 17곡의 한국인 작곡의 찬송이 있다고는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 대부분은 서양음악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2) 찬송가는 찬송가다워야 한다.
왜 국산 찬송가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두 번째 해답은 찬송가가 부르는 이들에게 쉬워야 한다는 것이다. 찬송을 부르는 대상은 교회 안에 모여든 천차만별의 회중인데 이들은 교회 밖에서는 민중이요 대중으로 불리운다.
찬송이란 바로 이 회중의 노래이어야 하며, 이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교회 내에 있는 엘리트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 가곡이 아니다. 회중이 곧 민중이요 대중이고, 따라서 회중의 노래인 찬송이 온 회중이 공감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회중 찬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본질상 민중의 노래나 대중의 노래와 맥을 같이해야 한다. 즉 쉬워야 하고 부담없이 심금을 울려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찬송은 민요이며 대중가요라고 과감히 정리해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서양의 수입 찬송들은 우리에게 적합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적 찬송가를 만드는 기본 정신은 '보편성과 약자에 대한 관심'이어야 한다. 찬송은 그것을 부르는 회중이 연령, 신분, 교육의 정도, 빈부, 지방, 남녀노소의 구분을 넘어서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어야 하고 공감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가진 본래의 음계나 리듬이나 분위기의 노래가 아니므로 악보대로 따라 부르지 못하며, 대부분의 경우에 회중들은 이 서양찬송들을 우리 식으로 나름대로 편곡해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편곡은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악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즉 우리 민족에게 쉬운 노래가 어떤 형태의 것인가를 회중들이 무의식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77)
그러므로 한국 찬송가란 단순히 음계나 리듬, 박자 등을 한국식으로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회중들에게 쉽고 널리 공감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회중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78)
이와 같이 한국 창작 찬송가는 열악한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열악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을 했던 작곡가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을 보면 나운영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음악이 보다 한국적이려면 네 가지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한다. 1단계는 일본 색과 서양색의 잔재를 일소하는 것이며, 2단계는 국악 가운데서 민족적 요소를 발견하여 그것을 소재로 하여 작품해야 하며, 3단계는 중국의 아악, 당악 음을 포함해서 외국 음악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섭취해야 하고, 4단계는 이상의 세 가지 단계를 토대로 삼아 한국 음악을 창조하는 데 적합한 실제적인 기법을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79)
그러면서 더 나아가 민족성과 시대성을 떠난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작품이라 할 수 없으며 또한 이 민족성과 시대성이 희박한 작품도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라고 말하고 또한 우리의 민족성과 시대성을 망각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이를 무시해서도 안될 것이라고 말한다.80)
한국적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국악'의 음악적 내용을 현대적으로 승화시켜 나가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창작계에서의 자기반성과 우리 음악의 틀을 하루 빨리 체계화, 현대화시키는 것에서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인 창작 찬송가의 현주소
찬송은 부르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대부분이 서양 사람들이 작사, 작곡한 것을 부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모두 서양 사람들의 신앙고백이므로 그들의 정서에 맞는 가사일 수밖에 없고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고백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81) 따라서 우리의 찬송가 현실을 감안해 보면 우리 예배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이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의 기독교는 차분한 분석에서 연구를 거치지 않은 체 서구인들의 의식과 생활양식에서 형성된 신앙의 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82)
그러나 우리의 현실과는 다르게 기독교의 음악은 타종교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원불교나 불교에서 만든 찬불가는 기독교의 찬송가를 모델로 한 것이다. 4성부로 되어진 이 음악들의 곡은 물론, 책의 겉모양이나 체계 역시 비슷하다. 또한 불교계에는 작곡가들이 드물어 기독교 출신 작곡가들에게 작곡을 의뢰하여, 이 일로 말썽난 일도 있다.83)
물론 천주교가 흡수한 신교의 음악은 우리들의 작곡이 아니고 서양인들의 것이다. 이 찬송가들은 교인들에 의해 오랫동안 불려져 내려 왔고, 아직까지는 신교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 음악이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로 '한국신교적'이라 할만 하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신교는 아직도 '서양적'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84)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홍정수 교수는 우리의 찬송가는 교회음악가들에게 일을 부탁해서 만들어진 부분은 매우 적고, 서양의 것을 번역한 것이 거의 전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라고 말하며 일은 쉽겠지만, 생각한 흔적이 드물고 우리의 찬송가를 모델로 한 불교나 원불교의 음악이 미숙하지만 모두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작곡임을 생각해 보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앞선 사람이 나중 되었으며 기독교는 많은 사람을 두고 활용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85)
한국의 20여 교단은 1974년 개신교 찬송가의 통일을 목적으로 모여 1983년 12월 통일찬송가를 출판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가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라 해도 통합된 찬송가책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대표적인 문제점은 새로운 찬송가의 편입이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서 새로운 찬송가 확산에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방해하는 역할도 한다는 점이다. 한국인 창작 찬송가가 많이 실리지 않은 관계로 인해서 한국 교회 음악의 자원이 사용되지 않고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86) 우리의 것에 대해서는 이러한 대접과 귀한 자원을 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것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입장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 예의 하나로 우리의 찬송가에는 찬송이 아닌 독일 국가가 두 장씩이나(127, 245) 들어가 있는 형편인데 꼭 그래야만 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우리가 몰랐다면 몰라도 엄연히 현재의 독일 국가임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추리를 해 본다. 우리 기독교가 너무나 한국적인 것을 배격하지나 않았는지....., 혹은 그러한 일에 앞장서지나 않았는지.... 한 번 생각 해 볼일이다. 서양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고 동양적인 우리의 것은 모두 무속적이고 미신적인 것이란 말인가? 더구나 찬송가집에 편집되어 있는 노래들은 한결같이 서양적인 것들이다. 심지어 한국인에 의한 작곡까지도 모두 서양적인 것에 기초를 두고 써내려 간 것들이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진정 한국인에 의한 한국적 방식의 찬송이 아쉽기만 하다.
우리의 예배 현장에서는 우리의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 단편적인 예로 찬송가를 들 수 있는데, Ⅲ장 1절에서 밝혔듯이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으로 1983년에 출판한 통일찬송가를 보면 한국인의 작사, 작곡으로 된 찬송가는 558곡 중 17곡으로 3%밖에 되지 않아서 그 전에 출판된 개편찬송가에 실린 27곡보다 10곡이나 줄어들었다.87) 그나마 있는 찬송가도 예배 현장에서 제대로 불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다른 나라들은 스스로 만든 찬송가가 우리들 보다 단연 많다. 스스로 만든 찬송가의 수가 한국의 전체 곡 수의 3%정도인데 반해 중국은 12%, 일본은 25%이다. 특히 미국은 88%나 된다. 거의 90%가 스스로 만든 찬송가들이다.88) 우리 찬송가를 외국인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원인 중에 하나가 우리 찬송의 출판에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작사, 작곡을 묶어 출판한 작곡가들이 많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출판사들이 이러한 곡들의 출판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의 이름을 달고 작품집들이 나오지만 실제적으로 작곡가 자신이 경제적 부담을 가져야 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출판사들이 한국인의 작품을 출판하는 경우는 대중성이 있는 것만을 골라내어 다른 번역 곡들과 함께 묶어 출판한다.89) 이렇기 때문에 교회음악 현장에서는 쓸만한 곡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며 그나마 소신 있게 일하던 한국인 창작 찬송의 작곡가들은 그들의 의지를 더 이상 펼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출판사란 영리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토양으로 인해 우리의 찬송은 많이 보급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나마 1983년에 출판한 통일 찬송가에 우리 한국인의 작곡가들이 만든 찬송이 있기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찬송과 작곡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표14】
찬 송 / 작 시 / 년 도 / 작 곡 / 년 도
53 / 김정준 / 1967 / 곽상수 / 1967
92 / 마경일 / 1967 / 김연준 / 1983
256 / 석자영 / 1952 / 박재훈 / 1952
261 / 김재준 / 1966 / 이동훈 / 1967
272 / 홍현석 / 1967 / 나인용 / 1983
303 / 박병섭 / 1967 / 이동훈 / 1967
304 / 주요한 / 1967 / 구두희 / 1967
305 / 전영택 / 1967 / 구두희 / 1967
311 / 임옥인 / 1967 / 박재훈 / 1967
317 / 전영택 / 1943 / 박재훈 / 1943
355 /이호운 / 1951 / 이유선 / 1967
369 /정용철 / 1966 / 곽상수 / 1967
378 / 정용철 / 1967 / 이유선 / 1967
453 / 최봉춘 / 1956 / 장수철 /1966
460 / 박재훈 / 1967
461 / 김활란 / 1921 / 이동훈 /1967
493 / 이호훈 / 1967 / 박태준 / 1967
한국에서 창작 찬송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전파될 때부터 있었으나 큰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남의 찬송을 번역해서 부르기보다는 우리의 찬송을 직접 만들어야 되겠다는 열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하다. 이것은 전통음악이 교회 밖에서 민족의 음악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사랑받기 시작하면서, 교회 안에서도 지금까지 전통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자세를 번성하고 찬송은 마땅히 우리가락으로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진 결과이다.90)
3. 한국 창작 찬송가의 한계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서양 지향적인 것이 된 이유는 기독교 자체보다 우리의 환경 문화 때문이다. 음악에 비교적 낮은 가치를 두었던 장로교, 감리교 등에 의해 음악이 전파되고, 음악가들이 배출되었던 것은 우리의 토양이 얼마만큼 음악에 대해 편협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91)
따라서 우리의 찬송을 한국인 스스로 만들지 못했던 이유로 서양선교사들의 선교정책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서양 선교사들은 한국민족에 비하여 자신들이 우월한 민족임을 자부한 것처럼 자신들의 문화가 한국고유의 문화보다 우수하다는 선입견과 문화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으며 이들은 한국인에게 우리 고유의 음악이 아름답고 우수하다는 것을 가르쳐 줄 지식도 없었고 마음도 없었다. 그러므로 배재, 이화학당 이후 설립되는 기독교 학교마다 서양음악만을 가르쳤고, 우리 전통음악은 가르치지 못하였다.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치하에는 일제의 우리 전통음악 말살 정책 때문이었다. 일제는 한일 합방이후 한국을 영원히 일본 땅으로 만들고 한국인을 황국 신민화 하여 민족혼을 없애버리려 하였다.92)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하여 교회에서의 우리의 음악은 설자리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 창작 작곡가들의 음악이 실제로 쓰이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홍정수 교수는 4가지를 그 원인을 들고 있다.
① 공적인 찬송가책에서 이들의 음악이 거의 실리지 않고 있다.93)
② 성가대 지휘자들이 한국인 창작 곡들을 연주하는데는 매우 인색하다.
③비교적 쉬운 음악을 쓰는 사람들은 음악가(특히 작곡가)들로부터 무시당한다.
④ 작곡가들이 교회의 요구를 지나치게 빗나가서 연주될 수 없거나, 안이한 생각으로 작곡하여
음악적으로 충실하지 못한 작품들도 많다.94) 이러한 다양한 원인중의 다른 하나로 찬송가 편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데 『신정찬송가』(1931) 편찬 작업 때에 한국 전통 선율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좋지 못한 연상작용"(bad association)을 염려하는 한국인 편찬위원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서문에서 밝혀져 있다. 이러한 나쁜 연상작용에 대한 염려는 당시 일반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는 것이었고 교회 특유의 현상이 아니었다. 또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선교사들이 전통음악 사용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고, 한국인 스스로가 반대한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다.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오늘날의 찬송가책에서도 한국인 작곡의 찬송가들은 장식적 수량에 그치고, 전통적 선율을 사용하는 데에는 매우 민감한 거부반응이 있다. 한국인에 의해 교회음악이 본격적으로 작곡되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출판 활동이 매우 미흡했다. 그리고 출판된 것들도 대부분 70년대 이후의 것들이다.95) 그만큼 우리의 교회는 우리의 음악에 대해 오랜 동안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갈등을 일으켰던 부분이 제사, 축첩, 주초, 안식일 문제 등에 관하여 나타난 갈등현상인데 당시에는 이러한 관습을 버리는 것이 기독교인이 된 증표 같은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시각이 우리 나라의 전통 음악을 어떻게 보았겠는가 하는 것이 또한 관심거리이다. 유감스럽게도 이에 관하여 아직 이렇다할 자료는 구하지 못했지만 대체로 비판적이었으리라 하는 심증을 가질 수 있다. 즉 정악과 아악은 조선조의 지배계층의 유교적 관습과 결부되어 있었고 그리고 민속악은 그렇지 않아도 천시되던 계급에 의해 전수 되기도 했거니와 일제시대 이후에는 기생조합과 관련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술과 도박과 담배를 금할 정도의 경건한 금욕주의적 생활을 권하던 개신교의 경우는 더구나 신앙생활과 관계없는 풍류나 잡회, 가무 등에 대하여 동정적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며 전통의 여러 관습(그 중에 무속 신앙 등도 있다)과 결부되어 있는 우리 나라의 전통 음악에 대해서는 다분히 의심쩍은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전통 문화에 대립됨으로써 교회는 방어적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전통문화를 위축시키는데 앞장 선 격이 되었던 것이다.
Ⅳ. 바람직한 한국인 창작 찬송가의 모색
많은 현실적 문제들이 찬송가 발전에 저해 요소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무조건 통일이란 아름다운 이름이 찬송가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제는 양적으로 늘어난 기독교인들에게 양질의 찬송가가 요구되는 것이다. 통일이란 아름다운 이름은 아무 것에나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찬송가 발전의 역사는 시대적, 개인적, 교단적 믿음의 신념과 특색에 따라서 영향을 미치며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96) 우리의 교회는 이러한 관점으로 살펴볼 때 아쉬운 점이 많다.
1. 한국 찬송가의 전망
한국 개신교의 예배 음악적 과업은 기독교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토착성있는 표현을 계속 추구해 나가는 일이다. 현재 한국 개신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서구와 북미의 찬송을 배우고 애창해 왔다. 그러기에 찬송가 하면 마치 4부 합창곡으로 된 몇 가지 악곡 형식에 따른 제한적인 형태의 찬송 곡만을 연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찬송을 작시하거나 작곡할 경우에는 서양의 긴 운율(Long Meter, 8. 8. 8. 8)이나 보통 운율(Common Meter, 8. 6. 8. 6), 짧은 운율(Short Meter, 6. 6. 8. 6)등으로 작시하고 거기에 따라 작곡하는 경향이 많다.
1) 찬송 가사의 한국화
'한국화'라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적인 정서와 감정을 담은 '가사의 창작'이요, 한국인의 느낌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곡의 창작'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나운영은 "음악의 측면에서 본 찬송가 가사"라는 글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사를 쓸 때에 대체로 7·5조로 쓰기 때문에 7·5조를 예로 가사와 곡조의 형식의 일치를 제시하고 있다.
【표15】
가 사 / 곡 조
7·5조 2행 / 한 도막 형식(큰 악절1개 ; 8마다)
7·5조 3행 / 작은 세 도막(작은 악절 3개 ; 12마다)
7·5조 4행 / 두 도막 형식(큰 악절 2개 ; 16마다)
7·5조 5행 / 확대 두 도막 형식(20마디) 또는 축소 세 도막 형식(20마디)
7·5조 6행 / 세 도막 형식(큰 악절3개 ; 24마디)
찬송 가사를 쓸 때에 7·5조 4행 또는 6행만을 고집하지 말고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써야만 변화 있는 곡조가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가사가 후렴구를 지닐 경우는 4행 + 후렴 4행은 후렴이 너무 길어서 지루한 감을 주어 적당치 않고, 4행 + 후렴 2행으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97)
가사의 리듬과 곡조의 리듬은 일치되어야 한다. 곡조는 어디까지나 가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가사와 곡조의 리듬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모순일 뿐만 아니라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운율을 가사의 숫자만 맞추면 되는 줄 알고 작시한다면 어색한 것은 물론 가사의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좋은 찬송가는 먼저 가사가 좋아야 좋은 곡조가 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찬송가의 한국화를 위하여 신소섭은 '예배와 찬송학'에서 이렇게 제언한다.
① 4·4조 또는 3·4조의 부활
우리 나라의 판소리의 창본과 시조의 가사를 보면 판소리는 4·4조로 되어 있고, 시조는 주로 3·4조로 되어 있다. (심청가)의 창본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천지 만물 삼겨날 제 / 날 짐생은 알을 낳고/
길 짐생은 새끼치고 / 백초도 싹나는 뒤"...//
(시조)의 가사를 인용하면,
"동창이 밝았느냐 /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하놈은 / 상기 아니 일었느니 /
재 삼 넘어 사래 긴 밭을 / 언제 갈여 하느냐. //
이와 같이 우리 고유의 가사 형식인 4·4조 또는 3·4조를 부활시켜 3행 또는 4행 또는 6행으로 가사를 쓰게 되면 결과적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한국 곡조가 탄생할 것이 분명하다. 이 가사에 6/8박자로 작곡을 하면 자연히 한국적 리듬의 곡조가 되는 것이다.
② 시적 매력이 있는 가사
찬송가는 먼저 가사만으로도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찬송가 가사에 있어서 글자 수를 맞추는 데만 급급한 나마지 시적이 아닌 표현이 되거나 또는 어려운 한문식의 낱말이 섞인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점은 하루 속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찬송가를 만들기 위해 작곡가는 시를 이해해야 하고 시인은 음악을 이해해야 좋은 곡조를 만들 수 있다. 특별히 찬송가는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여 영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98)
2) 찬송가 곡조의 한국화
우리 한국인은 한국인의 정서로 찬송을 정착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찬송의 토착화'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 이러한 연구는 신소섭씨가 정리한 글을 참조해 찬송가 곡조의 한국화의 방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한국화란 무엇인가?
① 멜로디는 5음 음계로 되어야 한다.
② 타령장단으로 작곡되어야 한다.
③ 평조, 계면조로 작곡되어야 한다.
④ 3도 화성으로 작곡되어야만 경건하고 은혜스럽다는 편견을 우선 버려야 한다.
◈ 리듬의 처리
① 2·4박자보다는 3박자가 좋다.
② x/4박자보다는 x/8박자가 좋다.
③ 당김법(Syncopation) 리듬도 사용할 수 있다.
④ 곡조 도중에 박자를 바꿀 수 있다.
◈ 멜로디의 처리
① 5음 음계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즉 Fa, Si, ??, ??, ??등이 경과음 또는 보조음 식으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② 더블 하모닉 스케일(Double Harmonic Scale ; Do, Re??, Mi, Fa, Sol, La??, Si)도 사용할 수 있다.
③ 가사와 곡조의 악센트(Accent), 리듬(Rhythm), 종지법이 잘 맞아야 한다.
◈ 화성(Harmony)의 처리
① 3도 화성만을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② 현대 화성을 활용해야 한다.
③ 3도 화성에 있어서 3음을 생략할 수 있다(Open Chord).
④ 3도 화성과 현대 화성을 절충 사용해도 좋다.
⑤ 대위 법적 처리도 바람직하다.
◈ 연주법
① ??????는 ???????식으로 연주해야 한다.
②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은 ∼∼∼∼식으로 연주해야 한다.
③ 민요, 시조, 판소리 창법으로 연주해야 한다.99)
한국인 창작 찬송가를 말할 때 우선 작곡하는 일이 요청된다. 연주는 어느 정도 되고 있지만, 우리가 애써서 만든 곡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작곡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좋은 작품들도 드물다.
2. 우리가락 찬송가
1) 우리가락 찬송의 당위성
소위 토착화된 찬송 또는 한국적인 찬송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버써 한국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 사이에서부터 있었다. 예를 들자면 선교사 게일(J. S. Gale), 또는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셀라(H. G. Appenzeller)이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 등의 선교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의 최초의 목사가 된 길선주 목사도 한국 찬송가의 가락을 찾아보기 위하여 무당이나 국악을 전공하는 사람을 찾아가 묻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몇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토착화된 찬송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그 당시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왜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가?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로 중요한 것은 이 토착 찬송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 주도되지 못하고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가지의 이유가 있다. 우선 우리 민족의 사대주의적 경향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해를 1884년으로 잡고 최초의 찬송가는 1893년의 언더우드의 '찬양가'로 잡는다면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불과 10년이 못되어 100% 서양 멜로디의 노래를 담은 '찬양가'가 한국 최초의 찬송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토착 찬송을 한국인이 스스로 만들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의 복음 이해와 신앙 형태는 경건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것이었다. 즉 복음은 개인의 회심과 구원의 내적 확신을 위한 것이며(경건주의), 그 회심과 학신은 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주관주의) 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선교 정책은 20세기말을 세계의 종말로 간주하여 빨리 모든 백성에게 복음을 '들려주기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복음을 받은 이 땅의 문화와 관습과 제도 등 재래의 좋은 유산의 가치를 거의 부정하고 정죄하는 배타적 신앙을 조정하였으며, 개인의 구원만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내세주의는 이런 유산을 문제삼을 흥미도 필요성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배재, 이화학당 이후 설립되는 기독교 학교마다 서양음악만을 가르쳤고, 우리 전통음악은 가르쳐지지 못하였다.
토착찬송을 한국인 스스로 만들지 못했던 세 번째 이유는 일제의 우리전통 음악 말살 정책 때문이었다. 일제는 한일합방이후 한국을 영원히 일본땅으로 만들고 한국인을 황국신민화하여 민족혼을 없애버리려 하였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일제는 35년동안의 통치기간동안 창씨개명, 신시참배 등을 강요하며 일본어를 국어라고 부르도록 하고 일본 역사를 국사라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일본음악을 국악(아악)으로 부르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음악의 학교 교육을 금지 시키고 일본 음악만을 부르도록 하였다. 우리전통 음악은 이때부터 교육의 장을 잃어버리고 이 땅에는 서양음악과 일본음악이 판을 치게 되었다.
찬송은 단순히 노래가 아니라 신앙고백이다. 이제 100년을 넘은 한국 교회가 자신의 신앙고백을 해야할 때가 되었다고 볼 때, 한국 찬송가는 글자그대로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겠고 한국인을 위한 찬송가가 되어야 하겠다.100)
2) 우리 가락 찬송을 만드는 방법론
(1) 우리 가락 찬송의 의미와 기본 정신
우리 식 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은 인위적이거나 억지가 아니라 필연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우선 찬송이 신앙고백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우리 교회 스스로가 찬송가를 만들어 내야하며 또 음악적, 가사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우리 고유의 찬송을 만들 필요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은 어떤 찬송가를 만들어야 하는가?
찬송가란 교회 내의 음악적 상식을 가진 몇몇 그룹들을 위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찬송가를 부르는 대상은 천차만별이며 여기에는 교육의 정도, 지방색,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차별을 둘 수가 없다. 그러므로 찬송가에는 이러한 천차만별의 회중을 가능한 한 많이 포용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약자에 대해 관심이 있어야 한다.101) 기독교는 민중의 종교이지 귀족의 종교가 아니다. 예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즐거워했던 모습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찬송에서도 그들을 소외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시의 교육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찬송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민족의 복음화를 꿈꾸는 한국의 기독교라면 이 서양찬송이 시골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려우며, 제대로 부르기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102)
한마디로 찬송가는 음악을 잘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부를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쉬워야 하고, 여러 가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다 포용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 나라의 공식 찬송가는 음악적 수준을 지켜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 곡에 대해서는 큰 아량을 보이면서도 한국인 작곡가의 곡에 대해서는 지나친 선곡 기준을 보인다. 그래서 현재 찬송가에 실린 한국인 작곡의 찬송가들이 대부분 서양인 작곡의 번역 곡보다 더 높은 수준을 갖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많이 불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103)
이제는 기독교 내에서도 한국의 전통에 따른 음악을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일부의 작곡가는 이 방향에서 수년간 작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크게 진척되지 못한 것은 아직도 한국 전통음악과 관련해서는 부정적인 연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전통음악을 듣고 무당, 기생들을 연상하지 않는 세대에서는 이 일이 쉽게 이루어 질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우리의 정신적 환경에서 민족주의가 어떠한 이데올로기보다도 강하고, 이 상황이 쉽게 변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도 창조적으로 교회음악에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104)
(2) 우리 가락 찬송을 위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들
우리가락으로 만든 찬송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부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어야만 한다.
첫째로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통음악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이름만 한국인이지 사실상 우리 고유 음악에 대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성장하였다. 그 대신 서양음악에 대한 교육은 철저히 받아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고유 음악에 대해 무식하게 되었고 이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전통음악에 대해 아름답고 품위있는 음악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유산인 국악은 철저히 천한음악, 기생음악, 술집음악, 놀이판의 유흥음악이란 생각을 그대로 이어받게 되었다.
우리는 솔직히 국악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아는 바가 없으니 흥미가 없고 모처럼 들어보아도 국악은 그 곡이 그 곡 같아서 특징이 없이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다가 갑자기 국악이 흘러나오면 방송을 돌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자들에게 국악은 귀에 거슬리는 거추장스러운 음악일 뿐이다.
우리는 토착 찬송을 만들기에 앞서 시급히 국가적 차원에서 학교 음악 교육을 통하여 우리 민족이 우리 음악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우리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풍토를 이루어야 하겠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전통 음악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기독교인들은 자연히 우리가락 찬송을 즐겨 부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락 찬송을 위해 해결 할 두 번째 문제점은 토착 찬송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토착 찬송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소위 교회내의 운동권 그룹이나 사회 참여의 주장이 강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어져 왔다. 그리고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온건, 보수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토착 찬송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보수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일수록 서양적인 찬송을 선호하고 토착찬송을 경시하는데도 문제가 있고, 토착찬송을 만드는 급진적 사회참여 세력들이 복음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달리하여 보다 현실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기사를 실음으로써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부를 마음이 나지 않는 찬송이 되어버린데도 문제가 있다. 어쨌든 우리 가락으로 만들어진 찬송가는 기독교 내의 어는 특정 그룹의 전유물이 되어 버려서는 안된다. 기독교인 모두가 부를 수 있는 찬송이라야 한다.
세 번째 문제점은 우리가락 찬송에 대한 목회자들의 적극적인 수용이다
우리 가락 찬송에 대한 목회자들의 적극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회중찬송은 실제로 목회 현장에서 불리워질 때만이 생명력이 있다. 우리 나라 목회 현장에는 아직도 목회자들의 절대적 권한이 인정되고 있으며 음악분야 에서도 예외는 아니다.105) 예배 찬송의 선택도 전적으로 목회자에 의해 선곡되고 있는 상태에서 목회자들의 우리 찬송 수용의 여부가 우리의 찬송을 살릴 수 있는 관건이다.
이것이 힘들다면 교회나 음악 목회자를 많이 양성해야 할 것이다. 음악 목회자가 없거나 또는 맡은 임무를 다하지 못할 때 담임목회자의 오류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나타난다. 관심은 있으나 전문 지식의 부족으로 오는 문제와 무관심으로부터 오는 오류이다.106) 이러한 오류들을 깨지 않고서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가락 찬송을 부르기 전에 우리 전통음악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어린아이가 동물원 원숭이를 구경하는 것 같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우리 전통 음악을 대해서는 안되고 진정 마음으로부터 우리 음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107) 학교에서 우리의 전통음악이 교육되지 않는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교회교육에서 즉 주일학교를 통하여 우리의 전통음악을 가르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이에 우리의 찬송가도 그 목표를 진정한 한국 음악의 성취에 둔 공통적 열망과 총체적 노력에 힘입어 현대의 우리 사고에 맞고, 폭넓은 언어와 문화를 담아내는 전통적인 예배찬송가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3) 가사에 관한 문제
가사의 문제는 곡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회중들이란 곡보다 우선 가사를 보고 찬송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곡은 모르더라도 우선 가사가 자신의 신앙고백과 일치된다고 생각 될 때는 불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토착 찬송은 위에서 말했듯이 가사적 측면에서도 보편성과 약자에 대한 관심이 강조되어져야 한다. 적어도 우리식의 찬송가에 적합한 가사란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너무 추상적이고 시적인 외국 가사를 그대로 번역하여 쓴다든지, 어려운 한자어나 고사성어나 현행 국어사전에도 없는 옛 용어나 사투리를 쓰는 것은 찬송가 가사로서 적합하지 않다. 또 지나친 줄임말도 의미 전달이 곤란하므로 적합하지 않다. 찬송가의 가사는 교육수준이 낮은 어떤 사람이 들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쉬운말로 쓰여져야 한다. 노래를 듣고도 이해를 못하여 가사를 눈으로 확인해야 겨우 말뜻을 이해하는 정도의 가사는 이미 보편성을 상실한, 찬송가 가사로서는 부적합한 것이다.108)
3. 찬송가 한국화의 가능성
찬송가를 한국화 하려고 할 때 우선 해결해야 될 문제는 전통음악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는 일이다. 전통음악은 우리의 사고 속에서 품격 높은 민족의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또한 품위있는 궁중 음악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민간 음악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서 쓰여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즉 민중의 음악은 속(俗)되지 않으며 따라서 '민속(民俗)음악'이 아니라 '민(民)음악' 혹은 '민간(民間)음악', '민중(民衆)음악' 또는 '民中음악' 등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능성의 근거를 성서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 그리고 교육적 측면에서 살펴 보려고 한다.
1) 성서적 측면에서의 가능성
구약시대의 노래 모음이었던 시편은 대부분 표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표제들 중에는 히브리인에게 친숙한 민요곡으로 생각되는 곡명들이 나오는데 이는 이미 제2성전 시대에 시편을 대중적인 민요 곡조에 얹어 불렀음을 말하고 있다. 알-다스헷(??????????????)은 시57, 58, 59, 75편의 표제인데 뜻은 '터트리지 말아라', '파괴하지 말아라'라는 뜻이며 포도를 따면서 부르는 노동요이다.109) 알-하깃딧(????????????????)이란 표제는 시8,81, 84편에 나오는 일반적으로 이것도 일종에 노동요인 '포도 밟는 노래'의 가락에 맞추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것은 수확한 포도를 발로 밟아 즙을 내는 작업을 하면서 부르는 민요이다.110)
알-아앨렛 하샤알(???????? ??????????????)은 시22편에 나오는데 '암사슴이 새벽 일찍이' 혹은 '새벽 암사슴'이라는 히브리인들의 민요이고, 알-소사님(????????????????)은 시45, 69편의 표제로서 '백합화'라는 민요 곡조에 얹어 부르는 것이다.111)
신약성서에는 에베소서 5장 19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에 대하여 오스카 죈겐(Oskar Söhngen)은 시(?αλμοσ)는 시편, 찬미(υμνοσ)는 창작 찬송, 신령한 노래(ωδεπνοιματικη)는 보다 자유로운 형태의 영가, 즉 오늘날의 복음성가와 같은 노래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 나라 공동 번역에는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시편과 더불어 창작 찬송과 자유로운 형태의 영가들이 예배 음악으로 사용되어 지는데 이런 음악들은 당시 민간 음악의 영향을 받았고 이방인의 가락도 들어 있었으며 가사 중에는 성서가 아닌 자유로운 것도 택했는데 후에 서방의 카톨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동방정통교회는 이를 정죄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찬송을 한국화 하자는 주장은 성서가 가르쳐 주는 방법론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며 성서의 사상에 위배되는 비성서적 행위가 아니다. 히브리 민족과 헬라 문화권의 민요와 민간 음악이 야웨 신앙을 노래하는 도구로 쓰여질 수 있었다면 오늘 이 시대의 우리에게 있어서 한국의 전통음악도 우리 민족의 신앙고백을 위한 가장 적절한 문화 유산인 것이다.112)
2) 사회적 측면에서의 가능성
한국 교회 안에서 아직도 우리 가락으로 된 찬송가가 많지 못한 이유는 한국 교회가 19세기말의 문화적 상황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가 그대로 있으며 전통음악이나 악기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비 신앙적인 일로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는 아직도 '국악'을 기생 음악, 술집 음악, 유흥 음악 정도로 생각하여 천시하고 비웃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전통 음악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과 배타적 태도로 일관해 오고 있는 동안 교회 밖에서는 전통음악이 민족의 음악으로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고 있다.
우리의 것을 사랑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 간직하고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다. 섹스물이나 폭력물이 아닌 순수한 판소리 음악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 '서편제'의 흥행 성공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교회는 토끼처럼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우리 사회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민족 문화의 진정한 가치가 숨겨진 그 결승점에서 서서히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이 사회를 비교해 볼 때 교회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전통 문화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오아시스 속의 사막처럼 고립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종교란 사회와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고 더구나 기독교는 사회 안에서 언제나 제 몫을 담당해야 생존할 수 있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전통 문화에 대한 이러한 교회 밖의 인식 변화에 대해 더 이상 무감각 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이제라도 무관심의 잠에서 깨어나 전통음악을 민족의 음악으로, 나아가서 교회의 음악으로 수용하므로 사회로부터 문화적 고립을 면해야 할 것이다.113)
3) 교육적 측면에서의 가능성
사회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것이 교육이다. 한 나라의 교육 과정(Curriculum)이란 그 사회의 각종 변화에 맞추어 개정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교육 과정도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전통음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크게 개선되고 있다.
현재에는 초, 중, 고의 음악 교과서에서 서양 노래와 한국 노래를 각각 50%씩 싣도록 의무화하고 있으며 전통음악에 대한 감상과 실습도 종전보다 크게 개선되었다. 아직도 목표에는 크게 미흡하지만 이러한 학교 교육은 우리 음악의 본래적인 품위와 가치를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일깨워줄 수 있을 것이고 전통음악이 더 이상 기생음악이나 술집 음악으로 푸대접받는 일을 면하게 해 줄 것이고, 민족 음악에 대한 교회내의 인식에도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 생각 속에 전통음악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싹틀 때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서양 찬송에 매달리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에게는 우리가락 찬송이 더 자연스러운 신앙고백이 될 것이다.114)
Ⅴ. 결 론
서양 찬송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아닌 찬송을 억지로 부르려고 하니 목에 힘만 들어가고 재미가 없는 것이다. 찬송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억지 찬송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결과를 낳으며 죄를 범하게 된다. 즉, 찬송 자체를 제대로 부르려고 신경을 쓰다가 정작
찬송의 대상인 하나님을 망각해 버리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의 현장에서 부르는 찬송가는 우리의 찬송이라기 보다는 옷만 갈아입은 서양의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3%정도의 우리의 것을 갖고 있는 실정이며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찬송가의 개선 방향을 조명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한국찬송가의 형성 배경과 과정들을 살펴보며, 우리 찬송가는 원 기독교 찬송가의 정통적 주류에서 다소 벗어난 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으며, 두 번째로는 이를 개선해 보고자 한국인 창작 찬송가의 현실을 살펴보면서 한국 찬송가는 복음가 위주가 아닌 예배 찬송가로서 역사적인 정통성을 가져야 하고, 성도와 교회를 더욱 성숙하게 발전 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또한 좋은 찬송가를 통해 하나님께 더욱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시대가 요구하는 다각적인 찬송으로서 누구에게나 공유될 수 있는 찬송가이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통일찬송가』는 역사적으로 18, 19세기의 영국과 미국의 찬송가인 복음가와 부흥찬송을 모태로 하여 형성되고 성장했는데, 그것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찬송가가 편찬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기인한다. 그것은 당시의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찬송, 특히 미국 부흥가의 찬송 곡들을 토대로 그것이 한국 찬송가에 뿌리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찬송가 편찬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있는 찬송가를 재편집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앞으로 다시 편찬될 찬송가를 기대하면서 몇 가지 주장을 하려고 한다.
첫째, 교독문으로만 낭독하고 있는 그 많은 시편들을 찬송가로 부르자는 것이다. 구약의 유대 성전 예배의식에서 엄연히 의식순서로 되어있었고, 회당예배에서도 시편을 불러 찬송 드리는 것은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중세와 예수 종교개혁시대를 통하여 찬송가로서 권위를 갖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시편 찬송을 부러야 할 것이다.
둘째, 찬송가가 조금 더 많은 연령층을 공유해야 할 것이다. 지금 통일 찬송가는 청년이나 젊은 층을 별로 고려하지 않고 편집되어 새로운 곡의 스타일, 리듬, 화성으로 젊은이를 위한 찬송가가 있어야 한다. 요즘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예배나 모임에서는 찬송가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모임에서는 복음성가가 중요한 레퍼토리로 사용되며, 감각적이고도 신앙의 깊이가 부족한 복음성가의 사용으로, 올바른 신앙의 정립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셋째, 한국인의 창작된 찬송이 더 많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찬송가들을 번역하여 사용되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며, 한국인이 한국인의 신앙을 담은 가사를 직접적으로 곡의 멜로디와 화성에 맞는 찬송가를 편찬해야 할 것이다. 이는 문성모의 저서 『민족음악과 예배』에서도 알 수 있는데, 그는 "한국 찬송은 한국인의 심성과 문화에 맞아야 하며, 도시 교인이나 시골 교인이나, 교육 수준이 높은 자이거나 낮은 자이거나 구분 없이 모두 쉽게 공감하고 따라 부를 수 있는 한국의 교회 공동체를 위한 찬송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115)
이와 같이 필자는 한국인이 쓴 좋은 찬송을 많이 개발하여 우리 찬송가에 접목시키고, 세계의 여러 좋은 찬송가와 함께 우리의 신앙과 감정을 하나님께 바르게 나타낼 수 있는 그러한 찬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넷째, 교회음악인의 양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말하고 싶다. 앞으로 21세기에 사용할 한국교회의 찬송가가 새로이 출판할 예정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새로 개편될 21세기의 찬송가는 2000년 8월이 되어야 최종적으로 결정이 되겠지만 현재 결정 된 사실은 통일찬송가의 558곡 중 79곡이 삭제되고 새로운 찬송이 169곡이 추가되어 644곡을 이루는 21세기 찬송가가 탄생될 것이다. 새로이 추가된 169곡 중에 56곡이 외국 곡이며, 한 두 곡은 현재 많이 불려지는 외국인이 쓴 곡이 들어가고 그 나머지는 한국인이 쓴 찬송가가 첨부될 예정이다. 8월까지 남은 기간 중에 더욱 신중하게 고려하여 21세기 찬송가는 화성이나 리듬 면에서도 고전적인 것으로부터 현대적인 감각을 가진 것들로 이루어 저야 할 것이다. 현재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대학원 내에는 찬송가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시간이나 여건이 제공되지 않는다. 찬송은 예배와 설교의 부속물인 양 여기는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찬송가, 더 나아가서 교회음악에 대한 지식과 중요성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교회에서 음악 부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회음악에 헌신되고 관심 있는 사람들을 더욱 후원하고 교육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수준 있고 체계적인 교회음악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흔히 '찬송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곡조 붙은 기도'라고 대답하는 것을 볼 있는데 이는 가장 기본적인 문자적 의미부터 잘못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찬송은 결코 기도가 아니다. 기도와 같은 요소는 있지만 기도의 한 부류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찬송은 사전에 보면 '찬성하여 칭찬함, 아름다움을 일컫고 덕을 기림'이라고 풀이했다.
찬송의 한문 단어의 뜻을 풀이해 보면 讚: 기릴 찬 頌: 기릴 송으로 풀이할 수 있다. 즉 칭찬, 공덕을 칭송, 성덕을 칭송하여 고함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전을 보면 頌讚(송찬)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찬송의 의미를 가진 이 단어가 옛날에는 고관대작들을 경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어떤 사람의 아름다운 인품을 흔히 德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도 하나님이 지니는 어떤 성품을 덕이라고 표현하는 곳이 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찬송은 '하나님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시대와 형식에 구별 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권능을 높이는 모든 노래'를 일단은 총체적으로 찬송이라 부르면 된다는 것이다.
찬송에는 신학이 담겨져 있다. 찬송의 내용은 설교 말씀과 같이 다양한 주제를 가지며, 깊이 있는 찬송을 부를수록 우리의 신앙은 깊어가게 된다. 우리의 현행 『통일찬송가』는 선교 초기 부흥회에 맞는 복음찬송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이러한 찬송을 부르는 우리의 예배의 현실은 아직도 초보적인 '부흥회'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배가 바뀌려면 먼저 찬송이 변하여야 한다. 미국은 100여 년 전 기독교와 함께 복음찬송이라는 찬송의 한 줄기를 우리에게 전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지난 현재의 미국 찬송은 그때와는 달리 새롭게 변하여 예배찬송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위해 다양한 노력과 연구 끝에 새로운 찬송들을 개발하여 기독교인의 삶을 더욱 은혜롭고 성숙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100여 년 전 들어왔던 복음찬송이 찬송가의 전통인양 그것만을 고집하며 살아왔고, 우리의 예배마저 거의 성숙해 가지 못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이제 이러한 찬송가를 과감히 던져버리고, 새로운 현대적인 감각의 언어와 문화를 담은 폭넓은 다양한 찬송을 수용하여 좀더 성숙한 교회, 성숙한 신앙 인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도 우리들이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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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찬송가는 1983년 한국찬송가공회 에서 나온 것으로 그 명칭은 『찬송가』이지만, 이 논문에서는 이 찬송가를 『통일 찬송가』(1983)라고 표기하였다.
2) 이영기, 『찬송가론』(대구 : 계명대학교 출판부, 1991), p.182.
3) 김남수, 『교회와 음악 그리고 목회』(서울 : 요단출판사, 1995), p.229.
4)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서울 : 호산나 음악사, 1995), pp.215-216.
5) 박봉배, "찬송가의 조속한 통합을 바라며", 『기독교사상』, 통권 제270호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80, 12), p.84.
6)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216.
7)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음악연구원, 1997), p.98.
8) 위의 책, p.100.
( * 『찬양가』(1894)에 수록된 언더우드의 번역 찬송가 : 3장, 9장, 10장, 11장, 15장, 18장, 19장, 23장, 24장, 25장, 32장, 34장, 47장, 56장, 64장, 69장, 79장, 81장, 82장, 83장, 88장, 91장, 96장, 103장, 109장, 총25편)
9) 염행수, 『찬송가학』(서울 : 도서출판 생수, 1996), p.191.
10)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00-101.
11) 위의 책, p.102.
12) 한영제, 『한국성서,찬송가 100년』(서울 : 기독교문사, 1987), p.68.
13) 조숙자 , 조명자, 『서울 :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1』, p.205.
14)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03-104.
15) 염행수, 『찬송가학』, p.60.
16) 조숙자 , 조명자, 『찬송가학』(서울 :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1), p.212.
17)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04-105.
18) 위의 책, p.105.
19) 위의 책, p.106.
20) 위의 책, p.107.
21) 한영제, 『한국성서 , 찬송가 100년』, p.133.
22)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108.
23) 위의 책, p.108.
24) 위의 책, p.109.
25) 위의 책, pp.108-109.
26) 위의 책, pp.112-113.
27) 위의 책, pp.111-112.
28) 김양선, 『한국기독교 연구』(서울 : 기독교 문화사, 1971), p.74.
29)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1-112.
30)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218.
31)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2-114.
32) 민경배, 『한국교회 찬송가사』(서울 : 도서출판 생수, 1993), pp.105-108.
33)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4-115.
34) 강신우, 『찬송가의 올바른 이해』(서울 : 기독교 음악사, 1983), p.49.
35) 조선예수교 서회, 『신정찬송가』(서울 : 1931), 서문.
36) 민경배, "찬송가의 조속한 통합을 바라며", 『기독교 사상』, 통권 제270호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5), p.43.
37) 조선예수교 서회, 『신정찬송가』, 서문.
38) 기독신보, 1935년 2월 27일자.
39) 김교신, "찬송가의 변형:, 『성서조선』(1933년 6월호).
40)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3회 회록, (1934년 9월), p.49.
41)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재』, p.219.
42) 민경배, 『예배와 음악』(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05), p.50.
43)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4-115.
44) 민경배, 『한국교회 찬송가사』, p.116.
45)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5-118.
46) 조숙자 , 조명자, 『찬송가학』, p.229.
47) 민경배, 『예배와 음악』(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05).
48)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18-121.
49) 민경배, 『한국교회 찬송가사』, p.44.
50) 한영제, 『한국성서 , 찬송가 100년』, p.139.
51)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음악연구원, 1997), pp.121-124.
52) 위의 책, p.123.
53) 위의 책, p.124.
54) 대한기독교서회(편), 『합동찬송가』 (서울 : 1949), 서문.
55)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p.220-221.
56)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125.
57)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221.
58)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126.
59) 염행수, 『찬송가학』, p.203.
60) 민경배, 『한국교회 찬송가사』, p.183.
61)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p.222-223.
62) 이유선, 『기독교 음악사』(서울 : 기독교문사, 1988), p.222.
63) 염행수, 『찬송가학』, p.206.
64)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p.126-128.
65) 강신우, 『찬송가의 올바른 이해』(서울 : 기독교음악사, 1983) p.50.
66)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229.
67) 강신우, 『찬송가의 올바른 이해』, p.50.
68) 이유선, 『기독교 음악사』(서울 : 기독교문사, 1988), p.224.
69) 조숙자, "한국찬송가와 미국 Gospel Song", 『여성신학과 한국교회』(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97), pp.327-331.
70) 위의 책, p.335.
71) 예배를 위한 공적 찬송은 주일 예배 찬송을 뜻하는 것으로 기도회나 집회 시에 부르는 찬송과는 구분된 찬송을 말한다.
72) 조숙자, 『한국찬송가 연구 논문집』, p.128-129.
73) 박근원, "새로운 예배 시편",『예배자료 21』, 제3권 (서울 : 대한 기독교 서회, 1998), 서문.
박근원 교수는 예배자료 21에서 시편가의 사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구약성서의 시편 모음은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이 시편들에 감명 받은 찬송이나 기도를 통해서 우리 모두의 찬양과 기도에 변함없는 영향을 끼쳐왔다. 그도 그럴 것이 시편은 예수 자신 뿐 아니라 초대 교회 그의 제자들에게 찬송가였고 기도서였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들은 시편이야말로 자기네 주님의 생애와 섬김에 관한 예언이라고 생각하였다. 시편은 신약성서 안에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다. 신약성서와 초대교회 교부들의 기록들 가운데 있는, 예언으로서의 시편 해석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시편을 사용하게 될 실마리가 되었다"
74) 강신우, 『찬송과 예배의 이론과 실제』, pp.241-242.
75)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서울 : 한들, 1995), p.107.
76) 현행『통일찬송가』(1983)의 한국인 창작 찬송가는 학자들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본고에서는 현행 찬송가 우측 상단에 있는 작곡자 명이 한국인으로 표기된 곡들을 중심으로 17곡이라는 견해를 따랐다. 그 내용은 53장, 92장, 256장, 261장, 272장, 303장, 304장, 305장, 311장, 317장, 365장, 369장, 371장, 378장, 453장, 461장, 493장이다.
77)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 pp.108-109.
78) 김이호, 『찬송가 연구 제 2 권』(서울 : 도서출판 지혜원, 1999), p.178.
79) 나운영, "한국 교회음악의 현대화 과제", 『기독교 사상』, 1967년 6월, p.66.
80) 나운영, "한국 교회음악의 진로", 『기독교 사상』, 1958년 5월, p.38.
81) 김인수, "초기 한국인작사 찬송가에 나타난 신앙", 『장신 월보 제 40호』, 1994년 11월 22일 (서울 : 장신월보사), p.3.
82) 정장복, "한국문화와 기독교 예배 예전의 연접에 관한 고찰", 『예배학 부교재』 (서울 : 장신대예배학교실, 1994), p.39.
83) 홍정수, "한국의 창작 교회음악, 그 진단과 전망", 『교회음악』, 1988년 봄, p.93.
84) 위의 책, p.94.
85) 위의 책, p.96.
86) 홍정수, "2000년대를 향한 장신대의 교회음악 교육", 『2000년대를 향한 신학과 교육』(서울 : 장로회 신학대학 출판부, 1992), p.238-9.
87) 한태근, "한국의 청소년 교회음악 이대로 좋은가?", 『교회음악』(1987년 여름), p.15.
88) 정치근, "부끄러운 한국 찬송가", 『교회음악』(1987년 가을), p.30.
89) 홍정수, "2000년대를 향한 장신대의 교회음악 교육", p.99.
90)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 p.104.
91) 홍정문, 『교회음악 개론』(서울 :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2), p.94.
92) 문성모, "우리가락 찬송가에 대하여", 『교회음악』(1989년 가을, 겨울호), p.19.
93) 현행 찬송가인 『통일찬송가』(1983)에 한국인 작곡가로는 곽상수, 김연준, 박재훈, 이동훈, 나인용, 이동훈, 구두희, 이유선, 장수철, 박태준 등 10인 이다.
94) 홍정수, "한국의 창작교회음악 그 진단과 전망", p.31.
95) 홍정문, 『교회음악 개론』, p.99.
96) 김남수, "예배와 회중 찬송", 『복음과 실천』(대전 : 침신대출판부, 1993), p.446.
97) 나운영, "음악의 측면에서 본 찬송가 가사", 『교회음악』(1981, 가을호 통권25호), p.17-19.
98) 신소섭, 『예배와 찬송학』 (서울 : 아가페 문화사, 1997), pp.242-243.
99) 신소섭, 『예배와 찬송학』, pp.244-245.
100)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 pp.152-157.
101) 문성모, "우리가락 찬송가에 대하여", 『교회음악』(1989년 가을, 겨울호), p.20.
102) 문성모, "한국 전통음악에서 본 찬송가 틀리게 부르기의 원인분석", 『교회음악』(1987년 봄), p.24.
103) 홍정수, 『교회음악 개론』, p.103.
104) 위의 책, p.95.
105) 문성모, "우리가락 찬송가에 대하여", p.22.
106) 김남수, "예배와 회중찬송", p.446.
107) 문성모, "우리가락 찬송가에 대하여", p.24.
108) 문성모, 『우리가락 찬송가』(서울 : 한국 국악 선교회, 1989), pp.118-127.
109)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 p.340.
110) 위의 책, p.341.
111) 위의 책, p.340.
112) 위의 책, pp.341-342.
113) 위의 책, p.348.
114) 위의 책, p.349.
115) 문성모, 『민족음악과 예배』,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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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September 15, 2008
자유주의 신학과 그리스도: 사랑 희망 복종 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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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이버의 책 제목이 '기독교와 문화'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문화'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니이버는 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책의 도처에 끼워 놓았습니다. 단지 그 이야기와 담론이 '한국기독교문화'에서 흔히 사용하지 않는 '투'이어서, 그곳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렵게 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하든 이를 풀어가며 대화를 소통시켜 우리들 담론의 새 차원이 열리어 가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니이버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시대착오성>에서 에드워드를 시대착오적이라고 비난하며 '왕따'시켰다는 19세기 유럽 지성인들이 <그리스도와 문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지난번 제1장에서 니이버가 그리스도를 '사랑' '희망' '복종' '겸비' 등에 의해 정의한 이유는, 19세기를 정점으로 하는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주요 주제들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마다 대표적 신학자들이 등장하는데 다음의 요약과 관련링크가 <그리스도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책에 나오는 순서를 따르지 않고 역사적인 등장 순서와 계보를 따랐습니다.
<<사랑>>
유럽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의 정통주의, 18세기의 계몽시대의 경건주의, 합리주의 신학을 거쳐 19세기에 이르러 독일관념론의 터전 위에서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정립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인간중심적'이다고 하겠습니다. 항상 인간의 삶의 현실로부터 신학을 시작합니다. 예수를 인류의 모본이나 교사로 보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면보다는 현재적인 면을 강조하여, 그리스도를 인간의 종교적 경험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 그 공통점입니다.
이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라 일컫는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종교론 On Religion: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의 영문판과 독일어 원문 입니다. 1893년에 번역된 영문판 전체를 다운 받을 수도 있습니다.
1799년에 출판된 그의 처녀작으로서 종교(당시의 기독교문화)를 멸시하는 교양인에게 보내는 이 책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언서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것은 경건주의를 배경으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해 종교가 현대에서 어떻게 존립 가능한가를 해명한 종교 변증서입니다.
계몽주의의 종교연구는 그 본질을 종교 현상에서 발견하려함으로써 종교를 도덕으로 환원하거나 철학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종교는 19세기초 독일 낭만파 지성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계몽주의의 종교관의 비판을 출발점으로 종교의 직접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이며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따라서 도덕화되고 이성화되었던 계몽주의 시대의 종교관에 반기를 들고 직관과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주장하여 종교의 독자성을 확보한 것이 그의 공헌으로 평가됩니다. <종교론>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그들이 외면하고 멸시했던 종교에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전통을 따르며 자유주의 신학의 왕자라 불리우는 리츨Ritschl은 신학의 영역으로부터 모든 철학과 신비주의를 축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복음을 신학의 토대로 삼으려했는데, 그의 신학 체계의 중심점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성서적인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교회를 개혁하려 했으나 그들의 종교적인 통찰을 통전적인 신학 체계로 정립하지는 못했다고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신앙에 의한 칭의의 교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서의 교훈사이의 관계성을 주목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죄로부터의 개인적인 구속을 강조했으나 사회 구원을 지향하는 윤리적인 활동을 소홀히 했다고 합니다. 리츨은 종교 개혁자들의 이런 취약점을 보완하여 종교개혁 작업을 완성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와 문화> 제3장 2절 - "문화-프로테스탄티즘"과 리츨 - 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리츨이 쓴 책 중 자주 인용된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을 클릭하시면 Google Book Search에서 Harvard대학교 소장본을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리츨은 기독교를 하나님 나라를 창건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위에 세워진 영적 윤리적 종교로 정의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기독교는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이 아니라, 두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입니다. 종교적 또는 영적 중심과 도덕적 중심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속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합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 속에서 존재하는 한 영적 종교입니다.
후자는 그리스도가 창건한 윤리적인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가 교회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이다 라고 합니다. 그것의 목표는 인간 사회 전체를 하나님 나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에 감동된 행위를 통하여 이룩된 인류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인 동시에 인간의 최고 선이다. 기독교인의 임무는 그것을 확산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리츨은 사랑이 궁극적 덕인 하나님 나라를 지고의 윤리적 이상으로 간주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말하는 사랑을 니이버가 <그리스도와 문화> 1장에서 그리스도를 정의하며 대비시켰습니다. 니이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공통된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만 공통된 근원을 가진 두 구별된 덕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유일한, 참 선한 이를 찬양하는 것이며 모든 은사를 주는 이에 대한 감사인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기쁨이다. 이것은 '존재(Being)에의 찬성'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찬양보다는 불쌍(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감사라기보다도 주는 것과 용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악과 불경성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있는 그대로 수락하는 것을 응함이 아니라, 회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비소유적인 에로스요, 사람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아가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열정(passion)이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동정(compassion)이다."
니이버는 여기서 <조나단 에드워드의 시대착오성>에서 조나단 에드워드를 왕따시킨 그 인간의 오만한 자신감, 그러니까 19세기 리츨 등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처참히 좌절되는지를 1,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트뢸취Troeltsch는 예수의 사랑의 윤리가 사회적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으로서의 기독교회사를 서술하였고, 하르낙Harnack은 정신과 이성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적 신앙에 도취되어 '신과 세계' '종교와 문화' '신앙과 사고' '신적질서와 지상적 질서' '권좌와 제단'을 자연적인 조화로 연결시켰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시민적 이상주의 시대의 최대의 설명을 수행했습니다.
1장의 문제제기에서 자주 인용된 하르낙의 <What is Christianity?>의 전문입니다.
이러한 하르낙의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앙에 의하면, 역사적 과정이 곧 신적운동이고, 이 신적운동의 목적은 역사속에 인류를 한 단계씩 자연상태에서 문화에로 상승하게 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개별적 인간은 이 정서적 힘들에 의해 자신을 밝히면서 자연상태로부터 역사의 과정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이 특수한 양식 속에서 여기저기에 정신적, 신적 힘을 소유한 개인들이 역사에 나타나고, 이러한 '계시전달자' 중 최대의 개인이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사실상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 감정이라든가,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은 신인식의 기관이었으며, 신의 계시와 인간의 종교적 문화의 어떠한 긴장도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신은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깊이 안에서 길들여지고, 인간의 종교적 문화 안에서 길들여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 종교는 문화와의 철저한 밀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의 문화적 프로테스탄티즘이 말하던 '사랑과 평화의 왕국'(하르낙)은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의 발화와 함께 무너졌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신학적 의미는 19세기를 지배했던 역사의 진보에의 부르조아적인 신앙이 허구임을 드러낸 역사적 실증이라는 점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역사적 진보사관에 의하면 칸트Kant이래 계몽사상으로 시작된 이 역사는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찬란한 꽃을 피워야만 했지만, 객관적 역사의 과정은 진보사관의 환상과 착각을 발견하도록 했으며, 그것은 곧 진보사관을 전제로 한 19세기의 문화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프로테스탄티즘 즉 자유주의적 신학은 1914년 8월 14일 하르낙이 기초하고 93명의 학자들이 서명한 독일 황제의 전쟁발발에 대한 '93지성인 성명서 Manifesto of the Ninety-Three German Intellectuals'와 함께 종언의 서막을 고했습니다.
변증법적 신학의 주창자였던 바르트Barth는 그 당시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그 해(1914년) 8월 초순은 적어도 나에게는 암흑의 날이었다.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지지서명을 발표했는데, 이 지식인들 중에는 이제까지 숭앙해 왔던 신학스승들의 이름(하르낙, 제베르크, 헤르만 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경악케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들의 윤리학과 교의학, 성서해석과 역사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고, 더우기 19세기의 신학은 더 이상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
바르트의 스승의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결국엔 독일의 이기주의적 영토확장을 뒷받침해주는 세상 나라의 전쟁신학으로 귀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학의 필연적 귀결이요, 그 이론적 실천적 실패의 징후였습니다.
"자유주의의 역사는 미로였고 사도(邪道)와 미궁의 역사였다. 그 힘은 모순과 상호파괴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뛰놀았다."
니이버의 책 제목이 '기독교와 문화'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문화'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니이버는 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책의 도처에 끼워 놓았습니다. 단지 그 이야기와 담론이 '한국기독교문화'에서 흔히 사용하지 않는 '투'이어서, 그곳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렵게 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하든 이를 풀어가며 대화를 소통시켜 우리들 담론의 새 차원이 열리어 가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니이버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시대착오성>에서 에드워드를 시대착오적이라고 비난하며 '왕따'시켰다는 19세기 유럽 지성인들이 <그리스도와 문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지난번 제1장에서 니이버가 그리스도를 '사랑' '희망' '복종' '겸비' 등에 의해 정의한 이유는, 19세기를 정점으로 하는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주요 주제들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마다 대표적 신학자들이 등장하는데 다음의 요약과 관련링크가 <그리스도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책에 나오는 순서를 따르지 않고 역사적인 등장 순서와 계보를 따랐습니다.
<<사랑>>
유럽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의 정통주의, 18세기의 계몽시대의 경건주의, 합리주의 신학을 거쳐 19세기에 이르러 독일관념론의 터전 위에서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정립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인간중심적'이다고 하겠습니다. 항상 인간의 삶의 현실로부터 신학을 시작합니다. 예수를 인류의 모본이나 교사로 보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면보다는 현재적인 면을 강조하여, 그리스도를 인간의 종교적 경험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 그 공통점입니다.
이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라 일컫는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종교론 On Religion: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의 영문판과 독일어 원문 입니다. 1893년에 번역된 영문판 전체를 다운 받을 수도 있습니다.
1799년에 출판된 그의 처녀작으로서 종교(당시의 기독교문화)를 멸시하는 교양인에게 보내는 이 책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언서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것은 경건주의를 배경으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해 종교가 현대에서 어떻게 존립 가능한가를 해명한 종교 변증서입니다.
계몽주의의 종교연구는 그 본질을 종교 현상에서 발견하려함으로써 종교를 도덕으로 환원하거나 철학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종교는 19세기초 독일 낭만파 지성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계몽주의의 종교관의 비판을 출발점으로 종교의 직접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이며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따라서 도덕화되고 이성화되었던 계몽주의 시대의 종교관에 반기를 들고 직관과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주장하여 종교의 독자성을 확보한 것이 그의 공헌으로 평가됩니다. <종교론>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그들이 외면하고 멸시했던 종교에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전통을 따르며 자유주의 신학의 왕자라 불리우는 리츨Ritschl은 신학의 영역으로부터 모든 철학과 신비주의를 축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복음을 신학의 토대로 삼으려했는데, 그의 신학 체계의 중심점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성서적인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교회를 개혁하려 했으나 그들의 종교적인 통찰을 통전적인 신학 체계로 정립하지는 못했다고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신앙에 의한 칭의의 교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서의 교훈사이의 관계성을 주목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죄로부터의 개인적인 구속을 강조했으나 사회 구원을 지향하는 윤리적인 활동을 소홀히 했다고 합니다. 리츨은 종교 개혁자들의 이런 취약점을 보완하여 종교개혁 작업을 완성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와 문화> 제3장 2절 - "문화-프로테스탄티즘"과 리츨 - 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리츨이 쓴 책 중 자주 인용된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을 클릭하시면 Google Book Search에서 Harvard대학교 소장본을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리츨은 기독교를 하나님 나라를 창건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위에 세워진 영적 윤리적 종교로 정의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기독교는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이 아니라, 두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입니다. 종교적 또는 영적 중심과 도덕적 중심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속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합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 속에서 존재하는 한 영적 종교입니다.
후자는 그리스도가 창건한 윤리적인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가 교회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이다 라고 합니다. 그것의 목표는 인간 사회 전체를 하나님 나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에 감동된 행위를 통하여 이룩된 인류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인 동시에 인간의 최고 선이다. 기독교인의 임무는 그것을 확산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리츨은 사랑이 궁극적 덕인 하나님 나라를 지고의 윤리적 이상으로 간주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말하는 사랑을 니이버가 <그리스도와 문화> 1장에서 그리스도를 정의하며 대비시켰습니다. 니이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공통된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만 공통된 근원을 가진 두 구별된 덕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유일한, 참 선한 이를 찬양하는 것이며 모든 은사를 주는 이에 대한 감사인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기쁨이다. 이것은 '존재(Being)에의 찬성'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찬양보다는 불쌍(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감사라기보다도 주는 것과 용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악과 불경성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있는 그대로 수락하는 것을 응함이 아니라, 회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비소유적인 에로스요, 사람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아가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열정(passion)이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동정(compassion)이다."
니이버는 여기서 <조나단 에드워드의 시대착오성>에서 조나단 에드워드를 왕따시킨 그 인간의 오만한 자신감, 그러니까 19세기 리츨 등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처참히 좌절되는지를 1,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트뢸취Troeltsch는 예수의 사랑의 윤리가 사회적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으로서의 기독교회사를 서술하였고, 하르낙Harnack은 정신과 이성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적 신앙에 도취되어 '신과 세계' '종교와 문화' '신앙과 사고' '신적질서와 지상적 질서' '권좌와 제단'을 자연적인 조화로 연결시켰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시민적 이상주의 시대의 최대의 설명을 수행했습니다.
1장의 문제제기에서 자주 인용된 하르낙의 <What is Christianity?>의 전문입니다.
이러한 하르낙의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앙에 의하면, 역사적 과정이 곧 신적운동이고, 이 신적운동의 목적은 역사속에 인류를 한 단계씩 자연상태에서 문화에로 상승하게 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개별적 인간은 이 정서적 힘들에 의해 자신을 밝히면서 자연상태로부터 역사의 과정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이 특수한 양식 속에서 여기저기에 정신적, 신적 힘을 소유한 개인들이 역사에 나타나고, 이러한 '계시전달자' 중 최대의 개인이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사실상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 감정이라든가,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은 신인식의 기관이었으며, 신의 계시와 인간의 종교적 문화의 어떠한 긴장도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신은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깊이 안에서 길들여지고, 인간의 종교적 문화 안에서 길들여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 종교는 문화와의 철저한 밀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의 문화적 프로테스탄티즘이 말하던 '사랑과 평화의 왕국'(하르낙)은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의 발화와 함께 무너졌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신학적 의미는 19세기를 지배했던 역사의 진보에의 부르조아적인 신앙이 허구임을 드러낸 역사적 실증이라는 점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역사적 진보사관에 의하면 칸트Kant이래 계몽사상으로 시작된 이 역사는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찬란한 꽃을 피워야만 했지만, 객관적 역사의 과정은 진보사관의 환상과 착각을 발견하도록 했으며, 그것은 곧 진보사관을 전제로 한 19세기의 문화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프로테스탄티즘 즉 자유주의적 신학은 1914년 8월 14일 하르낙이 기초하고 93명의 학자들이 서명한 독일 황제의 전쟁발발에 대한 '93지성인 성명서 Manifesto of the Ninety-Three German Intellectuals'와 함께 종언의 서막을 고했습니다.
변증법적 신학의 주창자였던 바르트Barth는 그 당시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그 해(1914년) 8월 초순은 적어도 나에게는 암흑의 날이었다.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지지서명을 발표했는데, 이 지식인들 중에는 이제까지 숭앙해 왔던 신학스승들의 이름(하르낙, 제베르크, 헤르만 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경악케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들의 윤리학과 교의학, 성서해석과 역사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고, 더우기 19세기의 신학은 더 이상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
바르트의 스승의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결국엔 독일의 이기주의적 영토확장을 뒷받침해주는 세상 나라의 전쟁신학으로 귀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학의 필연적 귀결이요, 그 이론적 실천적 실패의 징후였습니다.
"자유주의의 역사는 미로였고 사도(邪道)와 미궁의 역사였다. 그 힘은 모순과 상호파괴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뛰놀았다."
<그리스도와 문화> 제1장 2절 그리스도의 정의에 관하여: 희망과 복종의 주인공 들은 슈바이쳐Schweitzer와 불트만Bultmann 인데, 다음과 같이 용어를 정리해 봅시다.
<<희망>> / <<복종>>
묵시적 종말론 / 실존주의적 종말론
슈바이쳐Schweitzer, 몰트만Moltmann / 도드Dodd, 불트만Bultmann
초월적 / 내재적
현상학 / 해석학
실재 / 존재
already / not yet
이들간에 변증법적 긴장, 또는 창조적 긴장에 대한 논의...
<
Friday, September 5, 2008
영지주의와 아벨라르에 있어서 문화와의 조화
>
<그리스도와 문화> 제3장 문화의 그리스도 1. 영지주의와 아벨라르에 있어서 문화와의 조화 - 에 나오는 Abelard라는 이름을 어디서 줏어들어본 듯 하여 이곳저곳 뒤적여본 결과... 아~! 유럽의 로맨스소설의 원조와 원형이 되는 실화 -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업적에 관심이 계시면 여기 - Stanford 대학교의 철학사전 - 보셔요.
자 이제 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알아봅시다. 다음은 퍼온 글입니다.
엘로이즈(Heloise)는 12세기에 살았던 중세 신학자 아벨라르(Abelard)가 사랑했던 여자의 이름입니다. 아벨라르(1079-1142)는 노트르담 성당 학교의 교수로서 그 시대에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문필과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지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참사회원이었던 쀨 베르도 아벨라르의 학식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에게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엘로이즈(1098-1164)라는 총명하고 예쁜 조카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옐로이즈는 라틴어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철학, 문학에도 뛰어나 어느 대학교수보다 낫다는 평을 듣고 있던 재원이었습니다. 쀨 베르에게 엘로이즈는 그야말로 자랑거리였지요. 쀨 베르는 엘로이즈를 휼륭하게 가르쳐 좋은 가문에 시집보낼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쀨 베르는 당대 석학이었던 아벨라르에게 자신의 영리한 조카의 가정교사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때 아벨라르의 나이는 38살이었고 엘로이즈의 나이는 17세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낭만적인 연애소설의 패턴입니다. 보통 연애 소설에서는, 지위는 낮지만 자질이 뛰어난 남자가 어리지만 신분이 높은 여인의 가정교사가 됩니다.
쀨 베르는 아벨라르에게 젊은 처녀를 맡기면서도 아벨라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벨라르는 금욕주의자로 소문났고 그와 마찬가지로 노트르담 대성당 참사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사회원은 명예와 출세가 약속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참사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독신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쀨 베르는 야심만만한 아벨라르가 연애문제를 일으켜 자신의 출세길을 망치지 않으리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쀨 베르의 계산은 어이없게 빗나가고 말지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사이에는 사랑이 피어났고 이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를 뛰어 넘어 연인 사이로 발전합니다. 얼마 후 쀨 베르도 아벨라르오 엘로이즈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그때는 엘로이즈가 임신한 뒤였습니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고향에 가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후 이 아들은 아벨라르의 누이가 기르게 됩니다.
아벨라르는 쀨 베르에게 엘로이즈와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그 대신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 결혼을 비밀에 붙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엘로이즈는 그 결혼을 반대합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는 아내 보다 영원한 연인으로 남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몇 명의 친지들 앞에서 비밀 결혼을 치룹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부부가 되었으나 같이 살지 못하고 가끔씩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러자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수녀원에 들어갈 것을 권유합니다. 그 때 그가 둘러댄 이유는 쀨 베르의 감시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지금 막 피어난 아름다운 처녀 엘로이즈가 다른 남자들의 유혹을 받을까 두려워서였습니다.

<--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엘로이즈가 수녀원에 들어가자, 쀨 베르는 불같이 분노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엘로이즈를 유혹하더니 이제 그녀를 수도원으로 내모는 아벨라르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쀨 베르는 사람들을 시켜 아벨라르가 잠든 사이에 그를 거세해 버립니다.
그러나 아벨라르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벨라르의 급진적인 신학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지만 그만큼 강력한 적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1121년 그가 42살 되던 해, 로마 교황청은 아벨라르의 책에 분서형을 내리고 그를 브르타뉴의 생메다르 수도원에 감금시킵니다. 그 후 그에 대한 금고형은 풀렸지만, 카톨릭 수사가 된 그는 카톨릭 수녀가 된 엘로이즈와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못다 한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를 보실려면--> The letters of Abelard and Heloise
엘로이즈가 수녀가 된 것은 신의 부름을 받아서도 자신이 원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수녀가 되었던 것은 아벨라르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로이즈는 그의 대한 사랑으로 수녀가 되었고 평생을 세상의 즐거움과 담을 쌓은 채, 수도원에서 보냈습니다. 총명했던 그녀는 수도원에서도 능력을 발휘해, 수녀원장의 지위에 오르지만, 그녀는 자신의 편지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아벨라르였다고 고백합니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와의 사랑을 신에 대한 죄로 여기고 그것을 참회했지만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와의 사랑이 결코 죄가 아니며 자신은 그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당연하게 그녀의 아벨라르에 대한 사랑은 교회법을 가뿐히 뛰어넘고 교리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42년 아벨라르가 죽자 엘로이즈는 그 시체를 인수하여 매장하고 그 무덤을 22년간 지키다가 63세에 죽습니다. 그후 아벨라르의 유해는 1817년 파라클레투스 수녀원에 있는 엘로이즈 수녀의 무덤에 합장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죽은 후,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갔던 13통의 편지를 모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서한'이 발간되었습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무덤
ㅠㅠ..
가을도 다가오고... 이번 구월 독서회를 로멘틱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 이름을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만남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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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문화> 제3장 문화의 그리스도 1. 영지주의와 아벨라르에 있어서 문화와의 조화 - 에 나오는 Abelard라는 이름을 어디서 줏어들어본 듯 하여 이곳저곳 뒤적여본 결과... 아~! 유럽의 로맨스소설의 원조와 원형이 되는 실화 -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업적에 관심이 계시면 여기 - Stanford 대학교의 철학사전 - 보셔요.
자 이제 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알아봅시다. 다음은 퍼온 글입니다.
엘로이즈(Heloise)는 12세기에 살았던 중세 신학자 아벨라르(Abelard)가 사랑했던 여자의 이름입니다. 아벨라르(1079-1142)는 노트르담 성당 학교의 교수로서 그 시대에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문필과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지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참사회원이었던 쀨 베르도 아벨라르의 학식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에게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엘로이즈(1098-1164)라는 총명하고 예쁜 조카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옐로이즈는 라틴어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철학, 문학에도 뛰어나 어느 대학교수보다 낫다는 평을 듣고 있던 재원이었습니다. 쀨 베르에게 엘로이즈는 그야말로 자랑거리였지요. 쀨 베르는 엘로이즈를 휼륭하게 가르쳐 좋은 가문에 시집보낼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쀨 베르는 당대 석학이었던 아벨라르에게 자신의 영리한 조카의 가정교사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때 아벨라르의 나이는 38살이었고 엘로이즈의 나이는 17세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낭만적인 연애소설의 패턴입니다. 보통 연애 소설에서는, 지위는 낮지만 자질이 뛰어난 남자가 어리지만 신분이 높은 여인의 가정교사가 됩니다.
쀨 베르는 아벨라르에게 젊은 처녀를 맡기면서도 아벨라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벨라르는 금욕주의자로 소문났고 그와 마찬가지로 노트르담 대성당 참사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사회원은 명예와 출세가 약속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참사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독신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쀨 베르는 야심만만한 아벨라르가 연애문제를 일으켜 자신의 출세길을 망치지 않으리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쀨 베르의 계산은 어이없게 빗나가고 말지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사이에는 사랑이 피어났고 이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를 뛰어 넘어 연인 사이로 발전합니다. 얼마 후 쀨 베르도 아벨라르오 엘로이즈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그때는 엘로이즈가 임신한 뒤였습니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고향에 가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후 이 아들은 아벨라르의 누이가 기르게 됩니다.
아벨라르는 쀨 베르에게 엘로이즈와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그 대신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 결혼을 비밀에 붙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엘로이즈는 그 결혼을 반대합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는 아내 보다 영원한 연인으로 남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몇 명의 친지들 앞에서 비밀 결혼을 치룹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부부가 되었으나 같이 살지 못하고 가끔씩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러자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수녀원에 들어갈 것을 권유합니다. 그 때 그가 둘러댄 이유는 쀨 베르의 감시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지금 막 피어난 아름다운 처녀 엘로이즈가 다른 남자들의 유혹을 받을까 두려워서였습니다.

<--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엘로이즈가 수녀원에 들어가자, 쀨 베르는 불같이 분노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엘로이즈를 유혹하더니 이제 그녀를 수도원으로 내모는 아벨라르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쀨 베르는 사람들을 시켜 아벨라르가 잠든 사이에 그를 거세해 버립니다.
그러나 아벨라르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벨라르의 급진적인 신학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지만 그만큼 강력한 적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1121년 그가 42살 되던 해, 로마 교황청은 아벨라르의 책에 분서형을 내리고 그를 브르타뉴의 생메다르 수도원에 감금시킵니다. 그 후 그에 대한 금고형은 풀렸지만, 카톨릭 수사가 된 그는 카톨릭 수녀가 된 엘로이즈와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못다 한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를 보실려면--> The letters of Abelard and Heloise
엘로이즈가 수녀가 된 것은 신의 부름을 받아서도 자신이 원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수녀가 되었던 것은 아벨라르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로이즈는 그의 대한 사랑으로 수녀가 되었고 평생을 세상의 즐거움과 담을 쌓은 채, 수도원에서 보냈습니다. 총명했던 그녀는 수도원에서도 능력을 발휘해, 수녀원장의 지위에 오르지만, 그녀는 자신의 편지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아벨라르였다고 고백합니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와의 사랑을 신에 대한 죄로 여기고 그것을 참회했지만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와의 사랑이 결코 죄가 아니며 자신은 그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당연하게 그녀의 아벨라르에 대한 사랑은 교회법을 가뿐히 뛰어넘고 교리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42년 아벨라르가 죽자 엘로이즈는 그 시체를 인수하여 매장하고 그 무덤을 22년간 지키다가 63세에 죽습니다. 그후 아벨라르의 유해는 1817년 파라클레투스 수녀원에 있는 엘로이즈 수녀의 무덤에 합장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죽은 후,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갔던 13통의 편지를 모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서한'이 발간되었습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무덤
ㅠㅠ..
가을도 다가오고... 이번 구월 독서회를 로멘틱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 이름을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만남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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