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February 19, 2010

로마서 강해 - 기초 다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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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 1권 (롬3:20-4:25) 1장을 새로 번역하여 보았습니다. 로마서 전체에 대한 좋은 입문서입니다.


1. 기초 다지기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1)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2) 뿐입니다. (롬3:19,20 새번역)


바울이 로마에 사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로마서는 성서의 어떤 책이나 단락보다도 기독교 교회의 역사와 그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위대한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이 회심하게된 것도 로마서 13장의 마지막 몇 구절들을 읽으면서였습니다. 어거스틴은 5세기 이래 교회의 역사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인물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자신을 얽어매던 속박과 굴레에서 해방되어 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된 것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친 로마서 1장 17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진리의 조명을 받으면서부터였습니다. 루터가 해석한 바로 그 교리는 ‘베드포드의 불후의 땜장이’ 존 번연(John Bunyan)을 회심케 했고, 그 결과 번연은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과 <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마찬 가지로 1738년 5월 24일 밤에,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게’된 것도 한 남자가 읽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들으면서였습니다. 그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서신서의 내용을 면밀히 연구해야 하는 이유를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1장 16,17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도에 대한 기쁜 소식(3)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서(4) 전체의 대 주제이기도 하지만, 로마서에서 만큼 분명하게 진술되고 완벽한 방식으로 논의된 곳은 없습니다. 바로 이곳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5)이라는 결정적이고도 필수불가결한 교리가, 성경 전체를 통털어서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다루어져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3장 19절부터 5장 11절까지 자세히 설명하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이 우리가 알아보게 될 주제입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상세한 주해(註解)를 해나감에 따라 그것에 대한 해답이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만, 우선 간단한 정의(定義)로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이 교리는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과 화목(和睦 롬5:10)하는 방도(方道)를 하나님께서 고안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그가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된 주님이시요 구세주이신 그의 아들 안에서 당신께서 행하신 일을 기초로 해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시며 면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서, 신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서”(6) 하나님의 목전에서(7) 올바르고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가(轉嫁)”(8)되어 “우리 앞으로 달아놓여진”(9)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졌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허용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19절에서 표현한 바대로, 우리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의로운 백성으로 “판정”(10)을 받았습니다.

자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의 핵심 교리입니다. 이제는 이것이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나온 것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교리는 사람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고, 인간의 어떤 철학과도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성경 안에서 ‘발견하는’ 그 무엇입니다. 기독교 내의 어떤 분파들이 – 적당한 때 그 이름들을 밝히겠지만 – 가르치는 교리들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분명히 강조해야 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교리들은 전통[전승(傳乘)]으로부터 유도되었거나,(11) 그들에게만 주어진 추가적인 계시로부터 나왔다고 말합니다.(12)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인 우리의 입장은 가르침과 교리들을 하나하나 모두 말씀으로 테스트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가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나온 것임을 보여야 하는 필수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당장 야기되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습니다. 만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단지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 그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교리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의 위치가 바로 그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의해 인도함을 받거나 성경에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고, 인간의 사고나 사상, 즉 철학의 가르침에 지배를 받습니다. 요즘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입장을 취하며,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의 교회라 불리는 곳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는 궁극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이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인간의 사상인 철학이지 계시된 (말씀인) 성경이 아닙니다.

또 다른 반대 의견을 다루어 봅시다. 이 ‘이신칭의’의 교리가 단지 전형적 바리새인인 바울의 교리라고 하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로마서는 전형적인 랍비류의(13)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요즘은 이러한 반대가 그렇게 많이 들리지 않습니다만, 20세기 초반에는 ‘역사적 예수’(14)의가르침을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신학에 상반적으로 대조시키는 아이디어가 유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단순한 ‘예수의 복음’과 ‘사랑의 복음’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무적이고 법률적인 유대인 바울이 등장해서 – 그가 법률적인 사고를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만 –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이 복음에 그의 법률적인 사상과 견해를 슬그머니 써 넣은 것은 엄청난 재난이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기독교 메세지의 본질를 변조하여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논란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이 칭의에 관한 메시지가 성경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발견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도 자신이 아주 명료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3:21)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은 이신칭의의 교리가 구약 전체에 걸쳐 예시되었고 암시와 싹으로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교리는 실로 성서 전체의 줄기찬 메세지로서, 구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속에서 만개(滿開)되어 분명히 드러났다.” 또는 “신약은 구약 속에 잠재(潛在)해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명백(明白)하게 나타났다.” 이는 물론 위의 사실에 대한 간단명료한 진술입니다.

동일한 관점이 우리 주님 자신의 가르침에서도 발견됩니다. 주님이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 주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이러합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비유(눅18:9-14)가 주는 주님의 가르침은, 다른 많은 비유들과 가르침 속에서도 그랬듯이,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당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이점은 특히 더 분명해집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그러므로 이 교리가 랍비적이고 법률적인 유대인인 바울에게서만 나오는 특이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한가한 공상에 불과합니다. 그 공상은 사실들의 테스트에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대하게 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그리고 계시록 등 성경의 많은 곳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공통된 메세지입니다. 서문에서 이유를 밝혔듯이(15) 로마서 1장16절에서 시작하여 3장 20절에서 끝나는 위대한 진술들을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그 논지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거기서 사도는 3장 21절의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고백과 뒤따라 나오는 영광스러운 일들의 기초를 다지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의 논증(論證)을 요약해 봅시다. 그는 대담하고 강한 어조로 단언하며 시작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물론 그 말은 그가 복음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사도는 말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인 표현법을 빌리는 곡언법(曲言法 litotes)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법은 강조점을 부각시키는 데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특별히 아주 영국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합니다.”라는 말은 “나는 그 안에서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그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나는 생각만 해도 오싹해질 정도로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든 노예에게든 그 누구에게든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롬1:14). 그는 왜 그렇게 느꼈습니까?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6,17)

이것이 바울서신 전체의 주제이자, 특히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교리를 길고 상세하게 설명한 본 단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자랑스럽습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확실하며 실패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바울의 표현기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접근방식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바울서신의 구조에는 변하지 않는 매력이 있습니다. 저는 그의 서신을 읽을 때마다 항상 음악 작품, 예를 들어 교향악을 생각해 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보통 교향악의 서두에는 서곡이 있는데, 여기에 시도동기(示導動機)(16)들이 암시적으로 던져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다음에 작곡자는 그것들을 하나 하나 풀며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 끝낸 다음에는 전체를 하나의 장엄한 대단원과 클라이맥스 안으로 응집시킵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이 두 구절에서 그가 왜 그렇게 복음이 자랑스러우며 로마에 가서 전도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말함으로써 중심 테마에 대한 실마리를 던집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른 철학 이론을 제시하고자 로마에 가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또한 유토피아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가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메세지는 사람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포괄적인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더구나, 바로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하고 안전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즉시 이런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럼 그런 것이 도대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바로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1장18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1장18절에서부터 3장 20절까지 다루려고 하는 주제를 대하게 됩니다. 바울은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두겹으로 된(17) 문제가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직 이 복음만이 인간의 그 두겹으로 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이 그를 그렇게 자랑스럽고 전율케 한다고 말합니다. 그 두겹의 한 쪽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쪽은, “인간이 실재로 불경건하고 불의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가 이 두겹의 문제를 제시한 순서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고 위반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고의적으로 자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불경건’을 먼저 놓은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불의’는 단지 불경건에 따라오는 것일 뿐이라는 그의 생각에 주목하십시오. 그에게 있어 크고 중요한 것은 바로 ‘불경건’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관점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교회 내에서의 현대적 접근방식이, 물론 세상에서도 그렇지만, 진짜 문제는 불의(不義)함이며 오직 그것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불경건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중차대한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특히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가장 큰 필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문제이며, 이것이 교회가 담당해야할 과업이라고 합니다. 세계는 인종 문제, 이념 문제, 정치 문제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나누어져 있습니다. 세계는 여러 장막, 즉 철의 장막, 죽의 장막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인간 사이의 화해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교회가 담당해야 할 위대한 과업이 바로 이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그들은 시작하며 거기서 끝납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가장 큰 필요는(18) ‘자비로운 이웃’을 발견하는 것이며,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바로 그것이라고 요약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질병과 연약함을 치료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죄를 치료받아야할 필요가 있는 아픔, 즉 질병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인간에 관한,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가 첫째로 놓았던 불경건,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태도의 본질입니다. 저는 한 두해 전 이에 관한 주목할 만한 실례를 접했습니다.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우(Glasgow)시에서 종교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종교회의를 개최할 때마다 늘 그렇듯이,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개회식에 시장이 참석하도록 초청되었습니다. 고위 인사들을, 그들이 크리스챤이든 아니든, 항상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례대로 글라스고우의 시장은 회의에서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는 전형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참으로 학식있는 신학자들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나는 공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며, 당신들의 신학이나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나는 신학에는 흥미도 없으며, 당신들이 신학을 하느라고 시간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고는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알고 싶어하는 바는 어떻게 하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로부터 바로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위대한 신학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싶고, 또 보통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바는 어떻게 하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구원에 관한 교리 전체에 대한 완전한 무지(19)를 드러냈습니다. 루터가 ‘은혜로운 하나님’이라고 했지 ‘은혜로운 이웃’이라고 하지 않은 바와 같이, 인간의 첫번째 필요는 하나님을 알며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필요이자 요청입니다. 불경건은 불의보다 우선합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불경건의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비극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은 병의 증상들만을 약으로 처방하고 있으며, 질병 자체는 잊고 있습니다. 특별히 나타난 증상들만을 취급할 뿐이지, 문제의 근본적인 뿌리 자체는 다루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는 것입니다. 모든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활동들을 하면서 진짜 본질적인 문제는 회피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일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물음에,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다음 ‘둘째는’ (글라스고우의 시장이 첫 번째로 놓았던) “네 이웃을 네 자신과(20)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막12:28-31).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결코 ‘그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그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한, 당신은 당신 자신처럼 당신의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이유로 미루어 ‘불경건’이라는 사실에 대한 세상의 철저한 무관심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기만을 초래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출발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일로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입니다. 그곳이 출발점입니다. 이점을 자주 진술한다고 해서 지나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복음 전도는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외에는 어떤 다른 의미나 뜻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께 나오라고’ 초대할 때, 예수를 친구로서나 몸을 치료하는 자로서나 약간의 평안을 주는 자 등으로 소개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구원을 필요로 합니까? 정답은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내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것이 이미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나타난 바 된 사실로 인해서 바울은 그가 믿게된 그 복음을 기뻐하며, 또한 그 복음을 선포할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이 교리가 혐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모든 개념을 마음으로부터 싫어합니다. 그는 규율을 싫어하고 법률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요즘 세상이 이모양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현대인은 이러한 기본적인 원리로부터 떠났으며, 그래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을 그는 거부합니다.

현대인은 공의(公義)와 의로움, 그리고 심판과 같은 사상을 거부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정과 학교와 대학과 거리, 그리고 자기가 속한 여러 사회 영역이 무법천지임을 보고 놀랍니다. 그것은 현대인이 전반적 법률 개념을 유기(遺棄)하고 미워하며 혐오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이 점을 설파하는 것이며, 바로 우리의 메세지에서 핵심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진노’라고 해서 변덕스럽거나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뜻한다든지, 제멋대로 성을 내거나 자제력을 상실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혐오를 뜻합니다.

이 점은 성경의 어느 곳에나 나타나 있습니다. 십계명의 의미가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십계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는 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21)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해야 할 이유는 죄가 우리를 해하기 때문이거나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거룩해야 할 이유는, 죄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 않고는 못 배기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박국이 말한 대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22)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23)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도 거룩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교회가 – 때로는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교회 까지도 – 잘못된 길로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잊혀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 상황의 비극입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기도하며, ‘예수’로 시작하여 ‘예수’로 끝납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 아버지, 즉 우리와 관련된 거룩한 하나님이요, 온전한 의와 절대적 거룩함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나타내셨던 하나님, 그 아버지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구약 전체를 통해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위대한 메세지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복되신 주님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도 동일한 강조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24)하고 물었을 때, 그래 좋다.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가르쳐 주리라.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누군가 하나님을 ‘아빠(Dad)’ 또는 ‘사랑하는 아빠(Dear Dad)’로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는 모든 아버지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요즘 슬며시 침투해 유행하는 듯한 가볍고 친숙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우리 주님이 직접 가르치신 것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그와 다른 타자(他者)(25)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인간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가르쳐 주신 기도 방법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인 그 자신이 –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을 부르신 방식은 “거룩하신 아버지”(26)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성육신(成肉身)한 사랑의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참 표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이런 방도와 태도로써 하나님을 대하셨습니다.

사도의 전체적인 입장은 이러합니다. 그는 그가 전파한 이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복음만이 유일하게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를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복음이 이것을 할 수 없으면 복음이 아니며, 그 속에는 기쁜 소식을 담은 메세지도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일차적인 목적이며 의도입니다. 복음의 목적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체적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자리에 놓아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이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구약에서 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 나타났습니다. 여기 완전하게 창조된 사람이 있고, 똑같이 완전한 배필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의 최고 절정이었으며, 하나님은 그 남자와 그 여자를 낙원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그에게 반역하였으며, 유혹하는 자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죄에 대한 진노를 품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내셨으며, 그들이 죄의 대가로 받을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놀랍게 표명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기에서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계속하여 나타납니다. 구약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총애하시는 자’로 보이는 듯하거나 또는 실제로 좋아하신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범죄하였을 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징계하셨는가를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모세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도 모세의 불순종함으로 인해 그는 끝내 약속된 땅에 들어갈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명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2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점을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변명도 할 여지가 없습니다. 몰랐다고 핑계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인간이 죄를 범하면 그는 반드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며 응분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현 시점에서 다드(C.H. Dodd) 교수와 같은 학자가 자신의 로마서 주석에서(28) 이 점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합니다. 다드 교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진정한 의미가, 죄는 항상 스스로 자기 징계를 동반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당신의 손가락을 불 속에 집어 넣으면 당신은 고통을 느낄 것이고 또한 당신 자신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다드 교수는 죄의 즉각적인 결과에 덧붙여서, 하나님께서 ‘닥쳐올 징벌’(29)로써 징계할 것을 할당해 놓으셨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미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이며, 그것은 표명(表明)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로마서의 다음 부분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그 방도(方道)에 대하여 한가지 특별한 진술을 합니다. 그것은 1장 24절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타락한](30)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4-28) 그러고나서 사도는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그 가공할 죄목들을 열거합니다.(31)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가를 조심스럽게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는 그 가공할 죄목들이 바로 인간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이자 계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고대의 역사에 불과할까요? 아닙니다. 현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 현대사회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실감합니까? 사람들이 흔히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네들은 20세기 두 차례의 가공할 세계 대전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오늘날 부도덕과 악덕이 얼마나 만연하고 있습니까? 또한 성적 타락과 끔찍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습니까? 20세기와 오늘날의 생활상에 대한 설명은, 상실한 심령대로 인간을 내버려 두신 하나님의 진노의 또 다른 양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는 역사 속에서 이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의 세대 이전에도 그랬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에 대한 참된 관점을 취했을 때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법을 반대하고, 하나님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호소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예언자들(messengers)을 보내어 그들을 억제하려고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여전히 그들의 악한 길을 고수하고 반역을 계속하면,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 자기들 스스로 맘대로 하도록 간섭치 않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 좋다. 만일 너희가 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장담한다면 그렇게 해 보아라. 네가 어떻게 사는가 보자.”하고 사실상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세상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설명은 단순합니다. 지난 백년 이상 영리하고 고도의 지적 교양을 갖춘 인류는 하나님을 등져 왔는데, 이는 ‘불경건’의 죄목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좁은 소견을 따라 그들 나름의 한 신(神)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불경건의 죄를 지었고, 불의가 자동적으로 뒤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런 상태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세상 형편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간섭을 접으시고 인간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성서적인 가르침은, 인간이 죄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어떤 한계를(32) 설정하고 그것을 금지시키셨습니다.(33) 만일 하나님께서 통치체제나 다른 제도로써 죄를 억제시키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오래 전에 곪아 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에 관한 금지 명령을 내려 놓으시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주기적으로, 죄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표명하시려고, 당신께서 그 모든 죄를 미워하고 혐오한다는 것을 나타내시려고, 당신의 제지(制止)를 철회하시고 인간을 그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당신은 그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는 교리를 소개하는 사도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시는데, 그가 벽에다 자신의 머리를 부딪히게 하여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겸손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위대한 주장입니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제가 이미 강조하였지만,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불경건’과 ‘불의’의 순서, 즉 불경건이 불의보다 우선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망각하지 맙시다. 소요리 문답(Shorter Catechism) 제1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좋아합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금 바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조물인 인간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을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조물주보다 더”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실한 마음대로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그 원래적(原來的) 질병(34)으로부터 나오는 증상에 불과합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이 문제를 자세하게 풀어가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방인에 관한 모든 것, 즉 그들의 실패와 비참한 몰락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궁극적으로 유죄 판결이 내렸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물론 이방인 모두가 이 모든 죄에 대해 유죄는 아닙니다. 이방인 가운데는 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그리스 철학자들은 삶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했고, 가르침을 통해 인간성을 고양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런 일에까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건 아니겠지요?”라고 묻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 목적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순종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닌 이상,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로마서 2장 4절에서 이런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을 멸시하느뇨?” 그 사람이 얼마나 도덕적이고 이상적이며 자비심이 많은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죄악과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의미로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의 도덕성은 하나님의 고려 대상에 들지 못하는 무용지물(無用之物)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도록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데 사용해야 할 것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데 오용(誤用)한 것입니다. 이런 상세한 논쟁을 계속할 필요는 없지만, 1장에서 이미 사도는 자연(自然)에 ‘분명히 보여 알려진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20절)이 인간을 하나님께로 되돌아오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흔적과 자국을 자연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1:20)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을 발견하든지, 얼마나 많은 진보를 하든지, 또 아무리 사회복지가 향상되고 불법과 부정이 줄어들어도, 그 모든 것이 그를 회개케 하여 하나님을 떠난 그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백케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그렇게 언급하고 나서 이제 유대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이것이 로마서 2장의 주요 주제입니다. 어쨋든 유대인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그것을 알았는데, 그의 비극은 자신의 특별한 위치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데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사의 전갈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명시적고 외형적인 형태의 율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기에 더해서 유대인은 할례의 표(標)를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문제는 율법과 할례가 자기들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준다고 생각한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은 완전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2장 25-29절에서 그들에게 그런 생각이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자면,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35)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고 나서 아주 명쾌하게,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하며 그의 주된 사상 가운데 하나를 진술합니다.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35)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바울은 이런 식으로 할례에 의존하는 유대인의 모든 사례를 뒤엎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자기가 영국이나 미국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리스도인이고, 일본이나 인도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교도라고 생각하는 모든 견해를 뒤엎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할례에 대한 논증에 근거하여 뒤엎어졌습니다. “나의 부모가 그리스도인이었으니 나도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적이나 인간적 공동체에 대한 모든 의존은 이 할례에 관한 논증에 의하여 완전히 배제됩니다.

그러면 율법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바울은 율법도 논합니다. 결정적인 진술은 2장 13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바울은 로마서 10장 5절에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옵니다. “모세는 율법에 근거한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36)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37)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만일 네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율법의 조항들을 행하는 자는 그것들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거나, 듣거나, 익히 알고 있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대인은 그러한 허울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율법이 주어지지 않아서 율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은 무법(無法)하고 개들이며, 하나님이 없고 언약과는 무관해서 아무 것도 아니며 소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가졌으며 율법과 친숙해 있다.” 유대인들은 그것이 자기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게 아니라고 그들에게 증명해 보입니다. 2장 17절에서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 줍니다. 또한 오늘날 자신의 도덕성에 의지하는 모든 비기독교인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대변(代辯)할 때 말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보혈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며 조롱합니다. 왜냐구요?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선을 행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착하고 고상한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들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질문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38)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39)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저는 이렇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특히 그들의 종교적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자신도 회심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율법에 대한 전문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들이 그 율법에 대해 무지하다는(19) 데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여기 몇가지 예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자기가 속한 도(都)나 지방의 법률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법률을 위반해서 법정에 서게 되면, 법률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벌을 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하며 안다는 것에 의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준행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은 율법 조문의 대부분, 즉 주요 부분을 지키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관점을 가진 자들을 향해 지적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율법의 99%를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만일 1%를 지키지 못했다면 당신은 전 율법을 어긴 것이며, 또한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율법 조문에는 전문가이고 정확하지만 성령을 따르는 데는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35)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셨던 내용입니다. 자부심 많은 바리새인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겠지요. “저는 한번도 살인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잠깐!” 그 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제시한 질문들에 대한 실제적 주해(註解)이기도 합니다. “네가 결코 살인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나는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유없이(40) 자기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 아래 놓이게 되고,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라가’(41)라고 부르는 자는 공회에 서게 되고, 누구든지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42) 만일 당신이 당신의 형제를 얼간이라고 욕한다면 당신은 마음에 그 형제를 살인한 것이고, 율법의 판단으로는(43)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주님은 간통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간통과 같은 특정한 혐의에 대해 무고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기에도 동일한 탐조등을 비추며 말씀하십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44) 바리새인은 “나는 간음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 조문과 드러난 행동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45)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라고 바울이 호응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46) 율법 조문과 성령의 차이가(35)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성령 안에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간통죄를 범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난제는 바울이 여기서 보여주는 바로 이 점에서 발생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나중에 지적하지만, 또 다른 가장 중요한 주안점은 ‘탐심(貪心)’이라는 가공할 문제입니다. 탐심은 7장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바울이나 바리새인들은 그때까지 탐심의 의미를 깨달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유대인의 비극은 그가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자기는 무고(無辜)하다고 생각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주셨듯이, 그리고 바울이 깨닫게 되었듯이, 이런 류의 영역에서는 탐심이란 실제로 범하는 것만큼 고약하고 괘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탐심의) 욕정은 행위만큼이나 저주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의 참된 의미를 결코 깨달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율법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묻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러면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아무런 득이 없고 할례도 전혀 유익(47)이 없다는 말인가요?” 바울은 여기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다.”(48) 유대인은 특별한 위치에 놓여 있었고, 그러한 사실로부터 유익을 얻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방인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명확히 쓰여진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이 2장 14,15절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명백히 쓰여진 율법을 받지 못하였지만, 이 율법은 인간인 그들의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논거(論據)는 다음과 같습니다. 온 인류는 하나님의 법을 인식(認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모든 인류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유리한 점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외형적으로 주셨으며, 금상첨화격으로 그것을 명확한 글로써 기록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큰 잇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잇점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3장 20절까지의 나머지 부분은, 인간의 본래적(本來的) 타락(49)으로 인해서 그 잇점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음을 증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3장 19, 20절의 놀라운 결론과 요약에 도달했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이라는 교리의 핵심되는 서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서론이 도입된다는 면에서 이 구절은 다른 어떤 구절 보다 중요합니다.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1)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2)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논증 전체의 위대한 요약입니다. 바울은 1장 16절에서 시작한 말을 여기에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왜냐구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그는 복음이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고 말함으로써 시작해서, 여기에서(50) “온 세상”이라는 말로 결말을 맺습니다. 그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을 내내 주장해 왔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는, 이방인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고, 유대인에게는 분명하게 쓰여져서 주어졌다는 사실뿐입니다. 이 차이는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크고 중요한 차이이지만, 이것이 궁극적인 차이를 만들지는 전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전부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지식을 뽐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율법이 너에게 실제로 말하는 것을 네가 깨달을 때, 그 결과가 너의 모든 입을 막게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당신은 침묵하게 됩니다. 침묵하게 되지 않는 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비그리스도인의 문제는 그가 계속 떠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몰라. 어쨋든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지.” 그는 여전히 지껄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가 아닌가 보면 됩니다. 저는 복음의 이런 솔직성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입을 재갈물려서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 쉬지 않고 떠들며, 하나님을 비평하며, 하나님이 이것을 해야하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왜 하나님은 이러저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라고 질문합니다. 당신이 입을 다물고, 말하기를 중단하며, 말문이 막혀서 아무 할 말이 없어지기 전에는, 당신은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주장을 내걸고 당신의 모든 의를 내보이십시오. 그러나 율법이 말을 하면 그 모든 것은 시들어져 사라져 버리고, ‘더러운 옷’(51)과 ‘배설물’(52)이 되어,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나중에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3) 스스로 옳다는 당신 안의 바리새인, 속죄(Atonement)가 필요하지 않다는 현대적 도덕인(道德人)은 앞으로 나와서, 당신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을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율법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느뇨?” 당신은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영광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come short)”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나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사실들을 행위의 관점을 위주로 해서 평가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관계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당신의 처지라는 관점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든 문제는 율법의 기능과 목적에 대한 착오 때문에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까? 제가 말하는 율법은 우리들 마음에 쓰여진 법과 모세를 통해 주어진 명시적인 율법을 뜻합니다. 첫번째 답은,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그릇된 가정(假定)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잘못된 가정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며 “이제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율법을 지키는 것 뿐이고, 그러면 너희는 내 앞에서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런 연유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 안에 있는 인간이 그것을 지키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8장 3,4절에서 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지 말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완벽하게 진술된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율법을 주신게 결코 아닙니다.

또 다른 오류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유행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구원 문제를 두고 우선적으로 율법을 시도해 보셨지만 율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음을 발견하셨고, 그래서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으로 십자가에 관한 전체 개념을 도입하셨다는 것입니다. 뒷궁리 끝에 나온 것이 십자가라니! 얼마나 비성경적인 착상입니까! 이것이 성서를 여러 조각들과 처방들로 나누어서, 성서 모든 부분들의 본질적 통일성을 파악하는 데는 실패한 가르침의 전형적 특성입니다.

“아닙니다” 사도는 여기서 왜 율법이 주어졌나를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롬3:20 새번역)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2)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의 가공할 성격을 인식하게 하려 함입니다.

사도는 이 점을 여러 곳에서 다시 언급합니다. 가장 명백한 진술들 중 하나는 5장 20절 입니다. “율법이 끼어 들어온 것은”(53) – 이것이 사도가 쓴 바로 그 문구입니다. 왜 율법이 들어왔습니까?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왔습니다. 율법은 범죄에 대항하려고 오지 않았고 범죄를 ‘풍부하게’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더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라고 합니다. 또 7장 7절에서 다시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사도는 7장 5절부터 율법의 주된 효용(效用)이 죄를 더욱 많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 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the motions of sin; 이는 ‘율법에 의해서 활성화 된’(54)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바울은 말하기를, 죄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 많이 짓게 하는 그런 비참한 상태에 우리가 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7장 7절에서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7:8,9) 다시 말해서 율법의 온 기능은 죄를 정의(定義)하며 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있으나 그것이 충분히 분명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명시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정의(定義)하시고(55), 율법에다 밑줄 쳐서 분명히 강조하시고, 기록된 법으로서 명백하게 나타내셔서 유대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에는 또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위대한 진술 중의 하나인데, 7장 13절에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것이 율법이 수행하는 바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확히 지적하고, 정의하고, 죄가 숨어있던 곳에서 끄집어 내어 그 엄청난 죄된 성질을 들추어내기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사람 안에 숨겨진 죄가 어느 정도 깊은가 하면, 인간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바로 그 하나님의 법이 그 사람을 더 나쁘게 만들어 그를 죄악으로 몰아넣어 버리는 죽음의 도구로 전락하게 할 정도로 깊습니다. 율법 자체가 수행하는 그 작용 만큼 죄의 엄청난 죄성(罪性)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한번 율법의 참 뜻을 이해하고 나면, 그는 자기의 본성이 더럽고(56) 부끄러움(57)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악한 불신앙의 마음’, 탐욕하는 마음, 더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가졌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부끄럽고 죄로 가득찼노라!” 율법 이외에 어떤 것도 인간에게 이것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주어지지 않았고, 다만 구세주에게로 데려다 주는 ‘몽학선생’(58)으로서 주어졌습니다. 율법의 전체 목적과 의도는 인간이 결코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가 율법을 한번 이해해서 율법의 영적인 의미와 내용을 알게 되면, 그는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아직 미완성입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이 가르치는 것이 단지 술 먹지 말고, 담배 피우지 말고, 간통하지 말고, 이것저것을 하지 말라는 것만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율법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20) 사랑하라”(막12:30,31) 입니다. 어느 누가 그렇게 행해서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말하는 바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의 철저한 무능력과 완전한 절망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고 해방하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고 영원토록 보호하는, 오직 유일하신[獨生하신] 그분이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이렇게 선포하는 복음을 바울은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1. 로이드 존스가 사용한 KJV에는 “and all the world may become guilty before God.”으로 쓰였다.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에서는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로 쓰였고, <새번역>에는 “유죄로 드러내시려는 것”으로 하였다.
2. <한글>과 <개정>에서는 “죄를 깨달음”, NRSV에서는 “for through the law comes the knowledge of sin”, NIV에서는 “we become conscious of sin”, 로이드 존스가 사용하는 KJV에서는 “Therefore by the deeds of the law there shall no flesh be justified in his sight: for by the law [is] the knowledge of sin.”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is]는 KJV의 번역자가 원문에 대응되는 단어나 구가 없지만 해석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써 넣은 것이다. 보통 이탤릭체로 쓰여있다.
3. 복음 the good news; the gospel; ευαγγελιον (evangelion)
4. Bible 성서; Scripture 성경
5. ‘Justification by faith’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으로서 動詞的으로 번역하였고, 특히 by를 ‘말미암는’으로 옮겼다. 로마서 강해 한글판 제7권 20-23장에서 저자가 로마서 1장 16, 17절을 강해한 내용의 뜻을 존중하였고, 특히 제1권 9장에 나온 ‘말미암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따랐다. 1권 4장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우리말의 고어체를 사용해서 원문이 갖는 심오한 뜻을 독자가 스스로 탐구할 여지를 남기고 싶었다.

동사 δικαιοω는 ‘to make righteous’를 뜻한다 (IB, p394). 마지막의 σ가 형용사형으로부터 제거되었다. 바울이 말하는 'Justification'는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는 역사이고, 우리를 죄의 심판에서 변제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하나님이 "의로운 자"를 변호하는(vindicate) 행위를 하시는 것이지, 그들을 의로운 행위자 또는 성품의 소유자로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칭의'라고 할 때, ‘赦免 또는 放免(acquittal)’을 말하는 것이지 ‘實際로 義로움really righteous’을 뜻하지 않는다. 칭의는 새로운 性質[性品 character]이 주어짐을 뜻하지 않고, 우선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신분(status)을 받게됨을 뜻한다. 칭의는 그 사람을 하나님과 한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게 하는 법적인 절차이다.
6. 롬13:14; 욥29:14
7. in the sight of God 신12:28; 갈3:11 “하나님 앞에서”
8. Impute - to reckon or count 롬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시32:1 인용
9. put to our account 몬1:18 <새번역>
10. <새번역>에는 로이드 존스의 어휘 ‘constituted (καθιστημι)’가 잘 반영되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11. 교부들의 傳乘;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 해석
12. 예를 들자면, 몰몬교의 교주 Joseph Smith가 받았다는 계시가 이에 해당한다.
13. Rabbi - 유대인 율법학자
14. 가장 중요한 저서로는, Albert Schweitzer著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 (1906년 독일어 원저 출간) 참조.
15. 로이드 존스는 롬3:20절부터 첫 강해를 시작하는 이유를 이 책의 서문에서 밝혔다.
16. leitmotifs - 악곡의 중심 테마
17. Twofold - 단일한 대상이 하나 이상의 결정적으로 상이한 개념이나 성질을 갖음. "The office of a clergyman is twofold; public preaching and private influence"- R. W. Emerson; 수학과 물리학의 manifold 참조.
18. Need; 요청 postulat – 칸트의 용어로서, 신의 존재와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원을 이야기할 때 사용했다. 로이드 존스는 ‘필요’라는 뜻으로 격하시키면서 사용한 듯 하다.
19. Ignorant; 레4:2, 13, 22, 27; 레5:15, 18등에서 율법[토라;말씀]에 대한 몰이해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중요한 신학용어이다.
20. <한글>에서 ‘몸’이라고 번역된 yourself가 <개정>에서 올바로 고쳐졌다.
21. 레11:45
22. 합1:13
23. 요일1:5
24. 눅11:1
25. Other; 全的他者 das numinose - Rudolf Otto가 The Idea of the Holly에서 말한 것을 연상시킨다.
26. 요17:11에서 “Holy Father”로서 한 번 사용되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7. 겔18:4
28. C.H. Dodd,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MNTC; 8th ed. 1941)
29. 마3:7 <새번역>; <한글> <개정>의 “임박한 진노”는 미래 시제로 쓰여진 원문과 어감상 차이가 있다.
30. 타락한, reprobate mind <새번역, KJV>
31. 롬1:29-31에 열거된 죄악들을 지칭한다.
32. boundary; ‘에덴 동산’의 ‘동산 garden’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גּן gan은 ‘that is fenced; boundaries; hedge’라는 뜻이 있다.
33. 창2:16, 17
34. that original disease ‘원죄’를 암시하는 듯 하다.
35. the letter 율법 조문; 롬2:29 <한글>은 ‘의문(儀文)’으로 번역했으나 <개정>과 <새번역>에서는 ‘율법 조문’이라 옮겼다. the spirit은 각각 ‘신령’ <한글> ‘영’ <개정> ‘성령’ <새번역>이라 하였다.
36. 롬10:5上 <새번역>; <한글> <개정>은 문장이 혼합되어 있다. 저자는 KJV에서와 같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각각 인용하는데, 그 이유는 하반부가 레위기에서 인용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37. 레18:5
38. 사52:5 LXX(칠십인역)에서 인용되었다.; 겔36:22
39. 롬2:21-24
40. without a cause; KJV에만 들어있는 표현으로 한글 번역이나 영역판에 없다.
41. 유대인들의 욕설. 아람어로서 ‘얼간이’라는 뜻
42. 마5:22
43. in the sight of the Law; in the sight of God 하나님의 목전에, 하나님 앞에
44. 마5:27; 출20:14이나 신5:18에서 인용하였다.
45. 마5:28
46. 롬2:21,22
47. 유익 profit ωφελεω; 막8:36, 요6:63, 롬2:25, 고전13:3, 고전14:6, 히4:2, 히13:9 등에서 쓰이는 바와 같이, 흔히 통용되는 한자 ‘有益’의 뜻과는 다소 어감과 뜻이 다른 듯하다.
48. 롬3:2 They were committed the oracles of God.
49. innate depravity
50. 롬3:19
51. 사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52. dung 빌3:8
53. <새번역> came in by the side; 로이드 존스가 그리스어 원문 παρεισηλθεν을 풀이했다. ‘가입한’ <개역 한글>
54. energized by the Law
55. 定罪라는 용어는 ‘Condemn’에 해당함
56. Foulness ; 막9:25 the foul spirit ‘더러운 귀신’ <개정> ‘악한 귀신’ <새번역> 서로 다른 원문으로부터 번역된 듯 하다. 계18:2 foul spirit ‘더러운 영’
57. Vileness 수치스러움 ; 롬1:26 vile affection ‘부끄러운 욕심’; 빌3:21 vile body ‘낮은 몸’ <개정> ‘비천한 몸’ <새번역>; 약2:2 vile raiment ‘남루한 옷’
58. Schoolmaster; 갈3:24 ‘가정교사’<새번역>; Disciplinarian 어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해 심하게 벌하기도 하는 노예 신분의 가정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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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anuary 25, 2010

Lloyd-Jones 로마서 강해의 KJV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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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출판(2000년 초판 인쇄)한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는 매 장의 제목 밑에 해당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마존 등에서 시판되고 있는 영문 원서는 The Banner of Truth Trust에서 1985년에 초판이 발간된 것들입니다. 그 이전에는 Zondervan에서 출판되었나 본데, 1975년에 발간된 The Final Perseverance of the Saints (롬8:17~39 성도의 견인, 한글판 제6권에 해당)를 보면 매 장의 제목이 없고 해당되는 성경 구절만을 인용하였습니다.

이들 구절들은 흠정역(Authorized Version; KJV)에서 인용되었는데, 한글 번역판에는 <개역 한글> 성경을 번역문으로서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각 장의 서두에 붙은 KJV 인용문은 관례상, 또는 책 출판의 성격상 <개역 한글>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으나, 본문 내에서 로이드 존스가 직접 지적하는 KJV의 번역 오류– 그러니까 그리스어 원문을 영문으로 번역할 때 생긴 오류 –를 번역할 때에는, 그가 오류라고 지적한 KJV구절을 그 영문 자체로부터 뜻을 살려 번역해야 하고, 그가 옳다고 하는 번역을 <개역 한글>, <개역 개정> 또는 <새번역>을 통하여 인용하면 될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3:21)에서, 한글 번역판 로마서 강해 제1권 제3장 p62에는 KJV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해져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가 율법 외에 나타났다” (But now the righteousness of God without the law is manifested)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기록한 것은 사실상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But now without the law the righteousness of God is manifested)입니다. 그는 ‘율법 외에’ (without the law)를 ‘하나님의 의’보다 앞에 놓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절대적인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제 제시해 주신 의의 길은 율법과는 별도의 것이요 율법 밖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 외에’, ‘율법과 별도의’라는 말을 썼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가 율법 외에 나타났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이 두 한글 번역 문장에서 그 각각의 뜻하는 바가 차이가 있다고 이해되십니까? 로이드 존스는 여기서 그 둘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로이드 존스가 말하려는 바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원래 그리스어 원문(UBS 4th ed./Nestle-Aland 27th ed.)을 보면 Νυνι δε χωρις νομου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에서 apart from law에 해당하는 χωρις νομου가 but now에 해당하는 Νυνι δε 와 a righteousness of God에 해당하는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 사이에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영어는 한글과 달리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주로 형용사(구) 또는 부사(구)가 그 배치된 순서에 따라 수식하는 단어 또는 구에 의미를 가감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이지만 이 경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예를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 7권 로마서 1장 16, 17절에 대한 강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7권 제23장 맨 마지막에, 로이드 존스는 하박국2:4을 인용한 바울의 번역을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or a better translation altogether is this: ‘The righteous by faith, or the just by faith, shall live’. In other words, those who are righteous by faith shall live.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더 좋은 번역은 ‘믿음으로 의롭게된 자는 살리라’)
그리스어 원문 Ο δε δικαιοσ εκ πιστεωσ ζησεται 에서 by faith를 뜻하는 εκ πιστεωσ가 shall live를 뜻하는 ζησεται 앞에 놓여있습니다. 이경우 의미의 차이는 확연이 드러나고, 각자의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이와같이 영문에서 ‘율법 없는 하나님의 의’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the righteousness of God without the law’ 와는 달리, ‘without the law’를 ‘the righteousness of God’ 앞에 놓음으로써 'without the law'가 독립된 구로서 (혹은 문장 전체를 수식하는 좀 멀리 떨어진 구로서) 문장 전체의 의미에 기여해서, ‘율법과는 별도로’라는 의미를 부각시킵니다.

로이드 존스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두번째 요지는, 그 다음의 두페이지에 걸쳐서 그 ‘without the law’가 아닌 ‘apart from law’임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without the law’가 ‘하나님의 의’를 바로 수식함으로써 자칫 줄 수 있는 오해, 그러니까 ‘율법은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거나 ‘폐지’되어서 ‘쓸모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누차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교문서선교회의 한글판에서는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가 율법 외에 나타났다”고 KJV인용문을 번역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율법(이 필요)없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같이 번역해야 하며, 그 다음에 로이드존스가 권하는 영문 구절에 대해서 “그러나 이제 율법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라고 번역했어야 합니다.

한글판 번역의 오류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글 번역판의 "그는 ‘율법 외에’ (without the law)를…"에서부터의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He put ‘without the law’ before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he did that, of course, because he was anxious to emphasize that that is the big thing. He says this way of righteousness that God is now offering is something apart from the Law, without the Law. What does he mean by saying ‘without the law’, ‘apart from the law?’…

이것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절대적인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제 제시해 주신 의의 길은 율법과는 별도의 것이요 율법 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절대적인 문제”라고 번역한 영어 원문은 단순하게 “that is the big thing”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냥 “그것이(하나님의 의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라는 뜻이지 ‘우리의 것이 된다’든지 ‘절대적인’ 문제라는 것은 또 다른 말입니다. 오히려 그 다음에 나오는 ‘의의 길’을 풀어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길’이라 하는 것이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의 본 뜻을 잘 반영한다고 하겠습니다. ‘의의 길’이라 하면, 오히려 '성화'와 관련지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연상시키거나, 자칫 인간이 노력하는 올바른 행위를 암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의 ‘율법 밖’이란 말도 기왕이면 우리말 성서에 따라 ‘율법 외에’라고 하면 더 좋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KJV을 선호합니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 예가 제1권 제5장 ‘화목제물 Propitiation (KJV, NASV)’과 ‘속죄제물 Expiation; a sacrifice of atonement (NRSV, NIV)’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는 KJV의 부적절한 번역을 여러 곳에서 지적하는데, 이는 그의 강해가 주는 매력으로서, 깊은 묵상과 광범위한 연구에서 나온 그의 성실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사실과 진리 앞에서 양심있게 행동하는 참 신앙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KJV과 기타 다른 번역을 비교하며 취사선택을 하는데, 아마 희랍어 원문을 나름대로 대조한 듯 합니다. 그의 로마서 강해 제7권 (로마서 1장)에 있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 대한 강해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성경을 KJV로 보고 그것을 인용하지만, 상당부분에서 그 KJV 번역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오류로 지적된 KJV 부분은 그 인용된 영어 자체로부터 번역해야하고, 그가 옳다고 하는 번역을 우리 성경에서 쿠오트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말 성경은 KJV의 모본이 되는 희랍어 원문을 모본으로 삼은게 아니라, 그 보다 더 오래된 필사본을 모본으로 삼는 좀 더 현대적인 희랍어판을 근저로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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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13, 2009

하나님의 義에 나타난 믿음 - 롬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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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복음 ευαγγελιον (eu[v]angelion)은 old English로서 "good tidings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에 동사形으로 한번, 마가와 마태복음에는 13번 나오고 요한복음에서는 쓰여지지 않았다. 사도행전에 두번, 베드로전서와 계시록에 각각 한 번씩 나온다. 반면 바울의 서신에는 60여회 사용되었다.

ευαγγελιον은 신약시대의 그리스에서 지배자의 업적을 경축하는 것을 말하는데 (The Interpreter's Bible, vol.9 p.390)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업적을 선포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 한다.

능력(power) δυναμισ(dynamis)은 신약성서에서 기적이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表明(manifestation)할 때 쓰인다. 그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날 것을 볼 것이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היה hayah H1961). 복음은 이 역동적인 사건의 宣言이자 公表, 公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dynamis이며 지혜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YHWH의 역사하심에 응답하는 능동적 행위이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dynamis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1:18-25 새번역)

'구원(salvation)'은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구출함을 뜻한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유태인들에게는 마지막날에 하나님께서 가져다 주실 종국적인 위대한 구원을 의미했다. 바울은 바로 이 종말론적(eschatological) 의미에서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이는 죄와 죽음의 속박(bondage)에서 해방됨을 뜻한다. 화해 속에서의 여전한 불안감과, 불화 가운데의 증폭되는 적대감을 극복함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행하신 이 일은, 그리고 여전히 행하고 계신 일은 모든 자에게 열려있는데, 이때가 바로 마지막 날의 때이다.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사2:2 새번역)
And it shall come to pass (היה H1961) in the last days, [that] the mountain of the YHWH's house shall be established in the top of the mountains, and shall be exalted above the hills; and all nations shall flow unto it. (KJV)

로이드존스는 그의 로마서 강해 1권(3:20-4:25) p64에서 '믿음'에는 세가지 요소 또는 세가지 국면이 있다고 한다. 진리에 대한 앎 또는 인식(a knowledge[awareness] of truth), 그에 대한 찬성과 동조(assent of truth), 그리고 신뢰와 헌신(a trust[committal] in the truth)이다.

야고보서 2:14-26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일상적인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지적 동의라는 의미에서의 '믿음'을 뜻한다. 이러한 '믿음'이 있노라 말하지만 행함이 없으니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허탄한 자, 그의 믿음은 헛것이다.

'믿음'의 또 다른 의미는 히브리서 11장 1절 같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확신(assurance); 실체,보증(새번역)]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conviction)"로서의 '믿음'이다. 믿음이란 지적인 동의를 너머 행위를 수반하는 확신이며 확실한 보증이어서 현재 삶[實狀]의 모든 것을 - 고통과 심지어는 죽음까지 - 감수하며 오늘을 살게하는 능력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취하는 완전한 신뢰의 態道나 常態이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공로를 쌓는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性質(disposition)에 반응하는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靈의 disposition이다.

사랑이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방도는 겸허와 감사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은 이중적(twofold)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신뢰는 한없이 선하다. 반면 인간의 불경건함과 불의함, 그리고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義의 성취에 대한 절망감(despair)이다.

복음은 흔히 '회개'와 '믿음'을 설교하지만, 바울은 로마서에서 '회개'를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는 이 '믿음'에는 회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이다. 여기에는 자신을 향한 태도[회개; despair]가 포함되어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dynamis이고 그 매개체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일이다.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의 義(righteousness of God, 롬3:5에는 justice): 복음에는 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났는데 [계시되었는데 αποκαλυπτεται], 하나님이 인간을 올바른 관계 안으로 들어오게 하심으로써 드러난다 (롬3:21-26). 이는 마지막 날의 징표이다 (롬13:11,12).

세상에서 불의에 고역을 당하는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변호는: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公義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The Lord hath made known his salvation; his righteousness hath he revealed in the sight of the nations (시98:2)

公義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My righteousness quickly draws near and my salvation shall come forth like a light (사51:5, LXX 칠십인譯)

'하나님의 의'는 인간들을 위함이다.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I have brought near my righteousness and I do not hold back my salvation. (LXX)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사46:13)

여기서 義는 구원과 동의어로 쓰였다. '의'란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들을 변호하시는(vindicating) 하나님의 행위이다. YHWH께서 "알게 하시며 나타내셨도다!" 주님이 義의 대변자로서 구원하고 입증하는 행위의 주체이시다.

啓示(revelation)는 구약에서 항상 능동적인[dynamic] 의미로 사용된다 (IB). 바울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義(righteousness) δικαιοσυνη는 하나님의 內在的 성품인가 외적 행위인가?

성품으로서의 의를 뜻하는 경우, 18절은 단순히 17절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고 3:25과 -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내용이 상통한다. 즉, 하나님의 진노와 죄에 대한 심판과 [필요충분한 조건으로서 실제로 당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이 복음에 나타난다. 이러한 방도로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변호하여 立證(vindicate)하셨다. 원어에는 능동태로 되어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그의 의를 변호하신다"라는 적극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변호하시는 자들은 이미 의로운 자들이다. 말 그대로 "정당화 justification"하시는 것이다. 의롭다고 선언된 자, 의로운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자, 사실상 이들은 모두 의롭다. 여기서 바울의 신학은 차이를 보인다. "의롭다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데, 의롭다고 선포하고 의롭다고 여겨지는, 실제로는 지금 의롭지 않은 자에 대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으로부터의 稱義이다.

동사 δικαιοω는 "to make righteous"를 뜻한다 (IB). τυφλοω가 "to make blind"를 뜻하는 것처럼 이 두 경우 마지막의 σ가 형용사형으로부터 제거되었다. 바울이 말하는 '칭의 Justification'는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는 역사이고, 우리를 죄의 심판으로부터 변제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하나님이 "의로운 자"를 변호하는(vindicate) 행위를 하시는 것이지 그들을 의로운 [행위자 또는 성품의 소유자]로 만드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칭의'라고 할 때, "赦免 또는 放免(acquittal)"을 말하는 것이지 "實際로 의롭게됨really righteous"을 뜻하지 않는다. 칭의는 새로운 性質(性品 character)을 주는 것이 아니고, 우선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신분(status)을 받게됨을 뜻한다. 칭의는 그 사람을 하나님과 한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게 하는 법적인 절차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당신을 화해시키셨다. 이 의롭다 하고 화목되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믿음'을 기반으로 일어났다.

17절에 나오는 세 '믿음'을 각각 살펴보자.

δικαιοσυνη γαρ θεου εν αυτω αποκαλυπτεται εκ πιστεωσ εισ πιστιν (from faith to faith), καθωσ γεγραπται, Ο δε δικαιοσ εκ πιστεωσ ζησεται (by faith will live). (UBS 4th ed. Nestle-Aland 27th ed.)

For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through faith for faith; as it is written, "The one who is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The one who is righteous through faith will live]. (NRSV)

해석하기 어려운 from[through] faith to[for] faith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한글 성서의 "이르게 하나니"는 원문에는 없는 단어이나 번역자가 문맥상 집어넣은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三는 그의 로마서연구에서,

혹은 '소박한 신앙에서 정련된 신앙에까지'라 하고, 혹은 '신앙에서 출발하여 신앙으로 끝마친다' 하고, 혹은 '구약적 신앙에서 신약적 신앙까지'라 하고, 혹은 '(하나님의) 의는 신앙에서 발하여 신앙으로써 획득된다'고 한다. 기타 異說이 퍽 많다. 일역성서가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나, 신앙에서 신앙에 이른다"고 의역한 때문에 "신앙에서 신앙에 이른다"는 구를 떼어놓고, 단지 신앙의 진보를 의미하는 통속적 견해가 생겨났다. 그러나 원문에는 "하나님의 의는 이것에 있어서, 신앙에서 신앙에까지 나타났다"하고 있음을 보면, "신앙[믿음]에서 신앙[믿음]에까지"의 구는 하나님의 義의 나타나심과 밀접하게 관계됨이 분명하다.

NRSV에서 "through faith"란 "하나님의 미쁘심 God's faithfulness (롬3:3)"를 뜻하고, "for faith"는 "God's faithfulness elicits human trust"를 의미한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3:26)

하나님의 의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은 "한 사람이 순종하심(롬5:19)" "죽기까지 복종(빌2:8)"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忠誠됨에서와 같은 의미이다.

"..,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for all who believe" (롬3:22) 를 through the faith of Jesus Christ로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친다"로 읽게된다.

하박국2:4의 '믿음'은 "loyalty, steadfastness, faithfulness"를 의미한다. 의로운 사람은 그의 충성된 신앙으로-혹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인해 생존할 것이다. 그 당시 유태인들처럼 바울도 이 구절을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다면, 그 의로운 자, 메시야(행3:14; 7:52; 22:14)는 신실함을 근본으로 살아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7:52)

구원은 하박국서의 의미로서 하나님의 믿음[신실함] 안에 그 원천이 있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끌어내는 인간의 믿음, 즉 바울서신의 의미로서 우리의 믿음[태도; 반응]에 대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바울의 의도는 그가 인용한 하박국 2장 4절에 잘 드러나 있다.
The one who is righteous through faith will live. Ο δε δικαιοσ εκ πιστεωσ ζησεται (by faith will live).

하나님의 義, 그의 신실하심으로 의롭다고 稱해진 자는 살 것이다. 영원히 살 것이다. 인간 본연의, 창조된 모습으로 살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 것이다.

16절의 '믿음'은 동사形이다. 17절에 세번 나오는 '믿음'은 명사形이다. 16절의 믿음은 "모든 믿는 자"의 주님을 향한 태도이고, 17절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義이며,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조명된 (우리 안에 생겨난) 확신이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다.

명사란 개념화된 실체요 동사는 동적이기 때문에 결코 개념화될 수 없는 과정process이다. 명사는 이상화된 목표이며 동사는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인간의 행위이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中庸 제12장)
誠함 그 자체는 하늘의 길이요, 誠해지려고 함은 사람의 길이다.
(여기서 者는 誠을 명사화 시키는 토씨; 之는 지시대명사로서 목적어가 되기 때문에 그 앞의 誠을 동사화 시킴)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그의 죽기까지 복종하신 충성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롬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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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29, 2009

Romans - Martyn Lloyd-J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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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s 3:20-4:25: Atonement and Justification

제1장 서론적 기초 (3:19~20)
제2장 위대한 전환점-'이제는 But Now ' (3:21~31)
제3장 죄사함보다 더한 것 (3:21~31)
제4장 오직 값없는 은혜로 By Free Grace Alone (3:24)
제5장 화목제물 Propitiation (3:25)
제6장 예수 그리스도의 피 (3:25)
제7장 하나님의 자기 변호 The Vindication of God (3:25~26)
제8장 자랑할 데가 어디뇨? Boasting Excluded (3:27~31)
제9장 차별이 없느니라 Distinctions Abolished (3:29~31)
제10장 세워진 율법 The Law Established (3:31)
제11장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아브라함 (4:1~3)
제12장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심 Justifying the Ungodly (4:4~8)
제13장 오직 믿음 (4:9~16)
제14장 전능자의 은혜로 보증된 구원 Salvation Guaranteed by Omnipotent Grace (4:13~17)
제15장 믿음의 본질 (4:18)
제16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 Faith Glorifying God (4:18~22)
제17장 우리의 칭의를 위한 부활 Raised for our Justification (4:23~25)


로이드존스 목사의 간략한 전기(한글) 그리고 여러 자료를 모아 놓은 사이트(등록 要)

Martyn Lloyd-Jones 공식 웹사이트

로이드존스 목사 관련 링크 모음

설교 - Prayer in the Spirit


중생(重生)과 회심(回心)의 차이 (로이드존스 "성경교리 강해" 중에서)

“그러면 우리는 중생을 무엇이라고 정의해야만 합니까? 제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그것을 회심(돌이킴)과 차별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주, 이 둘은 혼동되어집니다. 그러나 중생이 회심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회심은 중생할 때에 우리가 하는 그 무엇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회심은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발생(發生 generation)하는 그 무엇입니다. 회심은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실제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의미는 다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회심한 이들은 자신이 중생한 사실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회심은 중생을 따라오는 무엇입니다. 중생으로 인한 변화는 사람들의 외적인 삶과 생활에서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위대한 변화는 첫째로 그들 안에서 발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것과 그 씨를 뿌린 결과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생은 삶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그 결과로 오는 것들과 분명하게 다릅니다.

중생과 탄생 사이에도 역시 차이가 있습니다. 중생은 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결론으로 인도하는데, 어떤 과정이 계속된 후에 탄생의 실제적인 과정에 도달합니다. 따라서 이 둘을 우리의 생각에서 구분하여 둔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중생을 말할 때, 우리는 실제적인 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generation)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효과적인 소명은 실제적인 출생으로 오며,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소명은 효과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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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ugust 25, 2009

Tragic Optimism - Viktor Fran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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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정신의학자인 저자(Viktor E. Frankl)가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기술한 클래식 -- 죽음의 포로 수용소 Man's search for meaning 개정판 마지막에 있는 The case for a Tragic Optimism 이라는 에세이 입니다. 아래의 Google books에서 전문을 참조할 수 있고, 그 밑에 요점을 의역해 보았습니다.



"a tragic optimism"이란, 인간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1)고통 pain (2)죄책감 guilt (3)죽음 death 이라는 비극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소망 가운데 그의 삶을 영위함을 뜻합니다. 사실 인간의 이 특성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아니 인간이 어떻게 이 모든 비극 가운데서 삶을 긍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불행 가운데 어떻게 삶의 의미를 간직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어떠한 조건이나 비참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삶의 부정적 측면을 어떤 긍정적이고도 건설적인 면으로 창조적 전환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역량을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문제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최선의 것을 만드는가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최선 the best"은 라틴어로 optimum 이라 하는데, 비극적 상황에 처한 인간의 낙관optimism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능력이 다음의 세가지를 가능케 한다는 데 착안하여 "tragic optimism"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1) 고난을 인간의 성취와 성숙으로 전환시키고,
(2) 죄책감을 더 나음을 향한 자기혁신의 기회로 승화시키며,
(3)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생활로부터 책임 있는 삶의 행위를 끌어 냅니다.

물론 낙관이란 우리가 조정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거슬러서 마구잡이로 낙관적으로 될 수도 또한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을 조정하거나 강제할 수 없듯이, 삶의 고통과 죄책감을 우리 맘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유럽인에게 미국 문화를 특징 짓는 것이 "인간이 행복하도록 명령 받았다"라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행복은 추구되는 것be pursued이 아닙니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잇따라 일어나는 것ensue입니다. 인간은 행복한 이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이유를 발견하면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따라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겠지만, 한 인간의 존재는 행복을 추구함에 있지 않고 행복하게 되는 이유를 찾는 데에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내재되고 잠재되어 있는 가능한 의미를 실재의 삶 속에 구현함을 통해서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 . .

이러한 이유의 필요성은 인간 본연의 또 다른 특징 --웃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을 웃길려면 웃음의 이유를 제공해야 합니다. 즉 농담을 재미있게 말해야 합니다. 웃으라고 타인에게 윽박지른다고, 또는 웃을려고 스스로 아무리 애써봐야 억지웃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진관에서 치-즈 하고 나온 이런 부자연스런 웃음을 정신의학에서는 "hyper-intension"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성적 감각신경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의 경우, 그 문제된 신경의 기능에 신경을 쓸 수록 그 증세를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 . .

일단 한 개인이 삶의 이유(의미)를 찾는데 성공하면, 그는 행복하게 될 뿐만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삶의 의미를 찾는데 실패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아마 치명적인 상황으로 몰리게 될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 수용소에서 미군들이 "give-up-itis"라고 부르던 현상이 먼저 일어납니다. 어느날 수용소에서 한 사람이 작업장에 나가서 일하기를 거부합니다. 감독관의 어떠한 협박도 그의 의지를 꺽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아주 전형적인 행동이 나타납니다: 깊은 곳에 몰래 숨겨 놓았던 귀중한 담배 한 까치를 꺼내 물고 피우기 시작합니다. 의미 지향적인 삶이 무너지고 즉흥적인 삶의 쾌락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러면 수용소의 동료들은 그가 이삼일 안으로 죽어갈 것임을 압니다.

오늘날(1984) 전 세계적인 drugs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산업화에 따른 인간 존재의 몰가치와, 그에 따른 삶의 허무 속에 자라난 젊은이들이 순간을 즐기는 현상입니다. 이 허무한 느낌의 근원은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도구와 물품은 많이 가졌지만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이유와 의미를 모르는 데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그나마 가진 것도 없습니다. 실직자들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연전에 "실업증후군"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한 젊은이를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실업은 자신을 쓸모 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하였고, 쓸모없음은 무의미한 삶과 동일시 되었으며, 결국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청년 단체나 도서관 등에서 자원봉사자로서 일하도록 설득하였는데, 보수는 없지만 그의 자유시간을 의미 있는 일에 보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의 경제적 형편은 여전하여 배고픔은 변함 없었지만 그의 우울증은 사라져 갔습니다.
. . .

모든 우울증이 허무감에서 온다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우울증의 귀착지인 자살 또한 항상 존재의 공허감에서 온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모든 자살이 허무감으로 부터 기도(企圖)되었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자살하려는 사람이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어느정도 깨닫는다면 자신의 생명을 끊을려는 충동을 극복하였을 것입니다.

의미 지향적인 삶의 태도가 자살을 예방한다면, 자살의 충동에 노출되어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젊었을 때 오스트리아의 정신병원에서 이미 자살을 기도했던 우울증 환자 12,000여명을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의 자살기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자주 말했습니다. 그들의 문제--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를 해결할 길이 있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응답하기를: "비록 만에 하나라도 해결책이 있는 것이라면, 당신의 문제가 조만간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날이 밝아오는 것을 볼 때까지 생존해서 그날을 맞는 것은 당신의 책임입니다"

또 다른 현대의 정신병--공격성, 반항성aggression--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목적을 함께 추구해 나갈 때 완화됨이 관찰되었습니다.
-p167

중독addiction에 대해서는, 알콜 중독자의 90%가 삶의 공허감으로부터 온다는 Annemarie von Forstmeyer의 연구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Stanley Krippner에 의하면 마약 중독자의 100%가 그러하다고 합니다.

이제 다시 본론--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으로 돌아갑시다.

무엇보다 먼저 저는, 한 인간이 그의 삶을 통해 대면해야 하는 그때그때 하나하나의 상황 속에 잠재된 고유한 의미를 다루려고 합니다. 인생을 전체로 보아 그 의미를 기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지금-여기) 일상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상황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영화는 수천 수만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한 장면 한 장면에 의미가 있어서 전체 줄거리를 전개해 가는데, 마지막 단원을 보고 나서는 전체 영화의 의미를 판가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한편, 전체 영화를 구성하는 각각의 장면을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그 영화를 감상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도 종국을 맞고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겠지요. [하지만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면 어떻게 삶의 의미를 (지금) 알 수 있습니까?]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그 삶을 구성하는 각각의 장면[상황]에 담긴 가능성이, 그 사람의 앎과 믿음을 좇아 최선optimum으로 그의 삶에 실재(實在)로 구현되어가는 데[과정]에 달려있지 않을까요?

결국 삶의 의미를 발견함이란 상아탑의 공허한 논쟁에 있지 않고, 지금-여기에 그 삶을 실질적으로 만들어감에 있습니다. 의미의 발견은 Karl Buhler가 말한 "아하" 하는 순간 같은 구체적 상황의 개인적 경험과, Max Wertheimer의 Gestalt(경험의 통일적 전체) 사이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삶의 의미란 "figure" on a "ground"의 돌연한 각성을 말하는 고전적 Gestalt 개념과 달리, 현실(reality)에 깔린 저변에 反하는 가능성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경성(警省)하게됨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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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4, 2009

Fre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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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비교표는 침례교 목사님인 David N. Steele 과 Curtis Thomas 공저, The Five Points of CALVINISM - Defined, Defended, Documented 에서 발췌했습니다.

(I) Arminianism: Free-Will or Human Ability

Although human nature was seriously affected by the fall, man has not been left in a state of total spiritual helplessness. God graciously enables every sinner to repent and believe, but He does not interfere with man's freedom. Each sinner possesses a free will, and his eternal destiny depends on how he uses it. Man's freedom consists of his ability to choose good over evil in spiritual matters; his will is not enslaved to his sinful nature. The sinner has the power to either cooperate with God's Spirit and be regenerated or resist God's grace and perish. The lost sinner needs the Spirit's assistance, but he does not have to be regenerated by the Spirit before he can believe, for faith is man's act and precedes the new birth. Faith is the sinner's gift to God; it is man's contribution to salvation.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말마암아 심각하게 손상되었지만 완전히 절망 가운데 버려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죄인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까지 간섭하지는 않으신다. 각 죄인은 자유의지를 가졌고, 그의 영원한 운명은 그 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인간의 자유는 악함 대신 선함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그의 의지는 죄악된 본성에 속박되어있지 않다…

Calvinism: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

Because of the fall, man is unable of himself to savingly believe the gospel. The sinner is dead, blind, and deaf to the things of God; his heart is deceitful and desperately corrupt. His will is not free, it is in bondage to his evil nature, therefore, he will not - indeed he cannot - choose good over evil in the spiritual realm. Consequently, it takes much more than the Spirit's assistance to bring a sinner to Christ - it takes regeneration by which the Spirit makes the sinner alive and gives him a new nature. Faith is not something man contributes to salvation but is itself a part of God's gift of salvation - it is God's gift to the sinner, not the sinner's gift to God.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스스로 복음을 믿을 수 없다. 죄인은… 마음이 사악하고 절망적으로 부패하다. 죄인의 意志는 자유롭지 않고, 그의 사악한 본성에 속박되어 있다.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하려면 성령의 도우심 이상의 更生 즉, 죄인을 살려서 새 본성을 주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믿음은 인간이 구원에 공헌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구원의 한 부분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시는 (댓가 없는) 선물이지, 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다.

(II) Arminianism: Conditional Election

God's choice of certain individuals unto salvation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was based upon His foreseeing that they would respond to His call. He selected only those whom He knew would of themselves freely believe the gospel. Election therefore was determined by or conditioned upon what man would do. The faith which God foresaw and upon which He based His choice was not given to the sinner by God (it was not created by the regenerating power of the Holy Spirit) but resulted solely from man's will. It was left entirely up to man as to who would believe and therefore as to who would be elected unto salvation. God chose those whom He knew would, of their own free will, choose Christ. Thus the sinner's choice of Christ, not God's choice of the sinner, is the ultimate cause of salvation.

하나님은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할 자들을 예견하여 선택하신다. 自由意志적 결단으로 복음을 믿을 자들만을 선택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그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이 예견한 그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죄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즉, 성령의 권능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죄인에 의한 그리스도의 선택(영접)이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Calvinism: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God's choice of certain individuals unto salvation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rested solely in His own sovereign will. His choice of particular sinners was not based on any foreseen response of obedience on their part, such as faith, repentance, etc. On the contrary, God gives faith and repentance to each individual whom He selected. These acts are the result, not the cause of God's choice. Election therefore was not determined by or conditioned upon any virtuous quality or act foreseen in man. Those whom God sovereignly elected He brings through the power of the Spirit to a willing acceptance of Christ. Thus God's choice of the sinner, not the sinner's choice of Christ, is the ultimate cause of salvation.

창조전부터 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의 주권적 행위(의지)이다. 이는 그 인간의 회개나 믿음을 예견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게 믿음과 회개를 그냥 주시는 것이다. 이 선택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한 자들을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하신다. 죄인에 의한 그리스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죄인의 선택이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III) Arminianism: General Atonement

Christ's redeeming work made it possible for everyone to be saved but did not actually secure the salvation of anyone. Although Christ died for all men and for every man, only those who believe on Him are saved. His death enabled God to pardon sinners on the condition that they believe, but it did not actually put away anyone's sins. Christ's redemption becomes effective only if man chooses to accept it.

그리스도의 속량은 구속될 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될 자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한 것이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구원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도록 하지만, 實際로 그 죄를 죄인에게서 없애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에 대한) 속량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 때에만 실효된다.

Calvinism: Limited Atonement 제한 속죄

Christ's redeeming work was intended to save the elect only and actually secured salvation for them. His death was substitutionary endurance of the penalty of sin in the place of certain specified sinners. In addition to putting away the sins of His people, Christ's redemption secured everything necessary for their salvation, including faith which unites them to Him. The gift of faith is infallibly applied by the Spirit to all for whom Christ died, therefore guaranteeing their salvation.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보장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한 자들을 위한 대속이다. 그의 백성들의 죄를 도말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것을--그의 백성을 그와 연합하게 하는 믿음을 포함하여-- 보장한다. 믿음이라는 선물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모든 자에게 성령의 권능으로 주시는 확실한 구원의 보장이다.

(IV) Arminianism: The Holy Spirit Can Be Effectually Resisted

The Spirit calls inwardly all those who are called outwardly by the gospel invitation; He does all that He can to bring every sinner to salvation. But inasmuch as man is free, he can successfully resist the Spirit's call. The Spirit cannot regenerate the sinner until he believes; faith (which is man's contribution) proceeds and makes possible the new birth. Thus, man's free will limits the Spirit in the application of Christ's saving work. The Holy Spirit can only draw to Christ those who allow Him to have His way with them. Until the sinner responds, the Spirit cannot give life. God's grace, therefore, is not invincible; it can be, and often is, resisted and thwarted by man.

외면적으로 복음을 들은 모든 자들을 성령님은 내면적으로 부르신다. 성령님은 모든 죄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로운 만큼 성령의 부르심에 저항할 수 있다. 성령은 죄인이 스스로 (회개하고) 믿지 않는한 그를 改心시킬 수 없다. 인간의 믿음이 선행하여야 거듭남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실행하는 성령의 활동을 제한한다. 성령님은 오직 인간들이 당신의 사역을 허락하는 안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신다. 성령님은 그 죄인이 응답함으로써만 그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 아니다. 인간이 거역할 수 있다.

Calvinism: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In addition to the outward general call to salvation which is made to everyone who hears the gospel, the Holy Spirit extends to the elect a special inward call that inevitably brings them to salvation. The internal call (which is made only to the elect) cannot be rejected; it always results in conversion. By means of this special call the Spirit irresistibly draws sinners to Christ. He is not limited in His work of applying salvation by man's will, nor is He dependent upon man's cooperation for success. The Spirit graciously causes the elect sinner to cooperate, to believe, to repent, to come freely and willingly to Christ. God's grace, therefore, is invincible; it never fails to result in the salvation of those to whom it is extended.

복음을 (귀로)들은 모든 자들에 대한 부르심에 더해서, 성령님은 특별한 내적 부르심을 통해 선택된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이 내적 부르심은 거부할 수 없으며 항상 改心케 만든다. 이 특별한 부르심에 의하여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신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제한 받지 않으며,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협력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성령께서는 택하신 죄인이 은혜로히 협력하게 하시고, 믿으며 회개하게 하시고, 자유롭고도 자발적으로 그리스도께 나오게끔 만드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그 은혜는 그것이 베풀어진 바 된 인간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일에 결코 실패함이 없다.

(V) Arminianism: Falling from Grace

Those who believe and are truly saved can lose their salvation by failing to keep up their faith, etc. All Arminians have not been agreed on this point; some have held that believers are eternally secure in Christ - that once a sinner is regenerated, he can never be lost.

진정으로 믿고 구속 받은 자들이라도 그들의 믿음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알미니안주의자는 구원이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히 보장된다고도 한다.

Calvinism: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堅忍

All who are chosen by God, redeemed by Christ, and given faith by the Spirit are eternally saved. They are kept in faith by the power of Almighty God and thus persevere to the end.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 받은 바 되며, 성령에 의해서 믿음이 주어진 모든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믿음 안에서 보호되며 그로 인하여 끝까지 견인된다.


History of Calvinist-Arminian debate


Pelagius vs Augustine


Timeline for Pelagius vs Augustine


에라스무스 루터 칼빈의 자유의지와 예정론


Luther and Erasmus on Free Will and Salvation


Discourse on Free Will


Arminianism vs Calvinism


The Triumph of Arminianism (and its dangers)


Calvinism vs Arminianism


Calvinism vs Arminianism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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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y 2, 2009

Numinose 全的他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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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utline of Rudolf Otto’s The Idea of the Holy

The Idea of the Holy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 연구 - 김 남중

루돌프 오토Rudolf Otto에게 처음 종교적 반응의 독특한 성격을 연구하도록 지도해준 스승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였다. 오토가 관심을 쏟은 것은 특히 슐라이어마허의 초기 저서 종교에 관하여: 종교를 경시하는 지식인들에게 주는 글 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1799)이었다. 오토는 이 책에서 종교를 인식하는 윤리적·합리적 방식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느낌 혹은 자각으로 종교를 인지하는 슐라이어마허의 방법에 끌리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훗날 이 독특한 느낌을 인간의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했다. 오토는 이러한 체계적 설명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슐라이어마허를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거룩함의 의미를 재발견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후에는 슐라이어마허가 그 책에서 강조한 것이 일상적인 혹은 '자연적인' 의존의 감정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여 그 설명을 비판했다. 오토는 '절대의존'을 '피조물 감정'으로 대체했다.

"피조물 감정은 또 하나의 감정 요소에서 나온 최초의 주관적 파생물이자 그 결과이다. 피조물 감정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지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자아(自我) 바깥에 있는 대상을 우선적으로 직접 가리킨다."

오토는 이 대상을 '누미노제'(das numinose) 혹은 '전적타자', 즉 세속 영역을 철저히 초월하는 존재, 전통적으로 운위되어온 '초자연적' 혹은 '초월적' 존재와 거의 일치하는 존재로 보았다.

거룩함의 개념

세월이 흐르면서 오토는 여러 영향을 받아 슐라이에르마허를 넘어서는 종교 범주(範疇)를 재구성했다. 괴팅겐대학교 학생시절에 그를 가르친 알브레히트 리츨Ritschl은 종교를 가치판단의 영역에 두었으며 [<그리스도와 문화> 제3장 2절 - "문화-프로테스탄티즘"과 리츨 -에서 자주 인용된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을 클릭하시면 Google Book Search에서 Harvard대학교 소장본을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괴팅겐대학교 교수이자 리츨의 동료 신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Troeltsch는 한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 선험(先驗 a priori)을 종교적 해석 및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고 했다.

오토는 윌리엄 제임스James가 다양한 종교체험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1902)에서 보여준 예리한 통찰력에 감명을 받았지만, 제임스의 경험적인 방법이 그런 현상을 해석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 오토는 J. F. 프리스Fries의 사상을 좋아했다. 프리스의 '안둥'(Ahndung : Ahnung의 옛날식 표현이며 문자적인 뜻으로는 '예감', ' 직관') 개념, 즉 진리의 느낌을 만들어내는 열망이라는 개념은 오토에게 종교현상을 민감하고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오토는 이 '진리의 느낌'을 그의 책 거룩함 The Idea of Holy: An Inquiry into the Non-rational Factor in the Idea of the Divine and its Relation to the Rational 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오토는 이 책에서 이전의 수준을 넘어서서 종교 차원의 비합리적 측면을 더욱 자세히 연구했고, '오멘'(omen : 징조)이라는 낱말에서 '오미뇌스'(ominös : 불길한)가 파생한 데 착안하여, 라틴어 '누멘'(numen : 신·영혼·신성)에서 '누미노제'라는 용어를 만들어 '종교 차원의 비이성적 측면'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경외심을 일으키는 종교 체험의 요소인 누미노제에 대해서 오토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누미노제는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다. 음악작품의 아름다움처럼 비합리적이며, 따라서 철저한 개념분석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미노제는 상징적인 용어들을 가지고 논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룩함 에서 오토는 이전의 연구들을 활용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지속해왔던 연구의 성격과 토대를 철저히 바꾸는 새로운 모험에 나선 셈이다. 여기서 오토의 관심사는 누미노제 자체를 인지하는 기본적인 체험에 참여하는 데 있었다. 오토는 누미노제를 인지하는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순간 우리는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어떤 것을 다루게 된다… 그 느낌은 때로 부드러운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예배에 깊이 몰두하는 평온한 상태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안정되고 일관된 상태에 있는 영혼이 충만해져서 한동안 두려움으로 전율하게 하다가, 결국에는 그러한 느낌이 다 사라져 영혼은 다시 매일 겪는 '세속적인', 즉 비종교적인 분위기를 되찾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느끼는 첫 순간에는 거칠고 야만적인 현상이 나타나다가 다시 아름답고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느낌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피조물이 마음을 졸이며 떨고 말문이 막히는 겸손한 상태가 되는 것은 누구 또는 무엇 앞에서일까? 그것은 표현할 수 없고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신비' 앞에서이다."

오토가 누미노제 체험형식으로 제시한 '신비'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용어가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신비'는 누미노제 체험의 질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느낌으로 경험된다. 그 내용은 다음 두가지 양상으로 전달되는데, (1) '사람을 압도하는 두려움과 장엄', (2) '독특하게 마음을 끌고 사로잡는 것'이다. 전자로부터는 경이감, 즉 신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느낌이 오고, 후자로부터는 사람을 안심시키고 밝게 하는 신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체험이 온다. 두려움이 깃든 신비와 매료(魅了)라는 이 이중적인 충격이 바로 거룩한 것의 만남을 표현하는 오토의 독특한 방법이다.


한민족에 내재하는 누미노제: 공구(恐懼)와 상제(上帝)의 임재(臨在)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바를 조심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

- 정 약용,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중용자잠(中庸自箴), 1권

인간의 본성은 원래 스스로 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조심[戒愼]케 하는 것까지는 가능하겠지만 대저 두려워한다는 것은 구체적 까닭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선생이 가르쳐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가짜 두려움이다. 군주가 명령을 내려서 두려워한다는 것도 기만적인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어찌 속임수로 얻어질 수 있겠는가? 밤에 공동묘지를 지나가면 두려워할려고 안해도 저절로 두려워지는 것이니 그것은 그곳에 도깨비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밤에 산림 속을 지나가다 보면 두려워할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두렵게 될 것이니 그것은 그곳에 호랑이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군자가 캄캄한 방속에 홀로 앉아 있어도 전전 율율 하면서 감히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상제가 그를 굽어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命과 性과 道와 敎를 모두 一理에 귀속시킨다면, 理라는 것은 본래 지각도 없고 위엄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으로 인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할 수 있게 되겠는가? 성인의 말씀은 지극히 진실된 것이므로 체면만 세우는 그러한 로써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人性原自樂善。使之戒愼。猶之可也。夫恐懼爲物。非無故而可得者也。師敎之而恐懼。是僞恐懼也。君令之而恐懼。是詐恐懼也。恐懼而可以詐僞得之乎。暮行墟墓者。不期恐而自恐。知其有魅魈也。夜行山林者。不期懼而自懼。知其有虎豹也。君子處暗室之中。戰戰栗栗。不敢爲惡。知其有上帝臨女也。今以命性道敎。悉歸之於一理。則理本無知。亦無威能。何所戒而愼之。何所恐而懼之乎。聖人所。皆至眞至實。必不作矯僞體面之。以自欺而欺人矣。

소매(魅魈)-산에 산다는 외다리 도깨비

Otto’s vocabulary

Numinous Dread: Otto calls the feeling of numinous dread, aka awe or awe-fullness, the mysterium tremendum.

The mysterium tremendum implies three qualities of the numinous:
(1) its absolute unapproachability (2) its power (3) its urgency or energy, a force which is most easily perceived in the "wrath of God."

It has been suggested that Gothic fiction originated primarily as a quest for the mysterium tremendum.

The Connection of the Numinous and the Gothic

Connection 1: "daemonic dread."

"Daemonic dread" is the first stage in religious development. Primitive people misunderstood their experience of the mysterium tremendum or the dread inspired by the numinous, to which they were drawn by the fascinating power of the numinous. Otto explains, "The daemonic-divine object may appear to the mind an object of horror and dread, but at the same time it is no less something that allures with a potent charm, and the creature, who trembles before it, utterly cowed and cast down, has always at the same time the impulse to turn to it, nay even to make it somehow his own." Still, "daemonic dread" is a genuine religious experience and from it arose the gods and demons of later religions.

Otto regards the "dread of ghosts" as a "perversion, a sort of abortive offshoot" of "daemonic dread." Even after purer, more highly developed religions have evolved, the primitive "daemonic dread" may assert itself. Otto points for proof of this to the attraction of horror and "shudder" in ghost stories. The ghost attracts us because it is wholly Other, and as such "falls outside the limits of the ‘uncanny' and fills the mind with blank wonder and astonishment," which are responses to the numinous. Ghosts have another connection with the numinous; in the primitive experience, the feeling of the presence of ghosts produces the stupor which the wholly Other arouses.

Connection 2: other interpretations of the numinous.

Other Gothic elements originate in the misapprehension of the numinous. The feeling of the numen as mysterious stimulates "the naive imagination, inciting it to expect miracles, to invent them, to ‘experience them,' recount them." Terrifying, baffling, and even astonishing natural events have inspired "daemonic dread," a response which transformed them into portents, prodigies, and portents. Demons and specters, in Otto's view, are not part of the true development of religious consciousness but "spurious fabrications of the fancy accompanying the numinous feeling." Nevertheless, these fabrications do serve a positive function, one which may operate in Gothic fiction; though feelings of horror and shudder at spectral hauntings are caricatures of authentic numinous emotions, they enable us to break through rationality to contact "feelings buried deep in religious consciousness."

Connection 3: the sublime. 고상한, 숭고한, 기품 있는

A counterpart to the numinous, the sublime provides another connection to Gothic fiction. Though Otto distinguishes the numinous and the sublime as separate categories, they have a close connection. Like the numinous, the sublime cannot be explicated, is mysterious, and is both daunting and intensely attracting. Because of these similarities, the sublime may stimulate the capacity to perceive the numinous, and there is a tendency for the sublime to pass over into the numinous and for the numinous to pass over into the sublime.

Otto explicitly connects the two categories; the sublime is the most effective, if indirect way of depicting the sublime in the arts. The eighteenth century Gothic novelists were aware of theories of the sublime; Edmund Burke's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the Sublime and the Beautiful presented the most widely accepted theory. They incorpoated the sublime into their novelists. Radcliffe was famous for her landscapes, which were imbued with the sublime.

Otto identifies portrayals of darkness and silence as a means of presenting the numinous; he stresses that the darkness must contrast with a flickering or dying light, the semidarkness creating a "mystical" effect. "The semi-darkness that glimmers in vaulted halls or beneath the branches of a lofty forest glade, strangely quickened and stirred by the mysterious play of half-lights has always spoken eloquently to the soul." And the Gothic novel abounds in these particular effects and similar ones over and over. For Otto, these effects expression the numinous in contrast to Burke, for whom they express the sublime.

Stupor:

Because the mysterium tremendum is wholly Other, i.e., is unlike anything that we have encountered or ever will encounter, it arouses in us a mental state of stupor, a "blank wonder, an astonishment that strikes us dumb, amazement absolute."

The shudder:

In this state, the soul, "held speechless, trembles inwardly to the farthest fibre of its being[;] ... it implies that the mysterious is beginning to loom before the mind, to touch the feelings."
Creature-consciousness and the simultaneous experiencing of the self as nothing.무아의 경지 Creature-consciousness is the awareness of ourselves as having being or of existing. The nothingness is not a sense of guilt for a transgression, but the sense of being profane, which is the opposite state to the holy or holiness, which is an absolute quality belonging just to God. Only the person who is "in the spirit" can experience profaneness, which Otto describes as a "piercing acuteness... accompanied by the most uncompromising judgment of self-depreciation, a judgment passed, not upon his character because of individual ‘profane' actions but upon his very existence as creature before that which is supreme above all creatures." I think of profane nothingness as feeling, "I am nothing in the presence of that which is all." In this state, we are moved to praise the might of the numen, because its might demands praise and even more because it is absolutely deserving of praise. This sense of nothingness, which Otto calls "disvalue,"becomes a sin or sacrilege if the numinous is perceived in or confined to a moral framework; it has no necessary connection to moral judgments.

Sense of unworthiness and need for "covering." Accompanying the disvaluation of self is the feeling of being unworthy to be in the presence of "the holy one" (we fear that our presence might even defile him). Being profane, we need a "covering," in Otto's term, or a consecration or grace, "that renders the approacher ‘numinous,' frees him from his ‘profane' being," so that he is no longer unfit to relate to the numen.

The numinous has another aspect which co-exists with the mysterium tremendum, the power to fascination. The numinous fascinates or draws us to it with a force that is nearly irresistible. Otto calls the alluring quality of the numinous the mysterium fascinosum. At its most intense, this fascination becomes "exuberant" and transforms into the mystical "moment" or direct, complete contact with the numen, a state which few people experience. The numinous dread and the fascinating "combine in a strange harmony of contrasts," which Otto calls the mysterium tremendum and fascinosum

Human beings as a species have the a priori capacity of mind to perceive or experience the numinous. This is not to say that the ability to perceive the holy, let alone the perception itself is innate; it merely means that every individual has the potential to perceive or experience the numinous. The numinous state of mind or the feeling of the numinous must be evoked in us or brought into consciousness; it cannot be taught. But not everyone has the same degree of receptivity to the holy. The revelations of those who are specially receptive, like the prophets, stimulate the numinous capacity of the less receptive. Otto, who believes in the superiority of Christianity, awards the highest stage of revelation to the Son or Christ, who embodies holiness.

The human soul has parallels with the divine or numinous; it too is "mystery and marvel," undefinable, and "wholly alien" to our understanding. Insight into the soul comes, when it does, as an eruption, a flash or burst of illumination. The numinous-ness of the human soul is what enables the mystic to apprehend the numin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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