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25, 2009

Hang on the Two Command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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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do the Law and the Prophets ‘hang’ on the two ‘greatest commandments’?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40 개역 개정)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새번역)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KJV)

여기서 '이 두 계명'이란, 율법士(마태)[서기관(마가), 율법師(누가)]와 예수와의 대화 속에 나오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5~40; 막12:28~34; 눅10:25~28)를 지칭합니다.

두 계명의 내용이 거의 동일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22:35)"로 시작하여 "…강령이니라(22:40)"는 예수의 말씀으로 끝나고, 마가복음에서는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막12:28)"로 시작하여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12:34)"로 끝나며,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10:25~26)" 하자 율법사가 그 '두 계명'을 답하니까 예수께서 "네 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8)" 그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 (10:29)"하며 대화가 계속 이어집니다.

개역 성경의 '강령'은 구약성경의 핵심요약으로 흔히들 간주해서 '일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를 의미하며 'manifesto'같이 사용하지만, 원문을 보면 문자 그대로 '달려 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참고로 '綱領'은 '삼강오륜'에서와 같은 '강'의 '령'으로 이해하여, '두 계명'이 구약의 핵심요약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번역된 듯 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만 나오는 이 말씀 'hang'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동사적인 표현법에 주목하면 히브리-그리스적 사유를 이해하는 단서를 잡게 되고, 소라이가 지적한 바대로 今註와 古註를 분별하여 이해하는 지혜로운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다고 주님께 칭찬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막12:34).

'hang'의 古註를 달아 今註를 밝혀보겠습니다.

질문: 율법(모세오경)과 선지자(예언서)가 두 계명에 매달림hang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구약성서의 모든 것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 또는 의존되어있다 depended upon, 또는 이 두 계명이 눈 앞에 달랑거리며 바라보게 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한다..?

κρεμάννυμι (Strong’s G2910: kremannumi = hang)가 나온 구절들을 찾아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18:6)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눅23:39~4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행5:30~3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행28:3~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참고로 가롯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27:5)" 에서 hang은 ἀπάγχομαι (apagchomai)로 마22:40의 hang과 다릅니다.]

"성경은" 하며 시작하는 다음의 갈라디아서3장 8절로부터 나오는 바울의 변증에서 보듯이, 인간이 '율법(오경)과 선지자(예언서)'의 '저주 아래' 있게 되는 연유를 알아보겠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갈3:8~13 새번역)

[참고로 '율법 (토라 Torah)'는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권(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 소위 '모세오경')을 지칭하는 것으로, 단어 자체는 'teaching, instruction'이란 뜻이고 동사어근 'to shoot (an arrow)'에서 나온 말로 '과녁에 명중하다'는 어원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율법을 가르침이라 할 때, 그 가르침의 스승이 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그 참 뜻을 알아가게 됩니다.]

율법의 저주란 무엇인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는 뜻은?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 하였습니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지키지 않을 경우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죄의 삯은 사망 (롬6:23)입니다. 하지만 율법 자체가 저주나 죽음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는 어떻게 의롭게 되며 자유하게 되는가? 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는가?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예수님이 토라가 아니며 토라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토라 안에 (나타나) 있고 예수께서 토라를 완벽하게 사용(인용, 해석)하셨습니다. 토라 안에는 축복도 있고 저주도 있습니다. 악한 자의 행적도 있고 선한 자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는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율법의 조항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하나의 법규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 그 요구를 대할 때 마다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도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지막 장을 빼고…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자기[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함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매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된 말씀을 다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Do we then make void the law through faith? God forbid: yea, we establish the law." (롬3:31) 할 때,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 establish the law'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데?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율법을 굳게 세우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fulfill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until all is accomplished (마5:17~18 NASB)

Something has to come to pass (haya)… What is in Torah must come to pass? The curse.

예수께서는 율법의 저주가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게 충족시키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또는 죽음을 담당하시고], 선지자가 말한 바 -이스라엘이 죄를 범해서 고난을 당한다- 를 충족시키려고 멸시함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여러 '예언'들이 실현됨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 뿐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 그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는 데 따른 저주를 친히 받아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갈4:5)" 하셔서, 자녀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갈4:7)", 죄의 종에서 해방된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 (갈4:31)"가 되게 하셨습니다.

Do we know how we are to love the Lord with all our heart, soul, mind & strength and to love our neighbors as ourselves?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흔히 우리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과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그 상황을 외면하거나 또는 그 사람을 비켜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되도록이면 평온한 가운데 현실적 안정을 도모하고 이웃과 갈등 없이 행복하게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은 이렇습니다. 남편과 아내, 자식들과 친인척 그리고 교회 교우들과 직장 동료들과 어쩔 수 없이 지지고볶는 상황 가운데 들어가게 되고, 그것을 회피하며 살아갈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에로부터의 요청을 듣는 것입니다. 가까운 자일수록, 그를 대할 때마다 나의 눈 앞에 두 계명을 대롱대롱 '매달려'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눅20:38 새번역)
For he is not a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all live unto him. (KJV)

그러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갑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관계 속에 살고 있는 그러나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을 듯한 '그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데 '달려'있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출발점은 자신이 '속량된' 사람임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량받은' 사람으로 볼 때 생겨납니다.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축복은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는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12:1~3 새번역)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반복 인용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NRSV, 3rd Ed)을 보면 긴 설명이 나오는데 특히 유익하고, The Jewish Study Bible (JPS), The Five Books of Moses (The Schocken Bible, vol. 1), Genesis (Robert Alter) 등의 각종 번역과 주석을 보면 바울이나 다른 성서의 기록자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약간씩 변형된 해석(번역)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유태인들이 번역한 토라에는 2절과 3절을 詩처럼 써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와 같이 한글(새번역)에서도 댓구가 좀 되도록 번역된 것입니다.

YHWH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하심으로 시작된 이 새로운 관계는, Moshe Weinfield가 지적한 대로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이후 계속되오던 인류의 저주의 역사를 반전시킵니다. 창12:1~3은 이스라엘 시초의 조상들에게 행한 하나님의 일련의 말씀 셋 중 첫째것입니다. 다른 둘은 26:2~5와 46:1~4인데, 조상들에게 갈 곳을 명하고 축복의 언약을 맺는 구조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함에 따라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해 갈 때에도, 야곱에게 명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창31:3)"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창31:13)"는 말씀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약속은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창11:30)"와 같은 처지에 있는 아브라함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이 언약 이후로 전개되는 아브라함 가족의 이야기는 이 약속의 말씀 안에 있는 당사자들의 삶 속에 펼쳐진 struggle이라 하겠습니다.

"너를 축복하여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는, 셈族(Shem = 'name' in Hebrew)의 후예인 아브라함이 바벨탑에서 추구했던 인간의 무모한 야망 "우리의 이름을 내고 (창11:4)"를 바야흐로 이루게 된다는 약속이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니겠습니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you shall be a blessing" (12:2b, KJV)는 마소라(Masoretic Text)를 읽을 때 문자적 의미로 "be you a blessing"인데, 히브리어 문법상 문제가 있어서 강독법을 좀 바꾸면 "and it [your name] will be a blessing"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반(창30:27~30)과 보디발(창39:5)의 경우에서와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이 약속이 실현되는 예가 율법(토라)에 나옵니다.

3절의 "one who curses you"는 마소라 전통에서 단수로 읽지만 다른 고대 사본들에서와 같이 복수로 쓰면 병행구가 어울려져 시적 운률이 있게 된다고 합니다. 창세기27:29, 민수기24:9 병행구에서도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하였습니다.

한데 여기 창세기 12장의 경우는 YHWH께서 "treats [Abraham] lightly"하는 자에게 조차 저주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Young’s Literal Translation에 보면, "I bless those blessing thee, and him who is disesteeming thee I curse" (창12:3a)라고 문자적으로 번역했습니다.

그 이유는, '저주'에 해당하는 두 히브리어 중의 하나가 ארר (H779)으로 저주 외에 별다른 뜻이 없지만, 또 다른 하나는 קלל (H7043) Pual形으로 쓰일 때 '저주받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한데 이 구절에서 쓰인 Hiphil形 'to treat with contempt, bring contempt or dishonour'의 경우, '멸시하다, 시시하게 보다'로 쓰여져 아브라함을 깔보거나 멸시하는 자들을 YHWH께서 저주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는 자들을 저주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을 중요시 여기지 않으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시초에 심각한 하자가 생깁니다. 다시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고 율법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지키지 않으면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간의 관계에서 그 이웃을 깔보는 자를 주님이 저주하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21:23)

..his corpse dost not remain on the tree, for thou dost certainly bury him in that day -- for a thing lightly esteemed of God [is] the hanged one -- and thou dost not defile thy ground which Jehovah thy God is giving to thee -- an inheritance. (YLT)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고난 당하시며 멸시 천대를 받았습니다.

다음은 '선지자(예언서)'의 저주 아래 놓이는 경우입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언약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렘11:3 새번역)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렘17:5)

주의 일을 정성을 다하여 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칼을 휘둘러 모압 사람을 죽이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렘48:10)

너희가 나의 말을 명심하여 듣지 않고서, 내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서, 너희가 누리는 복을 저주로 바꾸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받은 복을 내가 이미 저주로 바꾸었으니, 이것은 너희가 내 말을 명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2:2)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주의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YHWH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저주 받게 됩니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데 이 모든 것이 ‘매달려’ 있습니다.

다음의 스가랴서에서 두루마리에 있는 것은? 여기 말하는 저주란 무엇?

내가 또 고개를 들고 보니, 내 앞에서 두루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 천사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였다.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길이는 스무 자이고, 너비는 열 자입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온 땅 위에 내릴 저주다. 두루마리의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고, 두루마리의 다른 쪽에는 '거짓으로 맹세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내가 저주를 내보낸다. 모든 도둑의 집과 내 이름을 두고 거짓으로 맹세하는 모든 자의 집에 저주가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면서, 나무 대들보와 돌로 쌓은 벽까지, 그 집을 다 허물어 버릴 것이다." (슥5:1~4 새번역)

여기서 요한계시록에서 두루마리와 저주가 나오는 곳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또,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안팎에 글이 적혀 있는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니, 힘센 천사가 큰소리로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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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에게는 뿔 일곱과 눈 일곱이 있었는데,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그가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제사장이 되게 하셔서, 땅 위에서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계5:1~10)

요한이 본 것,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분께 두루마리를 받아 일곱 봉인을 하나씩 떼는 비젼이 계시록 6장 이후로 계속 나오는데 저주, 저주 또 저주… 이렇지 않습니까?

스가랴가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를 보았을 때 한 음성을 들었는데, "이것은 온 땅 위에 내릴 저주다. 두루마리의 한 쪽에는 '도둑질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고, 두루마리의 다른 쪽에는 '거짓으로 맹세하는 자가 모두 땅 위에서 말끔히 없어진다'고 씌어 있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내가 저주를 내보낸다." 라고 하였습니다.

자 이제 마태복음의 예수의 본 말씀으로 돌아가서;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이 두 조항도 성경의 한 구절이니까 결국 '율법과 선지자'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만약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밑에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갈3:8에서 바울이 해석한 창세기12:3b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에서 '모든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저주에서 벗어나 '복을 받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8,9절에서 "또 성경은" 하며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하였습니다.

바울이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All the Gentiles shall be blessed in you "로 인용한 그 Greek 문장은 <70인역> 이라고도 불리우는 Septuagint (히브히어 고사본의 그리스어 번역)를 근간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In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의 가능한 다른 번역이라고 해봤자 "by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less themselves"으로서, 의역하면 "우리가 아브라함 같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48:20a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에서, 여기서는 축복의 목적어가 없고 축복하는 樣式으로서 "이스라엘이 너희의 이름으로" 축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다른 나라들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축복을 우러러 보고 같은 축복을 자기 자신들에게도 내리기를 기원한다.. 뭐 그런 의미입니다. 다음의 시편을 보면 그 내포된 의미를 잘 전달받습니다.

그의 이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태양이 그 빛을 잃기까지 그의 명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뭇 민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모든 민족이 그를 일컬어서,
복 받은 사람이라 칭송할 것이다. (시72:17)

율법서에 나오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가볍게 보지 않음 또는 '저주'하지 않음'으로써 오는 이방인들에게 내린 축복과 관련된 사례를 마음에 새겨 둡시다.

아비멜렉(창26:28) 라반(30:27) 보디발(39:3~5) 요셉과 감옥에 같이 있던 자(39:21~23) 이드로(출18:10~12) 발람(24:1) …

이방인은 율법이 없이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갈2:16)

아브라함이 믿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한 일이 무엇인가? YHWH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행동하였나?

아브라함은 오랜 기간동안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마음에 새겨 듣는 것부터 시작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아브라함이 실수도 저지르고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지만 지속적으로 YHWH의 한말씀 한말씀에 복종하며 나아감을 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강령이 눈 앞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그 축복의 언약에 대한 믿음으로 삶을 헤쳐나간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저주가 우리 위에 놓일 때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도질 때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이 앞길을 막을 때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매달려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매달려 있음을 볼 때, 이 땅의 모든 짐을 지고 율법의 저주에서 나의 죄를 속량하느라 나무에 높이 매달시신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 에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3:5)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롬8:2)

그리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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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rch 5, 2009

Four Rivers and Two Trees in Eden (Gen. 2:8-17)

무대: 에덴 동산, 땅[하윌라, 구스, 앗수르], 하늘
등장인물: 두 나무, YHWH, 네 강(물), 사람 [아담], 여자 [하와], 뱀, 여자의 아들 [어린 양], 그룹들, 드래곤 [사단]과 그의 사자들,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 (그 여자의) 남은 자들

Four rivers, two trees in Eden

Q. (창2:8) garden의 뜻은?
A. (gan) that is fenced; boundaries; hedge
동사어근 (ganan, Strong's H1598) protect; defend – defend what? --> Eden

Q. 가든은 무엇이며 그안에 무엇이 있었나?
A. 에덴을 싸고있는 경계이며 그 안에는 두 나무와 사람(남자)이 놓였고 네 강물의 근원지이다.

Q. 에덴은 어디에 있(었)나? Eden의 문자적 의미는?
A. (Eden; 'adan H5727) to be soft; to be pleasant, delight (wonderful, beautiful place..)

느슨할(laxity) 정도로 부드럽고 상쾌하며 아름다운 곳. 위험한 것이 있어서 hedge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타락"하지 않았음, 위험하지 않음). 에덴은 가든이 있는 곳 또는 가든(헤지)되고 있는 상태로서, YHWH 하나님이 그 헤지된, 느슨한 상쾌함으로 한 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가든 안에 사람을 놓아두었다. 창세기1장에서, 그 garden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כי-טוב 키토브 because it is(was) good."

Q. 두 나무?
A. (창2:9)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Q. 나무에 대한 히브리어?
A. ('ets) wood; 꽃이나 식물과 달리 firm하다.

Q. 동사어근? 그 의미는?
A. ('etsah) to fasten; to make firm; to be made firm
이 어근은 성서에 한번 (잠언16:30) 사용된 동사로서 (Kal形) to shut 이란 뜻이고, 링크의 게제니우스 렉치콘을 보면 to make firm; hence to shut, specially the eyes 라고 나온다.

잠언16:30에서, "눈을 감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라는 표현은, root가 firm하게 되는 것처럼 눈을 꽉 감는다, 그러니까 죽음을 뜻한다.

나우웬(Henry Nouwen)은 Turn My Mourning into Dancing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이 십자가 [나무에 달린 자, 저주받은 자 (신21:23), 패역한 자, 눈을 나무의 굳음처럼 firm하게 꽉 감은shut 죽은 자]의 승리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공동체는 이 새로운 공동생활에 기뻐할 것이 있고, 환희(ecstatic) -죽음이라는 정지(static) 상태에서 벗어나서 인간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선포하는 것- 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계속 알리는 자리다.

Q.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왜 나무에 비유하시나? 나무가 하는 일은 무엇(또는 나무의 존재 이유)? 왜 하나님은 두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셨나?
A. (히브리)성서는 무엇을 말하려 할때 항상 "물질적"인 대상을 들어 표현한다.
하나님은 그가 좋아하는 사람 (rightousman, holy people, people of God)을 나무같이(로서) 표현하시고 좋아하신다.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창1:11). 모든 생산물이 나무로부터 온다 (창1장). 뿌리가 나무를 firm(solid)하게 한다. 나무는 물가에 심어져서 뿌리를 통해 물을 흡수하며 생명을 유지한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창6:14-) 노아 방주는 firm한 나무로 만들었다.
(겔37:20) the sticks.. it's the trees that is going to be firmly connected. 여기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firm하게 하는 나무 작대기.

인간은 나무가 아니라서 온 데를 돌아다니지만(창 3:7 - 동산에 거니시는 YHWH 하나님) 그래서 문제의 발단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이 spiritual함을 좋아하심.. 하늘과 땅을 연결짓는 것(나무, 사람)은 두 trees... your firmness and my firmness are based upon where somebody's hand.. make firm where somebody's hand..(창조자의 손)

Q. (창2: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네 강의 이름은?
A. (창2:11-15)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Q. 그 네 강이 흐르는 목적지는? 그리고 무엇을 하려 하는가?
A. four heads(areas)는 square의 네 모서리를 뜻하는것 아님. 강이 흘러가는 목적지를 가리키는 것.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계7:1)

Q. "river"의 뜻은?
A. (nahar) continuously flowing.. "water"

Q. 동사어근?
A. (nahar) to flow, to flow together, stream; to beam, shine, to give light, radiant
흐르고 넘치며 때로는 (홍수같이) 파괴적이고 압도적인 물의 흐름; 한편 빛에 대하여는 비침, 영롱함.

Q. 영적인 의미에서 "강물"이 뜻하는 바는?
A. 흐르는 물(생명); spirit

My spirit(s) come down like rain (water)...
For I will pour water upon him that is thirsty, and floods upon the dry ground: I will pour my spirit upon thy seed, and my blessing upon thine offspring (사44:3)
내가 메마른 땅에 물을 [부어] 주고 마른 땅에 시내가 [넘치게, 풍성하게] 흐르게 하듯이, 네 자손에게 내 영을 부어 주고, 네 후손에게 나의 복을 내리겠다. (새번역)
And it shall come to pass afterward (haya), [that]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flesh; and your sons and your daughters shall prophesy, your old men shall dream dreams, your young men shall see visions: (요엘2:28, 행2:17-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말씀하시되]" 라고 인용되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개역개정)

Q. The river that is in the middle of Eden surrounded by a garden(hedge) that waters something.. where does it go?
A.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사2:2 개역개정)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새번역)
And it shall come to pass (haya) in the last days, [that] the mountain of the LORD'S house shall be established in the top of the mountains, and shall be exalted above the hills; and all nations shall flow unto it. (사2:2 KJV)
..flow unto it.. something on the moving (has a purpose..) flow back into where it began.. (물밀듯 그리[원래]로 다시 모여들 것이다)

구원이란 回復한다는 것, 즉 (창조의) 원래대로 되돌아 (물밀듯) 모여드는 것.

참고로, 함 석헌 선생의 스승으로서 유명한 다석 유 영모 선생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을 뚜렷하게 [서 있게, 솟도록] 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굳게 서고 높이 솟아남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回光返照라는 말을 자주 했다는데, 니이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루터와 바울의 역설적 은혜론을 연상케 한다.

이원론자의 출발점인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서 이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은혜와 죄에 관한 그 근본적인 상황이 변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은혜는 하나님 안에 있고 죄는 인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만나와 같은 능력이 아니며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중개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행동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대결하는 역사적 완충지대를 넘어서 인간에게 도래한 화해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그 무엇이 그 은혜로운 행동에 감격한 바울이나 루터의 응답 속에 반사되더라도, 바울이나 루터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본다 할지라도 한 반영reflection으로 밖에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은혜스러움을 사람들이 자기 자신 안에 찾으려 할 때에는, 그것이 즉석해서 사라지고 맙니다. 마치 내가 나의 은인을 배반하고 그것이 나의 덕행이라고 생각할 때, 그 은혜끼친 이에대한 나의 감사가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석이 16세에 세례 받고 38년 후 回心하여 한 말;

옳은 이를 뵙자고, 참을 찾자고 반 백년 동안 목이 말랐었습니다. 누리를 하나되게 하실 이가 과연 누구일까요. 옳으신 그 어른이리니 우리 님이시여, 꼭 한 가지만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 나의 마음을, 이 만물보다 거짓된 나의 마음을 뿌리째 뽑아 버려 주옵소서. 그리 되오면 그 뿌리뽑힌 속의 속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샘물이 강이 되어 흐를 줄 믿겠나이다.

Q. (창2:11) 비손 Pishon의 어근의 뜻은?
A. (puwsh) scattering; distribution of
어디에다 distribute하는가? ..continuously spread itself (the Spirit of living God) out over this area.

Q. "하윌라 Chavilah 온 땅에 둘렸으며"의 뜻은?
A. (Chaviylah) circular기하학적 원이 아니고 pattern으로서 반복되는 형태. 히브리적으로는 패턴으로 나타나는 것, 반복되는 형태가 드러나는 것을 "영원"하다고 한다.
"둘렸으며"는 하윌라의 동사어근 (chuwl) to twist in circle; to dance; to whirl 인데, 하나님의 영이 circular (round)라고 불리는 곳으로 (패턴을 드러내며 춤추듯이) 감아돌아 흘러간다. 강이 계속적으로 spread itself out하며 돌아 흘러가는 곳이 하윌라.

Q. (창2:13) 두번째 강의 이름 "기혼 Gihon"의 뜻? 어디로 흘러가나?
A. (Giychown) bursting forth; to break forth
구스 (이디오피아 - 이 이름은 '대홍수' 후 나타남(고고학). 그러니 창세기의 이 부분을 '대홍수' 후에 쓰여졌다고 추정하는 것임)로 흘러감.

Q. "구스 Cush"의 뜻은?
A. (kuwsh) black; 아프리카 dark continent.. 온 세상 방방곡곡으로 흘러들어감.

Q. (창2:14) "힛데겔 Tigris Chiddekel"의 뜻은?
A. (Chiddeqel) rapid

Q. "앗수르 Assyria"의 뜻은?
A. ('Ashshuwr) 북 이라크. 그 동사 어근 ('ashar) to be straight, level, happy, honest, pure..

막1:3 등에 인용된 이사야서(40:3)의 말씀 "그의 첩경을 평탄케straight 하라" (물)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

Q. "유브라데 Euphrates"의 뜻은?
A. (Perath) 문자적 뜻은 "fruitfulness, sweet water"인데, break forth 어근 뜻을 가짐.

이 네째 강은 어디로 흘러가나 나오지 않았음!!

Q. 물이 break forth할 때 생기는 일은? 이 때 사람에 대해 물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A. (1) 하나님의 사람들 - 나무에게는 그 뿌리에 물(Spirit)이 끊임없이 공급됨으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2) 그러나 여기처럼 break forth하는 물은, 물이 창궐하거나 대군으로 질풍같이 쳐들어오는 군대(?) 같을 때, 계시록 12장에서 드래곤의 입에서 삼키려할 듯 나오는 쏟아져오는 물 [대홍수].

(계12:13) The dragon sent the waters to destroy the woman but the earth swallowed the water.. The dragon didn't succeed in conquering the woman, so what did he do?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계12:15)
이 첫번째 싸움에서 실패해서 드래곤이 그 여자 (12개의 별 -the house of Israel- 을 가짐)가 낳은 남자 아이 (예수 그리스도)와 싸움.. 여기 두번째 싸움에서 성공(?)하는데,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다 [또는, 죽음을 담당한다].

궁켈에 의하면 창세기는, 창조[order]를 통해 혼돈[chaos]을 물리친 1차 대전쟁의 언저리에, 헤지된 에덴동산의 사람이 앎[선 또는 악]을 주는 나무에서 사탄의 꾐에 빠져 에덴에서 좇겨나는 이야기를 통해, 패퇴한 잔당이 네 모퉁이 온 땅에 두루다니며 창조주의 자녀들과 싸우고 최후의 발악을 하는 현세의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 그러니까 창조된 상태 그대로 되돌아감[復]을 "구원"이라 할 때,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바, 소임 (잔당 소탕, 근데 이놈들이 원체 힘이 쎄서 -Archangel은 엘로힘과 맏먹는 능력을 가졌다- 우리의 싸움은 성전, 혹은 struggle (창32:28)이 되겠다)을 완벽하게 수행하면, 우리가 지금 삶을 영위하는 여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며,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내 안에 솟아나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내 집에서) 영원토록 思慕하게 하실 것이다.

Q. (창2:15-16) Did God not understand what He was doing, or is the lack of understanding our issue?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나?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물질적"이어서, 그것에 관련된 (상징적인) 무엇인가를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Q. "앎 knowledge"의 뜻은?
A. (det) cunning; cleaver.. knowledgible; perception; discernment; skill; understanding
게제니우스 렉치콘을 보면 아주 긴 설명이 나온다. 동사어근을 보면, 모든 7가지 동사형에 따른 각각의 쓰임새를 알 수 있다.

Q. 여기서 어떤 종류의 앎이 있는가? 누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차 있는가? 왜 그러한 지혜가 주어졌는가?
A. (출31:1-6)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knowledge 주어짐.

예언하여 이르기를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민24:15,16)

참고로 여기서 우리 성경에 "감았던 자" 밑에 주를 보면 "뜬자" 라고 나온다. 새번역에는 "뜬 사람"으로 했다!

두 상반된 종류의 knowledge: good or evil 선한 앎과 악한 앎이 있다. 앎 자체는 "선함"과 "악함"이 없다. good OR evil 이지 그 둘 사이에 회색지대란 없다. good AND evil은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못된evil 열매 맺는 좋은good 나무가 없고 또 좋은good 열매 맺는 못된evil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good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evil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눅6:43-45)

Q. 누가 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인가? 이는 유익한가? 만일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그 지식을 알기 원하지 않으셨는가? 어떤 종류의 지식을 알기 원하시고 어떤 종류의 지식을 거절하길 원하시는가?

Q. "evi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그 동사어근의 뜻은?
A. (ra' 여성형) "bad"; 동사어근: to break it pieces, break it apart, spoil, make it worthless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나무를 심어 놓으셨는데, 인간에게 묻기를, 어떤 "지식"을 갖기 원하느냐? Now we have this physical tree exist in the garden of Eden.. the first thing a man realize is..

God said "they have become like me".. what are they capable of doing now? they have knowledge of cunningness, discerning,..of destruction, separation,.. making a choice between good or evil.. among "키-토브"...

하나님은 "악함"을 이해하시는가? 악함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주의하고 계신가?
(창44:4-5) ..knowledge of evil -knowing how to do evil- "악으로 선을 갚느냐 rewarded evil for good"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사7:14-16)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For my people [is] foolish,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sottish children, and they have none understanding: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렘4:22)

I(YHWH) want you to have knowledge..

언제 하나님이 이 knowledeg를 주나?
After they take the tree of life… after wantingly, willingly believe..
In order to choose life, you must believe when God said you were challenged to choose..
Did we succeed? No!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thou shalt surely die (KJV)"

예수님이 죽음을 맞이하며 동일한 어투를 쓰셨는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예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서, 같은 말씀을 다시 하시면서, 세 번째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가까이 왔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마26:36-46)

창2:17절을 다시 표현하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선택하면 정녕 죽으리라".

예수께서, He that findeth his life shall lose it: and he that loseth his life for my sake shall find it. (KJV)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10:39 새번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막8:35)

自由意志

여기서는 마가복음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첨가되었다? 아마 마태복음은 유태인적인 것으로, "복음"이라는 정형화된 또는, 그 당시 초대교회 내에서 "심화된" 예수의 말씀이라 판단하여 뺏을까?.. 여하간, 이 말씀의 구조가 "태초"에 YHWH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과 동등한데, 예수님은 이렇게 사용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근심하시고 죽을 지경까지 괴로와 하시며 죽음을 "선택"하셔서 삶을 얻으셨다. 더우기 이 말씀의 전후 문맥(베드로의 고백과,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파악하면, 그 은혜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 달려 높이 우뚝 선 주님의 영광이, 찬란히 세세토록 온 천하 만민에게 빛날지어다!

Adam!
In order for you to have life, you are to choose me unto your death.
Do you believe me, 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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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February 16, 2009

as touching the dead, that they rise: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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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과 끊임없이 논쟁하신 것으로 증언합니다. 그들 유대교 지도자들이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로 대표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영혼은 영원불멸하다"고 믿는 반면, 사두개인들은 "영혼이 불멸하지 않고, 육체가 죽을 때 그와 더불어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The Wars of the Jews)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세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as touching the dead, that they rise:(KJV)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막12:18-27)

신명기 25장 5절 이하, 레위의 혼례법 (the law of levirate marriage, levirate = brother-in-law)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발해의 형사취수兄死取嫂를 연상케합니다.

사두개인들은 "그의 형을 위하여 자식을 낳는"(19절) 동서의 의무를 인용하였는데, 여기서 쓰인 헬라어 동사는 부활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사람이 그의 자손을 통해 이어가는 '생식生殖'의 부활을 의미한 듯 합니다.

또한 레위의 혼례법을 인류의 사회발전史의 한 측면에서 보면, 가부장적 사회에서 형사취수에 따른 부계로의 재산상속과 관련된 경제적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좀 더 직접적인 '신학적' 측면을 살펴봅니다.

인용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 중 모세와 관련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요? 구약성서의 모세와 관련된 사건 중 '부활'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 나오지요?

여기서 언급된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은 출애굽기 3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새번역)
Moreover he said, I [am] the God of thy father,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출3:6 KJ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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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3:14)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KJV)

YHWH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모세)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신 자체가 "죽은자의 살아난다는 것"(눅20:37)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이 전적으로 동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20:39).

누가복음에 나오는 동일한 에피소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말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개역개정)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새번역)
For he is not a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all live unto him. (KJV) (눅20:38)

부활과 같이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의 참 뜻을 헤아려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현존하시는 하나님-예수님과 교제한다는 것,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를 예수께서 응답하신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세상'에 사는 인간이 '이세상'이 갖는 '죄'된 속성과 관련이 없는 어떤 '신적인' 대상과 어떻게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가? '이세상'과 '저세상' 또는 '육체'와 '영혼' 같은 이원론적 사유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인간됨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어떻게 교통하는가에 대해 다음의 변론에 나와있습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을 다하고 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An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KJV)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 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막12:28-34)

여기서 인용된 구약성서의 말씀은 각각 신명기 6장과 레위기 19장에서 인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4-5)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An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ine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ght. (KJV)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19:18)

예수님은 그 중요한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첫째와 셋째의 '마음'과 '힘'은 정확히 쿠오트하셨지만, 둘째 것 '성품'을 '목숨'과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성품=목숨+뜻] 으로 '암송'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의향을 여기에 쓰인 원문의 단어와 그 쓰임새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성품 (신6:5) נפש nephesh

숨쉬는 기관(욥41:13 아가미?) 또는생명력-생동감(창1:20, 30)을 지칭하는 말로 다양하게 쓰였는데, 입맛, 몸, 호흡, 욕망, 기꺼움, 마음, 삶, 욕정, 사멸, 쾌감, 열정 등이 있는[나오는] (몸이나 정신적인) 곳[기관]으로서, 문자적으로 또는 빗대어서 사용되었습니다. [Strong's H5315]

BDB (Brown-Driver-Briggs) 히브리어 사전에서는,
1) 살아 숨쉬는- soul, self, life, creature, person, appetite, mind, living being, desire, emotion, passion 으로 쓰였습니다.
1a) the breathing substance or being, soul, the inner being of man 숨쉬는 것, 인간의 내적 존재
1b) living being 생물체
1c) living being (with life in the blood) (피를 가진) 생물체
1d) the man himself, self, person or individual 그 자신, 자아, (개체적) 인격
1e) seat of the appetites 맛을 감지하는 기관
1f) seat of emotions and passions 감정과 열정이 나오는 곳
1g) activity of mind, will or character 마음, 의지, 성품의 활동

목숨 (막12:30) ψυχη psuche [G5590]

breath, that is, (by implication) spirit, abstractly or concretely (the animal sentient principle only 실체적 또는 추상적으로 동물적 정서의 원천으로서만의 호흡 또는 정신; 그래서 합리적이고 영원불멸하는 영혼을 뜻한 [성령 Strong’s G4151]과는 다릅니다. 이는 신명기6:5의 성품[H5315]과 정확히 대응되는 그리스어입니다. 생동감 나는- heart, life, mind, soul.

Thayer's Greek 사전에서는,
1) breath 호흡, the breath of life 생물의 호흡;
the vital force which animates the body and shows itself in breathing
동물(인간)의 몸이 생명력을 나타내는 증거로서의 호흡
a living being, a living soul that in which there is life
생명력이 깃든 살아있는 존재와 혼
2) the soul 영혼
the seat of the feelings, desires, affections, aversions (our heart, soul etc.)
(마음 영혼등으로 표시되는) 욕망 호감 혐오같은 열정과 감정들이 나오는 곳으로서의 영혼

(막12:30) διάνοια dianoia [G1271]

심사숙고 deep thought; (마음의) 능력 또는 작용, 의지; 실례에서 이 단어가 내포하는 바는, 심사숙고하는 데서 나오는 상상력과 이해력.

1) the mind as a faculty of understanding, feeling, desiring
앎 느낌 바람(욕구)이 작용하는 능력으로서의 마음
2) understanding 이해력
3) mind, i.e. spirit, way of thinking and feeling
마음 즉, 사고와 감각의 방도로서의 정신
4) thoughts, either good or bad (좋고 나쁜) 생각

서기관이 사용한 '성품'에 해당하는 '지혜 understanding(KJV)'라는 단어의 사용이 흥미로운데, 그들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어휘의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뜻'을 첨가한 것을 알아채고 그 말씀을 받아서 응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혜 understanding (막12:33) σύνεσις sunesis [G4907]

지적인 종합능력 a mental putting together, 즉, 지능, 지식과 이해력.
1) a running together, a flowing together with
(지적인 발전사항을) 같이 잘 따라감, 이해함.
2) knowledge; the understanding, i.e the mind so far forth as it understands
지식; 알 수 있는 데까지 이해한 상태의 발현

여하간 이경우에도, '지혜 또는 영(적)지(혜) gnosis' 와는 다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에 여러번 사용되었지만 (요13:35) 명사적(개념적)으로 쓰인 이경우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의 동사어근 ginosko는 관계 속에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자가 남자를 안다고 할 때도 쓰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응답;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막12:34)"에서의 '지혜'는 KJV에서 "He answered discreetly"라고 했듯이, 상기의 '성품(신명기)' '목숨과 뜻(마가)' '지혜(서기관)' 들과는 전혀 상관 없는 말로서, '슬기롭게'라고 번역하면 더 좋습니다 (새번역).

욕망이든 지식이든 육체든 영혼이든 간에, 이들을 '건반의 키'로 하여 어떤 '곡조'가 울려나게하는가에 진실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도 그 '곡조' 자체가 아니고 그 배후에 있는, 매일매일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운데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는 struggle 자체가 하나님께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C.S. Lewis, 순전한 기독교)

기왕에 심사숙고하는 참에, 예수님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as touching the dead, that they rise:(KJV)" 라고 해석하신 신명기의 사건 - YHWH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나타난 말씀의 樣式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의 요한복음에서 인용된 말씀의 구조를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6:35a)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새번역)
And Jesus said unto them, I am the bread of life: (KJV)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1:25a)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새번역)
Jesus said un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KJV)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요6: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시니, (새번역)
But he saith unto them, It is I; be not afraid. (KJV)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8:5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새번역)
"Jesus said unto them, Verily, verily, I say unto you, Before Abraham was, I am. (KJV)

새번역(2001년 개정)이 원문의 중요한 표현법을 잘 반영했습니다.

주님이 --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당신의 현존함을 드러내시고 듣는 자의 응답 또는 결단과 복종을 지금-여기에서 요구하십니다.

상기의 요한복음 8장 후반부에서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The sam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 thing made that was made.

여기서 다시 마가복음의 '부활'에 관한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으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해석을 들어보시고, 그것이 지칭하는 출애굽기 3장의 떨기나무 이야기에서 '부활'을 찾아보십시요!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as touching the dead, that they rise:(KJV)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막12:18-27)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새번역)
Moreover he said, I [am] the God of thy father,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출3:6 KJV)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3:14)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KJV)

출애굽기 3장의 떨기나무 이야기에서 히브리어의 haya 동사[H1961] - YHWH의 동사어근 -에 대한 전체적 이해 속에서 만이 예수님의 해석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예수님을 걸고넘어가던 서기관[율법학자]을 위시한 반대자들도 그 해석에 동의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링크의 haya에 대한 설명, 특히 가운데 Gesenius사전의 긴 설명에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Ratschow의 Werden und Wirken을 구글하셔서 참조하시기를... 한국말로 번역된 토틀라이프 보만 저, 허 혁 옮김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분도출판사)에 haya에 대한 설명도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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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anuary 5, 2009

Film, Balette, 그리고 對談 하나.



Carmina Burana는 1803년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발견된 200여편의 라틴어 또는 옛 독일어로 쓰여진 13세기 유럽의 詩입니다.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고, 내용도 종교적인 것들이 많다고 하는데(하기야 중세시대에 종교적이 아닌게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사실은 교회 또는 교회의 도덕률을 비꼬거나 풍자하는 아주 "세속"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Carl Orff가 1937년 이 시들을 대본으로 작곡한 합창곡을 영화로 만든 것과 발레 공연을 보셔요. Carl Orff는 나찌였다 하고(흠...), 베를린 올림픽 때 개막공연의 음악을 담당했다고도 합니다.

Carl Orff가 인용한 Carmina Burana의 내용이 궁금하시면 여기를 보셔요.

"O Fortuna" 가장 유명한 듯 한데, 이걸 보면 영문번역과 함께 음악을 감상하게 됩니다.

Film:

1/9


2/9, 3/9, 4/9, 5/9, 6/9, 7/9, 8/9, 9/9


Balette:



2, 3, 4, 5, 6, 7, 8, 9, 10, 11, 12, 13-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25


다음은 The Question of God: C.S. Lewis and Sigmund Freud라는 제목으로, 루이스와 프로이드의 전기를 보여주며 사이사이에 하버드 의대 심리학자 Armand Nicholi의 사회로 각계각층 사람들과의 대담을 엮은 2004년 가을 PBS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입니다.

Part I: 1/7



Part I: 2/7, 3/7, 4/7, 5/7, 6/7, 7/7

Part II: 1/6, 2/6, 3/6, 4/6, 5/6, 6/6

Part III: 1/6, 2/6, 3/6, 4/6, 5/6, 6/6

Part IV: 1/6, 2/6, 3/6, 4/6, 5/6, 6/6


루이스와 Joy에 대한 영화: Shadowlands (Anthony Hopkins 주연)



Part 2, 3, 4, 5, 6, 7, 8, 9, 10, 11, 12, 13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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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20, 2008

순전한 기독교 - C.S. 루이스

Mere Christianity - C. S. Lewis

이 책은 지은이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BBC방송을 통해 평신도 및 무신론자들을 위해 강의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그 후 저자는 기독교인이 당면한 문제, 기독교인으로서의 행위, 인격을 초월한 존재 등 세 권의 책을 한 권으로 펴냈습니다. 이 책은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가치관,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의 행위, 인간의 사념을 초월한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지은이는 기독교나 가톨릭, 혹은 성공회 등 일정 교파의 소속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그야 말로 "순수하게 예수 믿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힙니다.

다음의 YouTube를 보시면 이 책을 쓰게된 배경과 입장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YouTube 사이트에 가시면 책 전체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1898년 북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자서전 아닌 (유일한) 자서전 Surprised by Joy: The Shape of My Early Life (1955)을 보면, 1895년 생인 형 Warren Hamilton Lewis와 친구처럼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낸 듯 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지만 아버지가 책읽기를 좋아해서 온 집안에 돌아다니는 책을 닥치는대로 읽으며 아주 어린나이에 그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놀았다고 합니다. 1908년 어머니가 병사하고, 그 후 아버지에 의해 보딩스쿨에 보내져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1917년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지만 곧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서 참전하게되고, 1918년 전장에서 부상을 당하여 1919년 제대합니다. 그후 옥스포드 대학으로 돌아가서 Greek, Latin, 영문학, 철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우등으로 졸업한 후,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중세 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면서 소설, 평론, 동화 들을 썼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강사로 지내며 옥스포드 대학 교수이자 Lord of the Ring의 저자 J.R.R. Tolkien과 "The Inklings"이란 문학회를 만들어 친하게 지냈습니다. 29년간 Oxford대학에서 재직하다가 1955년부터 Cambridge 대학의 교수직을 맡게됩니다. 1950-56년 사이에 <나니아 연대기 The Chronicles of Narnia>를 쓰는데,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동화이며, 전세계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책 중의 하나입니다. 1956년 Helen Joy Davidman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공산주의자이자 무신론자이었습니다. 당시에 Joy가 영국 체류권을 따기위한 수단으로 결혼했다는 비난이 있었지만, 결혼생활은 견실했고 법적인 결혼식 후 기독교적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그 결혼식은 투병중인 아내 Joy의 병상에서 거행됐고, 잠간 회복했지만 결국 1960년에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루이스 자신의 건강도 악화되어 1963년 64세의 나이로 주님께로 돌아갔습니다.

C.S. 루이스의 마지막 인터뷰 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C.S.루이스가 BBC 방송에서 행한 대담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이랍니다. 그의 육성으로 직접 들어보셔요.




이건 C.S. Lewis: My Life's Journey라는 제목으로 David Payne이 루이스의 삶과 그의 시대를 연기한 것입니다.



이건 The Question of God: C.S. Lewis and Sigmund Freud라는 제목으로 행한 하버드 의대 심리학자 Armand Nicholi의 강연입니다.

2004년 가을 PBS에서 같은 제목으로 방영된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Part 1 <-- 이건 part 1의 1/7인데 잘 찾아다녀야 합니다.




책 목차

1.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인간의 본성의 법칙
--몇 가지 반론
--이 법칙의 실재성
--이 법칙의 배후에 있는 것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2.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하나님의 침공
--충격적인 갈림길
--완전한 참회
--실제적인 결론

3. 그리스도인의 행동
--도덕의 세 요소
--기본 덕목
--사회도덕
--도덕과 정신분석
--성도덕
--그리스도인의 결혼
--용서
--가장 큰 죄
--사랑
--소망
--믿음

4.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만드는 것과 낳는 것
--삼위이신 하나님
--시간과 시간 너머
--좋은 전염
--고집센 장난감 병정들
--몇 가지 부연 설명
--가장합시다
--기독교는 쉬울까, 어려울까?
--대가를 계산하기
--호감 주는 사람이냐, 새 사람이냐
--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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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13, 2008

St. Symeon the New Theologian: The Three Methods of Prayer



세 가지 기도 방법

St. Symeon the New Theologian

엄성옥, 필로칼리아 4 (서울: 은성, 2008), pp. 88-102.


그리스 교부들 중에서 신 신학자 시메온(949-1022)만큼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의 제자인 니키타스 스티타토스(Nikitas Stithatos)가 저술한 전기가 있을 뿐 아니라, 시메온 자신의 저술에서 생생한 개인적인 언급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정교회의 신비적 전통에서의 영적 아버지 제도의 중요성을 예증해준다. 시메온은 소아시아의 지방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11살 때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삼촌에게로 보내졌다. 부모들은 그가 장래에 황실에서 근무하기를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14세 때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스튜디오스 수도원 소속의 "경건한 시메온"이라는 수도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일은 그의 미래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젊은 시메온의 영적스승이 된 경건한 시메온(St. Symeon the Studite, c.917-986/7)은 사제로 서임되지 않은 평신도 수도사였다. 동방 기독교에서는 종종 수도회에 속하지 않은 수도사들이 영적 지도 사역을 행했으며, 때로는 수녀들이나 수도사가 아닌 사람들도 영적 지도를 행했다. 신 신학자 시메온은 특히 사제가 아닌 수도사들이 고해성사를 받고 사죄를 행하는 것을 옹호하는 논문을 저술했다.

경건한 시메온의 지도를 받으면서 젊은 시메온의 기도 생활은 급속하게 발달했다. 그는 아직 세속생활을 하고 있던 20살쯤 때에 처음으로 피조된 것이 아닌 거룩한 빛의 환상을 받았고, 그 후 일련의 그러한 환상들을 받았다. 그는 다시 세속적인 생활을 하다가 977년에 스튜디오스 수도원에 수련수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경건한 시메온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 데 분개한 그 공동체의 수도사들 때문에 그는 일 년이 못되어 그곳을 떠나야 했다. 영적 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은 그를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성 마마스(St. Mamas)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수도사가 되었고, 980년경에 사제직에 서임되고 25년 동안 수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 수도원은 쇠퇴하고 있었지만, 그의 지도하에 크게 부흥했다 성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영적 스승으로 유명해졌고, 많은 유명한 평신도들이 그를 찾아와서 죄를 고백하고 조언을 구했다. 성 시메온은 자기의 지도를 받는 수도사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목자였다. 동시에 그는 표준을 높이 두고 따르는 "열성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수도사들이 자주 성찬을 받기를 기대했고. 경건한 시메온의 가르침을 좇아 성찬을 받을 때에는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지나친 기대 때문에 996-8년에 수도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시메온은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화해하는 데 성공했다. 몇 년 후 그의 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이 사망했을 때 시메온은 공개적으로 그를 성인으로 기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수도원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교회 당국자들에게 고발했다. 시메온은 평신도 고해 성사에 관한 가르침 때문에 의심을 받았다. 이처럼 계속되는 공격 때문에 시메온은 1005년에 대수도원장 직을 사임했다. 그는 4년 후인 1009년에 총대주교와 성의회(Holy Synod) 앞에서 재판을 받고, 보스포로스 해안에 있는 팔로우키톤으로 유배되었다. 이 판결은 곧 취소되었고 그는 다시 주교직에 복귀되었지만, 그는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유배지에서 살다가 1022년 3월에 사망했다.

추종자들이 그에게 "신 신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한 것을 볼 때, 그는 매우 존경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신학자"라는 용어는 오늘날과 같은 학문적인 의미가 아니라 기도의 사람(a person of prayer), 직접적인 경험에 기초를 두고서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정교회에서 시메온의 시대 이전에 "신학자"라는 호칭은 주로 복음서 기자 요한, 그리고 동방교회에서 세 명의 위대한 고위 성직자들 중하나로 존경받는 인물로서 관상적인 시들을 저술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에게만 사용되었다. 시메온이 "신 신학자"라고 불린다는 것은 그가 이 두 사람들과 함께 내적 기도의 전승에 대한 신실한 증인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메온은 이러한 경험적인 의미에서 "신학자"일 뿐 아니라 신비생활의 "선교사"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상적인 연합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또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들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환상들에 대해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같은 죄인을 이처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위해서는 더 큰 긍휼을 행하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가장 좋은 것이 여러분모두의 것이 될 것입니다."

성 마카리우스와 성 니코데무스는 성 시메온의 저술들 중에서 두 편을 이 책에 수록했다. 첫 번째 저술인 『사랑에 관하여』(On Love)는 시메온이 성 마마스의 대수도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도사들에게 행한 설교들이나 교리문답 중 하나이다. 그는 여기에서 조지(George)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의 내면생활에 대해서 삼인칭으로 이야기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청년은 시메온 자신이라고 여겨진다. 조지라는 이름은 그가 수도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사용했던 세례명이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거룩한 수도사"라고 지칭한 그의 영적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드러내준다. 젊은 시메온은 고행자 마가(Mark the Ascetic)의 글을 읽으면서 특히 "너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라"는 명령, 그리고 "성령의 능력들"에 대한 언급에 감명을 받았다.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신 신학자의 가르침의 중심사상들 중 하나이다. 그는 최초로 하나님의 빛을 보면서 기쁨을 눈물을 흘린 것에 대해 묘사하면서, 그 일이 자신이 세상적인 분심거리들로 인해 번잡한 평신도 시절에 발생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외적인 상황과는 상관없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관상의 고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 작품인 『153편의 실질적이고 신학적인 본문들』(One Hundred and Fifty-Three Practical and Theological Texts)은 여러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복합적인 글이다. §§1-118은 신 신학자의 226편의 본문들 중에서 취한 것이고, §§119-52는 신 신학자의 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의 글이다. §153의 첫 부분은 니키타스 스티타토스가 저술한 신 신학자의 전기 §31에서 취한 것이다.

신 신학자의 저술들 중에서 취한 부분에서는 그가 즐겨 사용한 여러 가지 주제들이 언급된다: 거룩한 빛(§§68, 105-6), 눈물의 은사(§§67,69), 성령을 의식적으로 경험해야 할 필요성 (§85), 영적 스승의 사역(§§6-19, 38-9, 41). 수도사들에게 과거의 모든 연결고리들, 특히 가족들과 완전히 결별할 것을 요구한 데서 시메온의 엄격함이 분명히 나타난다(§§3-8). 한편 그는 개인의 소명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추상적으로 어떤 형태의 삶이 다른 형태의 삶보다 더 고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들면, 은둔 생활이 공주(公住) 생활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각 사람에게는 각기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은 특별한 길이 가장 선하고 고귀한 삶의 형태이다(§§88-92). 사막에 거주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결혼하여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관상의 고지에 다가갈 수 있다.

경건한 시메온의 저술인 그 뒤의 본문에서는 스튜디오스 수도원만큼 조직적인 큰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저자는 엄격한 가난, 자기 의지의 근절,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단순성, 불필요한 분규에 얽히는 일을 피할 것 등을 강조한다. 그는 양심의 가책은 속죄의 고행이 아니라 즐거운 경험이 되어야 한다는 것(§140), 하나님의 빛을 보는 것(§150), 영적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 (§§129, 141) 등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것들은 후일 그의 제자인 신 신학자 시메온이 발달시킨 주제들이다. 경건한 시메온은 사랑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사랑이 기도보다 더 위대하다"(§143)라고 표현한다. 신 신학자 시메온도 이 말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6l).



신 신학자 시메온의 것으로 간주되는 글:

"세 가지 기도 방법"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cf Corinth,

The Philokalia.




개 론


『거룩한 기도와 경청의 방법』(Method of Sacred Prayer and Attentiveness)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짧은 글에서는 예수기도와 결합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정신 신체적 기법을 권한다. 이 글은 적어도 14세기부터 신 신학자 시메온의 저술로 간주되어 왔지만, 1927년 이후로 저자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하우세르(Irénée Hausherr)는 이 글과 니키포로스(Nikiphoros)라는 수도사의 논문 정신 신체적 기법을 어느 정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깨어 있음과 마음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On Watchfulness and the Guaring cf the Heart) 사이에 비슷한 구절들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니키포로스가 이 두 글의 저자라고 결론짓는다. 실제로 니키포로스가 『세 가지 기도 방법』의 저자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전통적으로 신 신학자 시메온을 저자로 여기는 데에는 적어도 한 가지 참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만일 이 글이 시메온의 것이 아니라면, 그의 제자들의 것일 것이다. 당분간 이 글의 정확한 저술 연대와 출처는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다. 성 마카리우스와 니코데무스가 이 저서를 현대 그리스어로 의역했으며, 현재 우리의 번역본은 하우세르의 원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세 가지 기도 방법』의 중심 주제는 마음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다. 저자는 자신이 묘사하는 처음 두 가지 기도 방법은 불완전하며, 마음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위험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다. 이 글을 비롯하여 다른 글에서 사용되는 "마음"(heart)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감정과 성정(性情)뿐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완전체로 간주된 인간의 영적 중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글에서 저자가 말하는 마음이란 "영혼의 모든 능력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세 가지 기도방법』의 저자는 마음을 지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특징을 포함하는 정신 신체적 기법을 제안한다: 첫째는 턱을 가슴에 대고 배꼽을 응시하는 자세 , 둘째는 호흡을 제어하여 서서히 속도를 늦추는 것 ; 셋째는 지성이 내면을 탐색하면서 마음의 장소를 찾는 것. 이것은 예수기도와 병행하기 보다는 예수기도에 선행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예수기도를 행하기에 앞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돕기 위한 선행 활동이 되어야 한다.

현대 서방의 저자들은 이 정신 신체적 기법을 요가나 수피즘에서 사용되는 방법들과 비교해왔지만, 그것들 사이의 유사한 점들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기도 방법』의 저자는 이 기법을 특별히 기독론적인 배경 안에 둔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기도를 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데 있다. 그러한 기법을 잘못 사용할 때에는 육체적인 건강과 영적인 건강에 심각한 해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채택되어야 한다. 『세 가지 기도 방법』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잘못이 없는 확실한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적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정교회 내의 거의 모든 교사들은 정신 신체적기법은 노련한 교사의 개인적인 지도하에서만 실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육체적인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도 예수기도를 완전히 실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간단히 설명된 기법은 인간에 대한 건전한 교리에 의존하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옹호될 수 있다. 그레고리 팔라마스(St. Gregory Palamas)는 인간은 몸과 영혼의 통일체라고 지적하는데, 그것은『세 가지 기도 방법』의 서두에서도 분명히 진술된다. 몸은 우리의 완전한 개성의 본질적인 측면이므로 기도할 때에 등한시 되거나 무시하지 말고 역동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세 가지 기도방법

서문

There are three methods of prayer and attentiveness, by means of which the soul is either uplifted or cast down. Whoever employs these methods at the right time is uplifted, but whoever employs them foolishly and at the wrong time is cast down. Vigilance and prayer should be as closely linked together as the body to the soul, for the one cannot stand without the other. Vigilance first goes on ahead like a scout and engages sin in combat. Prayer then follows afterwards, and instantly destroys and exterminates all the evil thoughts with which vigilance has already been battling, for attentiveness alone cannot exterminate them. This, then, is the gate of life and death. If by means of vigilance we keep prayer pure, we make progress; but if we leave prayer unguarded and permit it to be defiled, our efforts are null and void.

기도와 경성警省(醒)과 관련된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영혼은 이것들에 의해서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 방법들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지만, 부적절하고 어리석게 사용하는 사람은 아래로 떨어집니다. 깨어 경계하는 것과 기도는 몸과 영혼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경계함은 죄와의 전쟁에서 정찰병처럼 선두에 섭니다. 그 뒤에 기도가 따르면서 깨어 경계함과 이미 교전하고 있는 모든 악한 생각들을 즉시 파하고 근절합니다. 주의를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악한 생각들을 근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사의 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경계함으로써 기도를 순수하게 보존한다면 진보하지만, 기도를 지키지 않고 버려두어 더럽혀지는 것을 허용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헛되고 무익하게 될 것입니다.

Since, then, as we said, there are three methods of attentiveness and prayer, we should explain the distinctive features of each, so that he who aspires to attain life and wishes to set to work may with firm assurance select what suits him best; otherwise through ignorance he may choose what is worse and forfeit what is better.

경성과 기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으므로, 생명을 얻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알맞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각각의 방법의 특징을 설명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무지로 말미암아 좋은 것을 박탈당하고 좋지 못한 것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기도 방법

The distinctive features of the first method of prayer are these. When a person stands at prayer, he raises hands, eyes and intellect heavenwards, and fills his intellect with divine thoughts, with images of celestial beauty, of the angelic hosts, of the abodes of the righteous. In brief, at the time of prayer he assembles in his intellect all that he has heard from Holy Scripture and so rouses his soul to divine longing as he gazes towards heaven, and sometimes he sheds tears. But when someone prays in this way, without him realizing it his heart grows proud and exalted, and he regards what is happening to him as the effect of divine grace and entreats God to allow him always to be engaged in this activity. Such assumptions, however, are signs of delusion, because the good is not good when it is not done in the right way.

첫 번째 기도방법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서서 두 손과 두 눈과 지성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리며, 자신의 지성에 거룩한 생각들, 천상의 아름다움과 천군들과 의인들의 거처에 관한 심상들로 채웁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기도할 때에 거룩한 성경에서 들은 모든 것을 지성 안에 모아 정리하며, 하늘을 응시하면서 영혼을 고양시켜 거룩한 것을 갈망하게 하며, 때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서 자기의 마음이 우쭐대고 교만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에게 발생하는 것을 거룩한 은혜의 결과라고 여기며, 항상 이러한 활동에 자신이 개입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식으로 행해지지 않는 선은 선이 아니므로 그러한 태도는 망상의 표식입니다.

If, then, such a person is pursuing a life of stillness and seclusion, he will almost inevitably become deranged. And even if this does not happen to him, it will be impossible for him to attain a state of holiness or dispassion. Those who adopt this method of prayer have also been deluded into thinking that they see lights with their bodily eyes, smell sweet scents, hear voices, and so on. Some have become completely possessed by demons and wander from place to place in their madness. Others fail to recognize the devil when he transforms himself into an angel of light (II Corinthians 2:14); and, putting their trust in him, they continue in an incorrigible state of delusion until their death, refusing to accept the counsel of anyone else. Still others, incited by the devil, have committed suicide, throwing themselves over a precipice or hanging themselves. Indeed, who can describe all the various forms of deception employed by the devil? Yet from what we have said any sane person can understand the kind of harm that may result from this method of attentiveness. Even if someone who has adopted this method may perhaps avoid the evils we have mentioned because he lives in a community -- for it is solitaries who are especially subject to them -- none the less he will pass his entire life without making any progress.

그러한 사람이 침묵의 은둔생활을 추구한다면, 필연적으로 정신착란될 것이며,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해도 거룩함이나 무정념의 상태에 도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방식을 채택하는 사람들은 미혹되어 자신이 육체적으로 빛을 보고 향기를 맡고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완전히 귀신에게 사로잡혀 미쳐서 사방으로 배회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를 알아보지 못하고(고후 11:14) 그를 신뢰하여 죽을 때까지 미혹되어 구제불능의 상태에 머물면서 어떤 사람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한, 마귀의 선동을 받은 사람들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목을 매어 자살하기도 합니다. 마귀가 사용하는 다양한 형태의 속임수를 어떻게 모두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첫 번째 집중의 방법이 초래하는 해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방법을 채택한 사람이 한 공동체 내에서 살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해악들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 은둔자가 이러한 해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 그의 평생은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독거자들은 특히 그러한 해를 입기 쉽습니다).

두 번째 기도 방법

The second form of prayer is this. A person withdraws his intellect from sensory things and concentrates it in himself, guards his senses, and collects all his thoughts; and he advances oblivious of the vanities of this world. Sometimes he examines his thoughts, sometimes pays attention to the words of the prayer he is addressing to God, and sometimes drags back his thoughts when they have been taken captive; and when he is overcome by passion he forcefully strives to recover himself.

두 번째 기도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기도자는 지성을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거두어들이고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하여, 자신의 감각들을 지키고, 모든 상념을 한곳에 모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의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때로는 자기의 생각들을 성찰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자신의 기도말에 귀 기울이며, 때로 상념들에게 사로잡힌 생각들을 되찾아오며, 또 자신이 상념에게 압도당할 때에는 회복하기 위해 힘껏 노력합니다.

One who struggles in this way, however, can never be at peace or win the crown of victory. He is like a person fighting at night: he hears the voices of his enemies and is wounded by them, but he cannot see clearly who they are, where they come from, and how and for what purpose they assail him. Such is the damage done to him because of the darkness in his intellect. Fighting in this manner, he cannot ever escape his noetic enemies, but is worn out by them. For all his efforts he gains nothing. Falsely imagining that he is concentrated and attentive, he falls victim unawares to self-esteem. Dominated and mocked by it, he despises and criticizes others for their lack of attentiveness. Imagining that he is capable of becoming the shepherd of sheep, he is like the blind man who undertakes to lead the blind (Matthew 15:14).

그러나 이런 식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결코 평화나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치 컴컴한 밤에 싸우는 사람과 같아서, 원수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지만,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오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공격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그는 지성 안의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피해를 입습니다. 이런 식으로 싸우기 때문에 그는 정신(理性으로 이해되는)적인 원수들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며, 그들에 의해 기력을 소모합니다. 그는 노력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집중하고 경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지중에 자만에 빠집니다. 그는 자부심의 지배와 농락을 당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이 부족한 것을 멸시하고 비판합니다. 그는 자신이 양들의 목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마치 소경을 인도하는소경처럼 됩니다(마15:14).

Such 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second method of prayer, and everyone one striving after salvation can see what harm it does. Yet this second method is better than the first, just as a moonlit night is better than a night that is pitch-dark and starless.

이것이 두 번째 기도 방법의 특징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노력하는 사람은 이 방법이 끼치는 해로움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별도 없는 어두움보다는 달빛이 낫듯이, 이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 방법보다 낫습니다.

세 번째 기도방법

Let us now begin to speak about the third method of prayer, which is truly astonishing and hard to explain. For those ignorant of it, it is not only difficult to understand but virtually incredible, and there are very few to be found who practice it. It seems to me that it has deserted us along with the virtue of obedience. For it is the love of obedience that delivers us from entanglement with this evil world, rendering us free from anxiety and impassioned craving. It makes us wholehearted and unflagging in pursuit of our aim -- provided, of course, that we find an unerring guide. For if through obedience you make yourself dead to every worldly and bodily attachment, how can anything transient enslave your intellect? If you entrust all the care of your soul and body to God and to your spiritual father, no longer living for yourself or desiring the good opinion of others, what anxiety can distract you?

이제 세 번째 기도 방법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랍고 설명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믿을 수도 없으며, 그것을 연습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우리는 복종의 덕과 함께 이 기도 방법을 상실한 듯합니다. 복종에 대한 사랑은 악한 세상과 뒤얽혀 있는 우리를 구해주고 걱정과 상념에 물든 갈망으로부터 자유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우를 범치 않는 안내자를 발견하기만 한다면야, 우리로 하여금 지칠 줄 모르고 전심전력을 다해 목표를 추구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복종을 통해서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애착에 대해 자신을 죽인다면, 어찌 무상한 것들이 당신의 지성을 사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거나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끄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몸과 영혼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과 영적 아버지께 전적으로 맡긴 사람이 어찌 근심에 시달릴 수 있겠습니까?

This third method, then, destroys the invisible wiles of the demons, with which as with ropes they seek to drag down the intellect into all manner of devious thoughts. Set at liberty, the intellect wages war with its full strength, scrutinizing the thoughts insinuated by the enemy and with masterful dexterity expelling them, while the heart in its purity offers prayers to God. This is the beginning of a life of true seclusion, and those who fail to make such a beginning exhaust themselves in vain.

이 세 번째 방법은, 마귀들이 지성을 온갖 교활한 생각들로 끌어들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궤계들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순결한 마음(심장)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안, 자유하게된 지성은 전력을 발휘해 싸우면서, 원수가 은근히 심어준 생각들을 면밀히 검사하여 완벽한 솜씨로 그것들을 몰아냅니다. 이것이 참된 은둔생활의 출발점이며, 이런 식으로 출발하지 못하는 사람은 헛되이 노력을 소진합니다.

The starting point of this third method of prayer is not to gaze upwards, to raise one's hands aloft, to concentrate one's thoughts and to call down help from heaven. These, as we said, are the marks of the first form of delusion. Nor does it begin, as the second method does, by keeping guard over the senses with the intellect, while failing to observe the enemies who attack from within. In such a case, a person is struck by the demons instead of striking them; when wounded he is unaware of it; taken captive, he cannot retaliate against his captors. His enemies constantly attack him, and from behind and even face to face, and fill him with self-esteem and arrogance.

이 세 번째 기도 방법의 출발점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생각을 집중하며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첫 번째 형태의 허상의 표식들입니다. 또 그것은 두 번째 방법처럼 내면에서 공격하는 원수들을 관찰하지 못한 채 지성을 사용하여 감각을 지킴으로써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행하는 사람은 마귀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귀들에게 공격 당하게 되며, 상처를 입어도 의식하지 못하며, 잡혀도 자기를 사로잡아오는 자에게 반격하지 못합니다. 원수들은 끊임없이 배후에서, 심지어 직접 대면하여 공격하면서 그에게 자부심과 오만을 채워줍니다.

If you desire to embark on this light-giving and joyful task, begin as follows. You must first practice exact obedience, as described above, and so act always with a pure conscience; for without obedience it is impossible for your conscience to be pure. And you must keep your conscience pure in three respects: first, with respect to God, you must keep your conscience pure by refraining from doing anything that conflicts with the worship due to Him. With respect to your spiritual father do everything he tells you to do, neither more nor less, and be guided by his purpose and will. With respect to other people, you must keep your conscience pure by not doing to them anything that you hate (Tobit 4:15) and that you do not want them to do to you. With respect to material things, you must take care not to misuse them, whether food, drink, or clothing. In brief, do everything as if you were in the presence of God, so that your conscience does not rebuke you in any way.

만일 이 빛을 주는 기쁨에 찬 임무에 착수하기를 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시작하십시오. 우선 위에서 묘사된 것처럼 항상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엄격한 복종을 실천하십시오. 복종 없이는 양심이 깨끗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양심을 깨끗이 보존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상충되는 어떠한 일이라도 행함이 없도록 깨끗한 양심을 보존해야 합니다. 둘째는 영적 아버지에 대하여는, 그분이 명하는 것을 더하거나 감하지 말고 그대로 행하며 그분의 목적과 뜻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셋째는 사람들과 물건들에 대해 양심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당신이 싫어하는 일 및 당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그들에게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토빗 4:15). 물건들과 관련해서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나 의복을 남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하여 양심이 당신을 책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영문번역 없음>>

집중의 참된 특성 및 그 근거를 설명했으므로, 이제는 그것의 특징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바르고 참된 집중과 기도란 마음이 기도하는 동안 지성이 마음을 지켜 돌보는 것입니다. 지성은 항상 마음 안에서 순찰해야 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관대하시다는 것을 마음 안에서 맛본(cf. 시 34:8) 지성은 마음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며, 베드로처럼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성은 항상 마음 안에 깨어 있으면서 원수가 심어주는 생각들을 거절하고 몰아낼 것입니다. 이 수행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모질고 어려운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입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경험은 있지만 아직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숨막히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맛본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고 외칩니다.

교부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 15:19-2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또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뿐 아니라 안도 깨끗이 하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마 23:26). 그들은 마음을 지킴으로써 다른 모든 덕을 소유할 수 있지만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덕도 굳게 세워질 수 없다고 확신하고서, 모든 형태의 영적 수고를 포기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이 임무에만 전념했습니다. 어떤 교부들은 이 수행을 마음의 정적이라고 표현했고, 어떤 사람들은 경청이라고 표현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은 깨어 경계하여 물리침 이라고 표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생각들을 조사하고 지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어쨌든 그들 모두 자신의 마음 밭을 경작했고, 거룩한 만나를 먹었습니다(cf. 출 16:15).

전도서에서는 이것을 언급하여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며"(전 11:9), 마음에서 노염을 물아내고"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전 10:4)고 말합니다. 주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며"(마 15:19); "근심하지도 말라" (눅 12:29)고 말씀하셨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 (마 7:14)라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5:3), 다시 말해서, 세상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말했고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엡 6:12)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행자 마크, 요한 클리마쿠스, 헤시키우스, 시내 산의 필로테우스, 은둔자 이사야, 바르사누피우스, 그리고 『교부들의 낙원』(The Paradise of the Fathers)이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거룩한 교부들도 마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In short, if you do not guard your intellect you cannot attain purity of heart, so as to be counted worthy to see God (Matthew 5:18). Without such watchfulness you cannot become poor in spirit, or grieve, or 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 or be truly merciful, or pure in heart, or a peacemaker, or be persecuted for the sake of justice (Matthew 5:3-10). To speak generally, it is impossible to acquire all the other virtues except through watchfulness. For this reason you must pursue it more diligently than anything else, so as to learn from experience these things, unknown to others, that I am speaking to you about. Now if you would like to learn also about the method of prayer, with God's help I will tell you about this too, in so far as I can.

간단히 말해서, 지성을 지키지 않으면 깨끗한 마음을 획득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cf. 마5:18). 깨어 경계하지 않으면 심령이 가난해지거나 애통하거나 의를 갈망하거나 온유하거나 마음이 깨끗해지거나 화평케 하는 자가 되거나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수 없습니다(cf. 마 5:3-10). 일반적으로 말해서, 깨어 경계하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덕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배우려면 무엇보다 깨어 경계함을 더욱 부지런히 추구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도 배우기를 원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아는한 힘껏 그것에 대해서 말해주겠습니다.

Above all else you should strive to acquire three things, and so begin to attain what you seek. The first is freedom from anxiety with respect to everything, whether reasonable or senseless -- in other words, you should be dead to everything. Secondly, you should strive to preserve a pure conscience, so that it has nothing to reproach you with. Thirdly, you should be completely detached, so that your thoughts incline towards nothing worldly, not even your own body.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획득함으로써 당신이 구하는 것을 달성하기를 시작하십시오.
첫째는 이성적인 것이든지 감각없는 것이든지 모든 사물과 관련하여 근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둘째, 깨끗한 양심을 보존하여 스스로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합니다. 셋째, 완전히 초연함으로써 당신의 생각들이 세상에 속한 것, 심지어 자신의 육신조차 지향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Then sit down in a quiet cell, in a corner by yourself, and do what I tell you. Close the door, and withdraw your intellect from everything worthless and transient. Rest your head on your chest, and focus your physical gaze, together with the whole of your intellect, upon the center of your belly or your navel. Restrain the drawing-in of breath through your nostrils, so as not to breathe easily, and search inside yourself with your intellect so as to find the place of the heart, where all the powers of the soul reside. To start with you will find there darkness and an impenetrable density. Later, when you persist and practice this task day and night, you will find, as though miraculously, an unceasing joy. For as soon as the intellect attains the place of the heart, at once it sees things of which it previously knew nothing. It sees the open space within the heart and it beholds itself entirely luminous and full of discrimination. From then on, from whatever side a distractive thought may appear, before it has come to completion and assumed a form, the intellect immediately drives it away and destroys it with the invocation of Jesus Christ. From this point onwards the intellect begins to be full of rancor against the demons and, rousing its natural anger against its noetic enemies, it pursues them and strikes them down. The rest you will learn for yourself, with God's help, by keeping guard over your intellect and by retaining Jesus in your heart. As the saying does, "Sit in your cell and it will teach you everything."

그 다음에는 조용한 골방에 홀로 앉아서 다음과 같이 행하십시오. 문을 닫고, 무가치하고 덧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성을 거두어들이십시오. 그 다음에는 고개를 숙여 턱을 가슴에 닿게 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시선을 배꼽에 두십시오. 코를 통해 들이쉬는 호흡을 억제하면서 지성으로 하여금 내면에서 영혼의 모든 능력들이 거주하는 장소인 마음(심장)을 찾아보게 하십시오. 우선 그곳에서 어둠과 꽤뚫을 수 없는 물질(impenetrable density)을 발견할 것입니다. 밤낮으로 이것을 꾸준히 실천하면, 신기하고도 끊이지 않는 기쁨을 발견할 것입니다. 지성은 마음(심장)의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전에 알았던 것들이 무(無)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성은 마음 안에서 광활한 공간을 보며, 자신이 전적으로 명석하고 온전히 분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부터는 어느 쪽에서 산만한 생각이 나타나든지 그것이 완성되어 형태를 취하기 전에, 지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것을 몰아내고 소멸시킵니다. 이때부터 지성은 마귀들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기 시작하며, 이성적으로 분별 가능한 원수들에 대해 본성적인 분노를 일으키면서 그것들을 추적하여 쓰러뜨립니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당신이 계속 지성을 지키고 경계하고 마음(심장)속에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스스로 배울 것입니다. "골방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골방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Q&A:

질문 : 왜 수도사는 첫째 형태와 둘째 형태의 경계에 의해서 온전함을 회득할 수 없습니까?

대답 : 왜냐하면 적절한 순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 클리마주스는 이 방법들을 사다리로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정념들을 죽이고, 어떤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편찬송을 실천하면서 보내고, 어떤 사람은 기도에 헌신하며, 또 어떤 사람은 깊은 관상에 집중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살펴볼 때에는 사다리를 사용하여 유추해봅시다.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은 꼭대기에서 시작해서 내려오지 않고 바닥에서 출발하여 위로 올라갑니다. 그는 첫째 계단을 오른 후에 둘째 계단을 오르고 차례로 계속 올라갑니다. 우리도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성장하는 어린이들처럼 우리 앞에 놓인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여 한 단계씩 전진하다보면 마침내 장성한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될 것입니다.

수도 상태의 첫 단계는 정념을 억제하는 것이며, 이는 초심자들의 단계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여 사춘기에서 청년기로 진보하는 두 번째 단계는 부지런히 시편 영창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념들이 억제되고 매장되었을 때에 실천하는 시편 영창은 혀에 즐거움이 되고 하나님이 영접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방 땅에서. 즉 정념이 물든 마음은 여호와께 찬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cf. 시 137:4). 이것이 진보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표식입니다.

영적으로 청년기에서 성인 단계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특징인 세 번째 단계는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충분히 진보한 사람들의 단계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사춘기 소년이나 청년들과 다르듯이, 기도와 시편영창은 다릅니다.

영성생활에는 네 번째 단계. 즉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노년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관상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하며, 온전한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사다리의 꼭대기에 도착하여 여정이 끝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정하시고 배열하신 상태이므로, 어린아이는 사다리의 첫째 계단에 올라가고 계속하여 네 계단을 올라 온전함에 이르지 않고서는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거듭남을 원하는 사람이 빛을 향해 오르는 첫 단계는 정념들을 죽이는 것, 다시 말해서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지키지 않고서는 정념들을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단계는 시편 영창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정념들에게 저항함으로써 그것들을 죽여 매장한 후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향한 열망이 지성을 불태우기 때문입니다. 이 열망으로 인해 힘을 얻은 지성은 마음을 둘러싸서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 산만한 생각들을 집중과 경청으로 물리칩니다. 이처럼 지성은 둘째 단계, 즉 경청과 기도의 단계에 전념합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을 자극하며, 정념의 바람은 마음 깊은 곳을 거세게 휘젓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원함으로써 악한 영들이 완전히 정복되며, 소동은 마치 밀랍이 불에 녹듯이 사라집니다. 마귀들은 마음 밖으로 쫓겨났지만 감각을 통해서 외적으로 지성을 어지럽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피상적으로만 지성을 괴롭히기 때문에, 지성은 곧 평온함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지성은 결코 마귀들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자유는 완전히 장성한 사람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초연하며 쉬지 않고 마음에 집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중과 경청을 획득한 사람들은 그 후에 조금씩 노년기의 지혜, 즉 관상의 단계로 상승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사람들의 단계입니다.

이 모든 단계를 적절한 시기에 순서대로 실천하여 완성한다면, 먼저 당신의 마음에서 정념이 제거될 것이며, 그 후에 완전히 시편 영창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감각들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지성의 표면을 어지럽게 하는 악한 생각들을 대적할 수 있으며 영적인 눈과 육신의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면서 순수하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들이 공중에 매복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가끔씩만 위를 응시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깨어 경성함을 통해서 정화되는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와 열매도 거룩할 것입니다(cf. 롬 11:16). 그러나 만일 앞에서 말한 순서를 따르지 않은 채 영적인 것을 보려고 두 눈과 지성으로 하늘을 바라본다면, 진리가 아니라 환상을 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직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청의 첫 번째 방법과 두 번째 방법은 우리를 진보하게 하지 못합니다. 집을 지을 때에 기초를 세우기 전에 지붕을 얹지 못합니다. 먼저 기초를 놓은 후에 벽을 쌓고 마지막에 지붕을 얹습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집의 영적 기초를 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지키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념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영적인 집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외적인 감각에 의해서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영들의 소동을 둘째 형태의 경청을 통해서 물리쳐야 하며, 되도록 신속하게 그것들의 공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 후에 지붕을 얹어야 합니다. 즉,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적 인 집이 완성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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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November 10, 2008

The Philokalia - 예수기도의 삼단계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the sinner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다음은 한국러시아정교회 싸이트에서 퍼온 글: 예수의 기도; 필로칼리아


예수기도의 성서적 근원


  • 기도의 간단 명료함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마6:7 표준새번역)

  • 예수기도는 주님의 이름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은 그의 이름에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열성적으로 부르며 호소하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쓰여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다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지막 이름입니다. 예수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라고 쓰여 있습니다.(빌2:9-10)

    이 이름으로 마귀는 쫓겨나가고 (눅10:17), 기도가 응답 받고(요14:13-14),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습니다(행전3:6-7). 예수님의 이름은 그치지 않는 영적인 힘입니다.

  • 예수기도의 말들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여리고 근처 길가에 앉아있던 소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눅18:38), 나병환자 열 사람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였다.(눅17:13)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눅18:13).

  • 예수기도는 우리들의 죄를 인식하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방황하는 것을 알게하는 영적인 여행을 떠나게 합니다. 예수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이 절대로 필요함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요일1:8).


예수기도의 삼단계

기도는 살아있는 현실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므로 어떠한 분석이나 분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기도를 통하여 영적 생활을 성숙시키고자하는 이들에게 넓고 일반적인 안내를 위해서 19세기 러시아의 수도자 은둔자 훼오판은 기도를 수행하는 단계를 셋으로 구분을 지었습니다.


1. 말로하는 기도 또는 입술의 기도. 간단한 암송의 단계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러한 기도의 단계는 우리에게 있어서 외적이고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영혼은 인간의 마음과 심장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2. 마음의 혼란 없이 기도하는 단계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음의 혼란없이 기도하게 되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훼오판은 "마음이 말에 집중되어 있는" 기도라고 말하였습니다.

3. 심장의 기도가 되는 단계
이 상태에서는 기도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 됩니다. 그러한 기도는 성령의 선물이고 탕아처럼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눅15:11-32). "그리고 또 여러분은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갈4:6) 심장의 기도인 예수기도는 위의 성경말씀처럼 성령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기도의 열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우리 한 가운데 있는 왕국의 현존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무명 러시아 작가의 <순례자의 길 The Way of a Pilgrim>에는 예수기도가 두가지 구체적인 효과를 나타냄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내가 마음속 깊이 기도할 때 내 주의의 모든 것이 기쁘고 경이롭게 보였다. 나무들, 풀들, 새들, 공기, 햇빛은 그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을 올리고 있는 듯 했다."라고 합니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와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또,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시 나는 내 방랑길을 출발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전처럼 걱정에 가득 차서 걷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나를 기쁘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해를 끼치면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얼마나 달콤한가'라고 생각하면 모욕과 분노는 모두 사라지고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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