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13, 2009

하나님의 義에 나타난 믿음 - 롬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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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복음 ευαγγελιον (eu[v]angelion)은 old English로서 "good tidings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에 동사形으로 한번, 마가와 마태복음에는 13번 나오고 요한복음에서는 쓰여지지 않았다. 사도행전에 두번, 베드로전서와 계시록에 각각 한 번씩 나온다. 반면 바울의 서신에는 60여회 사용되었다.

ευαγγελιον은 신약시대의 그리스에서 지배자의 업적을 경축하는 것을 말하는데 (The Interpreter's Bible, vol.9 p.390)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업적을 선포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 한다.

능력(power) δυναμισ(dynamis)은 신약성서에서 기적이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表明(manifestation)할 때 쓰인다. 그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일어날 것을 볼 것이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היה hayah H1961). 복음은 이 역동적인 사건의 宣言이자 公表, 公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dynamis이며 지혜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YHWH의 역사하심에 응답하는 능동적 행위이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dynamis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1:18-25 새번역)

'구원(salvation)'은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구출함을 뜻한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유태인들에게는 마지막날에 하나님께서 가져다 주실 종국적인 위대한 구원을 의미했다. 바울은 바로 이 종말론적(eschatological) 의미에서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이는 죄와 죽음의 속박(bondage)에서 해방됨을 뜻한다. 화해 속에서의 여전한 불안감과, 불화 가운데의 증폭되는 적대감을 극복함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행하신 이 일은, 그리고 여전히 행하고 계신 일은 모든 자에게 열려있는데, 이때가 바로 마지막 날의 때이다.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사2:2 새번역)
And it shall come to pass (היה H1961) in the last days, [that] the mountain of the YHWH's house shall be established in the top of the mountains, and shall be exalted above the hills; and all nations shall flow unto it. (KJV)

로이드존스는 그의 로마서 강해 1권(3:20-4:25) p64에서 '믿음'에는 세가지 요소 또는 세가지 국면이 있다고 한다. 진리에 대한 앎 또는 인식(a knowledge[awareness] of truth), 그에 대한 찬성과 동조(assent of truth), 그리고 신뢰와 헌신(a trust[committal] in the truth)이다.

야고보서 2:14-26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일상적인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지적 동의라는 의미에서의 '믿음'을 뜻한다. 이러한 '믿음'이 있노라 말하지만 행함이 없으니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허탄한 자, 그의 믿음은 헛것이다.

'믿음'의 또 다른 의미는 히브리서 11장 1절 같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확신(assurance); 실체,보증(새번역)]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conviction)"로서의 '믿음'이다. 믿음이란 지적인 동의를 너머 행위를 수반하는 확신이며 확실한 보증이어서 현재 삶[實狀]의 모든 것을 - 고통과 심지어는 죽음까지 - 감수하며 오늘을 살게하는 능력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취하는 완전한 신뢰의 態道나 常態이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공로를 쌓는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性質(disposition)에 반응하는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靈의 disposition이다.

사랑이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방도는 겸허와 감사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은 이중적(twofold)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신뢰는 한없이 선하다. 반면 인간의 불경건함과 불의함, 그리고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義의 성취에 대한 절망감(despair)이다.

복음은 흔히 '회개'와 '믿음'을 설교하지만, 바울은 로마서에서 '회개'를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는 이 '믿음'에는 회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이다. 여기에는 자신을 향한 태도[회개; despair]가 포함되어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dynamis이고 그 매개체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일이다.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의 義(righteousness of God, 롬3:5에는 justice): 복음에는 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났는데 [계시되었는데 αποκαλυπτεται], 하나님이 인간을 올바른 관계 안으로 들어오게 하심으로써 드러난다 (롬3:21-26). 이는 마지막 날의 징표이다 (롬13:11,12).

세상에서 불의에 고역을 당하는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변호는: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公義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The Lord hath made known his salvation; his righteousness hath he revealed in the sight of the nations (시98:2)

公義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My righteousness quickly draws near and my salvation shall come forth like a light (사51:5, LXX 칠십인譯)

'하나님의 의'는 인간들을 위함이다.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I have brought near my righteousness and I do not hold back my salvation. (LXX)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사46:13)

여기서 義는 구원과 동의어로 쓰였다. '의'란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들을 변호하시는(vindicating) 하나님의 행위이다. YHWH께서 "알게 하시며 나타내셨도다!" 주님이 義의 대변자로서 구원하고 입증하는 행위의 주체이시다.

啓示(revelation)는 구약에서 항상 능동적인[dynamic] 의미로 사용된다 (IB). 바울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義(righteousness) δικαιοσυνη는 하나님의 內在的 성품인가 외적 행위인가?

성품으로서의 의를 뜻하는 경우, 18절은 단순히 17절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고 3:25과 -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내용이 상통한다. 즉, 하나님의 진노와 죄에 대한 심판과 [필요충분한 조건으로서 실제로 당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이 복음에 나타난다. 이러한 방도로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변호하여 立證(vindicate)하셨다. 원어에는 능동태로 되어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그의 의를 변호하신다"라는 적극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변호하시는 자들은 이미 의로운 자들이다. 말 그대로 "정당화 justification"하시는 것이다. 의롭다고 선언된 자, 의로운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자, 사실상 이들은 모두 의롭다. 여기서 바울의 신학은 차이를 보인다. "의롭다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데, 의롭다고 선포하고 의롭다고 여겨지는, 실제로는 지금 의롭지 않은 자에 대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으로부터의 稱義이다.

동사 δικαιοω는 "to make righteous"를 뜻한다 (IB). τυφλοω가 "to make blind"를 뜻하는 것처럼 이 두 경우 마지막의 σ가 형용사형으로부터 제거되었다. 바울이 말하는 '칭의 Justification'는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는 역사이고, 우리를 죄의 심판으로부터 변제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하나님이 "의로운 자"를 변호하는(vindicate) 행위를 하시는 것이지 그들을 의로운 [행위자 또는 성품의 소유자]로 만드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칭의'라고 할 때, "赦免 또는 放免(acquittal)"을 말하는 것이지 "實際로 의롭게됨really righteous"을 뜻하지 않는다. 칭의는 새로운 性質(性品 character)을 주는 것이 아니고, 우선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신분(status)을 받게됨을 뜻한다. 칭의는 그 사람을 하나님과 한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게 하는 법적인 절차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당신을 화해시키셨다. 이 의롭다 하고 화목되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믿음'을 기반으로 일어났다.

17절에 나오는 세 '믿음'을 각각 살펴보자.

δικαιοσυνη γαρ θεου εν αυτω αποκαλυπτεται εκ πιστεωσ εισ πιστιν (from faith to faith), καθωσ γεγραπται, Ο δε δικαιοσ εκ πιστεωσ ζησεται (by faith will live). (UBS 4th ed. Nestle-Aland 27th ed.)

For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through faith for faith; as it is written, "The one who is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The one who is righteous through faith will live]. (NRSV)

해석하기 어려운 from[through] faith to[for] faith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한글 성서의 "이르게 하나니"는 원문에는 없는 단어이나 번역자가 문맥상 집어넣은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三는 그의 로마서연구에서,

혹은 '소박한 신앙에서 정련된 신앙에까지'라 하고, 혹은 '신앙에서 출발하여 신앙으로 끝마친다' 하고, 혹은 '구약적 신앙에서 신약적 신앙까지'라 하고, 혹은 '(하나님의) 의는 신앙에서 발하여 신앙으로써 획득된다'고 한다. 기타 異說이 퍽 많다. 일역성서가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나, 신앙에서 신앙에 이른다"고 의역한 때문에 "신앙에서 신앙에 이른다"는 구를 떼어놓고, 단지 신앙의 진보를 의미하는 통속적 견해가 생겨났다. 그러나 원문에는 "하나님의 의는 이것에 있어서, 신앙에서 신앙에까지 나타났다"하고 있음을 보면, "신앙[믿음]에서 신앙[믿음]에까지"의 구는 하나님의 義의 나타나심과 밀접하게 관계됨이 분명하다.

NRSV에서 "through faith"란 "하나님의 미쁘심 God's faithfulness (롬3:3)"를 뜻하고, "for faith"는 "God's faithfulness elicits human trust"를 의미한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3:26)

하나님의 의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은 "한 사람이 순종하심(롬5:19)" "죽기까지 복종(빌2:8)"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忠誠됨에서와 같은 의미이다.

".., the righteousness of God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for all who believe" (롬3:22) 를 through the faith of Jesus Christ로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친다"로 읽게된다.

하박국2:4의 '믿음'은 "loyalty, steadfastness, faithfulness"를 의미한다. 의로운 사람은 그의 충성된 신앙으로-혹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인해 생존할 것이다. 그 당시 유태인들처럼 바울도 이 구절을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다면, 그 의로운 자, 메시야(행3:14; 7:52; 22:14)는 신실함을 근본으로 살아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7:52)

구원은 하박국서의 의미로서 하나님의 믿음[신실함] 안에 그 원천이 있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끌어내는 인간의 믿음, 즉 바울서신의 의미로서 우리의 믿음[태도; 반응]에 대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바울의 의도는 그가 인용한 하박국 2장 4절에 잘 드러나 있다.
The one who is righteous through faith will live. Ο δε δικαιοσ εκ πιστεωσ ζησεται (by faith will live).

하나님의 義, 그의 신실하심으로 의롭다고 稱해진 자는 살 것이다. 영원히 살 것이다. 인간 본연의, 창조된 모습으로 살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 것이다.

16절의 '믿음'은 동사形이다. 17절에 세번 나오는 '믿음'은 명사形이다. 16절의 믿음은 "모든 믿는 자"의 주님을 향한 태도이고, 17절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義이며,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조명된 (우리 안에 생겨난) 확신이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다.

명사란 개념화된 실체요 동사는 동적이기 때문에 결코 개념화될 수 없는 과정process이다. 명사는 이상화된 목표이며 동사는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인간의 행위이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中庸 제12장)
誠함 그 자체는 하늘의 길이요, 誠해지려고 함은 사람의 길이다.
(여기서 者는 誠을 명사화 시키는 토씨; 之는 지시대명사로서 목적어가 되기 때문에 그 앞의 誠을 동사화 시킴)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그의 죽기까지 복종하신 충성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롬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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