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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정신의학자인 저자(Viktor E. Frankl)가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기술한 클래식 -- 죽음의 포로 수용소 Man's search for meaning 개정판 마지막에 있는 The case for a Tragic Optimism 이라는 에세이 입니다. 아래의 Google books에서 전문을 참조할 수 있고, 그 밑에 요점을 의역해 보았습니다.
"a tragic optimism"이란, 인간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1)고통 pain (2)죄책감 guilt (3)죽음 death 이라는 비극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소망 가운데 그의 삶을 영위함을 뜻합니다. 사실 인간의 이 특성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아니 인간이 어떻게 이 모든 비극 가운데서 삶을 긍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불행 가운데 어떻게 삶의 의미를 간직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어떠한 조건이나 비참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삶의 부정적 측면을 어떤 긍정적이고도 건설적인 면으로 창조적 전환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역량을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문제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최선의 것을 만드는가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최선 the best"은 라틴어로 optimum 이라 하는데, 비극적 상황에 처한 인간의 낙관optimism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능력이 다음의 세가지를 가능케 한다는 데 착안하여 "tragic optimism"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1) 고난을 인간의 성취와 성숙으로 전환시키고,
(2) 죄책감을 더 나음을 향한 자기혁신의 기회로 승화시키며,
(3)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생활로부터 책임 있는 삶의 행위를 끌어 냅니다.
물론 낙관이란 우리가 조정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거슬러서 마구잡이로 낙관적으로 될 수도 또한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을 조정하거나 강제할 수 없듯이, 삶의 고통과 죄책감을 우리 맘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유럽인에게 미국 문화를 특징 짓는 것이 "인간이 행복하도록 명령 받았다"라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행복은 추구되는 것be pursued이 아닙니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잇따라 일어나는 것ensue입니다. 인간은 행복한 이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이유를 발견하면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따라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겠지만, 한 인간의 존재는 행복을 추구함에 있지 않고 행복하게 되는 이유를 찾는 데에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내재되고 잠재되어 있는 가능한 의미를 실재의 삶 속에 구현함을 통해서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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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의 필요성은 인간 본연의 또 다른 특징 --웃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을 웃길려면 웃음의 이유를 제공해야 합니다. 즉 농담을 재미있게 말해야 합니다. 웃으라고 타인에게 윽박지른다고, 또는 웃을려고 스스로 아무리 애써봐야 억지웃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진관에서 치-즈 하고 나온 이런 부자연스런 웃음을 정신의학에서는 "hyper-intension"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성적 감각신경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의 경우, 그 문제된 신경의 기능에 신경을 쓸 수록 그 증세를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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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 개인이 삶의 이유(의미)를 찾는데 성공하면, 그는 행복하게 될 뿐만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삶의 의미를 찾는데 실패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아마 치명적인 상황으로 몰리게 될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 수용소에서 미군들이 "give-up-itis"라고 부르던 현상이 먼저 일어납니다. 어느날 수용소에서 한 사람이 작업장에 나가서 일하기를 거부합니다. 감독관의 어떠한 협박도 그의 의지를 꺽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아주 전형적인 행동이 나타납니다: 깊은 곳에 몰래 숨겨 놓았던 귀중한 담배 한 까치를 꺼내 물고 피우기 시작합니다. 의미 지향적인 삶이 무너지고 즉흥적인 삶의 쾌락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러면 수용소의 동료들은 그가 이삼일 안으로 죽어갈 것임을 압니다.
오늘날(1984) 전 세계적인 drugs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산업화에 따른 인간 존재의 몰가치와, 그에 따른 삶의 허무 속에 자라난 젊은이들이 순간을 즐기는 현상입니다. 이 허무한 느낌의 근원은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도구와 물품은 많이 가졌지만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이유와 의미를 모르는 데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그나마 가진 것도 없습니다. 실직자들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연전에 "실업증후군"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한 젊은이를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실업은 자신을 쓸모 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하였고, 쓸모없음은 무의미한 삶과 동일시 되었으며, 결국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청년 단체나 도서관 등에서 자원봉사자로서 일하도록 설득하였는데, 보수는 없지만 그의 자유시간을 의미 있는 일에 보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의 경제적 형편은 여전하여 배고픔은 변함 없었지만 그의 우울증은 사라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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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우울증이 허무감에서 온다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우울증의 귀착지인 자살 또한 항상 존재의 공허감에서 온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모든 자살이 허무감으로 부터 기도(企圖)되었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자살하려는 사람이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어느정도 깨닫는다면 자신의 생명을 끊을려는 충동을 극복하였을 것입니다.
의미 지향적인 삶의 태도가 자살을 예방한다면, 자살의 충동에 노출되어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젊었을 때 오스트리아의 정신병원에서 이미 자살을 기도했던 우울증 환자 12,000여명을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의 자살기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자주 말했습니다. 그들의 문제--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를 해결할 길이 있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응답하기를: "비록 만에 하나라도 해결책이 있는 것이라면, 당신의 문제가 조만간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먼저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날이 밝아오는 것을 볼 때까지 생존해서 그날을 맞는 것은 당신의 책임입니다"
또 다른 현대의 정신병--공격성, 반항성aggression--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목적을 함께 추구해 나갈 때 완화됨이 관찰되었습니다.
-p167
중독addiction에 대해서는, 알콜 중독자의 90%가 삶의 공허감으로부터 온다는 Annemarie von Forstmeyer의 연구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Stanley Krippner에 의하면 마약 중독자의 100%가 그러하다고 합니다.
이제 다시 본론--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으로 돌아갑시다.
무엇보다 먼저 저는, 한 인간이 그의 삶을 통해 대면해야 하는 그때그때 하나하나의 상황 속에 잠재된 고유한 의미를 다루려고 합니다. 인생을 전체로 보아 그 의미를 기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지금-여기) 일상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상황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영화는 수천 수만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한 장면 한 장면에 의미가 있어서 전체 줄거리를 전개해 가는데, 마지막 단원을 보고 나서는 전체 영화의 의미를 판가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한편, 전체 영화를 구성하는 각각의 장면을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그 영화를 감상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도 종국을 맞고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겠지요. [하지만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면 어떻게 삶의 의미를 (지금) 알 수 있습니까?]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그 삶을 구성하는 각각의 장면[상황]에 담긴 가능성이, 그 사람의 앎과 믿음을 좇아 최선optimum으로 그의 삶에 실재(實在)로 구현되어가는 데[과정]에 달려있지 않을까요?
결국 삶의 의미를 발견함이란 상아탑의 공허한 논쟁에 있지 않고, 지금-여기에 그 삶을 실질적으로 만들어감에 있습니다. 의미의 발견은 Karl Buhler가 말한 "아하" 하는 순간 같은 구체적 상황의 개인적 경험과, Max Wertheimer의 Gestalt(경험의 통일적 전체) 사이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삶의 의미란 "figure" on a "ground"의 돌연한 각성을 말하는 고전적 Gestalt 개념과 달리, 현실(reality)에 깔린 저변에 反하는 가능성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경성(警省)하게됨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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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ugust 2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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