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22, 2009

고통의 문제 - C.S. Lew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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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2008) 12월 독서회에 C.S. Lewis의 간략한 전기와 함께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C.S. Lewis의 자서전격인 <예기치 못한 기쁨 Surprised by Joy (1955)>를 보면, 1912년(14세)에서 시작하여 1931년(33세) '회심'까지 20여년에 걸친 그의 고뇌로 가득 찬 기독교 신앙에로의 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릴적 가졌던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자칭 무신론자로서 젊을 날을 보낸 후, 결국 하나님의 존재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 돌아와 예수 그리그도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기까지 겪었던 갈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가 1952년에 쓰여졌으니까 <고통의 문제>는 그가 회심한 후 얼마 되지 않은 1940년(42세)에 쓴 초기 저작으로서, 그의 젊고 싱싱한 기독교관이 피력되어 있습니다. 반면 <헤아려본 슬픔 (A grief observed, 1961)>는 그가 익명(N.W. Clerk)으로 출판한 '고통'에 관한 책으로서, 58세에 처음으로 결혼한 아내 Joy의 사망(1960)을 겪으며 발견한 하나님과 인간과 그 세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책입니다. 여기서 증언하는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에서와 동일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감정이 섬세하고 리얼하게 묘사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영화한 것이 Shadowlands (Anthony Hopkins 주연)



Part 2, 3, 4, 5, 6, 7, 8, 9, 10, 11, 12, 13


루이스가 사망하는 해(1963)에 있은 그의 마지막 인터뷰 기사를 보면,

Q: In your book you remark that you were brought into the faith kicking and struggling and resentful, with eyes darting in every direction looking for an escape. You suggest that you were compelled, as it were, to become a Christian. Do you feel that you made a decision at the time of your conversion?

Lewis: I would not put it that way. What I wrote in Surprised by Joy was that ‘before God closed in on me, I was offered what now appears a moment of wholly free choice.’ But I feel my decision was not so important. I was the object rather than the subject in this affair. I was decided upon. I was glad afterwards at the way it came out, but at the moment what I heard was God saying, ‘Put down your gun and we’ll talk.’

Q: That sounds to me as if you came to a very definite point of decision.

Lewis: Well, I would say that the most deeply compelled action is also the freest action. By that I mean, no part of you is outside the action. It is a paradox. I expressed it in Surprised by Joy by saying that I chose, yet it really did not seem possible to do the opposite.

그의 계속되어지는 인터뷰에서: Heaven, Earth and Outer Space

Q: Do you feel, then, that modern culture is being de-Christianized?

Lewis: I cannot speak to the political aspects of the question, but I have some definite views about the de-Christianizing of the church. I believe that there are many accommodating preachers, and too many practitioners in the church who are not believers. Jesus Christ did not say, ‘Go into all the world and tell the world that it is quite right.’ The Gospel is something completely different. In fact, it is directly opposed to the world.

"The case against Christianity that is made out in the world is quite strong. Every war, every shipwreck, every cancer case, every calamity, contributes to making a prima facie case against Christianity. It is not easy to be a believer in the face of this surface evidence. It calls for a strong faith in Jesus Christ."

<순전한 기독교>가 일반인을 상대로 했다면, <고통의 문제>는 기독교인(루이스의 표현을 따르면 '세례를 받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쓰여졌습니다.

하나님의 전능, 선함을 이야기하는 <고통..>의 처음 세장을 읽으며, 루이스가 <순전한..>에서 'gentleman' 예를 들어, 어떤 개념을 '심화된' 의미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둘 때 급속도로 무용한 단어가 된다고 한 말을 다시 떠올립니다.

우리는 얼듯 '신사'의 본래적 '고상한' 뜻이 잃어가고 겉치레만 남은 위선적 '신사'가 됨을 루이스가 비판하는 거라고 지레 짐작하기 쉽지만, 루이스는 오히려 그 반대 방향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신사'란 말을 '심화'시키면 '객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어떤 존재'로서의 '거친 의미'를 잃는다는 의미에서 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전능과 선함'의 위대함과 고상한 의미를 우리가 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과 선함'을 영적으로 심화시켜서 그 본래의 참뜻 즉, 살아계셔서 오늘 지금 이순간도 끊임없이 여기 인간들 가운데 간섭해 들어오시며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주님으로서의 그 전능함과 선함을 우리가 생생하게 증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믿는다고 하는 전능함과 선함에 그 능력이 없고, 세상에 되어가는 일들을 보면 그 신학적 표현(전능-선)의 맛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선함을 고백할진데, 그의 자녀인 우리들이 왜 이토록 무능하며 심지어는 교활한가? 우리는 세상의 불행과 악인들의 횡행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그 전능-선함으로 생겨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한편, 이렇게 진부한 '신학' 이야기를 할 땐 <순전한 기독교>의 그 '지도' 이야기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해변에서 진짜 대서양을 본 사람이 집에 돌아와 대서양 지도를 볼 때 실제 세계가 덜 실제적인 세계로 바뀌듯이, 눈앞에서 넘실대던 파도가 한낱 색칠한 종이 조각으로 바뀌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지도가 색칠한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여러분이 지도에 관해 기억해야 할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지도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진짜 대서양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그 지도의 이면에는 해변에서 바다를 본 당신의 경험 못지않게 생생한 경험의 덩어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의 경험은 바다를 고작 한 번 흘낏 본 것이 전부지만, 지도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어딘가 가고자 할 때는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해변을 거니는 데 만족한다면 지도를 보느니 해변에서 직접 바다를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고 싶다면 해변을 거니는 것보다는 지도를 보는 편이 훨씬 유용할 것입니다.

신학은 지도와 같습니다...교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일종의 지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지도는 정말 하나님을 만났던 수백명의 경험 -- 여기에 비하면 여러분과 제가 경험하는 흥분이나 경건한 감정들은 아주 초보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선함에 상충하는 듯한 인간세상의 고통의 문제를 푸는 논리는 이렇습니다.

위의 인터뷰에서 그의 '회심'에 관한 진술에서도 보듯이, 그의 책에 조심스럽게 자주 등장하는 신학용어가 '자유의지' 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또는 인간이 선택하는 이 '자유의지'라는 가정에 내포될 수 밖에 없는 가능성으로서 고통이 존재합니다. 또한 '자유의지'에 따르는 인간 자신의 선택적 결과로서의 ''과 이로인한 고통의 가중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의 악순환을 바라보는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선함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써 나타날 때 선함과 고통과의 관계가 이해되어진다고 합니다.

인간이 육체적 통증을 통해 경각심을 가지듯이, 고통은 인간에 내재한 악을 발견케 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깨우치게 합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인데 인간은 이를 원치 않았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이러한 인간자신의 반역의지가 노출된 증거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악을 당하여 고통스러울 때까지 그것이 악인지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남을 해하는 행동이나 말도 그것을 본인이 당할때에야 비로소 큰 해악임을 깨닫는 지극히 악한 존재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너무 행복해서 하나님을 잊고 살 때 갑자기 일어나기도 합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그를 의지하게 합니다. 적극적인 선을 행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에게 때로 두려움과 연민을 통해 선한 일에 대한 순종과 베품을 가능케도 합니다.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건강하고 성숙하게 합니다. 고난이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의적 고행은 때로 철저한 반역의 의지적 표징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할일은 고통을 없애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고통을 없애려 한다고 해도 고통은 완전히 그치지 않을 것임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이 지독한 고통스런 갈망은 궁극적 결핍에서 옵니다. 그 고통스런 갈망이 우리를 이끄는 곳은 우리와 하나님의 연합입니다. 지옥은 그래서 동물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며, 어쩌면 지옥은 영혼이 선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자기부정을 원치 않는 자들이 최후까지 반역에 성공한 곳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있다는 말처럼...

인간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알게 되는 때는 자신을 비워 그 분을 모실 때, 또 그 분을 이웃과 나누길 원할 때입니다. 진정한 하나님과의 맞닿음, 어우러짐의 완성이 되는 그 때입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선이며 사랑입니다. 그 때야 비로소 파생된 우리는 우주의 심연이신 그 분 앞에 (고통의) 질문을 그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살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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