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26, 2008

Jonathan Edwards in Princeton


옆의 그림은 Princeton University Chapel에 있는 John Calvin, Jonathan Edwards입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그들의 이름이 보입니다. 칼빈이 들고있는 책이 바로 기독교 강요이고, 펼쳐놓은 장이 우리가 읽고있는 바로 거기?

Jonathan Edwards Center at Yale University <-- 조나단 에드워드의 모든 것!

조나단 에드워드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주의 이스트 윈저에서 출생했다. 그는 11자녀 중 외아들이었다 (딸 10명). 그의 부친 디모데 에드워드는 이스트 윈저의 회중교회 목사였다. 모친 에스더 Stoddard는 특출한 성품과 천부적인 지성을 가진 여인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많은 지적 재능을 보이던 조나단은 12세에 예일대학교에 입학하여 1720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720년부터 예일대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았다. 6년 후 조나단 에드워드는 메사추세츠주 노드햄턴에 있는 그의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가 시무하던 교회의 강도사 직을 수락한다. 1727년 2월15일에 회중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그는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하는데 그녀의 부친은 목사로서 예일대학교의 설립자 중 한 분이었다. 1729년 노드햄턴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노드햄턴교회에서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에 의해 많은 회심자가 생겨났고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변화되었다. 1734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義" 에 대한 그의 설교는 코네티컷 리버벨리 지역에 영적 부흥을 가져왔고, 그의 가장 유명한 설교인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놓인 죄인들"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지옥에서 맞이하게 될 운명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으로 1740년 일어난 대각성운동 The Great Awakening 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원죄, 예정론, 거듭남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1734-1735년과 1740-1742년에 일어난 부흥운동 이후 노드햄턴교회에서는 조나단 에드워드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나, 그가 성찬식 참여자의 자격에 대한 교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1750년 투표에 의해 노드햄프톤교회에서 해임되었다. 위의 예일대학교 조나단 에드워드 센터에 있는 그의 전기에 의하면, 그의 해임은 퓨리탄의 소위 '뉴잉글랜드 웨이'에 종지부를 찍는 초기 미국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라고 한다.
Concerned that the "open admission" policies instituted by Stoddard allowed too many hypocrites and unbelievers into church membership, he became embroiled in a bitter controversy with his congregation, area ministers, and political leaders. His dismissal is often seen as a turning point in colonial American history because it marked the clear and final rejection of the old "New England Way" constructed by the Puritan settlers of New England.

1751년부터 스톡브릿지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스톡브릿지는 신개척지 정착촌으로 조나단 에드워드는 몇몇 안되는 교인들의 목사로서, 그리고 Housatonic Indians에 대한 선교사로서 여러 해를 일했다. 그곳에서 그의 역작 The Freedom of the Will 이 저술되었다. 1758년 에드워드는 뉴저지대학(지금의 프린스톤대학교)의 제3대 총장직에 취임하였으나 취임 5주 만에 천연두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토종 철학-신학자로 알려지고 있다.

18세기를 전후한 Princeton 고을의 상황:

미국독립전쟁의 전환점이 되는 1777년 1월의 The Battle of Princeton이 조나단 에드워드가 죽은 후 20년이 지난 다음의 일입니다. Stony Brook 정착자들(퀘이커)이 집 짓고 방앗간 짓는 때가 1707-1714년이고 'meeting house'를 1724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Princeton"이라는 말이 1724년에나 처음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Richard Stockton, John Witherspoon, Joseph Hewes 같은 미국독립선언서에 사인한 양반들이 그때 당시 이동네에 정착했던 분들 이랍니다. Witherspoon의 자손 중 하나가 그 앞짱구 여배우 위더스푼입니다.

그당시의 건축물과 기타
역사적인 사진들을 보시고, 프린스톤의 역사 중에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가 관련된 프린스톤대학교(당시엔 뉴저지대학)에 관련된 얘기를 몇가지 알아보면;

1756년에
College of New Jersey가 Newark에서 프린스톤지역으로 이사와서 Nassau Hall을 첫 건물로 짓습니다. 왼쪽의 편지는 지금도 Nassau Hall에 전시되어 있는데, 조나단이 취임 후 12일 만에 Jonathan Sergeant라고 하는 재무이사한테 쓴 것입니다. 내용인 즉, 3월의 봉급을 가불하고 거기다가 100 파운드를 빌려달라는 내용입니다. 자기 딸에게 몇주 전에 쓴 편지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던 것 같습니다.
"I know I can't live at Princeton, as a President must, on the salary they offer: - yet I have left the matter to their [the Trustees'] generosity. I shall have no money wherewith to furnish the house…"

1750년을 전후한 朝鮮(영조 26년)의 상황:

유럽에서는 독일의 모체가 되는 프로이센 왕국이 1700년 초반에 성립하고, 17세기 후반 영국의 명예혁명권리장전 이후 7년전쟁(1756~63)을 거치면서, 해외 식민지 지배권을 둘러싼 영국·프랑스 양국의 패권다툼의 승자로 부상하는 영국은 대식민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합니다. 7년전쟁의 결과 영국과 제휴한 프로이센은 유럽 열강의 지위에 오르고 독일에서의 패권의 기초를 확고히 합니다. 1748년 몽테스키외의 법의정신 1762년 루소의 사회계약론 출판과, 1765년의 증기기관 발명, 그리고 1775년부터 시작되는 미국독립전쟁, 1776년의 미국독립선언 1789년의 프랑스혁명 등 유럽과 미국은 격동의 시대를 거칩니다. 1757년 영국은 인도의 지배를 확립하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자바를 점령합니다. 중국의 淸나라는 1720년 티베트를 복속 시키고 1750년 건륭제가 몽골 신강을 정복합니다.

우리나라 朝鮮은 영조 정조 때를 거치는데, 17세기 말년 장길산의 농민봉기 후 1725년 탕평책 1750년 균역법 실시를 보듯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개혁의 좌절과 갈등의 시대를 격습니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규장각이 설립되고, 1784년 이승훈을 통해 천주교가 전해지나 곧 西學이 금지되며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납니다. 1811년 홍경래의 난 [평안도 농민전쟁]이 일어나고 1818년 정약용의 목민심서 등이 저술됩니다.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가 창설되고 1860년 수운 최제우가 東學을 창시합니다.

조선에는 18세기 중엽에 이미 천주실의 언문판(한글판)이 유포되어 있었는데, 이승훈을 통해 자생적으로 전해진 조선의 기독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강제로 주어져왔던 식민제국주의기독교선교史에서 예외적인 특별한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기독교가 당시 핍박을 받았던 남인들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에는 조선유학의 뿌리깊은 종교적 열망이 깔려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건국엘리트들이 수용한 유교는 공자-맹자시대의 원시유교가 아니라 理氣論이라고 하는 서방적 사유체계를 빌린 朱子學이며 Neo-Confucianism이었습니다. 여기 '西方'이란 '천축(天竺)'을 가리키며 그것은 인도문명을 뜻합니다. 인도문명은 중동과 유럽에 친화력을 갖는 아리안 계통의 종교적 문명입니다. 조선사상사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을 잇는 조광조의 이상적 도학정치가 기묘사화로 좌절된 후, 사림은 퇴계의 主理論적 성리학으로 더욱 관념화 도덕화됩니다. 그후 기대승-이이-김장생-송시열의 소론-노론계열이 조선성리학의 주류라고 하지만, 그 저변에는 끊임없이 퇴계의 종교성, 그 도덕적 순수성에 대한 지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사단칠정론, 이기일원-이원론으로 대변되는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四七論辨에서 시작되는 조선유림의 사상논쟁이 1750년대쯤 되어서는 기호학파내의 호락논쟁(湖洛論爭)으로 전개됩니다. 호락논쟁은 송시열의 수제자 한원진(1682~1751)과 이간(1677~1727)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 인간의 미발심체(未發心體)가 순선(純善)한 것이냐, 선악병존하는 것이냐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권오영,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돌베개, 2003.

여기서 "순선한 미발심체"란, 후에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남인들에게는 하늘에 계신 인간의 본원으로서의 天主님을 우러르고 만나려는 종교적 열망을 뜻하는데, 그 초월성이 지극히 내면화되어 있지만, 그 上向의 심층구조는 동일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性惡적 인간의 타락을 가르치며 조선사회의 현실을 질타했고, 또 그러한 죄악적 현실속에서의 인간의 평등과 강력한 구원의 메세지를 전파했던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70가지 결심문을 읽으면서, 입교해서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자격에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은 자기교회의 "성도"들로부터 해임당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그는 70가지 결심문을 매주 읽으며 그 실천상황을 체크했다고 합니다. 그가 Philip Yancey를 만나서 얘기하면 무슨 사건이 터질까 궁금합니다.

여하간 조나단 에드워드가 그의 생애의 말년 프린스톤에 왔을 때, 미국은 퓨리탄의 종교적 이념을 뛰어넘어 독립전쟁으로 나아가는 시절이었고, 세계정세는 식민지제국주의가 정점에 달하는 반면 인간의 이성이 확대되어가는 격동의 시대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인간의 심성에 관한 고도의 논쟁이 오가고있는 반면 현실의 정치 경제 사회의 제 문제에 대해서는 괴리가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아들 조나단 에드워드 Jr는 프린스톤에서 목회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와 동시대인이고 천주교인이었다고도 하는 다산 정약용의 다음의 글을 보면, 유학자인 그에게 기독교의 "上帝"라는 것은 유교적 "신독(愼獨)"의 근거로서 충분한 존재이유를 갖는 인격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죄인들'이란 제목의 설교가 칠월의 독서회 주제입니다.


-정약용, 중용자잠(中庸自箴), 1권
인간의 본성은 원래 스스로 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조심[戒愼]케 하는 것까지는 가능하겠지만 대저 두려워한다는 것은 구체적 까닭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선생이 가르쳐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가짜 두려움이다. 군주가 명령을 내려서 두려워한다는 것도 기만적인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어찌 속임수로 얻어질 수 있겠는가? 밤에 공동묘지를 지나가면 두려워할려고 안해도 저절로 두려워지는 것이니 그것은 그곳에 도깨비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밤에 산림 속을 지나가다 보면 두려워할려고 하지 않어도 저절로 두렵게 될 것이니 그것은 그곳에 호랑이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군자가 캄캄한 방속에 홀로 앉아 있어도 전전 율율 하면서 감히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상제가 그를 굽어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命과 性과 道와 敎를 모두 一理에 귀속시킨다면, 理라는 것은 본래 지각도 없고 위엄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으로 인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할 수 있게 되겠는가? 성인의 말씀은 지극히 진실된 것이므로 체면만 세우는 그러한 말로써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1905년 우리나라 조선의 사정은 날로 악화하여 마침내 을사늑약을 당하는데, 이는 같은 해 미국과 일본의 Katsura-Taft 밀약으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그들의 필리핀에 대한 점령과 맞바꾼 결과이었습니다. 1905(1907)년은 우리 개신교에게는 평양대각성운동의 해로서, 지금까지도 좋은점 나쁜점 가릴것 없이 한국교회를 근본적으로 특징짓는 부흥운동이 시작된 해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대각성운동 이후 1900년을 전후하여 미국에서 무디, 토레이 등을 중심으로 소위 제3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는데, 그들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파송되어 길선주 목사로 대표되는 평양의 대부흥운동의 시대를 지납니다. 이에대한 좋은 요약으로서 김영한 교수의 '개혁신앙과 대부흥운동'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글을 꼭 읽어보시기를 바라고, 마지막으로 그보다 바로 전 시대에 제국주의 침략 야욕과, 자기와 다른 삶의 양식을 묵살하는 환원주의적 문화우월주의의 오류가 깔려있는 기독교의 모습을 갈파한, 천주교도로 몰려 사형당한 수운 최제우의 권학가 중 한부분입니다.


하원갑 경신년에 전해오는 세상말이

요망한 서양적이 중국을 침범해서

천주당 높이세워 거소위(擧所謂) 하는도를

천하에 편만하니 가소절창(可笑絶唱) 아닐런가

증전(曾前)에 들은말을 곰곰히 생각하니

아동방 어린사람 예의오륜 다버리고

남녀노소 아동주졸(兒童走卒) 성군취당(成群聚黨) 극성중에

허송세월 한단말을 보는듯이 들어오니

무단히 하날님께 주소간 비는말이

심심산천 옥경대에 나죽거든 가게하소

우습다 저사람은 저희부모 죽은후에

신도없다 이름하고 제사조차 안지내며

오륜에 벗어나서 유원속사(惟願贖死-오직 원하는 것) 무슨일고

부모없는 혼령혼백 저는어찌 유독있어

상천(上天)하고 무엇할꼬 어린소리 말았어라...







Wednesday, June 11, 2008

Babette's Feast

다음은 Babette's Feast에 대한 퀴즈 예상문제입니다. 고득점 자에겐 상품(!)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1. 마지막 만찬에 참여한 사람 수?
2. 그 메추라기 요리 이름?

3. 그 요리는 무엇을 상징?
4. 포도주는 총 몇 잔이나 마셨는가?

5. 만찬이 끝나고 집 밖에서 춘 춤의 이름은?
6. Babette’s feast 對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비교분석
7. 소감 한마디